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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마지막에 존 레논의 'Imagine' 흘러 나옵니다.
[ 영화, 킬링 필드 ]
1985년 제작된 영국영화로, <멤피스 벨>, <미션>의 제작자 데이비드 퍼트넘이 제작하였으며, <미션>, <주홍글씨> 등으로 잘 알려진 롤랑 조페가 감독하였습니다.
영화 <킬링 필드>는 1980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드니 션버그 기자가 쓴 〈디스 프란의 생과 사: 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으로, 캄보디아내란을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와 현지인의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렸습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 캄보디아에서 론놀의 우익(右翼)정권이 군사쿠데타로 전복되고 1975년 정권장악에 성공한 크메르루주가 4년간의 통치기간 동안 저지른 극도의 비인간적 야만과 살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킬링필드(Killing Field)란 크메르 루즈 정권 때 대학살로 인해 생긴 집단 무덤을 말합니다.
1985년 아카데미에서 편집, 촬영 부문 등 3개 부문 후보로 올라 디스 프란 역을 맡은 행 응오가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주연배우였음에도 조연상을 수상하여 인종차별이라는 논란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사진, 영화에서 왼쪽 시드니와 다스 프란)
행 응오는 살아생전 캄보디아 난민들을 위해 기부를 많이 했고 이 작품 이후 간간히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인으로 출연하는 영화의 출연료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6년 2월 25일, LA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검사 측 주장으로 크메르 루즈의 보복성 암살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와 당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사결과 거리의 아시아계 불량배 일당들이 돈을 노리고 벌인 강도 살인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크메르 루즈도 서북부 산간 오다 멘쩨이 지방에서 오늘내일 하면서 근근히 버티고 있던 때라 미국까지 가서 보복 암살을 벌일 여유도 전혀 없었습니다. <킬링 필드>가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1985년, 반공영화라는 선전효과 때문인지 각 학교의 단체 관람이 성시를 이루면서 엄청난 흥행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밀어준 덕분에 그 해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라는(사진 영화에서 킬링 필드)
대흥행작을 밀어내고 그 해 국내 흥행 1위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킬링 필드>가 이루어낸 이 흥행은 단관 개봉시대였던 80년대에는 일어나기 어려운 엄청난 기록이었고, 어지간한 오락 대작들이 기록한 흥행기록들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당시 이 영화에 대하여 반공을 강조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감독 롤랑 조페는 <킬링 필드>는 우정이 중요한 주제이고 정치는 그 뒷전이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즉 이 영화 자체의 핵심 포인트가 이데올로기 보다는 인종이 다른 동서간의 두 남자의 깊은 신뢰와 우정이 바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쿠메르 루즈와 킬링 필드 ]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의 우두머리였던 폴 포트는 공산혁명을 통해 ‘민주 캄푸치아’라는 공화국을 출범시켜 사회를 완전 개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킬링 필드’로 알려진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킬링 필드는 크메르 루주의 학살만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넓게는 미군의 학살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폴 포트의 본명은(사진, 폴 포트)
살로스 사르로 폴 포트는 공산혁명 이후 1976년 민주 캄푸치아국 선포와 함께 지은 이름입니다. 폴 포트는 1949~1952년 파리 유학시절 공산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 1952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폴 포트는 나중에 정권을 잡은 후 노르돔 시아누크 중학교 시절의 한 학년 후배인 키우 삼판을 상징적 국가원수에 앉혔습니다. 특파원을 지낸 작가 로버트 케이플린에 의하면 키우 삼판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에서 도시에는 기생충들이 살고 있으므로 이 기생충들을 대량 이송해서 농촌으로 소개시켜 농업의 성장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960년대 초에 캄보디아 농촌에 돌아가서 ‘크메르 루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운동가들 역시 크메르 루즈라고 불렀습니다.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는 프랑스 식민 시절이던 1941년 왕위에 올랐다가 독립 1년 후인 1955년 스스로 국왕 자리를 버리고 선거를 통해 정치 지도자로 변신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 놀 장군의 쿠데타로 쫓겨났습니다. 크메르 루주의 적은 친미적인 론 놀 정권이었습니다.
특파원이자 작가였던 미국의 케이플런은 “닉슨의 엉성한 정책은 1969년의 캄보디아 비밀폭격과 1973년에 있었던 또 한차례의 폭격으로 나타났다. 캄보디아 농촌을 휩쓴 B-52 폭격기들은 분노한 농민들을 크메르 루즈의 품 안으로 더 많이 안겨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서방과 캄보디아 도시민들에 대한 크메르 루주의 증오심은 더욱 강화되었다. 캄보디아와 크메르 루즈에 대한 닉슨과 키신저의 무지는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외교정책상의 파국을 가져왔다“고 얘기합니니다.
크메르 루즈는 1975년 4월 17일 월남이 패망하기 직전에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프놈펜을 점령했습니다. 크메르 루즈는 민주 캄푸치아를 세우고 3년 7개월의 통치 기간에 급진적 사회주의 정책과 반 베트남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캄보디아를 왕창 뜯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민들을 미리 계획한 대로 농경지대와(사진, 실제 시드니와 다스 프란)
시골지역으로 쫓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상적인 농촌 공산사회를 건설한다는 미명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프놈펜 점령 이후 두달 동안 전국적으로 200만~300만 명이 졸지에 농부로 신분이 바뀌어 시골로 추방되었습니다.
긴 이동행군 중 노약자와 환자, 어린이들은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퍽퍽 죽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혁명군은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짐승보다도 더 잔인하게 대했습니다. 추방 길을 인솔한 부대원은 시아누크 정부와 론 놀 정권 시대의 가난한 하층민들로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무산계급 혁명을 교육받으며 착취계급에 대한 증오를 키워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캄보디아는 전국에 2,500개가 넘는 사찰이 있는 불교국가였지만, 크메르 루주는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불교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폈습니다. 폴 포트는 시장을 폐쇄하고 학교 문을 닫으면서 “지금까지의 교육은 미 제국주의만 가르쳐왔으므로 학교는 모두 폐쇄되었다. ”당신들은 지금부터 논밭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산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자비한 강제노역을 밀어 붙였으며, 노동할 힘과 의지가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총살했습니다. 남부 캄보디아에서 발원한 크메르족만이 순수한 민족이라고 생각한 폴 포트는 크메르족에 의한 캄보디아 건설을 이상으로 삼아 상상을
초월하는 ‘인종 청소’를 저질렀습니다. 캄보디아 내 중국인과 베트남인이 그 청소 대상이었습니다.(사진, 영화에서)
특히 베트남인들에 대한 증오가 강해, 베트남 여자와 결혼한 캄보디아인들은 아내를 죽이지 않으며 처형될 것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2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누구를 죽이건 살인 방식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케이플런에 의하면 ‘베트남인이라는 죄밖에 없는 국경선 너머의 동료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총알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피살자 100만~150만 명 중에서 수천 명은 괭이와 삽으로 머리를 쳐서 죽였다고 합니다.
* 킬링 필드
크메르 루즈는 각지에서 집단 농장을 설치하고 사회주의식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도시 주민들을 모조리 그곳으로 내몰았습니다. 이와 함께 뚜얼 슬랭 같은 악명 높은 많은 수용소도 건설되었고, 반혁명 사상을 품고 있다고 의심되는 이들이나 외국과 관련이 있는 이들, 스파이로 의심되는 자들은 모조리 고문하고 처형했습니다.
정부가 정치 범죄자나 경범죄자들에게 처음에는 경고장을 보내지만 경고장을 두 번 이상 나오면 "재교육"을 위해 호출했습니다. 이는 거의 확실한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 외에도 종종 정부에서는 '혁명 이전의 삶과 그때 저지른 범죄'를 자백하도록 장려했으며 이를 용서해주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곧 비밀경찰 산데바르가 끌고 가서 정치범 교화소에서 고문을 받고 처형되기 위해 끌려간다는 의미였습니다.그리고 사실상 고등 교육 이상을 받은 캄보디아 국민은 대부분 말살 당했는데, 아무 짓도 안했는데 그저 안경을 쓰고 있다고 붙잡아 집어넣은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해의 대상이 된 지식인들이 죽거나 혹은 숨고 탈출하거나하여 사라지자 그 대상이 농민들 중 협조적이지 않은 자들로 확대되었고 나중에는 당 중앙을 제외한 크메르 간부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는 내부투쟁으로까지 변해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이 사지(死地), 즉 킬링 필드로 변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인 학살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처럼 캄보디아 교육에 크나큰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한창 교육 현장에 종사해야 할 교사들마저 다 학살당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크메르 루즈 반군 실무자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캄보디아는 도농간 격차가 현격해서 전기가 안 들어오는 시골도 부지기수였고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자도 엄청났습니다. 그들에게 도시 문명의 모든 것은 부의 상징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보였고 자동차, 라디오, TV, 전자기기는 "있는 놈"들의 물건이었습니다.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잡혀간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크메르 루즈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베트남 측에서는 300만 명으로 발표하였는데 이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대략 2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특히 학살은 민족주의적 감성에 의해 중국계와 베트남계에 집중되었습니다. 여기서 수십만명의 베트남계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했고, 이것은 베트남 전쟁을 승리하고 기세등등하던 베트남의 엄청난 분노를 자아냈습니다.(사진, 영화에서 다스 프란)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 사이에 극한의 외교적 대립이 이루어졌고, 결국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군은 망명한 캄보디아 난민으로 캄푸챠 민족구국통일전선을 조직하고 크메르 루즈 장교로 베트남에 망명한 헹 삼린을 내세워 폴 포트 타도를 기치로 캄보디아에 침공했습니다.
* 학살 방법
증언에 따르면 고압선을 이용한 전기충격과 물고문은 물론 사람을 고문 침대에 뉘어 놓고 쇳덩어리로 머리를 짓누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반동으로 몰린 사람들이 과거 정권에 협조했다고 불지 않을 때는 도끼로 손을 자르거나 유방이나 성기 등 인체의 예민한 부분을 예리한 칼 등으로 도려내기도 했다.
게다가 크메르 루즈는 반동분자를 산속 나무에 묶어 이 나무를 오르내리며 먹이를 찾고 있는 무서운 열대 붉은 왕개미들로 하여금 살을 파먹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크메르 루주들은 사람을 고문할 때 사진을 찍고 옷을 모두 벗도록 했고, 고문 기술자들은 고문센터에서 뿐 아니라 사람을 구덩이에 처넣기 직전에도 고문을 가했습니다. 당시의 고문 중에는 머리에 구멍 뚫는 고문도구가 있었으며 이는 아래 동그란 부분에 사람 머리를 넣게 하고 사람의 머리를 찧어서 죽이는 용도의 고문도구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가장 흔한 방법은 눈을 가린 뒤 팔을 뒤로 묶고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묻힐 구덩이를 파게하고 밖으로 나와 가장자리에 서게 한 뒤 몽둥이로 뒤통수를 쳐서 구덩이로 밀어 넣어 죽였다고 합니다. 캄보디아에 전시된 그림이나 자료들을 보면 사람들의 팔을 뒤로 묶고, 목과 목을 서로 연결해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어버리기도 했습니다.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반동분자들의(사진, 끌려가는 양민들)
씨를 말린다면서 잡힌 사람의 3대를 없애버렸는데 심지어 젖먹이 아이들까지 살해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훗날 보복할 수 있으므로 이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죽여버렸습니다.
죽인 방식도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갓난아이들이나 애들을 마치 개구리를 잡아 길바닥에 패대기쳐 죽이듯 팔이나 다리를 잡고 몸뚱이를 바위나 시멘트 바닥 또는 통나무 등에 내려쳐 죽였습니다. 심지어는 마을에 스피커를 달아서 온 마을 사람들이 희생자가 죽어갈 때 비명소리를 듣게 했습니다. 또한 갓난아이를 공중으로 던져서 사격연습용으로 이용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손톱을 뽑거나, 여자의 젖꼭지를 도려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구덩이에 사람들을 생매장시키거나 사람들을 우물에 넣어버리기도 했습니다.
* 악명 높은 수용소, 뚜올 슬렝
크메르 루즈의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로는 S-21 보안감옥인 뚜올 슬렝이 있는데 독나무 언덕을 뜻하는 이 수용소는 크메르 루주 정권 이전에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고등학교였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 고문소와 수용소로 개조되고 S-21 보안감옥으로 불리웁니다.
약 1만 7천명이 이곳에 수용되었으며 살아서 나간 사람은 12명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는 캄보디아 국민 말고도 해상에서 나포된 외국인들도 수용되었고, 모두 죽었습니다. 79명의 외국인 기록이 남아있으나 수용소에서 일한 전직 사진사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더 있었다고 합니다.
* 크메르 루즈의 실각과 캄보디아의 내전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로 수십만의 난민이 발생했고 친 베트남 성향이 강하던 동 캄보디아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집니다. 베트남은 1979년 1월 6일, 캄보디아 프놈펜을 공략합니다, 원래부터 태국과 더불어 동남아의 최강자였으며, 이에 더해 베트남 전쟁으로 단련된 베트남군은 조무라기에 불과한 크메르 루즈를 손쉽게 박살내버리고 프놈펜에 입성합니다.
결국 폴 포트, 이엥 사리 등의 크메르 루즈는 태국 국경 근처까지 쫓겨나고 유폐에 가까운 상태에 있던 시아누크는 다시 북경으로 피신했습니다. 1월 10일 베트남은 헹 삼린을 수장으로 하는(사진, 폴 포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는 일단 베트남의 침공으로 끝이 났습니다.이번에는 중국이 버르장머리 없는 베트남에 대한 징벌행위로서 무력침공을 비밀리에 모의,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 해방 등을 명분으로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이 국경을 월경하며 중월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치욕을 잊지 않고 베트남을 엿 먹이기 위해 크메르 루즈를 지원합니다. 미국은 외교적으로 베트남을 "아시아의 프로이센"이라 지칭하며 깡패 국가로 간주하면서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면서, CIA를 동원해 마약을 팔아가며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크메르 루주는 타이 국경 근처의 그들의 본거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 크메르 루즈는 베트남이 만든 캄보디아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2개의 비공산계열 크메르 단체들과 같이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명목상 시아누크를 지도자로 합니다.
결국 베트남은 크메르 루즈를 격파하고도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동시에, 미국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잔존 크메르 루즈 게릴라 세력과 베트남전과도 같은 게릴라전을 벌이고 휘말리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베트남은 외교적 정당성을 위해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합니다.하지만 캄보디아의 내전은 장기화되어 갔습니다. 크메르 루즈의 입장에서는 킬링필드가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려진 이상, 패배할 경우 학살자로 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트남 괴뢰정부의 입장에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였던 크메르 루즈가 혹시라도 승리할 경우, 외국의 괴뢰정부에 속했던 그들을 살려 두리라곤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양측모두 이기기 위해 온갖 막장 짓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닥치는 대로 민간인을 징집함과 동시에 소년병 등을 동원하고, 전비 확보를 위해 마약을 팔아대고, 전국에 온통 지뢰를 깔아버렸습니다. 이전 시기의 미국의 폭격에 의해 남은 불발탄들과 이 시기의 내전기 캄보디아 전국에 심어진 지뢰들은 아직까지도 희생자를 낳고 있습니다.
* 긴 내전의 끝
어쨌든 수렁에 빠져 있던 베트남군은 1989년 9월에 철수합니다. 당시 총리의 자리에 있던 훈센은 베트남군이라는 배경을 잃고 세력이 약화되어 내전은 더욱 수렁에 빠졌습니다. 결국 1991년 10월 23일, 캄보디아 평화파리협정이 개최되어 20년에 이르는 캄보디아 내전이 종결되었습니다.
이와같이 크메르 루즈 몰락 이후에도 내전에 시달렸던 캄보디아는 1993년에서야 비로서 유엔의 도움으로 입헌군주제 국가로 재탄생했습니다. 민주 캄푸치아 정부에서 1년간 국가수반 노릇을 하다가 쫓겨나 외국을 떠돌아다니던 노로돔 시아누크가 다시 국왕 자리에 올랐습니다. 시아누크는 2004년 말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국토의 20퍼센트를 게릴라들이 장악하고 있던 1990년대 중반 캄보디아에 묻힌 지뢰는 1,000만 개에 이르렀습니다. 지뢰 때문에 매달 200~300명의 부상자가 생겨 세계에서 불구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로 추정되었습니다.
* 잊혀진 학살
사실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는 킬링필드 실상이 외부에 잘 알려져 않았습니다.
크메르 루즈가 외국인 기자들을 다 쫓아내고 학살을 은폐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습니다.본격적으로 킬링필드가 알려진 것은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크메르 루즈를 몰아내면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베트남이 순수한 의도로 이런 악행을 알린 건 아니었습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를 침공했다는 반대여론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자 국제 여론을 달래기 위해 크메르 루즈가 저지른 대학살을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베트남은 S-21수용소 뚜올 슬랭에 박물관을 만들고 이것을 소련과 동유럽은 물론 서방에도 공개했고, 프놈펜 외곽의 다른 킬링필드도 하나씩 찾아내서 공개했습니다. 서방기자들은 원하면 캄보디아 전역의 킬링필드를 돌아보고 취재할 수 있었고, 이 취재를 바탕으로 크메르 루즈들의 천인공노할 만행들이 전 세계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 전범 재판
크메르 루즈 정권이 붕괴된 지 30년 만인 2009년 11월 초순, 캄보디아 정부는 프놈펜의 시소와드 고등학교 등 전국 고교를 대상으로 크메르 루주의 학살행위를 수록한 책을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캄보디아 청소년들은 종전에는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 크메르 루즈의 폴 포트 정권이 저지른 학살행위에 관해 들었으나 앞으로는 교과서를 통해 어두웠던 조국의 역사를 배우게 됐습니다. 지금까지의 교과서는 폴 포트 시대에 관해 불과 다섯 문장만을 실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과서는 다섯 개의 문장을 확대해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한 것입니다.
2009년 11월 25일 '킬링 필드' 대학살 가담자에 40년 형이 구형됐습니다.
이날 캄보디아 검찰은 '더치'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전 '투올 슬랭' 교도소장 카잉 구엑 에아브에게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40년 형을 내린 것입니다. 유엔이 지원하고 있는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소는 캄보디아 정부와의 협상에 따라 최고 형량을 사형이 아닌 종신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는 10년 동안 협상을 벌인 끝에 2006년 정범재판소를 설치했습니다.
캄보디아 정부가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을 처벌할 경우 정국이 또다시 불안해질 우려가 크다며 이들에 대한 처벌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캄보디아 내에서는 크메르 루즈가 자행한 반인륜적인 범죄의 진실을 밝혀내고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은 상황입니다.
에아브는 크메르 루즈 정권에 협력하지 않는다고 수감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처형하고 고문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그가 교도소장으로 재직할 당시 수감자 1만 6천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지 14명뿐이었습니다. 캄보디아와 태국 국경지역에서 숨어 살던 그는 1999년 체포됐습니다.
오늘날 킬링 필드는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명소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다크 투어리즘'이란 휴양과 관광을 위한 일반 여행과 달리 재난과 참상지를 보며 반성과 교훈을 얻는 여행을 말합니다.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현장인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탐방도 마찬가지 성격의 여행입니다. 인간말종 집단이라 할 크메르 루주의 뒤에 미국의 지원이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깨닫고 돌아갈지는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 보다 자세한 폴 포트 이야기 ]
폴 포트는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1925년에 왕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여섯 살 때 왕립 수도원에 들어가서 약 1년 동안 교육을 받았고, 이후 6년 동안 가톨릭 계열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프놈펜은 상인들과 베트남인 노동자들이 매우 많았던 도시였습니다.(사진, 말년의 폴 포트)
그러다가 1945년에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불교 승려들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해서 캄보디아 민족주의자들을 지도하는 정치 운동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스무 살이 되던 해에 폴 포트는 전기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스탈린주의에 완전히 매료되어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고 훗날 크메르 루주 지도부를 형성하게 되는 이엥 사리, 손 센, 키우 삼판 같은 동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폴 포트는 세 차례나 낙제한 끝에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군의 탄압에 맞서 캄보디아 독립 운동이 시작되던 상태였는데, 이에 폴 포트는 형제인 살로tm 차이를 따라 베트남인의 지도를 받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공산주의, 반외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베트남의 반불 저항 운동에 동참하며 여러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절 친구, 동료로서 이후 크메르루주와 거리를 둔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잔혹한 성격이라든지 음흉한 면은 없었다고 합니다. 과묵하고 예의 바르며 수더분한 인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시절은 조국을 생각하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구하자는 순수한 면까지 있었다고 합니다.그런데 베트남 사람들과의 충돌과 갈등으로 베트남과 손잡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한때 선생으로 착실하게 지내던 적도 있지만 서서히 반왕정 활동을 하면서 시아누크 비밀경찰에게도 수배 대상이 되어 밀림으로 잠적합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소수 원주민들과 친해지면서 이들의 공동체 의식, 나아가 독자적인 공산주의 정신을 가진 나라가 필요하다고 차츰 생각하게 됩니다.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 와중에 소수 원주민들이 주역이 된 공산당 분파인 크메르 루즈(의미는 붉은 크메르) 창설에 기여합니다. 나아가 중국의 지원 아래 무력 저항으로 캄보디아 왕정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하지만 이때의 크메르 루주는 애송이 수준으로 미미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으나 론 놀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에 맞서고자 여러 세력을 끌어들이려던 국왕 시아누크 덕에 상당수 무기 지원 및 수를 급격히 늘어나는 계기가 주어졌습니다.
게다가 미국이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무기 및 물자 운송로로 캄보디아가 쓰인다고 마구잡이 폭격을 하면서 국경에서 많은 사망자를 내면서 국경에 살던 많은 소수 원주민들이 분노하여 크메르 루즈에 들어오면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갔습니다.
* 쿠데타를 통한 집권
"우리는 어떤 외부 세력과도 연계되지 않은 깨끗한 승리를 거두었다. 민주 캄푸치아는 앞으로 고립을 택할 것이다."
- 1975년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킨 후 승리연설
론 놀 군부의 인기는 하락세에 접어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론 놀이 얘기하면 부하들은 졸기 시작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무능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975년 폴 포트가 론 놀 군부를 뒤엎으면서 크메르 루즈 정권을 세웠습니다. 이른바 민주 캄푸치아의 탄생이었습니다. 론 놀은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론 놀의 수하들 및 가족들은 깡그리 학살해 그냥 산가에 내다 버리게 한 다음 국가 공무원 및 군부에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시작했고 우리 식 공산주의대로 종전 소련이나 중국과 다른 강력한 사회국가를 표명했습니다.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들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
하지만 이런 와중에 캄보디아 내 베트남 사람들까지 대거 학살 및 숙청하였고 베트남을 선제 공격하도록 지시하여 베트남 마을 두 개를 박살냈습니다. 이에 분노한 베트남의 공격으로 1979년 정권이 무너지자 정글 속 원숭이들처럼 깩깩대며 밀림으로 들어가 산발적인 저항을 이어가게 됩니다.
호랑이를 건드렸다 호랑이에게 먹힌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국마저 이긴 나라가 베트남인데 정권이 안 무너지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자 미국은 된통 당한 베트남에 대한 보복도 할 겸 크메르 루즈를 지원하면서 지금까지도 미국이 욕을 먹게 되는 계기를 만들고야 맙니다.
* 몰락과 최후
베트남의 개입으로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의 주도권을 잃었고 북부 변방으로 쫓겨가게 됩니다. 베트남의 괴뢰 정부군과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크메르 루즈들 사이에도 내분이 심화됐습니다. 폴 포트의 직속 똘만이였던 '따목'이 1997년 7월 25일 폴 포트를 배반하고 그를 구속해 인민 재판에 회부하여 종신형을 선고했고 폴 포트는 모든 힘을 잃고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포트는 산 중턱에 있는 집에 연금되었는데, 그곳은 허접한 헛간이었습니다. 폴포트의 젊은 아내인 미아스와 경호원 그리고 키우 삼판의 아내가 폴 포트의 시중을 들고 있었지만, 폴 포트는 이미 심각한 심장병과 고혈압을 앓고 있는 데다 암에 걸린 상태였습니다.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고 죽기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조차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라며 "나를 보라,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는가. 아직 나의 정신은 말짱하다"고 말했으며 "75~78년의 통치 기간 중 우리의 운동이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이는 오로지 베트남 침공으로부터 캄보디아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게거품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98년 4월 빌 클린턴 행정부가 폴 포트를 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할 방침을 밝혔고, 캄보디아 정부군의 공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간부 중에는 폴 포트를 미국에 인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1998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황이 석연치가 않아 온갖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전부 폴 포트에게 떠넘기려던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습니다.많은 크메르 루즈 간부들은 폴 포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옛 지도자와 연루될까 두려워 모른체 했습니다. 옛 부하들은 외딴 시골에 폴 포트의 시체를 들고 가 가족들과 옛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찌어'가 보는 앞에서 폐타이어, 쓰레기와 함께 화장시켜 버렸습니다.폴 포트의 사망 이후 키우 삼판 등을 비롯한 크메르 루즈들은 내전에서 패배하고 모든 크메르 루주 세력들은 체포되어 현재도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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