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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무래도 이제 ?O아체보다는 해체로 쓰는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_-;; 아무리 승리가 패배보다 향기로운 것이란걸 고려한다 할지라도, 백년 전쟁을 통틀어 가장 널리 알려진 존재는 바로 잔 다르크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챕터에서 주가 되는 인물은 그보다 좀 더 전에 살았던, 한 비천한 가문 출신의 프랑스 기사이다. 그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라나 수많은 연대기 작가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활약을 펼쳤지만 결국 끝에는 프랑스의 총사령관(Constable)이 되어 멸망 직전에 처했던 왕국을 구해낸 인물이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베르트랑 드 게클렝(Bertrand du Gesclin). 이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이 분은 당시 연대기 작가들이 쓸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연대기 작가들이 쓸만한 이야기가 무엇이겠는가? 갑옷을 입은 기사들, 그리고 부딪치는 칼과 배틀, 유혈낭자한 전장의 후덜덜함이야말로 연대기 작가들의 펜이 영광스럽게 기록하고 예찬할 장면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게클렝의 전술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대규모 전면전에서는 썩 유능하지 못한 인물이었고,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소규모 전투와 성 공격시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게클렝은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잉글랜드군의 뒷다마를 까거나, 혹은 성을 점령해가는, 즉 게릴라 전술을 펼쳐서 지친 잉글랜드 군대를 프랑스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게클렝이 왜 이런 전술을 사용해야 했을까?
지난 10년간 프랑스는 크레시, 몽모랑시, 푸아티에 전투 등지에서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완패의 쓴잔을 삼켜야 했다. 프랑스 군대는 잉글랜드군의 장궁-보병 전술에 대해 쉽사리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일단 크레시 전투의 예시만 들어보아도, 필리프는 자신의 군대의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전투의 열정 때문에 통제 불능 곡길희 사마가 되어버린 기사들 덕분에 즉각적인 전투를 치뤄야 했고, 각 부대간의 손발도 맞지 않았다.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의 전열은 이리저리 흐트러진 상황에서 언덕 위에 잉글랜드 군과 교전했고, 푸아티에에서는 3열의 오를레앙공의 부대가 무단 탈주하는 바람에 2열의 정예 부대와 4열의 본진 사이에 공백이 생겨버렸고, 이틈을 이용해 전열을 재정비한 흑태자는 오히려 프랑스 왕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새로운 전술은 새로운 부원과 함께!)
비록 롱보우의 화살비가 기사들을 직접적으로 밥숟갈 놓게 하는 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양편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비는 기사들을 과도하게 중앙으로 밀집하게 했고, 옛날 칸나이에서 로마군이 그랬던 것처럼 과도하게 밀집된 상태에서 적과 싸워야 했다. 뿐만 아니라 기사 이외에 무장을 잘 갖추지 못한 징집병들이 화살에 범해지기 쉬웠다. 특히 후위 부대가 지원을 위해 달려왔을 때 잉글랜드 궁사들이 쏘아보낸 화살은 후위 부대를 쫓아보냈고, 중앙의 보병 기사와 창병들은 멋진 협동 전투 하에 프랑스 기사들을 밥숟갈 놓게 하고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용서없는 일격!)
물론 이 모든 전투는 궁수와 보병의 멋진 합동 전술이었지만, 이로 인해 후세에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위용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저런 전투 끝에 전투력을 상실한 프랑스 군이 전면전으로 잉글랜드 군대를 몰아낼 가능성은 씨벌교황 개념만큼도 없었...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매우 요원했던게 사실이다. 여러 전투에서 프랑스 군의 위용은 땅으로 쳐박혀 암반수를 뚫던 지경이었으며 오히려 개념없는 일부 프랑스 찌질이들-물론 다른나라도 포함-은 잉글랜드 군대가 했던 것처럼 주위를 돌아다니며 마적질을 하고 다녔다.
이 상황에서 게클렝의 전술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는 잉글랜드 군대가 우아한 말로는 기마행렬(chevauchee), 쉬운 말로는 마적질로 프랑스 마을에서 쥐불놀이를 하고 삥을 뜯는 행위를 하는데 대한 카운터 펀치로 큰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게클렝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는 비천한 가문 출신에다가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 전에 의존했다. 당연히 연대기 작가들의 구미에 당길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를레앙의 메이드(;;)같이 신비한 미소녀틱 포쓰를 풍기는 분도 아니니 일단 기각. 더군다나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에게 상황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한 때 프랑스의 강대했던 군대는 적의 검은 갑옷 왕자님에게 두 차례에 걸쳐 완파당했던게 사실이다. 어찌되었건 군사적으로는 무능의 극을 달리던 자기 왕들에 비해 흑태자라는 존재는 얼마나 눈부신 존재인가! 연대기 작가들이 크레시와 푸아티에의 절망적인 상황과 적장의 매력에 빠져있느라 아군에서 한 뛰어난 장군이 활약하고 있던 것을 기록하지 못한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한편, 잉글랜드 작가들은 어떤가?.......그분들 대부분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일단 책을 접었다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다시 시작한다던가-_-;; 어찌되었건 이제 본격적으로 드 게클렝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베르트랑 드 게클렝은 1320년 브르타뉴의 디낭(Dinan)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무려 10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게클렝이 맏이였다고 한다. 그는 몸집이 컸고, 동시에 매우 힘이 세고 난폭해서 밑에 있는 동생들을 울리기 일쑤였다. 이놈의 망나니 아들 때문에 아버지는 한 때 부자간의 연을 끊어버리자고 으르렁거릴 정도였고, 후에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수녀가 말리고 나서야 간신히 화를 가라 앉혔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소년 시절에 게클렝이 모범적인 생활을 보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는 그 지방 불량 소년 집단의 대장이 되어 옆 구역의 놈들하고 치고박고 했다는데, 항상 게클렝이 자기편 청년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어쩌면 후대에 그가 소규모 전투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데에는 이런 뒷배경이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어찌되었건 1337년, 즉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지난 번에도 언급했던 프랑스파 브르타뉴 공작 후보인 샤를 드 발루아의 결혼식이 있었다. 샤를 드 발루아는 결혼 기념으로 마상 창시합을 개최하기로 했는데 그 소문을 들은 게클렝은 자기 아버지의 짐말을 훔쳐타고 결혼식이 있는 렌(Rennes)으로 향했다. 한편, 높으신 자제분들께서는 한 초라한 청년이 짐말을 타고 터벅터벅 들어오는 꼴을 보고 살짝 기분나빠질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게클렝을 무시했다. 한편, 게클렝의 아버지는 갑자기 자기에게 날아온 마상 창시합 초청장을 보고 어리둥절해서 랑으로 향했다.
--흥을 깨는 이야기 같지만, 이번 이야기는 한 마디로 하자면..."뻥"이라고 한다-3-;; 이 이야기는 베르트랑 드 게클렝의 이야기를 기록한 최초의 연대기 작가인 Cuvelier의 "베르트랑 드 게클렝의 연대기"에 실린 이야기인데, 이 책은 게클렝이 죽은 후에 작성되었다. 물론 Cuvelier는 자신이 동시대인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썼다고 하지만 이런 영웅적인 이야기도 이리저리 뒤섞이게 된 것이리라.
자아, 사실 관계가 어찌되었건 17살이 된 게클렝은 17살에 여우에게 진다거나 할 정도로 허약하지는 않았다. 연대기 작가인 Cuvelier가 무훈시 작가였기 때문인지, 이후의 스토리는 무훈시 다운 진행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막 그 곳을 떠나려는 사촌을 붙잡아서 말과 무기를 빌린 후, 바이저를 내리고 정체를 감춘 뒤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갑자기 들어온 이 정체불명의 기사는 놀라운 괴력을 발휘했던 바, 순식간에 열 두명의 적을 창으로 찔러 고꾸라트렸다. 한 명 한 명이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져 쿵, 하고 무거운 소리를 낼 때 마다 관객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함성도 높아져갔다. 이 언노운(Unknown)씨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혈기를 못 이겼는지 게클렝의 부친께서 말을 빌려타고 경기에 출전했다. 두 기사가 부딪쳤고, 당연히 언노운씨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청중들은 깜짝 놀랐지만 언노운씨는 다시 말에 올라타 다른 대적자들과 솜씨를 겨뤘다. 마침내 몇 명의 기사를 더 쓰러트린 후, 한 노르만 기사가 창으로 그의 바이저를 들어올렸다. 그 때가 되어서야 언노운씨가 게클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의 아버지가 크게 기뻐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한편, 게클렝이 이렇게 잘 싸웠든 어쨌든간에 이로써 특별한 임무를 맡은것은 아니었다. 하긴 세상사를 보면 열살에 곰을 잡은 놈들이라거나, 혹은 열 여섯살에 뉴타입을 수박바로 범했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지 않는가. 초기에 게클렝의 활약은 분명하지 않아서, 그는 1342년 노햄프턴 공작이 랑을 잠시 공격했을 때 발루아 측 중기병(men-at-arms) 중 한 명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이름을 날린 것은 이런 정규전보다는 매우 활동적인 게릴라 전술을 통해서였다. 그는 Paimpoint 숲을 드나들며 떨어져 나온 잉글랜드 군대나 드 몽포르의 군대를 요격하며 브르타뉴 시민들의 전의를 드높였다. 그의 주요 목표는 약탈품을 싣고 돌아가는 소규모 잉글랜드 군대라거나, 혹은 거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병들이었다. 물론 이런 소규모 작전으로는 큰 전황을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차츰차츰 게클렝은 범위를 넓혀갔다. 그의 초기 전투 행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350년에 있었던 Grand fougeray 성을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 19세기에 게클렝의 연대기를 썼던 루스(Luce)는 이 성채의 대장을 다음해인 1351년 30인의 전투에서 사망한 잉글랜드 기사인 로버트 브렘보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이 성채는 게클렝 부대가 치고 빠지기를 거듭하느라 땔감이 크게 부족했다. 사실 중세의 숲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물론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처럼 두려운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숱한 동화나 민담에서 나오는 맹수들이 있었다. 현실은 에린과는 달라서, 맨손이든 무기를 들었든 곰이나 늑대를 때려잡을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물기 마련이다-_-;; 여기에 게클렝 패거리들까지 설쳐대니 숲으로 들어가기가 겁날 지경이었다. 어느날 로버트 브렘보경이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성 밖으로 나갔는데, 나무꾼 몇 명이 달려와 성 앞에 기세 좋게 땔감 더미를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땔감 보급을 받게 된 병사들은 좋아라 하며 도개교를 열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스토리대로(-_-) 나무꾼들은 본색을 드러내 수비대 몇 명을 쳐죽이고 게클렝을 불렀다. 밖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게클렝 부대는 재빠르게 성채안으로 진입해 수비대를 제압하고 성을 빼앗았다.
필살의 기능!
그러나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게클렝은 자기 조직된 소규모 약탈부대를 끌고 돌아다니는 도둑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 시점에서 게클렝의 활동이 매우 통찰력있고 장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도 정신에 입각한, 그리고 위기를 맞아 더더욱 똘똘 뭉친 기사들에게 있어 게클렝의 전략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에게 게릴라 전술은 실제 전투가 아니라, 마적질(chevauchee)이랑 똑같은 짓이었던 것이다. 뭐, 기사도 따윈 장식일 뿐일지도 몰랐지만, 높으신 분들은 당연히 그걸 몰랐다.
어찌되었건, 게클렝은 여러 활약에도 불구하고 기사 작위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클렝에게도 서서히 희망이 빛이 비춰왔으니, 당시 높은 직위에 있었던, 원수(Marshal) d'Audrehem경이 게클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분은 몇 년 후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선두의 기병 부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와 용맹하게 싸웠던 분이기도 했는데, 이쪽 분야에 대해서는 오픈 마인드(-_-)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1345년 브르타뉴 북동쪽의 란달(Landal)이라는 성채를 점령했다. 이 곳은 프랑스 군대의 본영이 있던, 브르타뉴 북동쪽 해안의 퐁토르송(Pontorson)에서 가까운 곳이었는데 이 곳을 점령하면서 프랑스 군의 전략적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이에 고무된 d'Audrehem(영어로 쓰려니 귀차니즘-_-)경은 시야를 돌려 잉글랜드군이 소유한 요새인 Becherel 성을 점령하려고 했다. 이곳은 렌과 디낭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성채로 이곳에서 6마일 떨어진 곳에는 몽모랑(Montmuran)이라는 프랑스 소유의 요새가 하나 있었다. 이곳은 Jean de Tinteniac이라는 프랑스 귀족이 소유하고 있었던 바, 이 영주님은 얼마 전 몽모랑시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패배할 때 전사했고 이 곳은 그 미망인이 지키고 있었다. 성스러운 주일(Holy week)를 맞아 이 미망인은 원수(Marshal)와 그의 군대를 초청했고 그 중에는 게클렝도 끼어 있었다. 1354년 4월 10일 화요일, 이들은 몽모랑 요새에 입성했다.
당시 낮은 지위에 있었던 게클렝씨가 이 높으신 분들의 잔치를 즐겼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만, 그의 군사적인 감각은 파티를 즐기면서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Brechel 요새의 주인은 휴 드 칼블리(Hugh de Calveley)라는 유명한 잉글랜드 기사로, 게릴라전에도 일가견이 있던 사람이었다. 게클렝은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서, 원수에게 적의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한편, 원수도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게클렝은 숲에 30명의 궁수를 매복시켜 두고 만약 적이 오거든 마음을 담아 깜짝 환영 화살비☆를 퍼부어주라고 일러두었다.
(데로로 중장은 마음을 담아 깜짝 환영 핵☆을 퍼부어주라고...;;;)
과연 게클렝의 예견은 들어맞아서, 칼블리 경은 딴에는 조심스럽게 몽모랑 요새를 기습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이었다. 그가 숲을 지날 때 갑자기 깜짝 화살비☆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군대가 당황하여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사이, 대비하고 있다가 밖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은 프랑스 기사들은 말을 타고 달려나와 잉글랜드 군에게 차지를 감행했다. 창에 찔린 칼블리 경은 말에서 떨어졌고, 곧 프랑스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를 사로잡았다. 잉글랜드 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지휘관이 사로잡히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기네 성채로 달아났다. 물론 이 전투가 특별한 파급 효과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음 문장...해석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_-;;) 더구나 게클렝은 카엔의 성주인 드 마레스에게 사로잡히기도 했는데, 그는 게클렝을 검으로 내려쳤다...게클렝의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걸까? 그랬다면 이런 이야기에 실리지도 못했겠지-_-;; 마레스 경은 게클렝을 검으로 내려쳤지만, 그건 전투 후의 일이고, 그 목적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로 전투가 끝난 후, 게클렝은 드디어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던 것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에 따라, 게클렝은 몽모랑 근처의 작은 예배당에서 기사 작위와 기사의 증표인 새하얀 로브를 수여받았고, 그는 유명한 그의 전투 함성을 하나 정하게 되었다. "노틀담 드 게클렝!"... 물론 여기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이 함성이 나중에 프랑스 전역에서 울려퍼지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기사 작위 수여는 드 게클렝의 인생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프랑스는 드 게클렝의 전략을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드 게클렝의 전략을 인정한 사람은 d'Audrehem같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던 몇 명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정면 승부로 잉글랜드 군대를 쫓아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의 보병들은 본격적으로 호빌라, 즉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프랑스 전역에서 약탈 행각을 벌이고 있었고 프랑스 군이 교전을 한다고 해도 잉글랜드군에게 범해지기 일쑤였다. 물론 최악의 상황은 드 게클렝이 기사 작위를 수여 받고 2년 후에 있었던 푸아티에 전투로, 프랑스는 왕이 사로잡히는 치욕을 겪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만한 굴욕이려구-_-)
한편, 장 왕의 몸값을 놓고 프랑스와 잉글랜드 협상가들이 빽빽하게 싸우는 동안, 오랜만에 등장한 에드워드 3세는 오랫동안 감방에 처박아놓고 군만두만 먹였던 샤를 드 발루아를 놓아주었다. 물론 교황인 인노켄티우스 6세의 중재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샤를 드 발루아는 막대한 몸값을 내고, 그리고 그 몸값을 다 지불할 때 까지 에드워드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굳은 맹세를 하고 나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물론, 에드워드나 샤를 드 발루아나 모두 그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았다. 샤를 드 발루아야 자신이 풀려나는 것이니 그런다고 쳐도, 에드워드는 왜 거기에 동의한 것일까? 아직 에드워드는 브르타뉴에 쓸 수 있는 카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샤를 드 발루아를 석방하는 동시에 존 드 몽포르를 브르타뉴로 파견했다.
이 존 드 몽포르는 지난 번 브르타뉴 내전에서 샤를 드 발루아와 대립했던 그 존 드 몽포르의 아들이다. 아버지 존은 1345년 감방신세에서 해방되어 잉글랜드로 건너왔지만 물 건너온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 한편, 초기에 그토록 열심히 싸웠던 몽포르 경의 아내인 조안은...안타깝게도...광년이 되어버렸다-_-; 그녀는 잉글랜드로 건너온지 얼마 안되어 정신이 나가버렸고, 결국 틱힐(Tickhill) 성에 감금되었다.
렌 공성전
물론 에드워드도 결손가정(;;)에서 자라난 꼬마애 한 명을 딸랑 브르타뉴로 보낼 정도로 현실감이 결여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랭커스터의 헨리를 브르타뉴의 책임자로 삼아 존 드 몽포르와 동행시켰다. 1356년 8월, 샤를 드 발루아와 존 드 몽포르는 거의 동시에 브르타뉴에 도착했고, 다시 한 번 내전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존 드 몽포르와 랭커스터 공작은 재빠르게 군사 행동에 나서서 10월 2일에는 렌을 포위했다. 이 곳은 아직도 친 발루아파의 성채였는데, 성벽은 크고 아름다웠으며 병력이 적었던 랭커스터 경도 쉽게 공격할만한 곳은 아니었다. 1342년에 있었던 칼레 공성전과 마찬가지로, 랭커스터 경은 필승의 작전을 쓰기로 했다....모든 것을 대답해 주는 것은 시간이라는 전제였다. 물론, 랭커스터 경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랭커스터 경의 병력 규모가 적다고 하지만, 푸아티에에서 개관광을 당한 프랑스도 별로 나을게 없었다. 근처에 있었던 프랑스 군대 규모라고 해봤자 간신히 1,000명의 병사와 500명의 궁수 정도 밖에 없었다. 랭커스터 경은 별 어려움 없이 도시를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 보고 느긋하게 포위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바로 드 게클렝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렌 공성전이 시작될 때, 드 게클렝은 그 곳에 없었기 때문에 밖에서 군대를 거느릴 수 있었다. 이 지역은 드 게클렝이 소년 시절에 아해들을 데리고 패싸움 할 때 부터 그의 안마당이었다. 당연히 드 게클렝은 이곳 지리에 훤할 뿐더러, 성을 둘러싸고 전투를 벌여야 하는 잉글랜드 군대는 치고 빠지는 게클렝의 작전에 대항할 수 없었다. 즉, 잉글랜드 군은 드 게클렝이 범하기에 아주 좋은 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드 게클렝이 이끄는 부대는 랭커스터 경의 보급 부대를 마음껏 유린하고 다녔다.
겨울이 다가오자 잉글랜드 군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이, 드 게클렝은 디낭, Fougeres, 퐁토르송 같이 근처에 있는 프랑스 성채로 들어가 우아한 웰빙 라이프를 즐겼다. 그는 정말 기사처럼 살면서 도둑같이 싸워댔다. 날이 갈수록 드 게클렝의 게릴라 전은 거세어져 갔고 랭커스터 경의 공세는 약해져만 갔다. 더군다나 1357년, 포스트 푸아티에의 프랑스를 이끌어가려고 눈물 겨운 노력을 기울이던 황태자 샤를이 간신히 브르타뉴로 지원군을 파견했다. 지원군의 규모도 그다지 크지는 않았던 듯 하지만 이들이 디낭에 본진을 차리자 랭커스터 경은 군대를 또 나누어 일부를 디낭으로 파견해 성을 공격하게 했다. 당연히 드 게클렝은 한층 더 기세등등하게 잉글랜드의 소규모 군대들을 범하기 시작했다.
드 게클렝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남기가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렌 공성전이지만, 이 곳에는 드 게클렝 못지 않은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다. 도시의 시장인 베르트랑 드 생 퍼언(Bertrand de Saint-Pern)이라거나, Penhoet 영주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굳건히 성문을 지키며 잉글랜드 군대의 봉쇄에도 버티어내고 있었다. 갈수록 전투력이 약해지던 것을 걱정하던 랭커스터 경은, 이런 상황에서 꼭 시도하는 땅굴파기 카드를 꺼내들었다. 물론, 어떤 이야기에나 그렇듯이 렌에서도 반대편으로 땅굴을 파서 이 작전을 저지했다.
땅굴작전이 실패하자 랭커스터 경은 좀 더 심리적인 작전을 쓰기로 했다. 자기들도 고통받고 있기는 했지만, 적들도 오랜 봉쇄로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돼지 4,000마리를 데려다가 랑의 성벽 주위에 풀어놓았다. 돼지떼들이 꿀꿀 거리며 해자 근처의 풀들을 코로 뒤적거리는 동안, 성안에서는 역공을 가해 돼지떼를 잡아오자는 의견이 일어났다. 물론, 이 경우 정확히 적에게 낚이는 거라는걸 잘 알고 있던 Penhoet은 머리를 쓰리고 했다. 그는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잡아다가 도개교 사슬에 한 쪽 다리를 묶어 두었다. 한편, 이제나저제나 상대가 낚일까 기다리던 랭커스터 경은 성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당연히 나와야할 프랑스 병사들은 안나오고 왠 새끼돼지 한 마리만 렌의 성문에 매달려 있었다. 도개교가 내려가며 쇠사슬이 들리자 새끼 돼지가 죽어라고 뀌익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이 소리는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돼지떼들의 주의를 끌었다. 곧 그 도개교를 향해 4,000마리의 돼지떼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다닌다는걸 알아차린 랭커스터 경은 화를 내며 병사들을 내보냈다. 잉글랜드 병사들이 몽둥이를 들고 돼지떼들을 간신히 진정시켰지만, 이미 많은 돼지들은 렌의 성벽 안으로 들어가버린 뒤였다. 뭐, 결국 자기 낚시에 자기가 낚인 꼴이었다.
(돼지들을 낚는데 좋습니다!...크흑 자화상...)
한편, 렌과는 반대로 디낭 쪽은 잉글랜드 군에게 희망적인 방향으로 풀려나갔다. 이쪽에 대한 잉글랜드 군의 공격은 꽤나 성공적이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45일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인질이 교환되었는데, 하필 그 중에 베르트랑 드 게클렝의 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적 사령관의 동생이 자기네 수중에 있다는 걸 알아차린 잉글랜드군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드 게클렝에게 사자를 보냈다. 게클렝이 편지를 읽자 동생을 석방시키고 싶다면 1,000플로린을 준비하라는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미디블 토탈워에서 폴란드 1년 예산이네-_-;;) 이 편지를 읽던 드 게클렝은 얼굴을 씨뻘겋게 물들이더니 사자를 향해 씩씩거렸다.
"한판 뜨자."
잉글랜드군도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 듀얼은 디낭의 성 한가운데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잉글랜드측의 기사가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혹자는 그가 캔터베리의 대주교의 동생인 캔터베리의 토마스라고 언급하는데, 실제로는 캔터베리의 토마스는 이 곳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어찌되었건, 20명의 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대적자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곧 드 게클렝과 아무개의 토마스씨는 창을 들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서로의 창과 창이 교차하며 방패에 부딪쳤다. 나무로 만든 창대가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나며 나뭇 조각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둘은 서로 엇갈렸다가 말머리를 돌리며 이제 검을 뽑아들었다. 드 게클렝과 토머스가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검끼리 서로 부딪치거나 혹은 방패로 막으며 둘은 한참 동안 칼부림을 계속했다. 마침내 토머스가 결판을 내겠다고 결심했는지, 드 게클렝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세게 휘둘렀다. 투구를 쓰고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생포할 요량이라면 충분하다. 그러나 오랜 싸움 때문에 손에 가득 찬 습기가 몸을 무겁게 했기 때문일까? 갑자기 검이 훌러덩 빠져나오더니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 아스트랄한 상황에서 게클렝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린 다음 토머스의 검을 멀리 던져버렸다. 사실상 결투는 이것으로 종결되었지만 토머스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말을 몰아 게클렝을 짓밟으려 했다. 위기의 순간, 드 게클렝은 재빨리 다리 갑옷을 풀어 던지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아슬아슬하게 말이 지나치는 순간, 게클렝은 재빨리 몸을 일으킨 뒤 자신의 검으로 말 허리를 깊숙히 찔렀다. 상처에서 피가 튀고 불쌍한 말이 울부짖으며 날뛰었다. 버티지 못한 토머스가 말에서 떨어지자, 게클렝이 몸을 날려 그 위에 올라탔다.
(.......)
게클렝은 토머스의 투구를 벗긴 뒤, 면상에 마구 주먹질을 날리기 시작했다. 아버지한테도 맞은 적 없는데(...그럴리 없잖아-_-) 두 차례보다 더 많이 면상을 두들겨 맞은 토머스가 마침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항복을 선언하자 게클렝은 대적자를 놓아주고 일어섰다. 프랑스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게클렝의 완승이었다! 잉글랜드 측은 약속대로 동생을 놓아주었고, 불쌍한 토머스는 군대에서 쫓겨났다.
이 이후 당연히 프랑스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잉글랜드 측은 물론 공성전에서 실패한건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 못지 않게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기가 오른 랑은 오랫동안 버텼고, 오랜 게릴라전으로 싫증이난 드 게클렝도 깜짝 파티를 열기로 했다. 이번에는 렌의 성 내부에서 조력이 있었다. Penhoet 경은 샤를 드 발루아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자신이 아끼는 부하 중 한 명을 탈주자로 꾸며 성 밖으로 내보냈다. 야음을 틈타 그는 드 게클렝의 진지에 합류했고, 드 게클렝은 한 가지 책략을 주어 이 남자를 다시 성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 남자는 중간에 잉글랜드 군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이것이 게클렝이 바라던 상황이었다. 그 남자는 랭커스터 공작에게 끌려갔지만 천연덕스럽게
드 게클렝과 프랑스 군대의 활약으로 렌의 성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공격을 버텼다. 마침내 1357년 3월 23일, 보르도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랭커스터 공작에게 철수를 명했지만 수 차례 관광 당하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포위를 계속했다. 그는 성 안에 자신의 깃발이 걸리지 않는 한, 결코 물러나지 않겠노라고 만용을 부렸다. 결국 공성전은 7월까지 계속되었고, 수비대와 공격군은 계속해서 지쳐갔다. 먼저 지친 쪽은 수비대였다. 렌 측은 1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항복한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했고, 지쳐있던 랭커스터 경도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성문이 열리고, 랭커스터 경이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드 게클렝이 따라주는 와인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그는 깃발이 성벽에 걸려있는 것을 확인한 뒤, 포위를 풀고 본국으로 떠났다. 물론, 랭커스터 경이 떠나자마자 그 깃발은 시궁창에 버려졌다.
프랑스와 잉글랜도 모두 이 전투를 자신의 승리라고 주장했는데, 특히 이 전투는 프랑스 쪽에게 의미가 컸다. 드디어 푸아티에 전투 이후에 잉글랜드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저지된 전투 인 것이다.
평화의 부재
드 게클렝의 전략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은 랭커스터 경이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에 밝혀졌다. 무려 9개월동안 포위를 통해 랑에게 항복을 받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고로 공성전 공성전 하면 성만 포위하고 있으면 되는 줄 알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무서운 것은 파산신의 강림이다. 공격군도 먹어야 싸울 것 아닌가? 거기에 각종 공성기구라거나 공격 물품, 용병에게 지불하는 돈을 더하면 공격측의 비용도 결코 만만치 않다. 일반적인 잉글랜드식 원정, 즉 짧은 마적질로 약탈품을 바리바리 싣고 돌아온다고 해도 무리였는데-에드워드 3세는 전쟁 시작 고작 반 년만에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_-;;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던 잉글랜드의 전속 은행인 바르디 은행은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쿠데타까지 계획했으나 결국 망했다;;- 과연 랭커스터 경은 멋대로 긁어댄 카드값에 대해 응분의 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길래 멋대로 긁지 말랬잖아!)
그나마 공격군에 비하면 수비대의 상황은 더더욱 비참했다. 지방세가 제대로 걷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제 때에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건 물론, 따분한 수비대 일상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보니 군기가 쑤욱 빠지는건 당연하고 혈기를 못 누르는 기사들은 전투가 하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그러다보니 30인 전투같은 아슷흐랄한 전투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한편, 1350년부터 3년간 브르타뉴의 지배인이었던 윌리엄 벤틀리경은 군기를 강화하고 봉급을 제때에 지급하는 한편, 그의 허락없이는 어떠한 병사도 브르타뉴를 떠날 수 없도록 지정해놓았지만 쉽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의지없는 놈들!)
더군다나 잉글랜드에 대한 프랑스인의 반감과 반란의 기미, 그리고 제 때에 봉급받지 못하는 수비대의 상황 속에서 드 게클렝의 작전은 더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이후 작전에서 드 게클렝은 브르타뉴를 휘젓고 다녔다. 물론 1358년과 63년 두 차례에 걸쳐 잉글랜드 군에게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곧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공식적으로는, 프랑스는 평화였다. 보르도 조약은 2년 동안 유지될 예정이었고, 그 사이에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장 왕의 몸값을 놓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도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여러 지방을 점거하고 있었고, 무법자들과 용병들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영지를 안가리고 약탈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에드워드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행진을 예정했다. 물론 행진에는 대규모 약탈이 수반되었다. 한 차례 순회공연을 벌인 뒤, 그 전과는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브르타뉴 조약이 체결되었다. 장 왕의 몸값은 400만 크라운이 될 것이며, 에드워드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가스코뉴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인정 받게 될 것이었다. 한편, 장 왕은 런던에서 자기 돈으로 럭셔리한 라이프를 즐기다 1차 지불금 40만 크라운이 지불되자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한편, 그의 아들인 샤를은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애처로울 정도로 돈을 긁어 모으며 나라꼴을 정비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나마 선조는 머리라도 좋았지, 이 무식한 아버지를 둔 죄로 광해군보다 훨씬 후덜덜한 상황에서도 황태자 샤를은 어떻게든 프랑스를 유지시켜 나갔다. 특히 그는 아버지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여동생을 밀라노 공에게 거의 팔아 넘기다시피까지 하면서 간신히 돈을 모았다. 그러나 장 왕이 프랑스로 돌아오자, 그는 선량왕이란 별명답게(전에도 설명했지만, 잔치 벌이기를 좋아해서 붙은 이름으로 특별히 선량한 인간은 아니었다.) 아들이 기를 쓰고 모은 돈을 럭셔리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카드값으로 다 써버렸다-_-;; 결국 지불할 돈이 없어지자, 그는 기사도의 화신답게 약속을 지키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아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화려한 생활을 즐기다가 1364년 세상을 떴다. (그정도 포쓰로는 상대가 안돼!!)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는 정중한 예우를 갖춰 시신을 프랑스로 보냈으며, 샤를은 슬픔에 잠겨 부친의 시신을 맞이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샤를이 왕위에 올라 샤를 5세가 되었다. 드디어, 그의 치세에서 프랑스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샤를 5세의 장점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드 게클렝의 전략의 유용함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는 드 게클렝에게 신뢰를 보내며 서서히 군대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샤를 5세가 막 즉위했을 때, 프랑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우선 나바레의 사악왕 샤를-역시 선량왕과 마찬가지로 별 의미없이 붙은 이름이다-이 노르망디 공작의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프랑스의 군사력은 매우 취약했으므로 이는 실질적으로도 강력한 위협이었다. 곧 샤를은 에드워드의 지원을 얻어 부흐의 대성주인 장 드 그레일리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공격했다. 샤를 5세는 도박을 했다. 그는 군대의 지휘권을 드 게클렝에게 맡긴 것이다. 비록 그가 여러 전투에서 멋진 활약을 벌였다고 할지라도 과연 정규전에서도 잘 싸울 수 있을는지는 미지수였다. 두 군대는 1364년 5월 16일, 코크렐(Cocherel)에서 마주쳤다.
코크렐은 노르망디에 있는 소속된 지역으로, 나바레 왕과 대규모의 잉글랜드-가스코뉴 군대의 연합군은 전통적인 잉글랜드의 전술대로 언덕 위에서 강력한 진을 쳤다. 푸아티에 전투 이후 가터 기사단에 가입한 최초의 외국인인 부흐의 대성주역시 지휘관으로서 훌륭한 명성을 휘날리고 있었다. 이들은 언덕 위의 깃발을 집결지로 삼아 포진했고, 언덕 아래에는 드 게클렝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드 게클렝은 오세르(Auxerre) 백작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투 의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기사 30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이들을 선두에 내세워 공세를 시도했다. 이 기사들의 공격은 역시 별 소득없이 격퇴되었다. 한편, 드 게클렝은 군대를 나누어 대규모의 군대는 후방에 대기시키고, 일부 군대를 언덕 위로 올려보냈다. 얼마간 전투가 벌어졌지만, 역시 언제나 그렇듯 프랑스 군대가 무너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악왕은 기분 좋게 추격에 나섰고, 그레일리 경도 역시 추격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한참 추격이 계속되던 시점이었다. 달아나던 프랑스 군이 제자리에서 멈추더니 곧 전열을 돌렸다. 역습이었다! 사실 이런 역습은 말로는 쉽지만, 달아나는게 진짜로 달아나기가 되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비수 전투에서 부견의 100만 대군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전술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드 게클렝의 지휘력과 프랑스 군의 역량을 바탕으로 이들은 추격해 오는 적에게 역습을 감행했다. 역습이 무섭다는 것은, 추격하느라 전열이 흐트러진 부대가 전열을 갖춘 부대와 교전을 하게 된다는데 있다. 여기에 더해 드 게클렝은 후방의 부대를 우회시켜 적의 측면을 들이쳤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연합군이 곳곳에서 무너져 내렸다. 프랑스의 대승이었다!
코크렐 전투를 계기로 드 게클렝은 드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가 단순한 기습전과 공성전 외에도 정규전에서도 훌륭한 솜씨를 발휘한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비록 이들이 완전한 잉글랜드 군은 아니었지만, 프랑스 군은 이 승리로 고무되었고 국왕과 이 비천한 출신의 기사가 훌륭하게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전투들을 보면, 게클렝은 감히 흑태자와 같은 위대한 지휘관과 비교할 역량은 없었던 듯 싶다. 그러나 전 부터 강조했듯이, 그의 진정한 강점은 게릴라 전과 공성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군은 앞으로도 이 방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