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허련(1808 – 1898)
조선 말의 화가로서 소치 허련을 짚어보고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생졸시기가 장승업과 비슷하여 같은 시기의 화가이지만 두 화가는 서로가 전혀 다른 길을 간다.
추사가 죽고 난 이후에 끝까지 추사를 추종하여 평생을 남종문인화를 그린 화가이다. 남종인화도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아주 중요한 회화 사조로 근대회화에 이어졌기 때문이다.
허련은 양천 허씨로서, 진도의 농사꾼 집에서 태어나서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하였다고 추정한다. 그가 28세 때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의 유년에서 청년시기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유배지 지역의 출신으로 신분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으리라 한다.
그는 양반 세족에게는 지나치리만큼 알랑거리면서도 자기 아래 사람들에게는 무서웠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자녀들에게도 나타났다. 처음에는 소질이 있어 보이는 큰 아들에게 그림을 가르켰으나 요절하자 크게 실망한다. 그러나 네째 아들 허형(미산)에게서 소질을 발견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면서, 다른 아들은 아주 혹독하게 대하면서 농사일이나 시켰다고 한다.
그는 사대부 화가도 아니고, 화원화가(전문직업화가)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그림을 좋아해준 사대부의 취향에 따른 남종문인화를 평생동안 그렸다. 한편으로 평생 동안 추사 김정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다시 말하면 그는 끝까지 추사를 추종함으로 남종문인화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허련은 하층민 출신이면서, 추사를 비롯한 한양의 경화세족과 인연을 쌓으므로, 자기 신분에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본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알랑거리고, 낮은 사람에게는 심하게 다룬만큼, 성격이 삐딱하였다고 한다.
28세 때 자기가 그린 그림을 들고 대흥사 초의선사를 찾아간다. 초의선사에게 그림의 기본을 배웠으리라는 주장과 그림을 배우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어 정확히는 모른다.
32세 때 초의 선사의 소개서를 들고 한양의 추사를 찾아간다. 한때는 추사가 나의 수제자라고 할 만큼 추사이 인정을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소치도 평생을 추사를 추종하여 남종문인화만 그렸다. 광통교 지물전에 그의 그림이 나타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다
당시의 헌종에게 불려가서 그림을 그려 바쳤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갔을 때 그는 세 번이나 찾아가서 몇 달씩 머물면서 온갖 수발을 들었다. 다른 제자들도 (이상적 등의) 간간이 찾아왔으나 수발을 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추사는 세한도를 그려서 소치가 아닌 이상적에게 주었다.
오세창은 그의 첫이름이 허유(왕유를 본 땄다고 한다.)였으나 나중에 허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안동 김씨로서 영의정까지 지낸 김홍근을 비롯하여 명문세가들과 많이 사귀었다. 사귀었다기보보다는 그들이 소치를 많이 좋아해 주었다.
특히 추사가 소개해준 신관호는 소치의 뒤를 많이 봐 주었다고 한다.
1856년에 추사가 죽자 진도로 내려가서 운림산방을 연다.
그의 산수화는 황공망 · 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붓끝이 갈라진 거친독필(禿筆)주2의 자유분방한 필치와담채(淡彩)주3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산수화 외에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한 사군자 · 모란 · 파초 · 괴석 · 노송 · 연화 그림도 특징적인 개성미를 지녔다.
스승 김정희도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든지,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토착화된 화풍은 아들형(灐)에게 전수되고, 손자건(楗), 방계으 후손 허백련(許百鍊)등으로 계승되어 현대 호남 화단의 주축을 이루었다.(남농 허건, 의제 허백련)
이왕이면 허련의 화풍을 조그만 더 살려보자.
김정희가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을 모범으로 하여 18세기 이후의 조선 화당의 중요한 흐름이었던 진경산수를 몰아낸다. 김정희를 추종하였던 허련은 김정희의 남종문이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호남지방으로 파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김정희가 중국서 가쪄온 남종화풍이 서울을 중심으로 주류가 되자 이 화풍을 다시 지방으로 퍼트렸다고 볼 수 있다. 이로서 허련 화풍은 지금도 전라도 지역에 후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화가들이 전라도에서 활동하고 있다.
남종화풍의 그림이 화가들 사이에만 유행한 것이 아니다. 전라도민들도 남종화풍에 빠져들어서 집집마다 남종화풍의 그림을 걸어두었다. 이것이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이고, 이 때문에 예향이라고 불린다
허련의 그림을 이은 아들 미산 허형이 아버지의 화풍을 아들 남농 허건과(허련의 손자이다.) 같은 문중인 방계 의제 허백련에게 전수하였다.
김정희의 그림에 중국 청초 회화의 영향이 보인다고 한다. 김정희를 추종한 허련의 작품에도 중국화풍의 영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추사를 추종하여 전문적으로 남종문인화를 그린 화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무인화의 양식이면서도, 자기 나름의 서정성을 담아내었다. 이것이 소치 허련의 그림 세계라고 말한다.
(*그의 호가 소치인 것은 그가 따른 화가가 중국의 대치 황공망임으로 자기 호를 소치라 했고, 진도에 지은 자신의 화실을 운림산방으로 한 것은 역시 자기가 따른 원말의 화가 예찬의 호가 운림이어서 이다.)
그는 유랑을 많이 했다고 하고. 그가 머문 집에는 그림도 그려주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소장하는 집은 거의가 전라도 쪽이고 경상도는 없다. 유랑이기보다는 서울의 세족을 찾아 오르 내린 것이 아닐까 한다. 경상도는 그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댓글 소치허련-생졸시기가 장승업과 거의 비슷하지만 미술세계는 전혀 다른 길이다.진도의 농삿군집안에서 태어난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였다.32살때 초의선사의 소개서를 들고 추사를 찾아간다. 한때 추사가 나의 제자라고 할만큼 추사에게 인정을 받았다.진경산수를 몰아낸 김정희를 추종하여 평생 남종문인화만그렸다.그의 산수화는 황공망 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고 붓끝이 갈라진 거친독필주2의 자유분방한 필체와 담채주3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두드러진 화풍을 볼 수 있다.산수화외에도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한 사군자 모란 파초 괴석 연화그림도 특징적인 개성미를 지녔다.김정희도'소치그림이 내것보다 낫다'고 칭찬을 했다.
그의 화풍은 아들 형에게 전수되고 손자 건으로 방계 후손허백련ㅇ로 계승되어 현대호남지방의 주축을 이루었다.(남농 허건, 의제 허백련)남종화풍그림이 화가들 사이에서만 유행한 것이 아니다. 전라도민들이 남종화풍에 빠져들어 집집마다 남종화풍그림을 걸어두었다.이것이 다른지역과 달라서 예향이라 불린다. 허연의그림은 무인화의 양식이며 자기나름의 서정성을 담아내었다. 이것이 소치그림의 세계라고 말한다. 그의 그림을 소장하는 집은 거의 전라도 쪽이다.
---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