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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 창조절 열셋째주일
예배 시편 / 시편 3편 1-8절
찬송 / 455장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성서 / 시편 4편 1-8절, 마태복음 6장 25-34절
말씀 / 밤이 깊어 갈수록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시편 4편 7-8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태복음 6장 34절)
Ⅰ
얼마 전, 어떤 분이 제게 ‘아보하’라는 말을 아냐고 물었습니다. 줄임말인 것 같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요.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말을 줄인 줄임말이랍니다. 우리 사회의 유행과 앞으로의 방향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올해에는 ‘소확행’이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웠는데, 이제 내년에는 ‘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아보하’가 대세를 이룰 것이라고 했답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친 과소비나 자기를 과시하는 대로 이어져서 젊은이들이 ‘소확행’에도 피로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아주 평범한 보통의 하루가 대세랍니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 그저 평범하고 보통인 하루가 소망이 되어버린 것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것이 아니어도, 큰 것이 아니어도, 놀랄만한 것이 아니어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이해하는 중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루를 은총의 선물로 여기는 것, 우리의 하루 가운데 하나님의 선물들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시131:1)
시편 131편 1절의 말씀입니다. 시편 131편의 기자는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길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에게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길을 버리는 길은 다름 아닌 큰 것과 놀라운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신앙이란 우리의 한계를 깨닫는 것, 그럼에도 우리에게 오늘도 소중한 하루를 은총의 선물로 허락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믿고 바라보는 것 아닐까요?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일찍 해가 떨어지고, 밤이 제법 길어졌습니다. 밤은 어둡지만 한편으로는 오늘과 내일의 사이에서 지나간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내일의 하루를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계절에 겨울을 맞이하면서 무수한 잎을 떨구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겸허하게 우리 가운데 있는 어둠과 헛된 마음을 성찰하고 참회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깰 때에 호흡과 생명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밤에 잠에 들 때에 주님 앞에 참회하며 돌아볼 수 있다면, 우리의 보통의 하루가 주님의 은총이 감싸는 하루가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길을 비추어 주셔서, 어둠이 짙은 곳에서 더욱 밝히 빛나는 작은 촛불처럼 우리가 깨어서 작은 불빛하나 비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Ⅱ
오늘 우리가 구약 말씀으로 받은 시편 4편은 저녁의 기도로 알려져 있는 시편입니다. 시편 150편의 서시이자 시편 전체의 들머리라고 할 수 있는 1편에서, 사람의 복은 주야로, 낮이나 밤이나, 다시 말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신뢰하는 삶이라고 노래하지요. 시인이 말하는 행복이란 낮이든 밤이든, 때에 따라, 섭리에 따라, 온전한 하루를, 온전한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시편에 이어서 시편 3편에는 아침의 기도가, 시편 4편에는 저녁에 드리는 기도의 시가 순서대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시편 3편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 하루를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이고, 시편 4편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입니다. 또한, 시편에서 해가 떠오르는 시간인 아침은 생명과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를 노래하지만, 반면 밤은 대체로 아침이나 낮과 다르게 위험에 노출된 시간이자, 고난당하는 시간이고, 하나님께서 지체하시고 침묵하시는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아침과 저녁의 노래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하루 전체,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4편을 저녁의 기도라 부르는 것도 시간적 의미의 저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시편의 기자가 고난당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숨으신 것 같아 보이는 어두운 상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4편에서 기자가 당하는 고난의 상황은 나타나지만, 그가 당하는 고난이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시를 쉽게 이해하기엔 조금은 난해 합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편 기자 앞에 놓였던 위기가 구체적으로는 알기 어려운 시편 기자만의 특별한 것 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난해함은 오히려 모든 신앙인들 또한 삶 가운데 경험할 수 있는, 어쩌면 경험 할 수밖에 없는 고난과 고통과 공명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됩니다.
시편 4편 기자는 1절에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세 가지 요청을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고, 둘째는 그가 곤궁에 빠졌을 때 주님께서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시는 일이며, 셋째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기도를 들어주십사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청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가 지금 곤궁에 빠졌는데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황이며, 부르짖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직 응답하지 않으셨고,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들어주지 않으셨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시편 기자의 어두운 밤 같은 고난 상황 속에서 높은 사람들 다시 말해 권세 있는 자들은 그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이들의 비난으로 인해서 시편 기자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또한 이들은 어두운 때를 기회삼아 거짓과 가식 좇고, 허영과 허위를 신을 섬기듯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절을 보니 주님께서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심을 기억하라고, 주님께서 그 사람의 부르짖음은 들어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일까요? 여기서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히브리어로 “하시드”라는 말 입니다. 하시드란 본래 경건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인애나 자비를 뜻하는 “헤세드”와 같은 어원이지요. 다시 말해 자비로운 사람, 인애가 넘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는 인애가 넘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시편기자는 4절과 5절에서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어둠이 짙어갈수록, 그때를 기회삼아 거짓과 허영을 일삼고 신을 섬기듯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죄짓지 않는 사람, 잠자리에 누워서도 마음깊이 반성하고, 눈물 흘릴 줄 아는 겸허한 사람입니다. 다만, 어둠의 시기를 지나면서도 거짓과 허영을 멀리하고 참회하며, 올바른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시편 4편의 기자는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의지하는 일의 결과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과 조금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에서는 비난자들이 사라졌거나 저자의 고통의 현실이 해결되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시편 저자는 비록 고난의 현실이 바뀐 것이 없다고 하여도,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 것 이라고 하여도, 아직 곤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겸허하게 주님께서 환한 얼굴을 비춰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환한 얼굴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뜻합니다. 시편 저자는 어둠의 현실에도 거짓과 허영을 좇는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구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아가고 회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와 평화를 구하는 겸허한 기도의 결과로 변화된 것이 있다면, 기도자의 내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고통의 현실은 때로 불안과 번뇌를 일으켰지만, 이제 기도는 그런 불안과 번뇌를 받아들이고 감수할 수 있는 평온한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러한 평안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이라는 물질적 풍요로움 보다도 더 큰 것이라고, 이제 편히 눕고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노래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바울 역시도 고린도 후서 12장 8절에 따르면 몸의 가시로 인해서 세 번 간구한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 들였지요. “나의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기회이자,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능력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4편은 역시 바울의 상황처럼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 하지 않지만, 기도를 그리고 참회를 고난 가운데에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난하거나 압제하는 자들이 아무리 높고 강하다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비난과 억압을 당하는 사람의 번민과 고통이 아무리 깊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에서도 잠을 이루게 하는 참 평안을 주실 수 있다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높은 자들의 비난과 거짓과 허영을 추구하는 일이 고난당하는 자의 고통을 더 심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역시도 어두운 상황에서는 거짓과 허영을 좇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이지요. 우리는 때때로 내가 고통당하는 것에는 매우 민감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나보다 작은 이들에게, 나와 가까운 주변 사람들을 말과 행위로 억압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며 참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Ⅲ
오늘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향하여 “걱정하지 말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 이 말씀이 우리가 어떤 계획이나 준비도 하지 말고 방관하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이 말씀의 뜻은 “너희는 내일을 핑계로 오늘을 값없이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고, 오늘 하루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너희를 돌보시는 분의 은총 안에서 감사히 먹고, 서로를 정성으로 대하고, 마음을 다해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중요한 일임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시되, 가난하고 고난 속에 있는 이들, 곧 어둠 속을 헤매는 이들을 섣부르고 값싼 희망으로 위로하진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너희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다만 더 풍성하고 넉넉한 것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리켜 보여주신 넉넉함과 풍성함은 세상이 말하는 ‘부와 권력’이 아니었지요. 크고 놀라운 기적과 신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고난당한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자연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보라고 하시고, 아름답게 피어있는 백합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리켜 보이신 것은 그 자연의 아름다움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아름다움에만 심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시며 그 아름다운 자연을 지으신 분, 그 아름다운 자연 가운데 계신 분, 그 아름다운 자연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십니다. 이 자연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신비는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절정에 이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아라. 저 새와 꽃도 먹이며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 사람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너는 사람이다. 사람다움을 잊지 말아라. 고난 속에서도 사람답게 살아라. 이 아름다운 자연을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너를 돌봐주신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제 세상과 역사로 향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이룬 풍요를 말씀하시지요. 모든 사람이 추앙하는 솔로몬 왕의 부와 영광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찬란한 부귀와 영화도 꽃 하나만도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반전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도, 이 땅의 주인은, 역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도 시간이 지나면 떨어지는 저 꽃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세 가지 말씀을 전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만을 위해 일하고 살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이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너희의 힘만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감을 깨닫고, 날마다, 하루 하루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고난 속에서 사람다움을 잃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라고, 다만 하나님의 은총과 뜻과 말씀에 순명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내일 염려는 내일에 맡기라고 하십니다. 걱정과 염려에 너무 매이지 말고,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사는 사람을 돌보아 주시며, 함께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깨어날 때 주님의 선물을 발견하고, 잠에 들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돌아볼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지으시고, 모든 것 가운데 섭리하시는 분께서 우리의 하루 하루의 고난을 아시며,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된 현실 속에서 고난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시며,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내일을 앞당겨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 새날은, 두 손 놓고 기다릴 일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 모두가 구하고 그 뜻에 따라 지금 살아야 하는 내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리는 나라는 새로운 날이자 내일의 일이지만, 이 새날의 빛에서 오늘을 살라는 말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뜻을 구하면서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실하게, 각자의 길을 가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가 고난의 현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라는 귀한 말씀일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과 다가올 내일의 사이에는 밤이 있습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밤이 길어지고 깊어져 갑니다. 어두울 때 일수록 기회를 틈타는 거짓과 허영의 세력이 있지만, 깊은 밤이야 말로 우리가 참회할 수 있는 시간이자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구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벌거벗은 나무와 같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참회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때로 우리의 현실이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참된 평안을 주셔서 고난을 감내하도록, 고통가운데에도 평안함을 허락해 주십니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빛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져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다만, 어둠이 깊어가는 이 계절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고 주님 주시는 평화를 함께 나누며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부터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겨울을 맞이하며 모든 잎을 내려놓는 나무처럼, 우리의 마음을 비웁시다. 우리의 염려를 내려놓고, 주님이 보여주신 새날의 빛을 따라 오늘을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