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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첫 사랑’ 소훈李氏
‘파란만장’ 궁중생활에 병얻어
“젖먹이 두 아이 두고 가다니…
내 마음 아는 이는 그대였소”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1694~1776)는 52년이라는 긴 집권 기간과 함께, 83세까지 살면서 당시로는 엄청난 장수를 했던 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조는 장수 덕에 안정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고 조선은 르네상스를 누렸지만, 영조 개인으로 보자면 배우자는 물론 아들, 손자, 며느리의 상을 다 겪어야만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소훈이씨(昭訓李氏·1694~1721)와 영조는 나이가 같았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궁궐에서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벗이 돼 정을 나누었다. 1721년 9월, 영조는 형인 경종의 뒤를 이을 세제(世弟)로 책봉되고 왕자 시절 첩이었던 이 씨는 정식으로 소훈이라는 후궁의 직첩을 받았다. 후궁이 된 지 2개월 뒤, 갑자기 병이 들어 창의궁으로 잠시 나간 소훈이씨가 그날 밤 창의궁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창의궁은 영조가 왕자 시절 살던 거처로 경복궁 서쪽, 곧 지금 종로구 통의동에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가 세상을 떠난 곳도, 영조의 첫째 왕자인 효장세자가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창의궁이었다.
《소훈 이씨 제문》
아침에는 나를 마주하여 말하더니
저녁에는 숨이 멎어 말하지 못하니,
그날의 애처로운 광경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소.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소,
이것이 命이란 말이오
命이 아니란 말이오
명이라고 말한다면
곧 방년 28세가
어찌 청춘이 아니겠으며,
명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선한 이에게 복을 내리고
사악한 이에게
재앙을 내리는 이치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이오_!
소훈이씨는 본래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8세에 궁녀로 들어와 왕자의 첩이 되었으니 궁중생활은 파란만장했다. 결국 이것이 고질병이 돼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소훈이씨가 죽자 영조는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짧고, 운명이 아니라고 한다면 소훈이씨처럼 착한 사람을 일찍 데려간 이치가 무엇이냐고 원망했다.
“영령을 실은 상여가 비록 출발하더라도 누가 출발에 임하여 곡을 하며 이별할 수 있으며, 반우(返虞)의 신주(神主)가 집에 이르더라도 누가 문에서 기다렸다가 맞이할 수 있겠소.
말이 이에 미치니 심장이 막혀 답답하기만 하다오.
예전 사제로 나갈 때 서로 문을 사이에 두고 보냈는데, 이제 영원히 떠나는 날에 내 얼굴도 못 보고 가시는구려. 내 마음을 칼로 베는 듯하니 그대의 정회는 어떠하겠소.”
두 아이는 살피고 사랑하여 더욱 잘 기를 것이니 저승에서 모름지기 마음을 편히 하시오
여기에 더해 살아있는 자신보다 남겨진 어린아이들과 함께 겪어야 하는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첫 아들 萬福(이행)의 탄생 (1719)
연잉군의 첫 아들이었고 숙종에게도 첫 손자여서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萬福 (이행)은 훗날__효장세자_가 된다
효장세자(진종)의 陵--파주의 永陵
● 화순옹주의 탄생
만복을 낳은 후 이씨는 연년생으로 딸 화순옹주를 또 낳았다.
후에 옹주는 남편과 깊은 사랑을 나누지만 그로 인해 영조에게 큰 슬픔을 준다....
●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면서 아들 만복을 낳은 이씨는 종5품 소훈 첩지를 받아 <소훈 이씨>가 된다.
“훗날 성장해 낳아준 어머니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라는 말은 남겨진 남편의 절절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비록 나에게는 생각이 미치지 않을지라도 유독 젖먹이 두 아이에 대해 생각이 어찌 미치지 않겠소. 만복(萬福)이가 어미를 찾으니 비록 쇠며 돌과 같은 심장이라도 어찌 꺾이고 찢어지지 않겠소. 아아! 애통하도다. 아아! 애통하도다… 두 아이는 살피고 사랑해 더욱 잘 기를 것이니 저승에서 모름지기 마음을 편히 하시오.”
소훈이씨의 장례는 1721년 12월 14일에 치렀다. 자신의 첫사랑이자 아내와 다름없는 사람이었지만 세제의 신분상 후궁의 장례에 참석할 수는 없었다.
발인에 곡을 할 수도 없고, 장례가 끝난 뒤 돌아온 신주를 받을 수도 없었다. 상여가 나갈 때 마지막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세제라는 위치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는 이 치제문을 친필로 작성하였으나 소훈이씨의 영전에서 직접 제문을 읽을 수 없어 상궁 이씨를 대신 보내 읽어야 했다.
“내 마음을 아는 이는 그대였고, 그대의 마음을 아는 이는 나였소.”
마냥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던 왕자의 고백이 더 슬프게 읽히는 이유다.
( 영조의 어필)
박용만 책임연구원ㆍ문화일보
소훈 이씨===>정빈 이씨
첫댓글 냉혈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가슴절절한 순애보가 애틋한 지아비 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