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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주필산 전투의 미스테리 1
글쓴이 : 타메를랑 번호 : 1675조회수 : 2622006.07.17 15:16 사용자 PC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스크립트를 차단했습니다. 원본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백암성을 점령한 당군은 더 이상 동쪽으로 진군하지 못하자, 요동성으로 옮겨 수일간 전열을 정비하고 작전 회의를 했고, 안시성으로 공격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요동도행군 제 1군인 장사귀가 이끄는 선발대가 안시성을 공격하러 먼저 출발했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즉시 성에서 나와 적의 낭장 유군앙의 부대를 포위해 거의 전멸을 시킬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때 당나라에서 아직 무명이었던 설인귀가 말을 몰고 나와 고구려 장수 한 명을 죽였다. 그러자 고구려군이 와해되어 당군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후 당군은 한동안 안시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안시성이 공격당하자, 연개소문은 대군을 징발해 지원군을 보냈다. 지원군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한편 당의 주력군은 6월 11일 요동성을 출발해 20일 안시성 주변에 도착했다.
무려 9일이나 걸린 당군의 행군 속도는 그들이 안시성에서 요동성으로 퇴각할 때 걸린 시간인 2일과 비교할 때 대단히 느렸다. 안시성 북쪽 교외에 나타난 당군이 진지를 구축한 곳은 작은 구릉이나 낮은 산으로 추정되는 주필산으로 이세민이 이곳에 머물러다는 연유로 이름 붙여졌다.
6월 21일, 고구려군은 안시성 외각에서 전투를 펼쳤다. 이 전투를 흔히 주필산 전투라고 하며, 신성, 건안성 전투와 함께 1차 고당 전쟁에서 3대 전투라고 불리고 있다.
주필산에서 당군의 활동은 크게 6월 21일부터 6월 23일에 걸친 전투 시기와 안시성 공략에 적극 나서기 이전까지의 소강상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3일간의 전투 상황과 그 처리 과정에만 집중되어 이후 전쟁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먼저 3일간의 전투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대군이 부딪친 이번 전투에서 양국은 서로 선호하는 전략이 달랐다. 고구려는 지구전을, 당군은 속전속결을 선호했다. 따라서 당군은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유인하는 전략을 펼쳤다. 좌위대장군 아사나사이가 이끄는 1천 명의 돌궐 기병들이 선제 공격을 해왔다.
적 기병의 공격을 받자 고연수는 궁병대를 앞세워 적을 많이 죽였다. 고연수는 늙은 대로 고정의가 지시한 지구전 전술을 무시하고 당군은 상대하기 쉽다고 판단해 30리를 진격해 안시성에서 동남쪽으로 8리 떨어진 산기슭에다 진을 쳤다.
양국이 근접한 거리에 진을 치게 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신당서 고려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세민이 6월 21일 밤, 여러 장수들을 불러 이세적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1만 5천명으로 서쪽 산 고개에 진을 쳐서 고구려군과 대적하게 하고, 장손무기가 우진달로 하여금 정예병 1만으로 고구려의 후면 협곡으로 나가게 지시했다.
이세민은 기병 4천 명을 이끌고 깃발을 눕히고 고구려 진영의 북쪽 산 위에 올라갔고, 북과 나팔 소리가 들리면 돌격하도록 했다.
22일 고구려군은 이세적의 군대가 적다고 판단해 바로 전투를 시작했다. 고연수는 이미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인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뒤쪽에서 당나라 장손무기의 군대가 공격해 왔다. 고각 소리가 울리면서 이세민의 군대를 비롯해서 사방에서 적군이 고구려군을 협공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고구려군이 병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했으나, 포위된 상태에서 협공을 당하자, 군사들이 허둥댔다. 장창을 든 당군의 공격과 기병대에 의한 후미 공격, 산에서 내려오며 달려드는 당군의 공격 앞에 고구려군 1만 명이 희생되었다. 고구려군의 참패였다.
고연수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산을 등지고 굳게 지켰는데, 다시금 장손무기와 이세적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작은 강을 건너는 다리가 당군에 의해 철거되어 퇴로마저 차단당한 채 고구려군은 위기에 몰렸다. 23일 고연수는 고혜진과 함께 당군에 항복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항복한 고구려군을 처리하는 당군의 대응이 너무나 이상하다. 이세민은 욕살(고연수와 고혜진)이하 추장 3,500명을 가려내 군직을 주고 당나라 내지로 옮기고, 말갈인 3,300명은 모두 생매장시키고, 나머지는 평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얼마나 죽었으며, 얼마의 병사가 항복했는지는 기록마다 너무나 다르다.
이 가운데 [구당서]등에 사망자가 1만 명인데, 포로가 15만 6,800명이라는 기록은 여러모로 의심이 생긴다. 먼저 당군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군 가운데 실제 그들이 처리한 병사는 6,800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15만 명은 모두 평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인데, 당군은 안시성 공격에 계속 실패하자 고구려 내지로 공격할 것을 구상하다가 건안성과 신성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군 10만 명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계획을 포기한다.
고구려군 10만도 두려웠던 당군이 15만이나 되는 고구려군 포로를 그냥 놓아준다니? 그들이 다시 무기를 들고 당군을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려고 놓아준단 말인가? 이세민은 그런 것도 몰랐을까?
그럼에도 이런 기록이 남은 것은 당군의 승전을 지나치게 부풀린 탓이다. 실제로는 포로 6,800명에 고구려 지원군 15만 명을 단순히 합산한 수치를 모두 항복해 왔다고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사상자 1만 명에 포로가 15만 6,800명이라면 그것은 고구려군이 완전 궤멸되어 재기 불능한 상태임을 뜻한다. 또 전군이 포로라는 것은 지휘부 전체가 적과 내통했을 경우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주필산 전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항복한 고구려군이 3만 6,800명이라고 기록한 [신당서]등의 기록은 어떤가? 이들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로 당군은 항복한 3만 명의 고구려군을 다시 돌려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또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3만 명이라고 해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신당서] <고려전>등에 기록된 고연수군을 포위한 당군의 숫자가 3만 명이었다. 그런 만큼 당군이 이렇게 많은 고구려군을 순순히 풀어줄 수는 없다.
3만의 고구려군 역시 처음부터 당군에 항복하지 않았거나, 당군에게 포위되어 고연수가 항복을 선언했다고 해도, 이들이 자발적으로 탈출했거나 다른 고구려군의 구원 작전으로 구출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결국 6월 21~23일 사이에 당군의 유인 포위섬멸 작전에 당한 고구려군의 실질적인 병력 손실은 최대 3만 6,800명에 불과한 셈이다. 물론 고구려가 기선을 제압당한 셈이므로, 사기의 저하 등 유무형의 손실이 이보다 클 수는 있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전멸당한 것은 아니다.
만약 고구려군이 전멸당했다면 당군은 그 여세를 몰아 안시성 공격에 나서거나, 아니면 천산산맥을 넘어 오골성으로 진격했어야 한다. 그러나 당군은 6월 23일 고연수의 항복을 받은 후, 7월 5일 안시성 동쪽 언덕으로 부대를 이동했다는 것 외에 특별한 행동은 없었다. 이 기간을 단순히 당군의 재정비 기간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나라 좌무위장군 왕군악의 죽음이다. 왕군악은 고연수가 항복했던 6월 23일에 고구려군과 맞서 선봉에 나섰다가 진영이 무너지면서 위기에 몰려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왕군악은 죽은 후 좌위대장군, 유주도독, 형국공에 추증되고, 이세민의 총애를 받아 그의 무덤 주위에 묻힌 고위 장군이었다.
왕군악의 부대를 격파한 고구려군은 포위당해 항복한 고연수의 부대가 아니다. 생각해 보라, 항복한 적장이 아군의 주요 장수를 죽이고 그 부대와 싸워 이길 수 있었겠는가? 만약 왕군악을 죽인 고구려군의 지휘관이 항복한 고연수였다면 그는 당군에게 죽임을 당했을 터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왕군악의 부대를 격파한 부대는 고연수의 고구려군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고구려 지원군의 본진이었던 것이다. 당군에 의해 풀려났다고 기록된 3만 명의 고구려군은 실상 고구려 지원군 본진의 구출작전에 의해 탈출했다고 볼 수 있다.
<바다출판사>에서 나온 [새로 쓰는 연개소문 전]에서 발췌
[한국사] 주필산 전투의 미스테리 2
글쓴이 : 타메를랑 번호 : 1676조회수 : 4432006.07.17 15:18 사용자 PC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스크립트를 차단했습니다. 원본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연수가 고구려 지원군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다. 흔히 고구려 지원군의 지휘자를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으로 보고 있지만, 그들이 15만 대군의 총 지휘자일 수는 없다.
중국측 사서인 [책부원귀]에서는 고연수를 위두대형 이대부 후부군주로, 고혜진을 대형 전부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위두대형은 고구려 관등 중에 제 5위에 해당하며, 대형은 7위에 해당한다. 욕살은 지방장관으로 대개 위두대형이 맡았다.
현재 욕살로 확인되는 것은 책성과 오골성에 욕살이 있었음이 확인되는 데, 오골성의 욕살은 전시에 최대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같은 욕살인 고연수가 아무리 비상시에 특명을 받았다고 해도, 고구려군 전체의 절반 내지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15만이라는 대병력을 지휘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이를 지휘하려면 위두대형보다 더 높은 태대사자, 주부, 태대형, 대대로가 직접 나서야 했을 것이다.
당군의 주요 지휘관인 장손무기는 정 1품의 재상이며, 이세적 역시 오늘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였다. 고구려에서도 대군을 동원한 만큼 당나라 장손무기 등과 맞먹은 정치적 비중과 관직을 가진 인물이 총사령관으로 나섰다고 봐야 한다.
이세민이 말했듯이 고구려도 주필산에서 당군을 막기 위해 국력을 기울여 전쟁에 임했다. 그런 만큼 15만 대군의 총수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연개소문이 신임할 수 있는 2인자 내지는 최상위급 지휘관이 출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15만 고구려군을 지휘한 인물은 고연수가 아니라 경험 많은 대로 고정의였다.
고정의는 [신당서] <고려전>에는 대대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대로라면 고구려 최고의 관직 겸 관등이다. 당시 대대로는 고구려 최고 벼슬이기도 하지만, 연개소문의 최측근이 임명되는 자리였다. 물론 고정의가 대대로가 아닌 대로라고 하더라도, 대로는 고구려 국정을 총괄하는 회의체인 대로회의 구성원으로 최하 위두대형 이상이다.
경험 많은 대로이며, 고연수에게 계책을 세워준 것으로 볼 때 고연수보다 고정의가 상위 관직의 인물임에 분명하다. 또한 고정의는 안시성 주변에 와서 당군의 상황을 살핀 상태에서 고연수에게 작전을 일어주었으므로, 15만 대군과 함께 중앙에서 파견된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15만 고구려군의 총수는 바로 고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욕살인 고연수와 고혜진은 선봉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선봉장이기에 당군의 선봉부대와 싸웠던 것이고, 하룻밤에 30여 리를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만 대군이 모두 30여 리를 진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장비의 이동, 후속 보급로의 확보 등의 이유로 대군의 이동은 선봉대보다 느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구려 지원군의 본진은 안시성 주변 40리 떨어진 곳에서 조금은 천천히 당군과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왔다가, 선봉부대가 당군에게 포위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23일 당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주필산 전투는 3일 만에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필산 전투에서 활약한 당나라 장수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신, 구당서] <양홍례열전>에는 당시 병부시랑이자 군대의 기밀을 책임지는 1급 군사참모였던 양홍례가 주필산 전투에서 기병과 보병 24개 군을 이끌고 고구려군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장손무기, 이세적과는 다른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또한 전군대총관 유홍기도 주필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는데, 대총관이라면 이세적과 비견되는 장군인 만큼, 고구려 선봉부대를 격파한 전투가 아닌 고구려 주력군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양홍례, 유홍기의 활약은 주필산 전투가 단 1회의 전투로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것은 고구려군이 고연수가 항복했다고 해서 붕괴되거나 궤멸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당문]에 따르면 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은 이세적으로 하여금 장사귀를 비롯한 14명의 행군총관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의 서남면을 맡게 하고, 장손무기에게는 26총관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아가 고구려군의 배후를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북쪽 산에 올라가 전황을 살폈다고 한다.
장손무기가 이세적보다 더 상위의 관등을 가졌고, 이세민에 버금가는 권력자였음을 감안하면, 이세적이 1만 5천, 장손무기가 1만 명을 거느렸다는 기록보다는 장손무기가 이세적의 두 배에 해당하는 총관을 거느렸다는 [전당문]의 기록이 사실에 더 부합하는 것이다.
장손무기와 이세적이 거느린 40명의 행군총관의 숫자라든가, 양홍례가 지휘한 24개 군의 병력을 고려한다면,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당군은 대략 30만 명에 이른다. 물론 당군의 전체 병력은 이보다 많다. 그런데 이러한 당의 대군이 안시성 북쪽에 도착해 6월 21~23일까지 고구려군과 대결을 한 이후, 7월 5일 안시성 동쪽 고개로 이동할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유홍기, 양홍례 등이 전투를 한 날짜도 기록에 없다. 때문에 7월 내내 아무런 전투 기록도 없다. 당군은 주필산 일대에 머물면서 건안성 공격 등 다른 대안을 찾기도 하지만, 결국 안시성 공격 외에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8월 10일 안시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면서 뒤늦게 안시성 공격에 나서게 된다.
당군은 1차 주필산 전투 이후 무려 50일 동안이나 주필산 일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이 진군하지 못했던 것은 고구려 지원군 본진이 당군을 이곳에 몰아넣고 포위공세를 펼쳤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주필산 부근에서 펼쳐진 고구려군과 당군의 지루한 대결을 2차 주필산 전투라고 할 수 있다. 2차 주필산 전투는 고구려군이 원하던 작전, 즉 고정의가 말한 지구전이며, 연개소문이 의도했던 작전의 결과였다.
고연수는 적의 유인작전에 말려 패배한 것이지, 고구려군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고구려군의 기본 작전을 고연수가 펼친 평원대회전이라고 본 일부 견해도 있지만,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견해이다.
기록의 이면을 파헤치려는 노력이 없이 단지 몇몇 알려진 사료에 의해서만 사실을 재구성하다보니, 전황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내려진 성급한 결론일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연개소문이 평원대회전 전술을 새로 도입하고자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고연수도 연개소문의 지시를 받고 당군과 싸웠다가 대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의 축조 주연이 아니며, 단지 마무리에만 참여했을 뿐이다.
또한 평원대회전 전술과 천리장성 축조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고연수군이 당군과 싸운 것은 적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든 것일 뿐, 연개소문으로부터 직접 작전지시를 받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고연수는 고정의의 작전지시를 받는 자로, 15만 대군의 총사령관이 아니다. 고연수가 포로로 잡혔다고 해서, 고구려군이 와해된 것은 아니다.
주필산 이후의 전투상황도 연개소문은 청야수성 작전, 첩보전, 보급로 차단작전, 적을 사지에 몰아넣으며 지구전을 펼쳤지, 무모하게 숫적으로 훨씬 우세인 당군을 상대로 정면대결을 펼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연개소문은 주필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주필산 전투 당시 고구려군의 지휘관은 고정의였다. 혹자들은 연개소문이 군사적으로 전혀 무능하다고 비난하지만,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662년 2월, 임아상 휘하의 당군을 격파하고 사수 전투에서 방효태가 이끌던 수만의 당군을 전멸시키고 대승을 거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주필산 전투에서는 그토록 무능하고 어리석었던 연개소문이 갑자기 병법을 깨우쳐 천재가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주필산 전투 당시의 연개소문과 사수 전투 당시의 연개소문은 서로 다른 사람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당군은 7월 13일 전사자의 시체에 표식을 하도록 하고, 이들을 일부 군대가 먼저 퇴각할 때 함께 가지고 가 귀환하도록 조치했다. 이것은 당군이 주필산에 머물 때 전투가 많이 생겨서 전사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군의 포위 공세가 심했음을 뜻한다.
당군은 1차 주필산 전투 이후 고구려의 후황성과 은성 두 곳을 함락시켰다. 기록에는 성 안에 있는 고구려군이 스스로 빠져 달아났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투를 통해 함락시켰을 것이다. 후황성과 은성이 천산산맥을 넘는 길목에 위치한 성이라고 할지라도, 당군이 이를 토대로 고구려 내지로 진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군이 안시성을 피해 천산산맥을 넘어 수암쪽으로 진군했을 수도 있지만, 수암 지역에는 노성구산성 등 둘레가 2~3킬로미터 남짓한 약 20개의 고구려 성들이 있다.
도리어 당군은 곳곳에 포진한 고구려 성들에 둘러싸여 새로운 활로를 뚫지 못하고, 요동성에서 안시성에 이르는 좁은 공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주필산 전투를 당군이 고구려에서 거둔 대표적인 승리라고 하지만, 고구려의 장군 2명을 포로로 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당군은 시간과 군량을 소모하면서도 고구려군을 격파시키지 못했고, 전략적 목표인 고구려 내지로 진격하지도 못했다.
당군은 분명히 전략적으로 실패했다. 반면 고구려군은 당군을 포위 압박해 적의 힘을 소모시켰으며, 전장을 요동으로 한정시키려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바다출판사>에서 나온 [새로 쓰는 연개소문 전]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