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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포로의 수가 증가하고 그들을 수용·관리하는 문제가 어려워질 조짐이 보였을 때, 유엔군사령부는 그 대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포로를 분산시켜야 할 필요성과 공산포로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된 대책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지고 육지와도 격리된 섬으로 포로를 옮겨 놓는 방법이었다. 이때 유엔군사령부가 수용소 후보지로 생각한 섬이 제주도였다. 유엔군사령관은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장군에게 부산의 포로수용소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고려해 보도록 지시하였는데, 리지웨이장군은 제주도가 포로수용소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표시하였다. |
▲ 이송되어 막사 배치를 위하여 대기중인 포로들,위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죽도이다. |
제8군사령관이 제주도를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고 했던 이유는 ①제주도가 이미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되어 있다는 점, ②사용할 물이 부족하다는 점, ③오랫동안 공산주의 세력이 강했다는 점, ④피난한 한국 정부가 이 섬을 임시정부의 이전 장소로서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이었다. 제주도에는 25만명의 주민이 있었는데, 여기에 포로와 수용소 경비 및 운영에 필요한 병력 등을 더하게 되면 그 인구가 2배로 늘어나게 될 것이었다. 이 섬이 그런 인구 증가를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비와 시간이 소요되리라 판단되었다.그러나 1950년 말에 중공군의 반격을 받아 사태가 극도로 불리해지면서 아군이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해서 후퇴하게 되자, 이번에는 리지웨이장군이 태도를 바꾸어 제주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1951년 1월 11일의 일이었다. 제8군사령관이 찬성함으로써 유엔군사령부는 제주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할 권한을 그에게 부여했다. 그런데 포로 수용소의 위치를 선정하는 문제가 거의 매듭 지워질 순간에 거제도가 포로수용소 후보지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결국 이 섬이 포로수용소 이전 장소로 최종 결정되었다. 거제도가 선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섬이라는 조건과 육지로부터의 이동 거리 등이 고려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적합 지역으로 판단한 이유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2년 6월 9일에 열린 미 하원의 청문회이다. 이 청문회는 포로수용소장 돗드장군의 피랍사건과 관련하여 거제도 포로수용문제 전반에 걸친 사실 확인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육군성장관(Secretary of the Army) 페이스(Hon. Frank Pace, Jr.)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Gen. J. Lawton Collins, Chief of Staff, United States Army)이였다.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장소로 선택한 주요 이유라고 두 사람이 밝힌 내용은 ①(섬이기 때문에) 포로 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될 것이다. ②급수가 용이하다. ③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었다.특히 급수문제는 중요한 요소로서 고려되었는데, 근해에 있는 여러 섬 중에서 거제도 외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 공급이 가능한 섬을 찾기 어려웠다. 제주도에는 이미 많은 피란민이 들어차 있는데다가 그들이 사용할 물도 충분치 않아서 우물을 더 파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
거제도가 포로수용소 설치 장소로 확정되자 1951년 초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몇 개의 마을이 수용소 부지로 선정되고, 부산의 포로를 이곳으로 이동시키는 "알바니작전"이 계획되었다. 계획 수립 과정에서 처음에 구상된 시설은 6만명을 수용할 규모였으나, 나중에는 22만명의 포로를 수용하는 규모로 계획이 확대되었다.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던 지역은 섬의 중앙에 해당하는 일운면 고현리(현 거제시 신현읍)를 중심으로 용산, 장평, 문동, 양정, 수월, 제산리와 연초면의 임전, 송정리(포로 공동묘지 지역), 그리고 동부면의 저구리 일대였다. 전쟁 후반에 포로 분산 작전이 실시되었을 때는 이 섬의 남단 해상에 있는 봉암도, 용초도에도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수용소가 들어선 지역은 대부분이 농토와 임야로서 정부가 이를 징발해서 사용하였다. 거제도는 포로를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수용소 시설 공사면에서는 어려운 점이 많은 곳이었다. 당시 미처 개발이 되지 않고 야산이 많았던 이 섬은 평지라고 할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평평한 땅이라고는 경작지로서 대부분 논이었으므로, 물을 빼고 말려서 흙을 채워 넣어야 했다. 사용할 수 있는 도로도 거의 없었으므로, 도보길 또는 우마차 길을 확장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만 했다. 해상으로 포로와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서 선박이 접근할 수 있는 정박 공간과 시설도 새로이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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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를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부산에 있던 포로가 이곳으로 수송되기 시작하여서, 2월 말에는 이미 5만여 명의 포로가 옮겨졌다. 3월 1일에는 주요 본부 및 부대가 거제도로 이동되었으며, 나머지 인원의 이동도 계속되어 3월 말까지 거제도로 이송된 포로의 수는 모두 약 10만명에 이르렀다. 이 기간동안에도 원주, 영등포, 수원, 제천, 대전, 하양에 있는 포로수집소에서는 계속해서 부산으로 포로를 후송하였으며, 이 인원은 다시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그때까지 거제도로 수송되는 포로는 일일 약 2천명 정도였다. 그리하여 5월 말에는 11만 5천여 명이 이미 거제도로 수송되었고, 6월 말에는 포로 이송 작업이 거의 마무리가 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수용 인원수가 14만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결국 부산에는 거제리 병원수용소만 남고 나머지 전 포로가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물론 그 후에도 전방에서 수집된 포로가 부산으로 모이고, 그 인원이 다시 거제도로 이송되는 과정은 계속되었다. 포로수송작전에 있어서 이런 속도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조급함 때문에 역대의 포로수용소장들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될 소지가 마련된 셈이었다. 갑자기 증가된 포로는 유엔군측이 조직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또한 수용소는 그 수용 가능량에 비추어 이미 만원이 되어버렸다.부산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의 대부분이 거제도로 옮겨지게 되자, 부산의 "제1포로수용소"라는 명칭도 거제도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로써 부산의 포로수용소는 보조적인 위치로 바뀌게 된 반면,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명실상부한 최대의 포로수용소가 되었다. 포로수용소가 이전된 후로 계속되는 포로의 이송을 통해 거제도에는, 통계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17만명에 이르는 전쟁포로들이 모이게 되었으며, 포로를 경비하는 부대병력과 행정인원 등이 합쳐져서, 자체 인구 약 10만명의 세배 이상이나 되는 사람으로 섬이 포화 상태가 된듯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음 해인 1952년 포로의 분리·분산작전에 의해 이곳에 있던 대부분의 포로들을 다른 여러 수용소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남짓 동안 거제도는 포로수용소의 주무대가 되었다. 부산의 수용소가 거제도로 이동함에 따라 한국군 포로 경비대대도 같이 이동했다. 한국군 당국에서는 거제도의 3개 경비대대(31, 32, 33대대)를 통합하기위해 포로경비연대를 창설하고 그 본부를 거제군 고현리의 제32경비대대 내에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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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첫해 동안 유엔군은 병참상의 문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에 전쟁 초반부터 수용능력을 넘는 포로를 보호 관리해야 하는 일은 대단히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주어야 하는, 전적으로 의존적인 포로 집단의 존재는 그렇잖아도 압박을 받고 있는 유엔군의 병참문제에 더 큰 압박 요소가 되었다. 유엔군의 병참 물자의 조달, 보급은 미군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곧 미군의 고충이 되었던 것이다.유엔군 산하의 포로수용소를 관장하고 있던 미군 당국은 제네바협약을 최대한 준수하려 하였으며, 또한 국제적십자사 등의 확인을 받고 있었으므로 포로들의 관리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1953년 2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매일 94톤의 쌀 및 다른 곡물이 소비되고 있었다. 세계적인 생산 감소에 의해서 쌀 정량이 감소되어도 쌀 대신에 다른 곡물이 보충되어서 식량의 전체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
여기에 추가하여 많은 양의 물고기, 소고기국, 돼지국, 소금에 절인 쇠고기, 육고기와 야채류, 마른 계란이 지급되었다.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서 포로들 중에서 요리사를 뽑아서 썼다. 그들은 또한 신선한 채소와 깡통에 든 채소, 말린 콩과 완두콩, 후추, 간장, 소금, 1일 10개피의 일제 담배가 든 레이션을 지급받았다. 거제도 수용소 안에서는 공산 포로들에게 의복이나 일체의 공급품으로는 미제(美製)가 공급되었다. 먹는 것도 한국군의 수준에 따랐으나, 미제 레이션 등이 추가 지급되어 한국군보다 오히려 포로들이 더 잘 먹는다는 불평을 들었다. '자유'라는 담배가 특별 제조되어 이들에게 공급되었는데 국군용 '화랑' 담배보다 맛이나 질이 훨씬 좋았다. 대다수의 북한군 및 중공군 포로들은 일상 생활에서 그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훌륭한 식사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포로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은, 이렇게 어렵사리 수용소에서 미국 음식을 먹여서 원기를 회복시켜 놓은 포로들이 연출하는 기상천외한 장면들을 목격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될 줄 어렴풋이 알고도 달리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속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유엔군사령부는 포로 처리의 방침을 그들의 노동력 활용과 심리전에 두었다. 노동이 가능한 포로들은 여러 종류의 작업에 투입되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자기들이 쓸 물자의 운반과 도로 보수, 환경 작업 등 경노동에 속했다. 그 외에 수용소 내의 고정작업으로 환자 간호, 취사, 목공일, 청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일과 속에 교양 강좌와 1인 1기의 실기 교육이 포함되어 희망에 따라 참석하도록 하였다. 장교, 환자 그리고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작업에서 제외되었다.포로들 중에서 숙련되었거나 또는 반쯤 숙련된 기술자들은 제36공병단 감독하에 수용소 내에서 자신들의 생활 여건을 좋게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포로수용소 내에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물건들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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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교육훈련인 양복장이 교육을 받고 있는 포로 | |
그 내용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쟁 발발 과정, 유엔의 목적·기능·실적, 전체주의에 대비한 민주주의의 원리·이상·관행, 자유 세계 여러나라의 발전상, 한국과 중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제 등이었다. 그 저변에는 자유 체제의 우월성과 전체주의의 문제점이 제시되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교육 이수 후의 평가에서도 반공적인 요소는 여실히 드러났다. 교육의 분야에는 오리엔테이션 외에도 문자해득 수업, 직업 훈련, 보건 위생, 및 여가 활동 등이 있었다. 문자해득 수업은 포로의 상당수가 문맹(文盲)인 까닭에 다른 교육의 목표를 위해서도 강조되었는데, 포로들도 이를 유용하게 여겨서 수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교육 효과도 가장 커서 오랫동안 실시되었다. 직업 훈련으로는 대장장이, 목수, 이발사, 구두수선, 양복장이 등의 기술교육이 이루어졌다. 1952년 초부터는 농업 교육이 실시되어 2만명 이상이 등록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라디오 방송과 영화는 기본적으로 공식 오리엔테이션, 문자해득 수업, 직업 훈련, 보건 위생, 및 여가 활동 등의 다른 분야 교육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 ||
▲ 대장장이 교육훈련중인 포로, 이곳은 폭동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제조하기도 하였다 |
▲ 민간정보 교육국 주관으로 실시되는 문맹자를 제외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수업광경 | |
영화는 매월 20∼30편씩 상영되어 4∼5만명이 관람했으므로 그 효과는 상당하였다. 라디오 방송은 영화보다 더 많은 사람, 특히 문자해독력이 낮은 사람에게도 전달이 용이하여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초기에 단지 뉴스와 음악이 방송되었지만, 점차 방송수신 장비를 갖추어 1951년 말에는 주당 21시간의 한국어 방송과 7시간의 중국어 방송이 가능해졌다. 포로의 분산 작전을 전후하여 교육의 내용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났다. 1952년 3월 말 모든 공개적인 반공적 선전 교재와 교육 과정은 폐지되었다. 교재와 그 내용이 소위 "긍정적 접근" 방법으로 바뀌었다. 포로들에게 민주 사회의 삶의 가치는 교육되었지만, 공산주의의 오류와 약점에 대한 언급은 피하도록 했다.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송환거부포로들에 대한 교육은 그들의 자립 능력을 키우는 직업훈련과 석방후 생활에 적응할 능력을 키우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초·중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고, 여가 시간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신체 단련과 여가 활동, 지적 활동을 하게 하였다. 또한 포로에게 민주적 생활 방식에 익숙케 하고, 유엔과 미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의 태도를 갖도록 교육에 친민주적·반공적 내용을 포함시켰다. 이런 교육에 대해서 포로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수용소 당국은 잠재적으로 이념적 갈등을 내포한 포로들에게 공산측에 대한 심리전의 일환으로서 민주주의를 인식시키려는 뚜렷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많은 포로들은 교육 프로그램이 그들의 마음을 친공에서 반공으로 바꾸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특히 오리엔테이션 교육은 좌익포로들의 사상을 약화시키면서, 아직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하지 못하고 중간적인 입장에 있는 포로들에게 공산측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반공 진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데에 기여하였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유엔군측의 교육에 대한 포로들의 저항과 공산군측의 대응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들의 저항에 의해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이 무시되거나 교육이 실시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수업이나 시험에서 자기의 생각을 밝히지 않거나 수업 내용을 비판하는 것으로 저항을 표시하였다. 또 라디오 방송용 유선과 스피커 장비를 파괴하거나 숨기기도 했다. 이러한 좌익포로의 저항에는 '해방동맹'이라는 조선노동당 거제지부의 뒷받침이 있었다. 포로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 요인으로 포로들의 장래 지위가 확정되지 않아서 수용소 내의 동요가 늘 존재한 것이었다. 좌익포로들로서는 교육에 공개적으로 협조하거나 반공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본국으로 송환된 후에 자신들의 입장에 치명적임을 알고 있었다. | ||
▲ 방송 요원들이 방송 내용을 협의하고 있다. 주당 한국어 방송을 21시간, 중국어 방송을 7시간 정도 하였다. | ||
좌익포로들의 동요와 방해활동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측은 친공막사에서 질서를 회복하는데는 교육 프로그램의 순조로운 재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따라서 수용소 당국은 교육의 진행을 위해서 좌익포로를 다른 막사로 전출시켜 교육에 대한 방해 세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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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있던 포로가 거제도로 옮겨옴에 따라서 포로문제도 자연히 거제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개월간은 비교적 평온했다. 이 기간은 수용소 부지 정리 및 시설의 확장, 포로 배치작업 등으로 분주한 때였다. 가끔 한국 경비병과 북한 포로 사이에 사소한 시비로 인해서 충돌이 발생하기는 했으나 큰 피해는 없었다. 이 시기에 있었던 싸움이나 저항은 집단적, 사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 감정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대부분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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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사내에서 폭동을 주도한 자가 경비병에게 붙잡혀 나오고 있다. |
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일까지 고려하지는 못했다. 이때문에 포로들의 저항 활동이 격렬해져도 그것을 저지·규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었다. 이렇게 볼 때 거제도는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의 표적이 될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로가 소요나 폭동을 일으키게 되면 제일 먼저 곤욕을 치르는 것은 한국군 경비병들이었다. 이들은 소수의 인원으로써 엄청나게 많은 포로들을 경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어서 사실상 포로 관리에 대한 실권이 없다는 것도 행동의 제약 요건이 되었다.경비 근무중에 한국군 경비병과 포로가 충돌해도 미군측에서는 가능하면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지, 아니면 휴전회담이 곧 시작되고 멀지 않아 전쟁이 끝날 것이므로 가만이 두면 문제가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 포로수용소장들이 심각한 수난을 겪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6·25전쟁에서 포로수용소장직을 맡은 사람들의 심리가 위축되어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
거제도를 소요와 폭동으로 얼룩지게 했던 포로들의 단체 저항 움직임은 부산으로부터 포로를 수송하던 마지막 단계인 1951년 6월부터 서서히 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포로들이 새로운 수용소에 도착한 이 시기에 북한군 장교 포로들이 들어 있는 제7구역의 제72소구역에서 제일 먼저 문제가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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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거제도에서 포로들이 일으킨 저항운동이 단체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된 첫 번째 사례였다. 하지만 그 당시로는 이것이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의 서곡이 될 것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그런데 바로 그 다음달인 7월에 휴전회담이 열리자 수용소 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포로송환이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많은 포로들이 북한 또는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는 뜻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포로들 간에 친공과 반공의 편갈림이 생기면서 양자 간의 마찰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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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수용소 근처의 민간인이나 피란민을 돈으로 매수하여 외부의 게릴라를 통해 북한과 연락을 취하고 전언(傳言)이나 투석(投石), 시호통신(視互通信)등으로 타지역과 연락하여 암암리에 조직을 만들고 정보를 교환하였다. 또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도 시비거리나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서 저항의 빌미로 만들었다. 이처럼 친공포로의 조직이 위협적인 세력으로 형성되자 한편으로 반공포로들도 단결하게 됨으로써 양자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반공계 포로는 조직면에서 친공계 포로들을 뒤따라가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친공포로의 활동이 처음부터 의도적이고 계획적이었던 반면, 반공포로의 활동은 자기 보호를 위한 자구책의 방편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이렇게 해서 수용소 내부는 소요와 난투극의 마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밤에는 경비병의 순찰이 없는 것을 기회로 해서 살인, 구타 행위가 빈발하여 희생자가 속출했으나 수용소 당국은 모른 척하였다. 사법권이 없는 수용소장으로서는 증거가 분명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1951년 후기에 유엔군사령부가 처음으로 북한 포로 첩보원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은 포로수용소 안에서 소동과 폭동을 선동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으며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경비 태세는 어느 정도 좋아졌으나 구역 내에서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투쟁은 계속 가열되기만 했다. 어느 한 편이 상대에게 전면 항복하지 않는 한 구역 내의 패권 싸움, 예를 들면 구타, 사형(私刑), 인민재판과 이것들을 제지하거나 보복하려고 하는 폭력 행위 등은 그칠 수가 없었다. 급기야 1951년 12월 18일에는 투석전이 일어나서 14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흥분된 분위기는 포로심사 문제가 대두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
포로들이 거제도로 이송된 후 포로수용소가 제자리를 잡은 51년 4월부터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소위 [해방동맹] (일명 [용광로])이라는 비밀 조직체를 만들어 그 본부를 제77수용소에다 두고 각 수용소 단위로 지부를 두었다. 그리고 친공포로들의 모든 행동은 해방동맹의 명령과 지시에 의해 좌우되었다. 해방동맹의 내부 조직으로는 군사행동부, 정치보위부, 내무부, 민청행동결사대, 당간부학교, 인민재판소 등을 편성하여 마치 포로로 구성된 소정부를 형성한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런 해방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움직인 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해방동맹을 조직하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자는 북한 공산군 전사 출신이라고 알려진 홍철인데 그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배후 인물임엔 틀림없다는 주장이 있다. 홍 외에 또 한 사람으로 이학구 총좌가 있었다. 그는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 제2군단 작전참모였고, 낙동강전선에서는 제13사단 참모장으로서 1950년 9월 21일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으로 투항해 온 사람이었다. 그는 포로 중의 최고위 계급자로서 해방동맹을 조직한 실질적 인물은 아니더라도 홍철과 더불어 그 조직을 조종하는 인물임엔 틀림없었다. 어쨌든 계급이 높았던 만큼 이학구는 표면상으로는 포로의 대표 행세를 하였다. 그가 정체 불명의 인물과 더불어 전수용소의 통솔권을 장악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판문점 회담이 절정에 이르자 그는 전 거제도 수용소의 이른바 대열 강화 사업에 착수, 비밀리에 각 수용소 간의 통신망을 조직하여 각종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또 그는 수용소 당국에서 요구하는 포로 명부 작성 제출도 거부케 하고 송환 분류 심사에도 응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1951년 5월에는 제92구역에 북조선 노동당 거제도 지부가 조직되었고, 각 구역에도 연락소가 조직되었다. 이렇게까지 수용소 안이 온통 친공포로들의 광란장소로 변하여도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은 그냥 보고만 있는 자세였다. 수용소장은 후방기지 사령관(수용소 관할의 직속 상급 사령관)이나 또는 그 이상의 지휘 계통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시도 받지 못하고 있어서, 그로서는 포로를 제약할 수 있는 방도가 달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때, 북한측에서는 [특별공작대]라는 특수 조직체를 만들어 암약하기 시작했다. 북한군 총사령부에 소속된 이 조직체의 임무는 전선에서 자진 투항하여 포로의 신분으로 수용소에 들어가 특별 지도 사명을 수행할 공작대원을 훈련시키는 한편, 포로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공작대는 사실상 남일에 의해 지휘되었는데, 그는 북한 공산군내 정치보위부의 책임자로서 이런 일은 그의 소관이었다. 남일은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직접 특별공작대를 편성하고 2개월에 걸쳐 각종 훈련과 교육을 시킨 다음 조직적으로 전선을 통해 수용소에 침투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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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공작대원들의 또다른 임무는 각 포로들의 과거와 현재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즉, 포로들이 포로가 된 동기를 조사하고 수용소에 들어온 후 변절한 자, 자발적 이탈자, 밀고의 혐의가 있는 자 등을 가려내는 일이었다. 공작대 활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통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의 통신 구조는 ①각 수용소 내의 연락망, ②수용소측 지휘부에서 수용소 내의 일반 포로 및 공작대원들에게 연결되는 연락망, ③수용소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연락망의 3원적(三元的)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포로들의 통신본부는 제64포로병원 장교 병동이었다. 모든 통신 정보와 지령은 일단 장교병동에 집중되었다가 분배되었다. 외부로 보낼 통신을 가진 포로들은 환자로 가장하여 입원하였으며, 퇴원하는 환자들이 그것을 받아 각 수용소에 전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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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들의 통신본부로 활용된 64포로병원 |
그들은 포로작업대가 수용소 밖으로 나오면서 약속된 장소에 투하해 놓은 통신문을 북으로 보내고, 또 같은 방법으로 북의 지령문을 포로들에게 전달하는 통신 수단을 주로 썼다. 특별공작대의 암약이 시작되자 공산측에서는 거제도 포로 전체를 지휘할 우두머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목적으로 밀파된 자가 북조선노동당의 부위원장 감투를 쓰고 있던 박상현이라는 자였다. 그는 전선에서 계획적으로 포로가 되어 1951년 11월경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들어오게 되었다. |
휴전 회담에서 포로 문제가 논의될 때 가장 격렬하게 대립되고 또 오랫동안 쟁점이 되었던 점은 '자원송환' 과 '강제송환'이었다. 자원송환은 포로 본인의 의사를 물어 송환 여부를 결정케 하는 것으로서 이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은 유엔군측에서도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공산군측에서도 궁금하게 여기던 사항이었다. 따라서 공산군측 대표는 북한 및 중국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포로가 실제로 얼마나 되는가를 알고자 포로들을 심사한 다음 그 포로 수를 제시하라고 유엔군측에 요구했다. 그런데 이처럼 송환 여부를 알고자 그 심사 실시를 인정하고서도 공산군측은 포로들에게 분류심사를 거부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남일이 바로 그 주모자로서 그는 회담 장소에서는 송환 거부 포로 숫자를 제시하라고 유엔군 측에 요구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제도의 박상현에게 송환 심사를 거부하라고 지령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주장대로 강제송환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친공포로들은 포로 명부 제출을 거부하는 동시에 송환 심사에도 응하지 않도록 단단히 지시를 받고 있었다. 심사를 실시하지 못한 구역 중에는 제62구역이 있었다. 여기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히 통제를 하고 '전원이 북한으로의 귀환을 희망하고 있으므로 심사는 시간 낭비'라고 선언하면서 유엔군측 심사관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엔군측은 심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서 실력 행사를 계획하였다. 이 구역에는 대부분 서울 출신의 의용군들이 있었으며 그중 절반이 대학 재학생으로서 사상적으로는 완전한 적색분자의 친공 수용소였다. 포로수용소 당국도 이런 형편을 알고 있었으므로 심사반은 신중한 계획을 세워 무장 병력의 특별 엄호하에 집단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구역을 4분하여 격리시키고 각 소구역별로 심사를 실시키로 하였다.
그래서 1952년 2월 18일, 새벽 2시부터 수용소 내의 통행이 금지되고 날이 밝을 무렵에는 심사반과 함께 착검한 미 제25사단 제27연대 제3대대 병력이 수용소 내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막상 심사를 하려고 수용소에 들어가자 포로들은 미리 준비해두고 있던 몽둥이, 도끼, 삽, 곡괭이 자루, 칼, 죽창, 천막지주 등을 휘두르며 저항하였다. 그리고 1,000∼1,500명의 포로들이 일렬로 서 있는 경비병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되자 양측은 격돌하게 되었고, 수용소 안은 일대 격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미군들은 처음에는 공포탄을 발사하였으나 포로들이 달려들자 마침내는 발포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폭동은 진압되었으나 이 사고로 55명의 포로가 즉사하고 162명이 부상당했으며 부상자 중에서 22명은 병원에서 죽었다. 미군의 사상은 사망자 1명, 부상자 38명이었다. 이 사건으로 수용소장인 피츠랄드 대령은 부사령관으로 격하되고 2월 20일 새로운 사령관으로 돗드(Francis T. Dodd) 준장이 부임하였다. 또 이 사건에 대해 미 공간사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치른 대가는 컸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인명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오직 목적 달성만이 문제였다. 결국 그들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미군은 철수했고 이 구역은 다시 심사하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사건은 공산측의 선전 자료가 되어 1952년 3월 초순 판문점에서는 항의 소동이 일어났다. 유엔군측은, 민간인 억류자 심사는 한국의 내정 문제이며 휴전회담의 범위 밖이라고 하여 곤경을 모면했다. 그러나, 유엔군사령관이 수용소장을 경질하고,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게 '자체 계획에 의하여 포로를 철저히 통제하라'고 지시했던 사실을 보면, 이 사건으로 인한 충격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수용소 내의 지휘 계통을 확립하고 이런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포로들의 소동은 전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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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돗드준장은 1952년 5월 7일 제76구역의 포로들이 그들의 처우에 불만을 품고 수용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고 그 요청에 응하기로 하였다. 그의 보좌관들은 2·18 항거폭동 이후 포로들이 과격한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면회를 거절하라고 종용했으나, 그는 듣지 않고 제76구역의 출입구에서 직접 포로들과 만났다. 그때 포로 작업반이 수용소에서 나오고 있었고, 유엔군 경비병들은 그들이 나갈 수 있도록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작업반이 나간 후에도 그 문은 계속 열려있었는데, 포로들이 그곳으로 나와서 돗드장군 주위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 면담을 마치고 떠나기 위해서 막 돌아섰을 때, 별안간 포로들이 그를 에워싼 채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직후에 포로들은 「우리는 돗드를 체포했다. 우리의 요구가 해결되는 한 그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다. 만약 총을 쏜다든가 하는 그런 야만적인 행동이 일어난다면 그의 생명은 위험해질 것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돗드장군이 체포된 후에 콜슨(Charles F. Colson)준장이 포로수용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포로들에게 돗드장군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으며, 만약 포로들이 돗드장군의 석방을 거부한다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포로들에게 경고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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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들에게 납치 되었던돗드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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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돗드준장 납치사건 이후 사건해결을 하지 못하고 포로에게 굴복한 콜슨 장군을 해임하고 새로 부임한 보트너준장 역대 포로수용소장중에서 포로의 효과적인 관리와 질서회복을 위하여 강력하게 대처했다. |
이 사건 직후 유엔군사령관은 포로 관리에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187공수연대를 거제도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신임소장 보트너 장군은 수용소의 내막을 파악하고 관리 개선을 위해 다각적인 검토를 하는 한편, 사태 수습을 추진하였다. 그는 거제도의 포로들이 평범한 포로들이 아니며, 비록 총은 갖지 않지만 그들은 임기응변으로 경비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춘 전투원으로서 저돌적이고 광신적이므로 강력한 방법에 의해 질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돗드 장군 석방 후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기세좋게 인공기를 게양하고 여기저기에 미군을 모욕하는 플래카드를 걸어 두었다. 뿐만 아니라 제76수용소에 모였던 각 수용소 대표들은 다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며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포로들은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포로 심사 같은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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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돗드준장 납치사건 후 포로관리에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하여 병력 및 장비가 증가되었다. | |
그러나 이러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적기와 선전물의 게시, 욕설 플래카드, 각종 표어, 김일성과 모택동의 초상화 게시가 여전하자, 그는 무장병을 수용소 안에 진입시켜 실력으로 철거시키는 강경책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계속해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포로는 발견되는 대로 사살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포로들에게도 이를 알렸다. 그후 제62수용소에서 인공기를 게양하던 포로 2명이 사살되었는데, 이후 포로수용에서 인공기나 중공기를 게양하는 일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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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어느 구역에나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혼합 수용되어 있었다. 개인별로 반공과 친공의 성분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은데다가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이 이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전쟁에서는 사상문제때문에 포로가 이처럼 극단적인 자체 분열을 일으킨 사례가 없었다. 또한 포로 관리 책임을 맡은 미군 당국은 제네바협약에 따라 그들을 잘 억류해두었다가 전쟁이 끝날 때 송환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에서 적당하게 수용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했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친공과 반공세력이 구분되기 시작하였고, 서로 간에 대립이 발생하면서 충돌도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엔군이 전쟁 중에 붙잡아 수용소에 억류해 둔 포로는 당연히 친공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북한군과 중공군 중에서 반공포로, 바꾸어 말하면 유엔군측에 우호적인 "친자유주의(親自由主義)" 포로가 나타나게 된 것은 상상밖의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이런 성격의 포로들이 북한군과 중공군에 공통적으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그 숫자가 오히려 친공포로보다 더 많았다. 중공군에서는 본래 장개석 군대에 있던 군인들이 공산측을 기피하여 반공의 편에 서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한국인 포로 중에는 원래 남한 사람들이 북한군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포로가 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공산군으로서 유엔군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던 그들이 포로가 된 후에 공산주의를 극력 혐오하고 본국으로의 귀환을 결사 반대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또 이들 반공포로 중에서도 더욱 열렬한 반공주의자들은 남한 출신보다 북한 또는 중국에서 공산 지배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보았던 그들이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포로수용소에서 친공포로들과 싸우는 선두에 섰던 핵심요원이 되었던 것이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들 사이에 서서히 편갈림이 생기고 양자간에 대립이 발생하기 시작한 시기는 포로들이 부산에서 거제도로 이동하고 나서부터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점점 뚜렷해져서 수용소 내에서는 양측의 투쟁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열되었고, 구실과 기회만 있으면 습격과 난투극을 벌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초창기에는 성격이 뚜렷하지 않았던 수용소의 각 구역이 친공 또는 반공으로 구분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양측간의 암투가 서서히 싹터서 주도권 싸움으로 되고, 어느 편이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서 좌익 또는 우익 수용소라는 간판없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었다. 즉, 어느 수용소에서 친공세력이 통제권을 장악하면 그 수용소는 친공구역이 되고, 반공세력이 그 수용소를 장악하게 되면 반공구역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처음에는 친공·반공계 간의 충돌이 주먹 또는 몽둥이나 천막 지주와 같은 것으로 치고 때리는 정도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싸움은 가열되었으며, 친공계는 더욱 악랄한 방법을 동원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처럼 반공이나 친공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불안한 평형, 또는 불안한 우세를 유지하는 구역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언제 그 상태가 깨어질런지, 또는 그 우세가 뒤집어질런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휴화산 아래의 마을처럼 언제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반공과 친공은 공존할 수 없었으므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모의와 투쟁이 늘 계속되었다. 그런데 휴전회담에서 포로 교환 문제로 쌍방간에 논란이 벌어지게 되자 우익계인 반공포로들은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휴전 성립 후에는 본의 아니게 북한이나 중공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를 운명에 처하였기 때문이었다. 반공계 포로들이 이렇게 곤란한 처지에 있었던데 반해 친공계 포로들은 '해방동맹'과 같은 조직을 통해 포로들을 규합·통제하고 점점 그 힘을 키우면서 수용소 내에서 반공계 포로들을 압도하려고 하였다.이들은 휴전회담의 진행과 더불어 가공할 만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만든 계획은 단계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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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유엔군 당국에 대해 인권 주장 및 제네바협약에 의한 권리 주장 운동을 전개한다. 대한반공청년단의 조직과 편성으로는 본부에 단장, 부단장, 비서장외에 11개부와 직속 경비대를 두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본부 조직 외에 각 '구역'을 '대대'로하여 대대에는 조장, 부조장, 중대에는 분조장, 소대에는 반장의 간부들이 배치되어 1개 구역당 약 6,000명의 인원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반공포로의 조직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그 조직력은 친공포로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유엔군 특히 한국군 경비대의 후원 및 지원을 받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친공포로의 조직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철저한 계획하에 만든 것으로서 북한의 지령과 자금 지원을 받는다는 강점이 있었다. |
1951년 8월 말까지 거제도와 부산에서는 포로들 간에도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특히 거제도는 친공포로들의 폭력 행사로 더욱 살벌해지고 있었다. 양쪽은 수용소의 각 구역 내에서 자기 편의 인원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이 횡행했으며 특히 친공계열이 우세한 곳에서는 매일 인민재판이 열렸다. 비록 반공주의자들이 다수인 경우에도 친공포로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핵심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이 잘 되고 계획된 방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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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지령과 선전 선동은 즉각적으로 모든 친공포로들을 자극함으로써 그중 일부는 미치광이가 되어 수용소마다 반공포로들을 찾아내어 운동장으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형식적인 소위 인민재판을 한 후 즉석에서 타살하였다. 각 수용소에서는 10명 내지 30명씩의 반공포로들이 무참하게 학살 당함으로써 전 수용소에서 희생된 숫자는 300명에 달했다. 9·17사건이라 불리는 이 폭동은 9월 20일까지 계속되어 각수용소에는 인공기가 나부끼고 거제도가 마치 공산군의 병영이라도 된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다만 우익계가 장악한 포로수용소에서는 이와 같은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좌익계가 열세하여 폭동을 일으키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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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인민재판을 한 후 즉석에서 타살된 반공포로들 |
이런 중에서도 그해 12월 23일 밤에 제73구역에서는 150명의 친공포로들이 성탄절 축하 준비를 하고 있던 반공포로 60명을 습격, 난타하여 한 명이 죽고, 32명이 중경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수용소 내에서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세력 다툼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으며, 언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는 긴장된 날들이 계속되었다 |
1952년초 친공포로의 송환 분류 심사 거부로 일어난 2.18 폭동이 진압되고 나서도 각 친공 수용소에서는 밤마다 반공포로들이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타살되고 있었다.이 해 3월 16일 오후에는 친공포로 일색인 제95구역에서 약 50명의 반공포로들이 결사적으로 탈출하여 철조망 쪽으로 달려 나왔다. |
▲ 반공포로들과 대립을 위하여 인공기를 게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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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수용소에 걸려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육안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빛깔은 자색으로 변색되었고, 기폭이 뻣뻣해져서 바람에 잘 나부끼지도 않았다. 반공포로들의 탈출을 목도한 반공청년단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다음 날인 17일에 반공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 이를 우익계 수용소인 제71, 72, 73, 74. 81, 82, 83, 84, 91, 93, 94, 96 등 각 구역에 통보했다. 반공 총궐기대회는 비폭력으로 각 수용소 안에 태극기를 걸고 각종 구호를 외치며 인접해 있는 좌익계 수용소를 위압한다는 단조로운 시위였다. 그리고 제93구역에서는 제92, 95구역 등 좌익계 수용소에 대하여도 적극적인 시위를 하기 위해 국군 제33경비대대 소속인 제5중대장의 협조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17일 아침 각 수용소에서는 하늘 높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목이 터지도록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기세를 올렸다. 오후에는 계획대로 제93구역을 비롯한 제91, 94, 96구역에서 반공 시위를 감행했는데 이 때에는 제5경비중대장 강대위가 지휘하는 소대병력이 이들을 엄호하고 있었다.시위 행진부대는 친공 제92구역 앞길을 지나면서 구호를 제창했다. 이 때 제92구역에서는 시위부대에 대해 투석공격을 시작했다. 시위부대는 많은 인원이 부상을 입었으나 대항은 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하였다. 그러다가 참다못한 강대위가 권총을 뽑아 사격 신호를 내렸다. 사방의 국군 감시대에서는 일제히 공중에다 위협사격을 가했다. 그래도 친공포로들은 계속 돌을 던졌다. 총성 때문에 미군 감시병들까지 출동했으나 그들은 가세하지 않았다. 총에는 당할 수 없었던지 친공포로들의 투석이 줄어들어 멈추자 사격도 멈췄다. 우익 시위부대들은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각 수용소로 돌아갔다. 수용소 내로 들어가서도 밤새도록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는 전체 우익 수용소에서 반공 총궐기대회의 명목 아래 18일에도 계속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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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공포로의 대표적인 수용소인 76, 77, 78수용소를 겨냥한 미군경비대 탱크의 포신 |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미군 당국은 한발짝도 수용소 안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분명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
제95구역은 이후에도 악질 친공포로의 소굴로서 포로수용소 당국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한국군 경비대와도 충돌을 일으켰다. 이 구역은 국군 제33경비대대 제5중대 경비구역이었는데, 1952년 4월 10일에도 경비병과 포로들 간의 욕설이 빌미가 되어 가벼운 총격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한·미 경비병과 포로들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한국군 경비대측에서는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미군 대위 1명이 부상을 입는 결과를 빚었다. 포로측은 30명이 피살되고 80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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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많은 정보를....역시 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