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읍 신촌리와 조천리 접경 대섬습지의 '竹島山房'(아래그림)이 공격적으로 유객(誘客?)하고 있다.
여염집이라 하나 습지위의 특이한 꾸밈과 거대한 규모가 나그네들로 하여금 걸음을 멈추도록 강렬한
인력을 발산하고 있으니까.
산방(山房)이란 단순히 산속의 집이나 방이라기 보다 아호(雅號)나 지명 등의 뒤에 쓰이어 주로 서재
(書齋) 또는 화방(畵房atelier) 등을 나타낸다.
그래서 가정집이라는데 수긍이 가지 않은 것이리라.
주인이 아마도 괴상한 범인(凡人)이거나 평범한 기인(奇人)이 아닐까.
죽도는 차귀도(제주시 한경면 고산리)를 형성하고 있는 세 무인섬(죽도, 와도, 지실이섬)중 하나인데
여기 신촌리에도 대섬(竹島)이 있으므로 그 지명을 딴 것일 테고.
대섬은 철새들의 안식처(도래지)인데 오·폐수 유입과 각종 쓰레기 등으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단다.
제주도가 이 섬 주변 일대를 해양레저 및 휴양이 주기능인 유원지로 개발하려 한다는데 글쎄.
조천진은 화북진과 더불어 제주의 양대 관문이었다.
현재는 진터만 남아있으나(아래 그림1) 연북정(아래 그림2, 3)과 제주 9연대중 1인 조천연대(아래
그림5)가 복원되었다.
"연북정(戀北亭)은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한많은 귀양살이 중에도 그같은 충정이 절로 울어나왔을까.
하긴, 임금까지 좌지우지한 집권세력에 의해 희생중인 무고한 죄인들은 오매불망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가 절대군주 왕정이었다 하나 원시적이나마 내각책임제가 시행되었던 셈이다.
사색당파의 치열한 권력투쟁 역시 정당정치의 한 고전이었고.
조천에 비석거리가 빠질 리 있는가(아래 그림4)
강제병합이 몰고온 거국적인 3. 1독립만세운동에 먼 섬이라고 예외였겠는가.
요원의 불길이 된 1919년 3월의 만세운동 말이다.
제주도에서도 1919년 3월 21일 조천(朝天)면 미밋동산(味尾峰)에서 5, 6일간 8천여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단다.
제주만세운동의 진원지이며 민족정기를 일깨워 준 이 미밋동산(아래 그림1)이 만세동산이다.
전국 어디엔들 3. 1독립운동의 족적이 없겠는가.
궁핍을 극복한 이후, 특히 지자체의 시행 이후에는 더욱 치단장(治丹粧)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제주도의 경우 주목할만한 특이점이 있다.
재일교포들의 희사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아래 그림 2~4)
압제자 소굴에 들어가 그들을 상대해서 번 돈으로 그들에게 항거한 기념탑을 세웠으니까.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 분들이라 하면 결례가 될까.
지금은 굴지의 재벌인 L그룹의 모회사는 일본에 있다.
일본에서 성공한 재일교포의 회사다.
그 자금을 들여와 이 땅에서 사업을 개시한 초기에 그들은 매판자본으로 매도되었다.
특히 내가 몸담았던 대학의 교수들 중에는 그들의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각종 회의나 세미나 장소로 그들의 최신식 호텔을 선호했다.
그 호텔의 음식이 일품이라면서.
염불보다 잿밥이었던 학자들과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 분들이 대조되었다.
만세동산에서 조천연대가 있는 해안도로로 나서는데 서남쪽의 눈덮힌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왔다(아래 그림1)
방향만 다를 뿐 제주도 어디에서나 한라산은 나그네에게 나침판이며 등대에 다름 아니다.
얼마 가지 않아 신흥리방사탑 해안이(아래 그림2)이 펼쳐진다.
육지의 장승에 비견되는 방사탑(防邪塔)이 신흥리 해안에도 2개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탑을 세운 방향이 허(虛)하다 하여 남과 북 양쪽에 각1기를 세웠단다.
그리고, 이 탑 덕에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다.
방사탑신앙(俗信)이라 할까.
곧 함덕해수욕장이다.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
마치 자전거를 타고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고 마는 것 처럼.
함덕해수욕장 일대도 바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혀 생소하게 변했다.
호텔과 리조트 등과 편의시설이 들어서는 등.
내가 며칠 머물었던 때로부터 13년은 참으로 긴 세월인데 당연하지.
당시에는 없던 함덕리4구 샘물공원 정자(평사정아래 그림3)에도 비석들이다.
돌이 흔한 탓인가.
하찮은 선행, 공덕보다 비석 세우는 비용이 더 들겠다.
광복과 더불어 야기된 이념적 갈등이 극심한 먼 섬에 중앙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지방권력은 자위를 이유로 전횡이 극에 달한다.
경찰관 2명의 죽음이 4. 3사태라는 이 엄청난 비극의 도화선이 될 줄이야.
무릇 역사적 대형 비극은 예외없이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되어왔지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비극적인 사건중 하나로 정리해 버리면 끝나는가.
공권력에 의한 무수한 양민의 학살을 한 정부가 공식으로 사과했다.
그런데, 이 사과가 다시 도마 위에 올라있다.
시각을 조금 달리해 보면 어떨까.
좌.우익, 보수와 진보 등 굶주린 개마저도 먹지 않을 이데올로기(ideologie)문제와
자나깨나 주문처럼 외쳐대는 한민족, 한핏줄 시각은 접어두고 다만 수평적인 사람
관계에서 생각해 보는 것 말이다.
보복이 두려웠던가.
남자를 하나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에 절로 무남촌(無男村)이란다.
그렇다면 무아촌(無兒村)은 왜?
성인 남자가 없으므로 얼마 동안은 보복당할 리 없음은 물론 어차피 어린 아이들이
생산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보복하러 나설 수 없는 어린 애들인데 왜 아기무덤들이 그리 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