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중장년층이 젊은 시절을 보내던 1970, 80년대만 해도 일본 TV에는 ‘겨울연가’와 같은 순애보적 드라마가 많았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이 한국에서 건너온 ‘낯익은’ 드라마를 발견하고 환호한 것이다. 일본의 ‘겨울연가’ 팬 가운데 중장년층이 유난히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드라마를 ‘문화상품’이라고 부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드라마를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사람은 이제 없다. 한때 드라마가 우리의 문화적 감성이나 효용에만 소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소비의 대중화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드라마는 더 이상 우리의 감성적 범위에서만 안주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숱한 대중문화 코드와 경향을 생성하면서 이미 대중소비문화의 중심축으로 편입되고 있다.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만 자족했던 드라마가 이제는 경제논리와 결합하면서 다양한 부가가치를 파생시키고 스스로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드라마의 ‘또 다른 잠재가치와 역량’이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드라마의 경제적 가치는 특히 해외시장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최근의 ‘수훈갑’으로는 단연 ‘겨울연가’를 꼽을 수 있다. 이 드라마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일본이라는 요새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쾌거를 이룩했다.
특정 드라마가 외국에서 전파를 타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우선 상당한 수준의 제작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제품’이 좋아야 한다는 뜻이다. 심정적 공감대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유사성(이를 전문용어로는 ‘문화적 할인’이라고 한다)도 있어야 한다.
이처럼 자못 까다로운 장벽 때문에 일본 땅에서 우리의 드라마가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겨울연가’(일본에서는 ‘겨울소나타’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다)가 해낸 것이다. 우리가 문화적 모방을 일삼아온 ‘드라마 선진국’ 일본에서 얻은 성과이기에 ‘겨울연가’의 성공은 더욱 돋보인다.
일본에서 ‘겨울연가’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겨울연가 신드롬’ 으로 일본 사회가 들썩거리는 가운데 특히 남자 주인공 배용준의 인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욘사마’(배용준의 이름 ‘용’의 일본 발음에 존경과 공경의 뜻을 담은 접미사 ‘사마’를 붙인 것)는 이제 보통명사처럼 돼 버렸다. 배용준에게 빠진 중년 여성들 때문에 가정불화까지 빚어진다는 의미에서 ‘겨울연가 이혼’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드라마의 인기를 활용해 출시된 각종 상품을 과다하게 구매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겨울연가 거지’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드라마의 인기는 구체적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겨울연가’는 이미 지난해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의 위성채널로 재방송됐다. 그랬던 드라마가 올해 들어 NHK 지상파에서 다시 전파를 탔다. 토요일 밤 11시10분이라는 시청률 취약시간대임에도 9회까지의 평균시청률 12.1%를 기록했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의 시청률이 20% 전후임을 감안하면 ‘겨울연가’가 얼마나 인기를 얻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드라마의 성공은 경제적 효과도 창출해 내고 있다. ‘겨울연가’의 DVD 20만 세트가 이미 시장에 출시됐다. 소설, 가이드북, 드라마를 활용한 한국어 교재 등 ‘겨울연가’를 소재로 한 책도 130만 권의 시장을 만들어 냈다. 우리 돈으?치면 약 1,000억 원대에 달하는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드라마의 인기는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를 대폭 개선하는 효과도 낳았다. 드라마 세트장을 구경하고 주연 배우를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생겼다. 전보다 더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 관련 행사에 참가하고, 한국 관련 서적을 구입하고 있다. 한국식 식사를 즐기고,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일상 대화 속에서도 ‘한국’에 대한 화제가 늘었음은 물론이다.
주연을 맡았던 배용준과 최지우에 대한 인기는 일본 내 한국인 스타의 역량도 한층 강화시켰다. 드라마의 인기는 종영(終映)과 함께 소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스타의 인기는 얼마든지 연장 가능한 것이 현대 대중문화의 추세다. 스타의 탄생은 단순히 경제적 가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갖는 문화성과 국적성 등과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겨울연가’의 성공은 일본시장에서도 다양한 마케팅이 가능한 스타까지 탄생시킨 것이다.
오랜 세월 방송 콘텐츠의 생명력은 시청자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그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겨울연가’의 성공 신화는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콘텐츠의 질만 담보되면 외국에까지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를 낳음은 물론,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다양한 변화까지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겨울연가’가 입증한 것이다.
‘겨울연가’는 중국·대만·태국·필리핀 등지의 이른바 ‘한류(韓流) 열풍’을 일본으로까지 확산시켰다. 그렇다면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성공한 배경은 무엇인가. 왜 일본은 ‘겨울연가’와 배용준에 그처럼 환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몇 가지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겨울연가’ 성공 비결은 ‘틈새시장 공략’
첫째, 이 작품이 일본 드라마의 ‘틈새’를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시청률이 높고 낮음에 따라 방송 제작자의 인사가 좌우되는 시스템이다. 시청률이 광고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에서 방송사는 광고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대중 소비문화의 주력인 젊은층을 TV 앞에 끌어들이기 위해 스타급 탤런트를 기용해 젊은층의 구미에 맞는 트렌디 드라마를 끊임없이 제작하는 것이 일본의 방송 환경이다.
이러한 흐름이 굳어지면서 중장년층이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는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청춘 남녀의 ‘쿨’한 트렌디 드라마만 양산되는 환경에서는 세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폭넓은 공감대를 끌어내는 작품이 나올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트렌디 드라마로부터 소외됐던 중장년층 시청자라는 ‘틈새시장’을 파고든 것이 바로 ‘겨울연가’였다.
실제로 일본의 중장년층이 젊은 시절을 보내던 1970, 80년대만 해도 일본 TV에는 ‘겨울연가’와 같은 순애보적 드라마가 많았다. 그 시절을 기억하면서도 시대적 흐름 속에서 소외됐던 중장년층이 한국에서 건너온 ‘낯익은’ 드라마를 발견하고 환호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겨울연가’ 팬 가운데 중장년층이 유난히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겨울연가’ 성공의 두번째 비결로는 드라마 자체의 끈끈한 매력을 들 수 있다. 아름다운 배경과 대사, 주연 배우의 분위기와 연기력 등이 조화를 이룬 것이 드라마에 대한 흡인력을 한층 끌어올린 측면이 있다.
세번째는 NHK라는 공신력 있는 매체를 유통 창구로 삼은 점이다. NHK의 시청자는 다른 민간 방송국 시청자에 비해 중장년층의 비중이 큰데, 이들이 ‘겨울연가’의 열렬한 팬이 된 것이다. 젊은 시청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민간 방송사의 전파를 탔어도 지금과 같은 신드롬이 형성됐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장기 불황도 ‘겨울연가’의 인기에 한몫 거든 것으로 판단된다. 10년을 넘긴 불황이 일본인들의 심리를 ‘좋았던’ 과거지향적으로 만들었다는 분석은 이미 여러 차례 나온 바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겨울연가’가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겨울연가’의 주 시청자층이 40∼50대라는 점은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한 일본 방송 관계자는 “한국 드라마가 대체로 감성적 소구를 축으로 갈등과 반전을 거듭하는 진부한 구조로 되어 있지만 트렌디 드라마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감을 주고,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일본의 ‘한류 열풍’은 ‘겨울연가’의 성공 이전에 이미 그 토대가 마련돼 있었다.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역시 2002년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한 것이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는 이웃나라 한국이 자기네들과 ‘인류 최대의 이벤트’를 공동 개최할 만큼 성장했음을 인식시킨 계기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대다수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아름답지 못한’ 뉴스의 단골 격이었다. 한국에 대해서는 시위와 최루탄으로 얼룩진 가운데 ‘과거사 문제로 귀찮게 해오는 나라’라는 경직된 이미지가 앞서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한류열풍이 걱정되는 이유
그러나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면서 한국에 대한 ‘소프트’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스포츠 소식뿐만 아니라 영화·방송·게임 등 한국의 대중문화가 대거 일본에 소개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이벤트가 없었더라면 우리 대중문화의 일본 진출과 성공은 요원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월드컵 공동 개최로 우호적 분위기가 형성된 가운데 우리 영화 ‘쉬리’가 일본으로 건너가 120여 만 명의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쉬리’의 성공은 일본인들이 그전까지만 해도 무지에 가까웠던 한국 대중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전환점이 됐다.
월드컵 공동 개최를 기념해 한국과 일본이 공동 제작한 드라마 ‘프렌즈’가 일본의 전국 네트워크인 TBS를 통해 방송된 것도 한국 대중문화 수용의 저변을 확대시키는 데 일조했다. ‘프렌즈’는 드라마 자체에 대한 일본 시청자들의 반향이 컸던 데다 ‘원빈’이라는 한국 탤런트를 일본에 소개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프렌즈’는 ‘가을동화’ ‘이브의 모든 것’ 등으로 이어진 한국 드라마 붐을 견인해낸 도화선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작지만 꾸준한 한국 드라마 붐이 이어지는 가운데 NHK의 위성채널에서 ‘겨울연가’가 인기리에 소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겨울연가’ 신드롬은 올해 4월부터 NHK 지상파로 옮겨져 다시금 뜨겁게 재현되고 있다. ‘겨울연가’의 성공적 안착 이면에는 일본의 대표 방송인 NHK가 일정부분 보증수표가 돼주었다는 점 외에도 ‘쉬리’에서 시작된 적잖은 주춧돌이 작용했던 셈이다.
하지만 ‘겨울연가’의 히트는 일시적 고지 점령에 불과하다. 단명으로 끝나버린 대중문화 상품과 유행을 무수히 경험해온 우리로서는 지금이야말로 일본에 ‘한류’를 뿌리내리기 위한 ‘진지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겨울연가’ ‘가을동화’ 등으로 확인된 일본 내 잠재고객은 또 다른 문화적 효용을 쫓아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다. 월드컵 축구를 계기로 형성된 잠재수요는 베이징(北京) 올림픽 등 또 다른 스포츠 이벤트로 대체되거나 이탈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본 언론의 ‘겨울연가’에 대한 잇단 보도는 우리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겨울연가’의 성공이 한·일 양국에서 회자될수록 일본 문화에 대한 ‘단계적 개방’이라는 우리의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 뻔하다. 우리나라는 일본 대중문화를 전면 개방할 수 없는 명분으로 ‘국내 산업 보호’를 내세웠다.
하지만 자국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마당에 일본 정부가 마냥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 ‘준사마’인 나보다 ‘욘사마’의 인기가 더 높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발언은 그래서 더욱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겨울연가’의 훈풍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라 ‘포스트 겨울연가’를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준비하고 실력을 쌓을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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