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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탐구 생활 (22) 본기도
대영광송을 노래한 뒤에 사제는 “기도합시다.”(Oremus) 하고 말하며 잠시 교우들을 침묵으로 초대합니다. 이 말은 아주 오래된 표현으로, 그리스도교 이전 유대교 기도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초대의 말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런 기도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뒤에 따라 나오는 중요한 기도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다음에 잠깐 침묵하며 기도하는 시간은 2차 바티칸 공의회 미사 경본에 새로 도입된 요소입니다. 이때 교우들은 미사에 오면서 각자 마음속에 간직한 기도를 바치면서, 이날 드리는 전례 거행을 자신의 것으로 삼습니다. 우리 각자는 전례의 참관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전례 거행의 주체입니다. 이 침묵의 순간이 없다면 이어지는 사제의 기도는 백성 전체의 기도가 아닌 사제 혼자만의 기도처럼 들리게 될 것입니다. 사제가 회중을 기도로 초대하고 침묵한 다음 대표로 기도를 바치는 패턴은 미사 안에서 몇 차례 반복되는데, 언제나 중요한 기도들과 연관됩니다. 이 기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의 기도가 교회의 전례를 주례하도록 서품된 이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 퍼지는 형식을 갖습니다. 이 때문에 주례자의 기도들은 전통적으로 1인칭 단수(나)가 아니라 복수(우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사제는 회중의 기도를 하나로 모아 그날 바치도록 정해진 기도문을 하느님께 드리고 백성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말로 ‘본기도’라고 부르는데 라틴말을 직역하면 ‘모음/모임 기도’(Collecta)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래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가 아닌 ‘모임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모두가 교회에 모인 다음에 드리게 되는 ‘기도’로 그 뜻이 확장된 것 같습니다. ‘교회’라는 말이 공동체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공동체가 모이는 ‘건물’까지 의미하게 된 것과 비슷합니다.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례 문헌인 「베로나 성사집」에 이때 드리는 기도문이 풍성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문헌은 로마에서 편찬된 미사 기도문 모음집의 초기 형태로서, 기도문들을 특정한 날에 맞게 배정하고 있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에 수록된 많은 기도문들의 원본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전통적인 로마 전례의 본기도는 짜임새가 매우 튼튼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부르는 표현이 나옵니다(①),
그다음 우리가 부른 그 하느님이 누구신지 또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②),
이것은 우리의 청원을 드리기 위한 사전 준비로, ①과 ②가 결합된 형태로 나오기도 합니다. 이어서 본격적인 간청의 내용(③)과 목적이 나오고
(④),
마침 영광송(⑤)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연중 제23주일)의 본기도를 분석해 보면 이 구조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느님(①),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②),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③+④), 성부와 성령과 함께 ……(⑤).
본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과거에 해 주신 좋은 일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욱 은혜를 베풀어 주십사 간청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 개인과 가정의 삶, 더 나아가 온 교회와 인류 전체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열망을 하느님 앞에 바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시작 예식의 모든 요소들을 끝낸 우리는 이제 비로소 본격적인 예배(말씀 선포와 성찬 나눔)에 들어가게 됩니다.
[미사의 모든 것] (7) 진정한 예배란 무엇인가
성체성사 통해 살아가는 자비와 성덕의 삶
나처음: 수도원 오는 길에 한 노숙자가 지하철역에서 마스크 없이 승차하려다 승객들과 실랑이하는 걸 봤어요. 그래서 언해와 제가 마스크 한 통을 사서 그에게 주고 왔어요.
라파엘 신부: 참 잘했구나.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골칫거리가 아닌 우리와 똑같이 존엄한 사람으로 여기는 태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지.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자비가 ‘교회 생활의 토대’라고 강조하셨단다. 교황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자비가 정의의 완성이며 하느님의 진리를 가장 찬란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며 “자비는 천국의 열쇠”라고 말씀하셨어요.(「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05항 참조)
나처음: 교황님 말씀대로라면 교회에 나갈 필요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날마다 사랑을 실천하면 되겠네요. 굳이 미사에 참여할 필요도 없이 말이요.
조언해: 미사는 미사고 선행은 선행이지 그걸 그렇게 엮냐!
라파엘 신부: 처음이가 이번엔 무리수를 둔 듯하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신분이나 처지에서든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성덕에 이르도록 저마다 자기 길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고 있지. 무한한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 가족을 부양하고자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들, 환자들에게 한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의료인들 등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기 길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랑과 희생으로 살아가고 있지. 이들은 우리 한가운데에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 보여주는 거룩한 존재들이야.
하지만 인간은 늘 자기중심적이지. 지식이나 구체적인 경험을 지나치게 격상시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승자박에 빠져 하느님을 조정하려고 하지. 너희도 잘 알지. 우리나라 한 목사가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고 대놓고 말한 것.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거야. 주님께서 세우시고,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결합돼 있으며, 성령께서 보호하시는 교회는 신앙 전체를 선포하며, 모든 구원의 방법들을 자신 안에서 충만히 지니면서 이를 관리하며 모든 이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고 있지. 죄인들로 이루어진 죄 없는 교회, 생명으로 살아가면서 인간을 성화시키는 교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진 교회가 인간에게 꼭 필요하단다.
나처음: 그래도 나날의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고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진정한 예배가 아닐까 생각해요.
라파엘 신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우리의 행동 가운데 가장 고결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웃을 향한 자비의 활동’이라고 주저 없이 말씀하셨지. 심지어 그것이 우리의 예배 행위보다 중요하다고까지 강조했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있단다. 우리가 왜 이러한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야. 그 이유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교회에 당신 자신을 주셨기 때문이야.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1요한 4,19)
이에 교회는 성찬례를 통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하고 경배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성체성사가 교회의 존재와 활동을 이루며 우리 신앙의 요약이고 집약이라고 하는 거야. 따라서 모든 거룩함의 근원인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비와 성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거란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십자가와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 예배는 어떤 가치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지.
조언해: 원래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배웠어요.
라파엘 신부: 교회를 일컫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불러 모은다’는 뜻이란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님께서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도록 불러 모은 사람들의 모임,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체로 살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한 마디로 ‘주님께 속한 모임’을 의미하지. 초대 교회 신자들은 스스로를 ‘교회’라고 불렀단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도 갖고 있단다. 주님께서 친히 당신을 돌에 비겨,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마태 21,42)고 하셨지. 그 기초 위에 교회가 사도들을 통해 지어졌고, 그 기초 때문에 교회는 견고한 결속력을 지닌단다. 교회는 ‘하느님의 집’(1티모 3,15), ‘하느님의 신령한 거처’(에페 2,19-22),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장막’(묵시 21,3), ‘하늘의 예루살렘 성전’(묵시 19,7) 등 여러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단다.
나처음: 기도할 때 유다인들은 성전 지성소를 향하고, 무슬림은 메카 방향을 향한다는데 가톨릭 신자들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을 향하나요?
조언해: 넌 참 엉뚱하고 기발하구나! 저도 성당을 지을 때 전통적으로 서쪽에 정문을 두고 동쪽 끝에 제단을 설치한다고는 들었어요.
라파엘 신부: 주일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거룩한 시간이라면 성당은 주님을 찬미하는 ‘거룩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 이 공간은 단순히 기도하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이란다. 교회는 이 성당 안에서 거룩하신 삼위께 영광을 드리고 공적인 예배를 거행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자신의 기도를 올리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드린단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성당 동쪽에 제단을 설치하는 것은 살아있는 말씀이자 영원한 말씀이시며 참빛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함이야. 떠오르는 태양이 그리스도를 상징함은 다른 한편으로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지. 그 태양이 다시 오실 주님, 역사상 마지막 일출을 상징하기 때문이야. 따라서 동쪽을 향한 기도는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마중하며 동쪽을 향한 전례는 그러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나처음: 그럼 가톨릭은 동쪽을 향해 기도한다는 것인가요.
라파엘 신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당 동쪽에 자리한 제대를 향해 기도하는 것이지. 미사와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제대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거룩한 공간이야. 따라서 미사는 제대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며 기도이지. 제대를 중심으로 기도의 방향을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고 있는 전통이야.
조언해: 현대인에게 이런 제대의 방향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지 않나요. 하느님께서 어디에나 두루 계시니 굳이 기도하는 데 방향과 장소에 얽매일 필요가 있나요.
라파엘 신부: 맞아. 이 말은 가톨릭교회의 ‘보편성’과도 연결되는 것이야. 우리의 기도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중개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께 부합해야 해. 떠오르는 태양에 담긴 우주적 상징은 모든 공간을 초월하는 우주적 보편성을 표현하는 것이지. 따라서 장소와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에서 어느 때 기도해도 하느님께 우리의 기도가 닿을 수 있지. 교회가 제대 중심의 전례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성화하시는 하느님의 활동과 인간이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가 성찬례 즉 미사에서 그 정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란다.
[문화사에 따른 전례] 초기 교회(100-313년)의 입문성사
이 시기에는 성사의 틀이 잡히지 않았고 지역마다 다른 형태로 입문성사(세례, 견진, 성체)를 거행했다. 사도들의 설교 전체를 보면, 그들의 목표는 믿음과 세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도 2,14-36; 8,12-36; 10,34-43; 18,5; 19,4-5 참조), 사도들은 가르칠 때 분명히 세례에 대해 다루었으며, 복음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구별하였다(마태 3,11; 마르 1,8; 루카 3,16; 요한 1.33; 사도 19,1-5 참조).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지만, 그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새 생명을 주는 정화의 의식으로 바꾸셨다(요한 3,5-6 참조).
그리스도의 세례를 이어 가는 사도들로 말미암아 초기 교회는 세례와 성찬례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설립하고 확산한다. 여기서는 초기 교회의, 전례에 관한 기록을 통해 2-3세기의 입문성사의 거행 형태를 알아본다.
2-3세기의 입문성사를 전해 주는 문헌들
로마의 철학자인 유스티노 순교자의 「첫째 호교론」(150년 무렵)을 보면, 세례를 받기 전에 먼저 다음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곧 교리 교육과 기도와 단식이다(61,2). 세례 전 교육이 목표로 하는 것은 믿음과 그에 따르는 윤리적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스티노는 세례 예식에 대한 정확한 요소들을 전해 주지는 않는다.
리옹의 이레네오는 「이단 반박」(180년)과 「사도적 가르침의 논증」(Demonstratio praedicationis apostolicae)에서 세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료들을 전해 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교리 교육과 세례 준비의 내용에 대한 윤곽을 그려 볼 수 있다. 반면 「이단 반박」에서는 성령에 대해 말하면서 ‘완전함’(perfectio)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는 「성사론」에서 이 말을 바로 견진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
3세기에 들어와 세례 준비 기간에 대한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예비 신자들은 보통 3년 동안 예비 기간을 보냈는데, 이에 대한 증언은 로마의 히폴리토의 「사도전승」에서 볼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세례론」(De baptismo)에서 예비 신자들에게 “열렬한 기도와 단식과 철야 기도로써” 세례를 준비하도록 권한다. 그는 물로 받는 세례와 안수로써 받는 성령의 증여를 명백히 구별한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얻는 효과로는 소극적인 죄의 용서만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며, 그 반면에 성령은 안수로써 주어진다고 말한다. 치프리아노는 이보다 더 나아가 세례와 견진 때 받는 성령의 증여를 명확히 한다.
히폴리토의 「사도전승」의 전례적 가치
로마의 대립 교황으로 알려진 히폴리토가 220년 무렵에 저술했다고 전하는 「사도전승」은 550년 무렵에 작성된 ‘미사 전례문의 모음집’인 「레오 전례서」(「베로나 성사집」)보다 훨씬 앞선 전례 문헌이라 할 수 있다. 유스티노 순교자가 이 책보다 70년 더 앞서 저술한 「첫째 호교론」(61,65-67장)은, 세례 예식과 성찬례를 설명하는 매우 이른 시기의 자료로서 가치가 높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간략하여 전례적 내용을 풍부하게 전해 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에 「사도전승」은 3세기 초의 전례 전체를 잘 전해 준다. 100년 무렵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래한 가장 오래된 교회 규정인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에는 전례 지침보다 교육 지침의 비중이 훨씬 더 컸지만 「사도전승」에서는 전례적 관심이 지배적이며 교육은 부수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이다.
「사도전승」이 전해 주는 입문성사의 과정
「사도전승」은 시대적으로 앞선 문헌인 「디다케」와 이레네오의 「호교론」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주교 ‧ 사제 · 부제의 서품, 독서자 ‧ 차부제 ‧ 과부 ‧ 동정녀의 서임을 다룬다. 나아가 세례 지원기와 세례, 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식과 아가페, 기도 시간을 알려 준다. 「사도전승」의 역사적 가치는 입문성사의 전과정을 자세히 묘사하는 최초의 교회 문헌이라는 사실에 있다.
「사도전승」이 전해 주는 입문성사의 진행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예비 신자 기간에 들어가기 전에 후보자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이때 그들은 윤리 생활, 직업에 대한 것과 같은 세세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예비 신자들은 3년 동안 교리교사에게 교육을 받는데, 평신도인 교리교사가 교리 교육을 행한다.
이러한 기간을 마친 예비 신자들은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심사를 받은 뒤 입문성사를 받기 직전의 준비 기간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후대에 “선발된 이”라고 불리며 부활 전야 전날까지 날마다 구마식을 받고, 성금요일에는 단식한다. 성토요일, 주교는 그들을 불러 모아 단식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도록 명한 뒤 구마식을 위한 안수를 베푼다. 그 뒤 그들의 얼굴에 입김을 불고 이마와 귀와 코에 십자가를 그은 다음 일어나도록 명한다.
부활 밤 내내 예비 신자들은 기도하고 성경 독서를 듣고 교리 교육을 받으며 밤을 새운다. 새벽녘에 세례수를 축복하고 세례를 베푼 뒤 견진과 성찬례가 이루어진다. 이렇듯 당시에 진행되던 단계별 입문성사를 잘 알려 준다.
세례, 견진, 성체성사가 이어진 입문성사
「사도전승」 21장에서는 예비 신자가 세례 – 도유 – 영성체 곧 세례, 견진, 성체성사를 연이어 받음으로써 신자 공동체에 들어오는 입문성사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다. 세례 예식은 수탉이 우는 시간에 맞추어 세례에 쓰일 물을 축복하는 예절로부터 시작되며, 이때 물은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나 위에서부터 흐르는 물”을 사용한다. 흐르는 물은 살아있는 물을 상징하며 새로운 생명을 주는 세례와 잘 연결되는 의미이다.
물 축복 뒤에 감독자(현재의 ‘주교’)는 “감사의 기름”과 “구마의 기름”을 축복하고 사탄과 사탄의 행위를 끊어 버린다는 포기 선언을 한 다음 도유 예식을 한다. 세례는 세 번의 침수로 거행되며, 번번이 신앙고백, 안수, 침수의 순으로 반복된다. 첫 번째 침수에서는 성부에 대해, 두 번째 침수에서는 성자에 대해, 세 번째 침수에서는 성령과 성 교회와 육신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데, 이 전체 내용은 지금의 사도신경 내용과 거의 같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면, 장로(현재의 ‘사제’)는 “거룩한 기름”을 수세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라 준다. 여기까지가 현재의 세례 예식에 해당한다.
수세자들이 몸을 닦고 옷을 입은 뒤 성당 안으로 들어오면, 감독자는 그들에게 안수한 다음 자기 손에 “거룩한 기름”을 붓고 그 손으로 안수하고 이마에 십자 표시를 하면서 도유해 주고 이어서 평화의 입맞춤을 한다. 이 부분은 현재의 견진 예식에 속한다.
이렇게 세례와 견진을 받은 사람은 처음으로 성찬 전례에 참여하여 영성체하고 신자들과 평화의 입맞춤을 나눌 자격을 얻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표방한 전례 개혁의 원리 가운데 하나인 “원천으로”(Ad fontes)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사도전승」 연구는 본디의 로마교회의 단계별 입문성사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미사의 모든 것] (6)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 담긴 ‘삼위일체의 신비’
나처음: 십자성호의 의미는 알겠는데 그래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를 선뜻 이해할 수 없어요. 어떻게 한 분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활동하실 수 있죠?
조언해: 처음아, 하느님을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게 아니야. 성경을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한 분의 하느님이시라고 증언하고 있어.
나처음: 그러면 자꾸 성경에 있다고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줄래.
조언해: 성부, 즉 아버지 하느님은 넘치는 사랑으로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셔. ‘창조주 하느님’이라고 하지.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넘치는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거듭 거역과 배신으로 응답하고 있지. 첫 번째 인간인 아담과 하와부터 시작해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조차 하느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타락의 길을 걸었어. 너도 나랑 같이 영화 ‘엑소더스’를 봤으니 잘 알 거야.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은 인간을 완전히 내치지 않으시고 거듭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나처음: 그래!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고 이집트 군대를 몰살시킨 거 잘 알지.
조언해: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때가 되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 그분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지.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라고 선포하셨지. 하지만 인간은 예수님과 그분이 전하신 복음을 거절해. 그래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 자신을 성부께 바치셨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 되신 것이지.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성자를 다시 살리셨지.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거야.
나처음: 잘 알아. 신자가 아니라도 아마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걸?
조언해: 그래. 바로 그분이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성자 하느님이셔. 부활을 통해 구원사업을 완수하신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시지만,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 주셨지. 성령은 교회와 하느님의 백성들이 성자 예수님을 굳건히 믿고, 그분 안에서 활기차게 살아가면서 주님을 세상에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단다. 그래서 성령을 ‘보호자’ ‘협력자’이신 하느님이라고 하지. 이렇게 성경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돌보고 구원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지.
나처음: 언해의 설명을 들으니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해 약간은 이해가 되네. 성경을 꼭 한 번 읽어봐야겠구나.
라파엘 신부: 언해가 참 설명을 잘해주었구나. 언해의 말처럼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사랑으로 인간을 돌보고 늘 인도해 주신단다.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나처음: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군요.
라파엘 신부: 그렇지. 사랑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무조건이고 헌신적인 사랑이야. 상황과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 항구한 사랑이 바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이야.
조언해: 교리 시간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완전한 사랑에 대한 신앙이며, 그 사랑의 결정적인 힘, 곧 세상을 변모시키며 시간을 비추어 주는 사랑의 능력에 대한 신앙이라고 신부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기억나요.
라파엘 신부: 그래서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라고 고백하고 있지.
나처음: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신앙인들은 절망에 빠지지 않겠네요.
라파엘 신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생활하지. 설사 죄에 떨어지고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삼위일체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간단다.
조언해: 신앙은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시듯이 그분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배웠어요.
라파엘 신부: 맞아.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방식에 참여하는 것이란다. 삶의 여러 분야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더 잘 아는 다른 이들은 신뢰하지. 우리의 집을 짓는 건축가, 치료 약을 주는 약사, 법정에서 우리를 대변해 줄 변호사를 우리는 신뢰하는 것처럼 하느님과 관련된 일에서도 믿을 만하고 식견 있는 누군가가 필요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신 분이셔(요한 1,18 참조)
조언해: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맞아들이고 따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죠.
라파엘 신부: 그렇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느님이 참인간이 되셨다는 것과 그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우리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실 만큼 우리와 가까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지. 그래서 가톨릭 신앙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셔.
나처음: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삶 전체를 끌어안으셨고, 지금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머무신다. 이게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이 말씀이죠?
라파엘 신부: 바로 그거야. 처음이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해 확실히 이해했구나.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있는데 신앙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모습을 띠게 되고, 믿는 이들 사이의 실제적인 친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고백 되어야 한다는 것이야.
조언해: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이를 당신께 모아들이시어 당신의 몸을 이루게 하셨기 때문이죠.
라파엘 신부: 맞아. 교회를 떠나서는 신앙은 그 기준을 잃고, 더 이상 균형을 잡지 못하지. 신앙이 지탱되는 데 필요한 공간을 찾지 못하면 신앙은 사적인 것이 되고 개인주의적인 개념이나 주관적인 견해로 추락하게 돼.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항상 교회를 통해 올바르게 진리로서 선포되는 것이야. 그 핵심적인 공간과 예식이 바로 ‘미사’란다.
나처음: 그래서 지난번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미사를 시작할 때 십자성호를 그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군요.
라파엘 신부: 그렇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육친의 부모는 각기 다르지만, 신앙상으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가족이야. 하느님을 가정으로 모시는 신앙의 형제자매는 마땅히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며 지내야 하지.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살이를 해야 해. 그러려면 예수님을 닮아야 하지. 미사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마음을 넓히게 해줘. 무엇보다 영성체 즉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랑의 삶을 사는 구체적인 방법을 일깨워주지.
이제 지난번에 이어 십자성호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를 이해했으니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미사에 관해 설명하마. 처음이가 아직 교회에 관해 모르니 지금처럼 미사의 의무를 가톨릭 교리와 연관 지어 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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