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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도 먹는 MZ병사..."최전선 사수" 눈빛은 겁먹지 않았다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2023.07.26 05:00
"北과 바로 맞서는게 천직" 오늘도 수색대는 지뢰밭에 삶 던진다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2023.07.25 07:22
여자지만 '이런 다이아'가 좋다…최전방 여군 소초장 '남다른 꿈'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2023.07.25 05:00
내 소꿉친구 영길이는 공산당의 지령으로 아내와 두 아들을 평양에 남겨두고 북쪽으로 도피했다. 그의 장인 전영택 목사는 잘 알려진 소설작가이다. 딸과 외손자 둘을 서울로 데려오면서 영길에게 꼭 월남하라고 소식을 남겼다. 그러나 당원이었던 영길은 그대로 남아 공직을 계속했다. 내 뒤를 이어 학교장이 되었던 윤 목사는 당원이 될 수 없어 좌우 양측의 버림을 받아 만경대 밑 대동강가에서 처형되었다.
여덟 식구와 함께 다시 부산에
이런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며칠을 보냈는데,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이남까지 후퇴한다는 뉴스였다. 나는 서둘러 떠나야 했다. 두 남동생과 여동생, 그리고 성혜를 이끌고 나섰다. 만경대 대동강가에는 벌써 웅성대는 분위기였다. 나룻배를 얻어 타고 강 동쪽 역포까지 왔다. 군용기차와 자동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에야 부모님을 남겨둔 것이 큰 잘못임을 알았다. 큰동생에게 서울과 부산의 주소와 머물 곳을 적어주면서 빨리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돌려보냈다. 나는 여기저기 헤매다가 남행하는 군용기차로 갔다. 군 장교에게 간청해 기관차 뒤에 연결되어있는 석탄 칸에 자리를 얻었다. 큰 어려움 없이 다음날 이른 아침 수색역까지 올 수 있었다.
모두 사랑하는 ‘평화의 때’ 소망
그러나 전세는 급변했다. 다시 여덟 식구가 된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떠났다. 3개월 머물렀던 대연동 교회로 돌아왔다. 내가 큰 실수를 했다. 부모님은 고향에 머물러도 목숨은 보존될 수 있지만 동생은 발각되면 체포되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죄책감에 시달려 고민하다가 혼자 서울 빈집까지 와 보았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그해 마지막 날 저녁때,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던 기도를 드렸다. “연말인 오늘까지도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기도였다.
기도를 마치고 교회 뜰 안으로 나왔다. 누군가가 대문 입구에서 찾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 사모가 문을 열어 주면서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동생을 포함한 어머니, 사촌 남녀 동생이 들어섰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해가 다 가기 전에…”라고 기도를 드리곤 했기 때문이다. 부친과 숙부는 황해도를 거쳐 해주 쪽으로 먼저 떠나고 어머니 혼자 남아 계셨는데, 어머니도 가족들을 위해 평양에서 부산까지 멀고 먼 길을 걸어오셨다. 나는 새해 새벽 기도를 드렸다. “우리 어머니가 자녀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을 세상 모든 사람이 갖는 평화의 때가 올 수 있게 해주세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cpon****1시간 전
그 때...굶어 죽었어야 할 저 김일성이는 김성주가 맞지요? 김잃성 이야기를 자세하게 육성 기록으로 남겨 주세요. 가짜김일성을 파헤친 펜앤 마이크,김용삼 대기자와 대담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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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3시간 전
살아있는 생생한 역사증인이 있는대도 남침북침논재이 난무하고있으니 한심스러운것이 국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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