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게 어렵다
노병철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게 되고 하니 차츰 문자를 고르는 습성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냥 쉬운 말로 쓰면 아무 문제 없는데 조금은 유식한 척하고도 싶고 해서 사자성어를 억지로 외워서 한 번씩 사용한다. 문제는 겨우 외워놓았는데 막상 사용하려니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 버벅거리다 일 끝낸다. 그나마 어렴풋이 생각나는 사자성어는 사람 꼴을 더 우습게 만든다. ‘야밤도주’ ‘일사분란’ ‘명약가관’ 나오는 대로 말하다 보니 가방끈이 짧은 것도 아닌데 이런 것도 모르나 싶어 괜히 부끄럽고 쪽팔린다. 다행히 끼리끼리 논다고 대충 이야기해도 대화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다 알아듣는다. 아마 자기도 모르거나 혹은 대충 그런 뜻이겠지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목례하지 말고 정중하게....”
인사할 때 대가리만 까딱거리지 말고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하라고 팀장이란 인간이 아래 직원에게 훈계랍시고 한다. 그냥 지나치려다 아는 척하고 싶은 생각이 불연 들었다. 그럴 땐 목례가 아니고 묵례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목례는 물레 다방 김 마담이 널 꼬실 때 보내는 눈웃음을 이야기한다고 정확하게 예시까지 들어주었다. 하지만 목례든 묵례든 듣는 사람들은 다 알아듣는다. 세상 굴러가는 게 다 이런 모양이다.
작가라는 사람들은 글을 잘 쓴다. 책 한 권도 내지 못하는 수준에 있는 나로선 책을 낸 분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서 지인들이 왜 책을 안 내냐고 물으면 대답이 궁해 겨우 한다는 말이 돈이 없어서 못 낸다고 한다. 사실이기도 하고. 명색이 이 나이에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 책 낼 정도 실력이 못 된다고 하기엔 창피해서다. 사실 작가로서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있는데 이것도 잘 구사하지 못하니 어찌 작가라고 떠벌리고 다니겠는가.
“청안욱필하소서.”
선배 문인들이 한 번씩 문자를 보내오는데 이런 말을 한다. 확실한 뜻은 잘 모르지만 멋진 말이 아닌가. 책 낸 작가분들껜 축하드린다는 인사말 대신 “상재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나 나옴 직한 멋지고 찰진 단어 아닌가. 절대 내 머리에선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다. “건필하십시오” “옥고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난 자꾸 두드러기가 난다. 조선시대에 사는 느낌도 들고.
오래전에 김연아가 갈라쇼를 한단다. 그런데 당시 갈라쇼가 뭔 쇼인지를 몰랐다. 어우동 쇼나 뱀 쇼에만 익숙해져 있었지 ‘갈라’라는 말뜻조차 몰랐다. 누구에게 물어보는 것도 창피스러운 일이었다. 남들은 다 아는 척하고 고개 끄덕이고 있으니 말이다. 나중에 갈라쇼(Gala Show)는 기념하거나 축하하기 위해 여는 공연이란 걸 알았다. 그냥 축하 공연이라고 하면 될 것을 ‘지랄’을 한다. 비엔날레(Biennale)란 말도 몰랐다. 2년마다 열리는 전시회를 비엔날레라고 하는 모양인데 매년 열리는 걸 뭐라고 하며 3년마다 열리는 걸 또 뭐라 하는지 물어도 아는 인간이 없다. 요즘은 큰 전시회는 무조건 비엔날레라고 통칭하는 것 같다.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야.”
과거의 제도, 유행, 풍습으로 돌아가거나 따라 하려는 것을 ‘레트로’라고 한다. 이걸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모르면 등신이 되는 건가? 드라마에서 스모킹 건이란 말도 잘 모른다. 결정적 증거를 스모킹 건이라고 한다. 총 쏘고 나면 연기가 나기에 이것을 결정적 증거로 본다는 뜻이란다. 집단 격리를 말하는 코호트(Cohort)는 코로나를 겪으면서 알았다. ‘요양병원을 코호트 한다’기에 뭔소리인지 몰랐다. 코호트 원래 뜻은 로마 군대 100인 단위 조직을 말한다고 한다.
‘소양증(搔癢症)일 땐 보습(保濕)을 더 해주는 것이 중요’
오늘 인터넷을 여니 이런 말이 뜬다. 그 옛날 뇌졸증인지 뇌졸중인지도 몰라 무식한 놈 취급을 당한 적도 있는 터라 소양증을 모른다고 타박받은 어떤 이의 심정을 백번 이해한다. 가려움증을 말하는 소양증을 누가 알겠는가. 간지러울 땐 긁지 말고 몸이 건조하지 않게 만들라는 말을 하면 되는데 뭔 유식하게 표현하려고 했는지 이상한 소리를 해 댄다. 그리고 제일 이상한 소리 많이 하는 인간들은 홈쇼핑 쇼호스트이다. 뭔 말만 하면 전부 이상한 용어로서 제품이 허접하지 않고 뭔가 있어 보이게 하려고 온갖 외래용어를 갖다 붙인다.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 뭔가 있는 제품이려니 하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리라.
일 년 동안 평론을 공부하면서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다른 작가의 글을 읽고 그 글에 대한 평을 하는 데 있어 가지고 있어야 하는 나름 기초적인 소양은 인문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 그리고 시대를 앞선 선각자들의 남긴 말을 모두 주워 담아야 한편의 그럴듯한 평론이 나온다. 꼭 이래야만 하는가 싶어 수많은 평론 이론서를 읽었지만, 정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글은 중학생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쓰는 것이 가장 좋은 글이라 배웠지만, 이율배반적 이론을 깔아 놓고 유식함을 자랑하고 있으니 뭔가 답답하다는 생각뿐이다. 세상 살기 참 더럽게 어렵다.
첫댓글 어렵긴요.
제가 궁금하고 모르는 건 유 선생님께서 수시로 글로 짚어 주시는걸요.
또 기대합니다.어렵다쳐도 전 깨끗하게 어렵습니다.호호.
해악과 풍자가 넘치는 작품으로 최곱니다! 최고!
요즘은 회사 이름도 이름을 봐서는 뭐하는 회산지 모릅니다. 모르게 하기
그래서 관심을 끌기
뱀 한마리를 들고
애들은 가라고 하면 더 궁금해지는 심리를 이용해서 약팔려고 하는 옛날 달성 공원 앞의 약장수 ^^
이제는 그런 모습들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고 됩니다.
파도가 밀려가면 누가 바지 벗고 수영했는지 알수있다는 한동훈법무장관의 말에 빵터져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글 한줄 못쓰는 제가 문학계에 어정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지. 국장님이 부럽습니다.
나훈아 선생 바지 보다 비싸다고 저 혼자서 생각하는 사람이 파도가 밀려가면 바지 벗어서 브랜드가 명품이라는 것을 만인시하에 보여 줄 것입니다. ^^
한 장관님은 순발력이 대단한 분으로 아이큐가 300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