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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를 잘 아시는 분들에게는 다소 민망할 수도 있지만, 혹시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나름 중국사를 구분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시도록 축약해 보기로 한다.
중국사를 보면 나라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접근하기에 다소 버거워 보일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쉬운 접근을 위해서 우선 중요한 나라부터 기억해 나가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심하
게 축약했다고 나무라지 말았으면 한다.
하상주 - 춘추전국시대 - 한나라 - 위진남북조 - 당나라 - 송 -원 - 명 - 청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를 하상주 하나로 묶은 이유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하상주 단대
공정'을 통해 중국사를 이해해보자는 취지도 있고, 기억하기도 편하기에 한데 묶었다. 또한
이 시기가 중원이 급 성장한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고대사이기에 하나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
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춘추전국시대가 주나라가 힘에 약해져 제후국들이 전쟁을 벌인 시
기임에도 굳이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를 분리한 이유는 그만큼 춘추전국시대가 중요하기 때
문이다.
중국에도 우리의 단군신화처럼 신화의 시대가 있었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도 있었고 반고
개천, 복희씨와 여와의 이야기도 있다. 신화라는 것이 단지 지어낸 이야기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역사적 사실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여러 신화들
을 종합해서 추려낸 것이 아마도 삼황오제일 것이다. 아래의 글은 신 승하가 지은 '중국사
(상)' 66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중국 고대의 전설은 춘추 말에 '오제(五帝)설'이 형성되고, 전국 시대 말기에 '삼황(三
皇)'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한 대에 들어와 삼황이 오제 앞에 놓이게 되었다. 전설
이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삼황이 누구라고 할 수 없지만, 한 대에 들어와 대체로 다섯
가지 설이 나왔다. 즉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수인(燧人). 복희〔伏羲, 포희
(敍犧)〕.신농(神農), 복희. 여와(女蝸). 신농, 복희. 축융(祝融). 신농, 등으로 되었다. 그
밖에도 복희. 신농. 여와. 수인. 유소(有巢)씨 가운데 임의로 셋을 택하기도 한다.
삼황이 신화에 가까운 반면 오제는 그래도 역사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다. 오제도 설이 분
분하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황제(黃帝)-전욱-제곡-요(堯)-순(舜)'이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 같다. 여기서 황제는 치우와 전쟁을 벌였던 그 황제이다. 삼황과 다르게 재위순
서로 나와있다. 요순은 우리에게 성군의 대명사로 익숙한 요와 순이다. 요가 순에게 순이 우
(禹)에게 왕위를 양위한 것은 아름다운 미담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우도 자신의 왕위
를 익(益)에게 선양하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우의 아들 계(啓)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고 그
뒤로 왕위가 세습되어 하왕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중국 최초의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하왕
조가 멸망하고 상나라가 들어서고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니 이를 줄여서 하상
주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나라와 상나라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상
왕조부터 역사시대로 구분되나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문인지 남아있는 사료는 많지 않다. 그
러기에 춘추전국시대가 포함되어있는 주나라는 비교적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하나라와 상나
라에 대해서는 막연히 사진을 통해본 유물만이 떠오를 뿐이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유구한 중국의 역사가 서구의 역사보다 길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하곤 했던 것 같다. 중국의 역사가 기원전 2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비해 메소포
타미아나 이집트의 역사는 무려 기원전 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거의 1000
년 이전부터 서구에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문화적 자존심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큰 자극
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중국은 고대사 재정립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는 산재한
역사적 사료들을 취합해 상고사를 정립해야한다는 실질적 이유에도 맞닿아 있었다. 결국 중
국은 '하상주 단대공정'의 실행한다. 아래의 글은 김 경호외 3인이 지은 '하상주단대공정 중
국 고대문명 연구의 허와실' 15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기원전 1세기 사마천(司馬遷)이 서주(西周) 공화(共和) 원년(기원전 841) 이전의 연대
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천명한 이래 중국 고대 기년(紀年)문제는 오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2천년 이상 수많은 학자들이 공화 이전의 연대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제출했
지만 만족할만한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웠다. 1996년부터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 하에
착수된 이른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하 '공정'으로 약칭)은 이렇듯 불가
해한 영역으로 남아 있던 서주 공화 이전부터 하(夏)왕조 성립 시기까지의 연대 재구성
을 목표로 추진된 대형 프로젝트였다. '공정'은 2000년 그 결과물인 『하상주단대공정
1996∼2000년계단성과보고(간본)(夏商周斷代工程1996∼2000年階段成果報告(間本)』(이
하 『간본』으로 약칭)의 내용 가운데 「하상주연표(夏商周年表)를 통하여 하(夏, 기원
전 2070∼기원전 1600년), 상(商, 기원전 1600∼기원전 1300년), 상 후기(기원전 1300∼
기원전 1046년), 서주(기원전 1046∼기원전 771년)의 연대를 확정하여 그 성과를 발표
한 후, 과제를 매듭지었다.
서주 공화 원년은 서주가 동천하기 이전 여왕( 王)이 쫓겨나고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선왕(宣王)이 즉위하기 전까지 공동 집정했던 14년의 원년을 말할 것이다. 자신들의 역사를
연구하고 성과를 낸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정확한 연도를 알기 어려운 과거의
역사를 이론(異論)의 여지를 주지 않고 확정한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과거보다
자료에서나 도구에서 역사를 연구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은 맞다. 하지만 사마천을
비롯한 이전의 무수한 역사학자들이 이를 확정하지 못했던 이유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고 본다. 하상주단대공정이 정부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연구성과를 의심하게 하는 원인
이 된다. 과거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진 연구였을 것이라고
의심되기 때문이다. 하상주 삼대에 대한 좋은 연구로서 의미를 두길 바란다. 서주 공화 원년
이후 수 천년간 지속되어온 중국역사의 위대함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작은 소망
이다.
이제 춘추전국시대를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이 한 단계 도약했던 시기
이다. 춘추전국시대는 황제의 권위가 땅 아래로 떨어지고 각 제후들이 스스로의 이로움을
위해 무수히 전쟁을 벌이던 혼돈의 시기였다. 그러나 각국간의 생존을 담보로 한 치열한 전
쟁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사상의 발전을 가져와 우리가 잘 아는 공자, 노자, 맹자 등 뛰어난
사상가가 배출하였다. 농업에서도 소와 말을 농사에 이용하기 시작했으며, 철제 농기구가 도
입되어 경작지가 확장되었다.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이뿐 아니라 민족적으로도 새로운 이
민족이 중원의 역사로 편입되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대표적인 민족이 우리가 '초한지'로도
잘 알고 있는 항우의 초나라이다. 아래의 글은 백 양이 지은 '맨 얼굴의 중국사 1권' 251 페
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초부락은 주 왕조와는 다른 민족이다. (감히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묘
족의 한 갈래일 수도 있다. 그 때문에 특별히 자체의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초 부락에서는 '우유를 먹는다'는 의미의 '흘내(吃 )'를 '곡(谷)'이라 말하며, '호랑
이' '노호(老虎)'를 '우토(于 )'라 한다. 주 왕조가 그들을 '남만(南蠻)의 새 혓바닥을 가
진 사람'이라 놀린 것도 말하는 것이 흡사 새가 지저귀는 것같이 알아듣기 힘들었기 때
문이다.
초 부락은 불의 신을 숭배했고, 주 왕조는 농업의 신을 숭배했다. 초 부락은 운명을 숭
배했고, 주 왕조는 조상을 숭배했다. 중국인은 수 백년 또는 수 천년 넘게(전설시대도
포함한다면) 정부조직을 가졌지만, 초 부락은 그저 하나의 부락으로 매우 뒤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도 자신들이 낙후되었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만족(蠻族)
임을 자처했다. 그 들은 원래 지금의 호북성 서부 일대에 정착하여 살았다. 하지만 그들
이 어디에서 이곳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초나라뿐 아니라 동이족이 많이 살던 제나라도 중원의 일부였다.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
상담(臥薪嘗膽)의 배경이 되는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의 숙명적 대결로 우리에게 익숙한 월
나라도 이민족의 국가였다. 진정한 의미의 중원이 완성된 것은 춘추전국시대였다고 본다. 춘
추전국시대는 진시황이라는 희대의 영웅에 의해 통일되고, 진나라의 멸망이후 장기판의 초
한으로도 친숙한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의 격돌에서 한나라가 승리하여 중국이 좋
아하는 천하의 주인이 된다. 춘추전국시대가 한나라로 귀결되는 역사의 대변혁은 화하(華夏)
족이 한(漢)족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민족적 대융합이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화하족과 한족
을 구분 없이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중원을 중심으로 열국의 쟁패에 뛰어들었던 이민족들
의 나라들이 한족으로 융합되는 과정을 무시할 수 없기에 나는 화하족과 한족은 구분되어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강한성당(强漢盛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강하고 번성했던 한나라와 당나라
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중국인들에게 한나라와 당나라는 자랑스러운 그 들의 역사이다. 한나
라는 정말 강했던 것 같다. 기나긴 전쟁이후 새롭게 한족으로 거듭난 그 들은 분명 시대의
강자였다. 한무제는 흉노를 정벌했으며 서역을 그 들의 수중에 넣었다. 한나라에게 멸망당해
서쪽으로 쫓기어 간 흉노는 훈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고 로마멸망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아마도 당시 지구상의 최강자는 한나라가 아니었나 싶다. 고조선이 멸망한 시기
도 한무제 때였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족(漢族)이라는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중간에 왕망이 신(新)을 건국해 14년간의 짧은 단절이 있었지만 한
나라는 전한과 후한을 거치며 400년 이상 존속하였다. 장구했던 한나라는 삼국지에도 등장
하는 황건적의 난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후의 이야기는 삼
국지를 읽어보셨다면 다들 잘 아시리라고 본다. 삼국지를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도 어지간한
내용은 다들 아실 것이다. 조조가 위(魏)나라를 건국하고 손권은 오(吳)나라를 건국한다. 그
리고 소설 삼국지의 영웅 유비는 촉한(蜀漢)을 건국한다. 비록 소설을 통해 유비의 촉한이
더 정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사학자들은 조조의 위가 중국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본다. 그러기에 조조의 위나라를 필두로 위진남북조가 있는 것이다. 촉한은 위나라에게 오나
라는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晉)에게 멸망당하고 삼국은 통일된다. 사마염(司馬炎)이 건국한
진(晉)나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팔왕(八王)의 난이라는 왕족간의 골육상쟁으로 큰 위기에
직면하게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오호난화(五胡亂華)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게 된다. 아래의 글은 신 승하가 지은 '중국사(상)' 244 페이지의 일부이다.
이처럼 흉노인 유연이 왕이라 칭한 다음부터 남조 송 문제 원가(元嘉) 16년(439)에 선
비족의 북위가 화북 지방을 통일하기까지 136년 동안을 '오호난화(五胡亂華)', '5호 16국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진의 중국 통일 기간이 불과 30여 년이어서 이를 '짧은 기간
의 중국 통일'이라고도 부르며, 뒤에 남쪽에서 부흥된 진과 구별하기 위하여 '서진(西
晉)', 부흥된 진을 '동진(東晉)'이라고 부른다.
오호 십육국의 오호 즉 다섯 오랑캐는 흉노족, 선비족, 갈족, 저족, 강족을 말한다. 길지 않
은 130여 년 동안 16국이 난립했기에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큰 흐름의 줄기는 다음과 같다.
다섯 오랑캐 즉 오호(五胡)중에서 처음으로 실권을 잡은 민족은 흉노족이었다. 304년 흉노족
유연(劉淵)이 한(漢)나라를 건립하였지만 아들 유총(劉聰)을 거쳐 손자 유찬(劉粲)때에 외척
근준의 반란으로 멸망하였다. 근준의 반란을 평정한 것은 유총의 사촌 동생 유요(劉曜)와 갈
족(?族) 석륵(石勒)이었다. 이후에 유요는 전조(前趙)를 세웠고 석륵은 후조(後趙)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둘은 곧 전장에서 맞붙었고 결국 석륵이 승리를 거둔다. 석륵의 후조는 석륵
의 조카 석호(石虎)가 그 뒤를 이으나 폭정을 일삼다 죽고 아들들은 황위를 다투다가 결국
석호의 양손자이자 한족이었던 염민( 閔)이 정권을 획득한다. 정권을 잡은 염민은 호족(胡
族)을 20여 만명이나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염민은 정권을 잡은 지 3년만에 모용 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에게 멸망당한다. 잠시 갈족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의 글은 류 징
청이 지은 '중국을 말한다 8권' 36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갈족〕
갈호(?胡)라고도 부른 갈족(?族)은 중국 고대 민족의 하나로 소월지(小月支)에서 왔으
며 주로 유목 생활을 했다. 서한 시대에는 흉노를 따라 몽고 초원을 전전하다가 남으로
이동했다. 위. 진시대에는 상당군(上黨郡)에서 한족과 함께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한족 지주들의 압박을 받았다.
갈족에 대한 또 다른 묘사이다. 류 징청이 지은 '중국을 말한다. 8권' 41 페이지에 나오는 글
이다.
염민은 변경에 있는 호인들까지 모두 죽이라는 영을 내렸는데, 그때 코가 크고 구레나
룻이 있는 사람은 갈인으로 여겨져 모두 목숨을 잃었다.
갈족은 흉노족의 일파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갈족에 대해서는 확답이 없는 것 같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중원에 들어온 흉노족들의 행동방식이었다.
아래의 글은 류 징청이 지은 '중국을 말한다. 8권' 38 페이지에 나오는 글이다.
〔호족의 최고 통치자-대선우〕
16국 시대 많은 정권들이 '호한분치'를 실시해 관직도 호한 2개 체계로 나뉘었다. 진나
라 이전부터 호족의 최고 통치자는 대선우를 자칭했는데, 대선우는 황제가 겸할 수도
있고 태자나 세자가 맡을 수도 있었다. 그 세력은 부왕(副王)이나 마찬가지다. 대선우의
권력 집행기구는 선우대(單于臺)이고, 대선우의 속관으로 좌우 현왕(賢王)이 있다. 이
좌우 현왕은 전조의 유요 때만 존재했고, 후에는 보상(補相)으로 대부분 좌보(左輔). 우
보(右輔) 혹은 좌상(左相). 우상(右相)을 두었다.
비록 중원에 들어왔지만 왕의 명칭은 과거 그 들이 사용하던 명칭을 다시 사용했다는 점에
서 전통을 지켜 나가려했던 흉노족들의 간절한 소망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선비족들 중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부족은 모용 선비였다. 337년 선비족 모용황이 건
국한 전연은 중원의 난을 피해온 한족 유민을 받아들이고 한족의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시킴
으로써 강국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전연도 결국 370년 저족( 族) 부건(符建)이 세운 전
진(前秦)에게 멸망당한다. 전진은 전연, 수지, 전량, 대국 등을 제압하고 376년 북방을 통일
한다. 전진은 부견(符堅)때 크게 번성하였다. 명재상 왕맹(王猛)의 도움으로 부국강병은 물
론 북방까지 통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견의 지나친 과욕에서 비롯된 건업에서 다시 태어
난 동진(東晉)과의 무리한 전쟁은 결국 전진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전진(前秦)과 동진(東晉)
의 이 전쟁을 비수전( 水戰)이라고 한다. 전진의 멸망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북방 지역은
또 다시 여러 개의 이민족 국가들이 난립하게 된다. 이런 혼란을 평정하고 재차 북방을 통
일한 나라는 탁발 선비 즉 타브가치가 세운 북위(北魏)였다. 북위는 동진을 대체한 유유(劉
裕)의 송(宋)과 더불어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나의 역사인식이 너무 지나치게 이민족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라
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충분히 이해를 한다. 나 또한 중국역사의 주인공이 한족
(漢族)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1%의 의심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직도 과거 중
화주의에 입각한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있다. 과거 수세기 동안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던 성리학의 그림자가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특히 역사인식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
다. 삼국지의 내용은 훤히 꿰뚫고 있으면서도 당시 고구려와 한반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끔직한 일이다. 비록 삼국지가 훌륭한 문학소설임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지만 적어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를 끝까지 지키려는 유비가 영웅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보며 마치 자신이 한족인 것처럼 감정이입하여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꽤나 민망한
일이다. 소설을 소설로만 보지 못하는 내가 속 좁아 보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역사 인식은 필요하다고 본다. 중국에게 오랑캐는 우리
에게도 오랑캐였다. 몽골의 침략과 병자호란을 겪은 우리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조차 민족의 융합으로 보는 위진남북조 시대를 오랑캐의 변란으로만 생각한다면 다소
문제가 있지 않을까? 중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다소 과장되게 부풀리고 자랑스러워한다는 것
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본다. 단지 그 것이 주변국에 피해가 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어
느 정도의 역사 부풀리기는 어느 나라에나 조금씩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중국의 자
국역사 인식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 과거 한족중심의 역사관에서 배척되고 무시되어 왔던 이민족 오랑캐
에 대해서 나름 관심을 가지고 서술해 보았다. 내가 서술한 부분들은 중국 역사의 극히 일
부분 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국 역사의 일부임도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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