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등사 대웅전 기둥에 있는 낙서를 찍은 사진이 필요해서 오늘 낮에 전등사로 올라갔다.
전등사 근처에 사는지라 계절별로 한 번씩은 찾아가는 편이지만
그 낙서는 자세히 본 적이 없다.
병인양요 때 맹수를 잡던 포수들 300여 명과 순무영 병사 100여 명,
그리고 전등사의 사부대중들까지 합세를 해서 성을 지켰다.
그 덕분에 전등사도 또 정족산성 사고도 무사할 수 있었고
조선왕조실록 등도 보존할 수 있었다.
대웅전 기둥의 낙서들은 병사들이 부처님의 가호를 빌면서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가서 살펴보니 양 사방의 기둥마다 한자로 쓴 낙서들이 많았고
벽과 문짝에도 이름들을 써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전등사에서는 이 역사적인 유적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단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낙서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영산대재'를 봤다.
'영산대제는 진혼대제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기아 그리고 여러 사고로 인하여
고통을 겪은 모든 영가들을 초청해서 그 넋을 위로하고 달래주는 자리다.
강화도는 지리적으로 요충지여서 여러 차례 전란을 겪었다.
고려시대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 장군,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죽어간 사람들과 병사들,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과 병사들,
신미양요 때 어재연 장군과 병사들,
그리고 둑립운동가 이동휘 선생과 조봉암 선생,
또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영혼들 등 많은 영가들을 모셨다.

원래 영산재는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과 보살성중에게 올리던 공양의식이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국가 발전과 민족 안녕 기원, 호국영령을 위로하는
진혼의 성격을 띠는 행사로 발전하였다.
예전 우리 조상님들의 평생 소원이 영산재 구경이었을 만큼
사흘 밤낮으로 행하던 장엄한 의식이었다고 한다.
영산재는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음식, 복식 등이 총망라된 종합예술로 익식되고 있으며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로 지정되어 보존 계승되고 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국립국악원의 단원들이 와서 음악을 연주했고
영산재를 주관하는 스님들이 서울에서 오셔서 여러 의식을 진행했다.











회심곡을 들으니 눈물이 약간 나왔다.


살풀이 춤


영산재는 2시간이 넘도록 하는 장엄한 행사였다.

목숨을 걸고 정족산성을 지킨 병사들이 남긴 흔적들.
부처님의 기호를 빌었다.

정족산성
일부러 남문에서 동문쪽으로 성 바깥쪽을 따라 가보았다.
높이가 3미터 정도는 될 것 같다.
더구나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가며 성을 쌓았으니
프랑스군은 이 성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프랑스군은 아침 일찍 갑곶진을 출발해서 오전 11시 쯤에 정족산성 근처에 도착했다.
조선군이 많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왔는데 성 근처에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성 안을 정찰하자는 부하들의 말을 올리비에 대령은 듣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점심도 못 먹고 배를 쫄쫄 굶은 채 저녁 때가 지나서야 갑곶진으로 돌아갔다.
노새 등에 점심을 싣고 왔는데
총소리에 놀란 노새들이 다 도망을 가서 점심을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군 160명 중 6명 전사, 60여 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반해
조선군은 1명 사망 서너 명 부상 정도에 그쳤다.
오늘 동문과 남문을 둘러보며 새삼 그때를 그려봤다.
148년 전 11월 9일 점심 때 쯤,
이곳 정족산성에서는 콩 볶듯이 요란하게 총소리가 온 산을 울렸고,
그리고 적을 물리쳤다.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가 있은 지 이틀 뒤 강화도에서 떠났다.

첫댓글 글과 사진 부럽습니다 , 잘 보고 흔적 남깁니다^^
오랫만입니다~~~.
언제 한 번 만나야죠? 길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