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367]稼亭先生28,묵매(墨梅)
墨梅(묵매)
李穀(이곡)
晴窓寫出照潭姿(청창사출조담자)
못에 비친 매화 자태 햇빛 밝은 창에서 그리려니
頃刻春風漲墨池(경각춘풍창묵지)
순식간에 묵지 가득 봄바람이 넘실넘실
已分明妃愁畫面(이분명비수화면)
명비(왕소군)가 그림 속에서 찡그리고 있으니
謫仙休怪玉顔緇(적선휴괴옥안치)
옥안 검게 변한 것을 이태백은 저어마오
晴=갤 청,동자(同字)暒,
窓=창 창, 굴뚝 총. 본자(本字)窗.
寫= 베낄 사, 부릴 사. 속자(俗字)冩 약자(略字)㝍, 写.
照=비출 조. 동자(同字)曌, 瞾
潭= 깊을 담, 물가 심.못 담
姿= 맵시 자. ② 모양내다 ③ 모습 ④ 풍취(風趣)
頃=밭넓이 경, 기울 경, 반 걸음 규.이랑 경, 잠깐 경,
頃刻경각= 아주 짧은 시간. 또는 눈 깜빡할 동안.
漲= 넘칠 창. ② 성하다 ③ 막다 ④ 물결치다. 동자(同字)涱
墨= 먹 묵. ② 형벌 이름 ③ 검다 ④ 더러워지다
池= 못 지. ② 해자(垓字) ③ 물길 ④ 벼루 따위에 물이 괴게 오목한 곳
已分이분=이미 분별하다.
明妃=한 원제(漢元帝) 때 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에게 보내진
왕소군(王昭君)을 가리킨다.
愁= 시름 수. ② 시름겹다 ③ 슬퍼하다 ④ 얼굴빛을 바꾸다
畫=그림화. 謫=귀양갈 적.동자(同字)=讁
謫仙=적선(謫仙)은 인간 세계에 귀양을 온 신선이란 뜻으로,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을 처음 만나 그의 글을 보고는 지어 준 별칭이다.
休=쉴 휴, 그만둘 휴.
恠=기이할 괴.괴이할 괴. 怪의俗字.
休恠=괴이 여기지 말라.
玉顏옥안=옥같은 얼굴.
緇= 검을 치. ② 검은 옷 ③ 승복(僧服) ④ 중
가정집 제15권 / 율시(律詩)
稼亭先生文集卷之十五 / 律詩
墨梅 (묵매)
稼亭[가정] 이곡[李穀]
晴窓寫出照潭姿。頃刻春風漲墨池。
已分明妃愁畫面。謫仙休恠玉顏緇
못에 비친 매화 자태 청창에서 그리려니 / 晴窓寫出照潭姿
경각간에 묵지 가득 봄바람이 넘실넘실 / 頃刻春風漲墨池
명비가 그림 속서 찡그리니 어떡하나 / 已分明妃愁畫面
옥안 검게 변한 것을 적선은 저어 마오 / 謫仙休怪玉顔緇
[주-D001] 묵지(墨池) :
먹물을 한데 모으도록 된 벼루 속의 오목한 곳으로, 연지(硯池)라고도 한다.
[주-D002] 명비(明妃)가……어떡하나 :
매화의 본색을 제대로 그려 내지 못하고 그림을 망쳐 버렸다는 말이다.
명비는 한 원제(漢元帝) 때 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單于)에게 보내진
왕소군(王昭君)을 가리킨다. 원제는 후궁이 워낙 많아서
화공에게 궁녀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그것을 보고 궁녀를 골라
총애하였기 때문에 궁녀들이 화공에게 다투어 뇌물을 주곤 하였는데,
후궁 중 최고의 미인이었던 왕소군만은 그렇게 하지 않아서 화공이
추하게 그린 까닭에 황제의 은총을 입지 못했을뿐더러
흉노가 선우의 연씨(閼氏)가 될 미인을 요구했을 때도
왕소군이 뽑혀서 가게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94 匈奴傳下》 《後漢書 卷89 南匈奴列傳》 《西京雜記 卷2》
[주-D003] 옥안(玉顔)……마오 :
얼굴이 야위어 핼쑥해진 정도야 잘못된 이 그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의 해학적인 표현이다.
이백(李白)의 시에
“시조 사이에서 그럭저럭 보내는 동안,
옥 같은 얼굴은 날로 검게 야위어,
잃은 것은 산악보다도 중하고,
얻은 것은 진애보다도 가벼웠소.
〔悠悠市朝間 玉顔日緇磷 所失重山岳 所得輕埃塵〕”라는 말이 나온다.
《李太白集 卷14 潁陽別元丹丘之淮陽》
적선(謫仙)은 인간 세계에 귀양을 온 신선이란 뜻으로,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을 처음 만나 그의 글을 보고는 지어 준 별칭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7
이곡[李穀]
고려 후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한산. 자는 중부(仲父), 호는 가정(稼亭).
아버지는 자성(自成)이며 아들은 색(穡)이다.
백이정(白頤正)·정몽주·우탁(禹倬)과 함께 경학의 대가로 꼽힌다.
1317년 거자과(擧子科)에 합격,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1332년 원나라에서 정동성 향시에 수석,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했고,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원나라 문사들과 사귀었다.
1334년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에 가서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 등의 벼슬을 거쳤고,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지하도록 건의했다.
1344년 귀국, 이듬해 도첨의찬성사·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했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 3조의 실록편찬에 참여했다.
문장이 뛰어나 원나라에서도 존경받았다.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서
유학의 이념을 가지고 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으나 이상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가전체 작품 〈죽부인전 竹夫人傳〉과 100여 편의 시가 〈동문선 東文選〉에 전하며
저서로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