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神바람
- 전진 신부-
성경에 보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기적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지상의 ‘보통’?의 생명을 되찾았을 뿐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다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통한 전인적 차원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 안에 온전히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을 통해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38ㄱ)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내 육신이 지금 여기에 살아 있든, 죽어 없어졌든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기만 하면 모두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세의 삶을 집착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원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내 자신과 삶을 들여다본다면, 그 안에 담긴 하느님 생명의 신비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열심하고 좋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본의 아니게 메마르고 팍팍해질 수 있습니다. 부활 시기를 보내면서 별일 없어 보이는 일상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고, 우리 마음에 성령의 神바람 불어와 삶에 대한 열정과 생기가 불러일으켜져 주님 안에서 거듭난 부활의 삶을 살기를 희망합니다.
그저께부터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지요. 특히 어제는 남부지역에 때 아닌 눈까지 왔다는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계속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이제 그토록 길었던 겨울이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봄이 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네요.
추어지기 시작했던 지난 화요일에 있었던 일 한 가지가 떠올려 집니다. 피정 준비로 인해서 방에 하루 종일 있었지요. 그러다가 머리도 식힐 겸해서 이발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물론 추운지도 모르고 얇은 티셔츠 하나 입고 나갔지요. 얼마나 추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의 얇은 옷차림에 비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모두 두꺼운 옷을 입고 계시더군요. 저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뛰어서 근처 미장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미용사는 저를 보며 말씀하시네요.
“춥지 않으세요? 추운 날씨에 이렇게 입고 돌아다니시다니요.”
말은 이렇게 부드럽게 하셨지만, 표정은 ‘정신 나간 사람 아냐?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렇게 입고 돌아다니다니…….’라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추운 날씨에 얇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문제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4월 중순에 얇은 옷을 입어야 할까요? 아니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할까요? 당연히 얇은 옷을 입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저한테 문제가 있기 보다는 두꺼운 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이 날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판단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정말로 옳은 것일까요? 혹시 내가 옳다고 주장한 것이 실제로는 옳지 않아서 다른 이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각나네요. 부부 간에 계속해서 사랑하라는 의미로 쓰인 것 같은데요. 그 말은 이렇습니다.
“20대는 열정으로 사랑하고, 30대는 체온으로 사랑하고, 40대는 조화로 사랑하고, 50대는 동행으로 사랑하고, 60대는 추억으로 사랑하고, 70대는 주책으로 사랑한다.”
이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주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길과 정반대로 걸어가는 사람은 어떨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당연히 주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겠지요. 이러한 사람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섣부른 판단보다는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돈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다. 돈으로는 사랑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존 레넌).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오민환-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나누었던 대화의 마지막
부분과 많이 비슷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하늘에서 오신 분에 대한 신학적인
증언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대목을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연속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하튼 세례자 요한의 입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예수님의 고유한 전권과 증언이 얼마나 참된 것인지가 밝혀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어떤 종교지도자의 말보다 힘이 있고 사람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것’과 ‘성령이
한량없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의 고유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성령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 말씀을 피상적이고 낯설게 여겼을
것입니다. “어디에서 와 어디로”(요한 3,8) 갈지 모를 자유로운 성령은 인간의 부자유와
거짓을 꿰뚫어 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느님의 것이 아니면서도 하느님의 것처럼 흉내를 내는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분명 생명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세례자 요한은 힘주어 말합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말입니다.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
-전삼용신부-
저는 어렸을 때 매우 시골에 살았습니다. 시골인데다 비행장이 가로막혀 있어서 전기까지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제 나이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덕분에 많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때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 예로 텔레비전을 보려 해도 그 전에는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하여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즉, 배터리를 자전거에 싣고 배터리 충전하는 곳에 가서 얼마의 돈을 주고 배터리를 충전하여 다시 가져옵니다.
한 일주일정도 텔레비전을 보다보면 양 옆에서부터 시작하여 화면이 조금씩 검어집니다. 배터리가 다 됐다는 증거입니다. 조금 더 있으면 화면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배터리를 싣고 충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꼭 재밌는 프로가 시작되려할 때 그렇게 배터리가 다 되어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충전한 만큼만 불을 켜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자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온 가족이 전기밥솥 앞에 앉아 밥이 저절로 되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습니다. 배터리를 충전하러 갈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역시 가끔 전기가 나가면 암흑으로 바뀌고 다시 초를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차가 연료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에너지를 충전한 만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연료가 없는 자동차는 아무리 고급차라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에너지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에너지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오고 그 에너지를 부어주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라.”
즉,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성령의 에너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전기 끊어진 집처럼, 연료 없는 자동차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더 나아가 ‘사랑’도 나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사랑해야 행복한 것은 알지만 사랑하기 위해 성령님을 충만히 받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우리 마음은 마치 기름통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시지 않으면 사랑 없는 죽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한 신부님께 이렇게 고해했다고 합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다 싫은데, 그 중에서 특히 몇몇은 더 싫어요.”
단 한명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사랑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에너지가 없으니 사랑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에너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아들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그만큼 사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 즉 성령님을 부어주셨고 그 성령님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를 아무리 해도 사람이 용서되지도 않고 사랑하기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보다도 나의 마음이 상처 나서 깨져있지는 않은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따라서 먼저 악습으로 인해 나의 마음의 그릇이 깨져있지는 않은지 먼저 돌아보고 깨끗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그 만큼의 성령님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내 힘으로 누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내가 하느님이 되는 교만함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만큼 행복하기 위해서, 먼저 나를 깨끗이 해 주십사, 그리고 성령님을 충만히 보내 주십사 청합시다.
<<짧은 묵상>>
사람은 자신이 관심 갖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각자가 다 관심분야가 다르고 그 관심분야가 이야기의 소재거리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고 당신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는데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누구도 그분의 증언은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정말 ‘아무도 그 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아무도 당신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당신이 어떻게 세상에 오실 수 있으셨을까요? 성모님조차도 당신의 증언을 온전히 받아들이시지 못하셨다는 말일까요?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주셨다고 합니다. (요한 3,16) 누군가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현재형’을 쓰고 있습니다.
즉, 당신을 받아주신 분은 성모님이고 그래서 모든 여인들 중에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누구도 성모님만큼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만큼 죄에 갇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분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더 많이 그리스도의 증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워지지 않은 그릇엔 무엇도 채워 넣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양승국신부-
<우리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수도원에서 먹는 밥그릇수가 많아질수록 더욱 진하게 와 닿은 깨달음이 한 가지 있습니다. 수도원은 ‘날개 없는 천사’들만 사는 곳이 아니라는 것, 수도원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수도원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 희망과 실망이 교차하는 곳, 그래서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이지만,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쩔 수 없는 분쟁과 그로인한 상처, 이기심과 죄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대한 지나친 기대 역시 금물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해보려고 교회에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일수록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실망도 커집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이런 뼈아픈 체험도 부지기수로 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나를 바라보는 교회 공동체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해지기 시작합니다. 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뒤에서 수근 거립니다. 사사건건 딴 지를 겁니다. 왕따를 시킵니다. 다가가도 슬슬 피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성당에 나가지 인간들 때문에 나가나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그것도 한계에 도달합니다.
원인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에서 깜짝 놀랄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주범이 다름 아닌 대자(代子)입니다. 아니면 대녀(代女)입니다. 내가 그를 하느님께로 인도했었고, 신앙의 씨를 뿌려주었으며, 그토록 극진히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야말로 하늘이 노랗게 변할 것입니다.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면서 땅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 선포의 일선에 섰었던 사도들 역시 이런 체험을 셀 수도 없이 했더군요.
저는 초대교회 복음 선포, 쉽게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 마다 신자들은 열렬히 환영해주었고, 예비자들의 수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 사도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멀뚱멀뚱 소 닭 바라보듯이 관심 없이 쳐다보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겨우 복음의 씨앗을 뿌려놓았지만 때로 결실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신신당부해도 사람들은 과거와 결별하지 못했고, 우상숭배를 계속했습니다.
그중에는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을 교묘하게 이간질시키는 가라지 같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앞에서는 미소를 짓지만 돌아서면 갖은 험담과 중상모략을 일삼던 사람들, 그래서 교회의 성장을 가로막던 암초 같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 보여준 사도들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들을 음해하는 무리들의 사악한 행동 앞에 분노하지도 않았습니다. 상처받지도 않았습니다. 복수하지도 않았습니다.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범인을 색출하고자 기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전과 같이 마음 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사도들은 겸손하게 처신했습니다. 관대함과 온유함으로 무장하고 다시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분노하는 대신, 슬퍼하는 대신, 실망하는 대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그들 앞에 내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만을 설명합니다. 그분을 믿을 것만을 부탁합니다.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독려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사도들을 그토록 변화시켰을까요?
부활 예수님에 대한 강렬한 체험,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스승이셨던 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분이시고,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신 분이라는 것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실 구원의 샘이란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들에게 있어 예수님만이 전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사명은 스승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고, 스승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를 받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양승국신부-
<믿음을 잃기보다는 목숨을>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믿음"을 주제로 지으신 기도문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수녀님의 기도문 한 구절 한 구절을 통해서 그분께서 지니셨던 믿음이 얼마나 극진한 믿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을 잃기보다는
생명을 잃는 편을 저는 택하겠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믿음 없이는 생명도 생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이 결실을 맺고
하느님을 위하여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하려면
믿음,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 부족한 까닭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에게 득이 되는 일만을 찾는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참된 것이라면
그것은 섬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하나인 것,
서로 보충하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제가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다른 사이비 종교나 무신론으로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교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진리 중에 진리,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가 예수님이십니다.
믿음 중에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좋은 몫을 선택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 매순간의 삶이 축복임을 깨닫는 것이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기에 더 이상 고통이나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믿음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삶의 십자가가 힘겨울 때도 십자가 안에 긷든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눈여겨보면서 힘차게 일어섭니다.
리타 엠댓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능력은 3개의 C와 3개의 D이다.”
여기서 3개의 C는 Challenge, Challenge, Challenge(도전하라)이고, 또 3개의 D는 Do it, Do it, Do it(행동하라)라고 합니다. 즉, 끊임없이 도전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야말로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하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행동하기보다는 남에게 책임을 넘기고 말만 하는 모습들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볼 수가 있습니까? 아니 내 자신을 보면서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되네요.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문득 과학자들의 계속된 관찰 속에 얻게 되었다는 인간의 특징이 생각납니다. 과학자들이 바라본 인간의 특징은 “자극을 주지 않으면 한없이 나태해지는 존재.”라고 합니다. 하긴 게으른 사람은 더욱 더 게을러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습관이 박혀서 시도해 볼 엄두도, 또 도전할 가치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이 어쩌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자극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없이 나태해져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자극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자극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해야 할까요? 좌절에 빠져서 원망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앞서 말했던 사회의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행동함으로써 내게 주어진 자극들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그리고 자기의 뜻대로만 살려고 하다 보니 더욱 더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바로 세상의 원리 원칙만을 내세우면서 자기 뜻대로 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진노를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대신 주님께 순종하면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를 위해 계속해서 도전해야 하고, 계속해서 행동하는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과연 3개의 C(Challenge)와 3개의 D(Do it)가 있을까요? 없다면 지금 당장 도전하고 행동하십시오.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해보고, 지금 당장 도전하고 행동하십시오.
우리도 예수님처럼
- 김우정 신부-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다 보면 경문과 기도문의 깊이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각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습관적으로 하다 보니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미사 중에 듣는 기도문입니다. 대부분 사제들이 이 경문을 말하기 때문에 늘 듣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 경문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뵙고,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 때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미사와 성사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과를 통해 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심이나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이따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무시하거나 온전하게 주어져 있는 진리조차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키워나가고 진리에 다가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몸소 하느님을 드러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시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성사 안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사랑 안에 들어갈 때, 우리도 그분처럼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돌려줄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독서> : 사람에게 복종하기보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사도들
- 경규봉 신부-
대사제는 사도들이 의회의 결정에 불복종하고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는 점에 대하여 추궁한다. 그 자신도 불의하게 예수님을 사형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선포됨으로써 자신들이 당할지도 모르는 불이익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가지고 사도들을 심문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했고, 성령을 받았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자신들을 감옥에서 풀려나게 하심으로써 주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적대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충실하게 전파할 수 있었다.
설사 죽음을 당할지라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적대자들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충만하였다. 그들은 적대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이 받는 모욕과 박해까지도 오히려 기쁨으로 생각하였다(사도 5,41).
이제 그들은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대로 자신의 삶 전체를 온전히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깊은 신앙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복음 선포가 곧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임을 증언하며, 적대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고, 자신들과 자신들이 받은 성령이 곧 그 증인임을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도자에게 권한을 주신다. 지도자는 하느님의 권위가 침해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도해야 한다. 사람은 하느님의 도구일 따름이다. 만일 지도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거스르거나 적대하도록 한다면 이는 하느님과 충돌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지도력과 권위는 상실되고, 그들의 영향력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대사제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처형함으로써 이미 하느님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박해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권위를 상실했다.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권위조차 남아있지 않다.
주님의 부활과,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이 이를 증명한다. 때문에 사도들은 비록 그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결코 그들에게 복종할 수 없었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 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며 나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다.”(루가 21,12) 하고 예언하셨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도들은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참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박해 받으셨듯이 박해를 받는다(요한 15,20). 그러나 결국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다(요한 16,33).
주님께서는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11-12) 하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상을 이미 약속하셨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박해 가운데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삶을 산다.
사도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사람에게 복종하기보다 하느님께 복종하고, 사람들을 바라보기보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간 분들이다. 우리도 사도들을 본받아 하느님께 복종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바라는 신앙인이 되자. 사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힘과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하자.................◆
신앙의 보증
- 김훈일 신부-
1997년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국가가 빚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아서 국제통화기금에 돈을 빌리고 강제적으로 경제개혁을 해야만 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여러 은행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이 와중에 사업을 한 것도 아니고 빚을 진 것도 아닌데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이들이 있었습니다. 보증을 서 주었다가
함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것입니다. 그 중에는 가족 간에 친지 간에 빚보증으로 더 큰 상처를 가진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맡기거나 보증을
서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그 사람을 상대하면서 얻은 여러 가치들을 종합할 때
생깁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보증을 서게 되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믿음도 이와 같은 방식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신앙과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생겨납니다. 그러니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라는 절묘한 조화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실 때 대자연과 우리 이웃들을 증인으로 쓰십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을 당신의 증인으로 쓰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 사용하시는 방법이 시련과 고통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할
때입니다. 이미 하느님은 당신의 것을 다 내놓았고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응답할 우리의 자세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우리의 믿음으로 보증을 섭시다.
-황순찬-
소풍날인 듯했다. 너른 마당에는 사람들이 탄 관광버스가 이제 막 출발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방에서 배낭을 꾸리고 있다. 아무리 싸도 배낭은 꾸려지지가 않는다. 마음은 조급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서성거리기만 한다. 창밖으로 버스가 출발하는 것이 보이는데도 발만 동동 구를 뿐 나가지 못한다. 자리에서 겨우 일어났다. 꿈이어서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그런 꿈이었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소풍인데도 꿈속에서 나는 준비하는 과정을 엄청난 일로 받아들이고 그 일을 끝내지 못한다. 현실의 내 모습이 그렇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느 한 가지를 완벽하게 끝내고 다음 일로 넘어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뿐더러 즐겨야 할 소풍도 즐기지 못한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이 늘 ‘현재’(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분) 임하신다고 전해준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나는 ‘이미’(2천 년 전에 오셨던 분)와 ‘아직’(언젠가 미래에 다실 오실 분) 사이에서 내가 끝내지 못한 일(과거), 아니 끝낼 수 없는 일(미래)에 매달려 여념이 없다.
군인은 군인 정신으로, 신자는 신자 정신으로
-이기양 신부-
신자수가 1500여 명이 되는 근처 교회에 목사님이 일곱 분이 계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신자수가 3800명인 우리 성당에는 사목자가 몇 명이 있어야 되나요? 열 여덟 명이 필요하겠네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우리 성당의 사목자는 저 혼자 뿐이지요. 제가 열 여덟 명의 사목자를 합한 것 이상으로 능력이 훌륭해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아니지요. 이것이 천주교와 개신교의 큰 차이입니다.
그 차이는 사목자 개인의 능력보다는 천주교회의 조직과 정신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순명’의 정신이 있는 천주교는 신부 혼자서도 만 명의 신자를 거뜬히 사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는 근본적으로 다르지요. 천주교 신자들이나 사목자, 수도자들은 자신과 의견이 달라도 결정된 흐름을 따르고 받아들이지만 개신교에서는 순명하는 모습보다는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순명에 대해서,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의 정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독서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감옥에 갇히는 박해 속에서도 “예수는 주님이시다.”고 증언합니다. 수석사제들과 사두가이들은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지만 사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풀려납니다. 사도들이 감옥에서 나오자 이들은 이번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하며 단단히 경고합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사도5,28)
이렇게 사도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복음 전하는 일을 금하고 나서지요. 그러자 사도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9)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오로지 복종해야 할 분은 하느님 한 분이시지요.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 목숨에 순종하며 살지만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은 그 모든 것보다도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순종하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풍성하게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한마디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명과 불순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했을 때 사람들은 축복을 받으며, 그 뜻에 지속적으로 성실히 임할 때 그 축복이 계속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지 않고 세상의 논리에 따랐을 때는 멸망의 길고 빠지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됨을 또한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지요.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성모 마리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인간적인 의지나 판단과 지식을 넘어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했습니다. 자기 판단으로는 아닌 것 같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는 예언자의 전갈에 바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어도 순명의 길을 갔지요. 그리고 그 길에 풍요로운 은총이 넘쳐났음을 역사가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욕망과 지식과 의지를 내세워서 불순명의 역사를 간 사람들이 있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자기들의 생각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불순종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지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하느님의 큰 축복을 받았지만 그 축복이 마치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서 비롯된 것인 양 교만하게 굴다가 결국에는 자기 도취에 빠져서 멸망의 길을 가고야 말았습니다.
신약성경에도 대표적인 불순종의 인물이 있지요.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욕망과 돈을 섬겨 불순종의 역사가 죽음의 역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수 만 명이 있어도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복음적인 순명에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신부와 수녀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입니다. 신부와 수녀는 교구장이나 총원장 수녀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따릅니다. 예를 들어서 “잠실7동 성당 이기양 신부 좀 쉬지.”하고 교구장님께서 말씀하시면 “좀 더 있었으면 합니다.”의견은 낼 수 있지만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두 말 않고 따르지요. 수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 수녀들은 다 순명 서약을 합니다. 사제들은 일년에 한 번씩 성 목요일에 모여 순명 서약을 새롭게 하는데 이는 주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교님도 주교품을 받을 때 교황님께 가서 순명 서약을 하지요. 교황님의 결정에 주교와 사제는 무조건 순명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교황님 혼자서 11억 가톨릭 인구를 사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교황님이 하느님의 대리자임을 믿고 따릅니다. 돌아가신 교황님을 전 세계가 애도하는 것을 보고 놀라셨다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신 것을 잘 몰랐다는 것이지요. 저는 교황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보고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하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지요. 이렇게 성직자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우리 교회의 절대적인 특징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의 순종, 이것이 바로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분열 없이 일치된 하나의 교회로 이끌어 온 바탕이지요. 순명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행하여야 할 가치 있는 덕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성직자와 수도자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우리 신자들은 나와 의견과 다르다고 교회의 뜻을 물리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들은 다르지요. 나와 다르면 다니는 교회를 바꾸고, 목사를 바꾸고, 우선 내가 편하고 좋은 곳으로 쉽게 갑니다. 그래서 수십, 수백 종파로 갈라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지요. 이렇게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천주교 신자는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대리자인 성직자의 사목 방침에 함께 하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목자와 수도자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지요. 미사 중에 항상 빠지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교황과 교구장, 주교, 성직자를 위해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전 세계의 모든 신자들이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주장합니다.
“이런 자유주의 시대에 무슨 그런 시대 착오적인 순명을 이야기하느냐?”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신은 변하는 것이 아니지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군인에게는 군인 정신이 있습니다. 군인 정신은 명령에 따르는 것이지요.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군인이 상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군인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정신’이지요. 천주교 신자들은 당연히 그러한 정신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참으로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많은 신자들이 천주교 신자로서의 정신을 모르고 있거나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자기 주장을 하고 자기의 생각과 다른 것은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큰 다른 뜻이 있으려니…’하고 순명하려는 마음보다는 내 생각만을 앞세웁니다. 그것은 철없을 때 하는 행동이지요. 제대로 꾸준히 기도하여 정말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되면 당연히 건의하는 것이 순리이지요.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묵주기도를 하며 성모 마리아의 삶을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 성모마리아의 삶은 한 마디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삶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성모님의 삶을 본받는다면 바로 그러한 교회 정신과 그 순명의 삶을 깊이 새기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은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9)
사도들은 하느님께 순종했고 성령을 받으며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천주교회가 하느님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그 바탕은 하느님의 사랑의 가르침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들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사는 것, 이것이 이천 년 그리스도교 가톨릭 교회의 모습이고 복음적인 공동체를 분열시키지 않는 바탕입니다.
백인백색이라는 말이 있지만 복음적인 가르침에는 백 사람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군중이 있더라도 하나로 일치되는 힘, 이것이 바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정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일치하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고 우리 가톨릭 교회의 모습이지요. 더욱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어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서로 노력하는 것, 이것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
- 김유철 신부-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경험과 연결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32)라고 표현함으로써
예수님의 모든 기적과 가르침은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늘 나라에
계셨다는 것을 의미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서 보고 듣고
아버지 하느님을 통해 배운 것을 이 세상에 오셔서 펼치시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늘 나라에서 오신 예수님은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을 통해 그토록 이야기 되어왔고, 준비되어 온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더 나아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악의 세력을
안다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안다는 것은 이미 악의 세계에 갔다 왔다는
것이지요. 악에 물든 자녀는 당연히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아들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싫어하며 제거하려 할 것입니다. “아드님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되어”(3,36)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악의 세력을 이기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 영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성경 말씀을 읽고, 미사에 꼭 참석합시다.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차공명 신부-
여러분들은 지음인이나 단현이라는라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는가? 이것은 중국고사에 나오는 말이다. 고대에 백아라는 거문고 연주의 명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친구 종자기는 거문고 연주를 감상하는데 있어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백아가 고산가라는 곡을 탈 때면 종자기는 그 곡만 듣고도 참 아름답도다! 태산처럼 높고 장중하여라! 라고 감상 평을 하고 백아가 유수곡이라는 강에 관한 곡을 연주하면 정말 좋도다! 장강과 황하처럼 유장하구나! 하면서 감탄을 하는 식이었다. 그런던 어느 날 종자기가 병으로 죽자, 백아는 몹시 비통해 하면 이제 이 세상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하여 거문고 줄마저 끊어 버리고 두번 다시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음을 아는 사람이란 지음인이라는 말이, 줄을 끊어버린다는 단현은 자기를 잘 알아주는 지음인 같은 친구를 잃음을 상징하는 말이 된것이다.
사람이 가장 비참하게 될 때는 아마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사하고 아무도 관심조차 그 누군가에게 주지 않는 다면 그 누군가의 인생은 너무나 실패한 인생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일상생활 속에서 주위사람들에게 짜증이나 화를 낼 때를 가만히 돌이켜 원인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 기대했던 관심을 받지 못할 때가 많을 것이다. 남편이나 자식들이 어미 생일이나 명절도 안 챙겨줄 때. 친구나 애인이 내 맘도 몰라주고 섭섭하게 할 때 등등..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나 아닌 또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고 다른 이들의 사랑과 관심이 자기에게 집중될 수록 행복해지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본당에 있는 신부들은 어떨까? 역시 똑같은 인간으로서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간절히 내면으로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자들이 신부나 수녀들에게 무관심하다면 아마도 그 분들의 힘들 절반이하로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자 이제 더욱 범위를 넓혀서 하느님의 경우에는 어떻할까? 물론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인 섭섭함이나 질투심이나 같은 것은 없겠지만(구약에 보면 질투하는 신으로 묘사도 되어있지만) 당신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이라는 사랑의 선물을 무관심하게 무시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그 불경죄가 아닐까?
오늘 복음말씀에는 어제에 이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위에 머무르게 된다라고 나온다. 그야말로 불신 지옥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심판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대한 예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음이며 제스추어이다. 그 뜻을 헤아려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조물로서의 지극히 당연한 행위이다. 우리가 앞서 백아와 종자기의 관계를 살펴본것 처럼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류를 향한 높은 사랑의 그 뜻을 우리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면 그 사랑의 의미는 퇴색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된 도리로서 이 사랑에 응답하고 그 사랑을 이해해야만 한다.
은총의 꽃을 피우는 나무
-강영구신부-
벚꽃나무가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우리 성당은 벚꽃 축제 중입니다.
눈부시게 활짝 핀 벚꽃을 보면서 신기함과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겨우내 삭정이처럼 메말라있던 가지 속에 황홀하리만큼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송이들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나무들이 다 아름답고 눈부신 꽃들을 피우는 것은 아닙니다.
대지에 깊이 뿌리내려 살아있는 나무만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일을 말하고 세상일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욕망의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고 돈과 권력,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는 그의 나무에 향락의 꽃이 핍니다. 우선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이지만 향기가 없습니다. 향기 없는 꽃에는 벌도 나비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꽃이 떨어지면 그 가지에 달고 향기로운 열매 대신에 허망함이 맺힙니다.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인생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하늘나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믿음의 뿌리를 하느님 안에 내리고 사랑과 소망의 생활을 하는 그의 나무에 은총과 축복의 꽃이 핍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 꽃에 벌과 나비가 찾아오고 감미로운 열매가 열립니다.
당신은 어디에 뿌리내려 인생을 꽃피우려고 합니까?
눈부시게 화려한 저 벚꽃나무처럼
믿음의 뿌리를 하느님 안에 내리고 향기로운 은총의 꽃을 피우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세상 일보다는 하늘의 일에 익숙해져야 할 우리들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3장의 마지막 단락이다. 이 단락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다소 어렵다. 그것은 이 대목이 정작 누구의 말인지 분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이냐에 따라 내용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맥상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확히 들여다보면 세례자 요한의 증언인지, 예수님 당신의 말씀인지, 아니면 복음서 저자의 말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요한복음 3장을 다시금 분석하면, 전반부(3,1-21)는 과월절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와 머무시던(2,13.23) 예수께서 유대교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고데모와 가진 대화를 소개하고, 후반부(3,22-36)는 세례자 요한의 예수께 대한 마지막 증언을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3장의 후반부에 속하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직접적인 발설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지만, 공동번역 성서에 따르면 직접화법의 인용부호가 없다. 그렇다고 간접화법으로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대목은 몇 가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① 오늘 대목을 그냥 그 자리 두고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의 간접적인 증언이거나 요한복음서 서문(프롤로그: 1,1-18)과 같은 저자의 증언으로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증언의 주체는 세례자 요한으로 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의 자세한 해설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세례자 요한을 증언의 주체로 보고 몇 마디 붙여 보겠다.
세례자의 앞서간 증언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은 요한 자신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0절)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 자신은 분명히 세상에 속하여 세상일을 말하는 사람이다.(31절) 그러나 그는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참되심을 확증한 사람이 되었다.(33절)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닦고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잡혀 감옥에 가기 전에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께 대한 마지막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②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요한 3,22-30을 현재 위치에서 옮겨 요한 2,12 뒤에 놓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따르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속할 수 없으며, 자연히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에 붙게되어 예수님의 간접적인 증언이 되든지, 아니면 복음서 저자의 증언이 된다. 후자(後者)의 경우라면 이는 요한복음 서언(프롤로그: 1,1-18)과 같은 형식이 된다. 이는 예수님의 장소이동에 주목한 결과이다.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이 먼저 활동을 하였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세례자는 우선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물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1,28) 이곳은 예루살렘 근처 동쪽으로 약 2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아는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가 살던 곳(요한 11,1.18; 12,1.19)이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전·후 시점에 머물렀던 장소(마태 21,17; 26,6; 마르 11,1.11; 14,3; 루가 19,29; 24,50)이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은 예루살렘에서 동편으로 36Km 떨어진 예리고를 지나 약 8Km 지점에 있는 요르단강에 바로 인접한 베다니아이다. 예수님의 활동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지역인 이곳 베다니아에 오신 것으로 시작된다.(1,29) 예수께서 당신이 자라난 나자렛으로부터 오셨다면 그 길은 무려 100Km 정도에 달한다. 예수께서 이곳까지 오신 이유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이다. 비록 요한복음에 세례자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언급은 없으나 공관복음을 미루어 볼 때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마태 3,13-17; 마르 1,9-11; 루가 3,21-22) 그 다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지방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첫 번째 기적을 베푸셨고(2,1-11), 그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2,12). 여기서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과월절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2,13)고 하는데, 성서학자들은 이곳에 3,22-30을 끌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상경하시기 전에 유다지방으로 가셔서 세례를 베풀었다(3,22)는 말이 된다. 정확한 세례활동.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면 이곳은 원래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1,28)가 틀림없다. 그 사이에 세례자 요한은 살림에서 가까운 애논으로 옮겨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23) 살림지방의 애논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요르단강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으로서 사마리아 지방과 베레아 지방의 경계지역으로서 데카폴리스 지방에 속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예수께 대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증언(3,27-30)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예수께서는 과월절 축제를 맞아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상경하여(2,13) 먼저 성전을 정화하셨고(2,14-22),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관심(關心)과 호감(好感)을 얻으셨으며(2,23-25), 이곳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와의 긴 대화(3,1-21)를 주도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3,31-36)은 이 대화의 결론역할을 맡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 대목은 예수님의 간접증언이나 프롤로그(1,1-18)와 같은 복음서 저자의 증언으로 볼 수 있다.
이 주장에 따라 내용을 분석하면 우선 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되신 역사예수의 초월성을 말한다. 이 초월성은 곧 예수의 역사성(歷史性)과 성자의 선재성(先在性) 사이를 오가는 자유(自由)이다. 선재(先在)하는 성자는 성부와 본성(本性)으로 같은 하느님이기 때문에 성자의 말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34절) 하느님의 본성상(本性上) 성자는 성부의 모든 것을 공유(共有)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넘겨받았다.(35절) 이렇게 성자의 말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고, 성부 하느님의 모든 것을 성자가 공유하는 까닭은 성령(聖靈) 때문이다.(34절) 성령 하느님이 역사적(歷史的) 예수와 선재적(先在的) 성자 사이를 오갈 수 있게 하는 활동의 원리(原理)인 셈이다.
따라서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느님 성부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고, 불신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되는 것이다.(36절) 여기서 하느님의 분노는 종말론적 심판을 의미할 수 있으나, 니고데모와의 대화(3,18)에 연결하여 본다면 불신자체로 이미 심판 받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증언을 거부하고 예수를 불신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일에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31-32절)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는 불신과 신앙 사이에 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일보다는 하늘의 일에 점점 익숙하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