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아내의 부친은 6․25 전쟁 당시 적 치하에서 면책임자를 맡았던 경력의 소유자였다. 연좌제가 존재했던 그 시대에서는 그런 사유로 인해 취직까지 제한되었던 탓에 우리 집의 반대가 더욱 격렬해졌지만 나는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했을 1972년에 내가 스물일곱, 아내는 한 살이 적었는데 당시로서는 적당한 나이였다.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은 다음 1975년 4월, 네 차례의 도전 끝에 마침내 제17회 사법시험의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붙었다.
고졸 출신은 내가 유일했지만, 처음 고시를 준비했을 때는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판사가 되는 줄 알았을 정도로 시야가 넓지 못했다. 판사와 검사는 물론 변호사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적성에 맞지 않았던 판사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에도 양쪽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개업한 부산에서의 변호사 생활은 제법 할 만 했다. 난생 처음 자유를 만끽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시기도 오래가지 않았다.
철권으로 통치하던 박정희의 시대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인권은 신군부가 등장한 다음에도 개선되지 못했다. 개선되기는커녕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무참한 대량학살을 자행한 신군부는 박정희 시대보다 더한 탄압과 고문을 통치의 무기로 삼았다.
분노한 대학생들을 위시한 애국시민들의 저항과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신군부는 그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체제를 전복하려는 빨갱이’로 규정하고 잔혹하게 사냥하기 시작했다. 무소불위의 국가보안법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재판도 없이 고문을 당한 다음 조직과 강령과 전모를 자백하는 청년들은 예외 없이 고문에 의한 피해자였다.
1982년, 부산에서 사회과학을 테마로 하는 독서모임에 참여했던 22명의 대학생과 교사, 회사원들은 느닷없이 체포되어 끌려갔다. 형언하기 어려운 고문으로 인해 사소한 만남이나 대화가 전부 소름끼치는 빨갱이들의 책동으로 포장되는 가운데, 57일이나 행방불명되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김광일 변호사의 권유로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게 된 나는 한동안이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들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믿고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무려 두 달 가까이나 바닷가와 산속을 헤매었던 어머니의 몰골은 지금도 형언할 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