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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보중학교15회동창회
 
 
 
카페 게시글
-----♤지보♤♤ 사랑방♤ 스크랩 완담서원 이야기
경광이 추천 0 조회 16 11.04.19 16: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완담서원(浣潭書院)
소 재 지 :  지보면 마산리 629-2
(원소재지 : 예천군 지보면 마산리 629-2)
건 축 주 :  정광필
건축시기 :  1569년
중건시기 :  1998년
이건시기 :  1606년
훼철시기 :  1869년

건축 이야기
건물의 배치 방법은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여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정문과 강당?사당 등을 동일선상에 맞추어 세우고 사당은 별도로 담장을 두른 다른 그 앞에 삼문(三門)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였다. 이 부근에 제사를 위한 제기고가 놓이고, 강당의 앞쪽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두었으며, 강당 근처에는 서고와 장판각 등을 배치하였다. 고사는 강학 구역 밖에 한옆으로 배치한 것이 일반적이다.

건축 배경
완담서원(浣潭書院)은 지보면 마산리에 있다. 이 건물은 1569년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606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1869년 사당이 철거되었는데, 1998년 사당을 중건하였다.

건축 구성
배치는 동재와 서재의 기능을 하는 ‘?’자형의 건물과 강당? 내삼문?사당을 동일 선상에 놓고,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평면은 중당협실형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전면에 개방된 툇간을 두었다.

내력과 기능

관련이야기
- 완담서원
완담서원(浣潭書院)은 지보면 마산리에 있다. 지보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의 하나로 군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용궁군 내하면으로, 조선시대 말까지 용궁군의 내상면, 내하면, 신상면 등 3개의 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용궁군이 없어지면서, ‘지보역’의 이름을 따서 ‘지보면’이라 하여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지보면의 사방 경계는 동쪽은 안동시 풍천면, 서쪽은 용궁면, 남쪽은 풍양면과 의성군 신평면, 북쪽은 개포면과 호명면에 접한다. 마산리는 지보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6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용궁군 내상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예천군 지보면에 편입되었다.

마산리는 ‘마산’, ‘완담’, ‘큰골’, ‘어소’, ‘용포동’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원이 위치한 곳은 ‘완담(浣潭)마을’이다. 완담은 이 근처에 사는 동래정씨의 조상인 정귀령(鄭龜齡)의 묘터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다’는 갈마음수혈(渴馬飮水穴)이므로 ‘완담’이라고 한다 하였다. 그 후손이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하여 가문을 보전하고, 자손이 번창해졌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라고 한다.



관련문서
- 관련 전적
『정 문익공 유고(鄭文翼公遺稿)』

관련인물

관련인물
- 정광필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은 풍양군 청곡리 별실(別室) 마을 출신으로 본관은 동래다.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이고, 정난종(鄭蘭宗)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홍문관부제학,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중종반정(1506년)으로 홍문관 부제학에 복직되어 이조참판, 예조판서,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라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1510년)을 토평하고 돌아와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하고 공을 세우고 돌아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기묘사화(1519년)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 파직되고, 1527년에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 총호사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憘陵)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로 1537년 김해에 유배되었고, 1538년 김안로의 사형으로 풀려났다. 영중추부사로 죽었는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중종의 사당에 모셔지고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과 지보면 마산리의 완담서원(浣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정 문익공 유고(鄭文翼公遺稿)』가 남아 있다.

마을이야기

예천 > 내성천남부권 > 마산리
- 마산리.
마산리는 지보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6㎞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용궁군 내상면(內上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예천군 지보면에 편입되었다. 마산리는 ‘마산’, ‘완담’, ‘큰골’, ‘어소’, ‘용포동’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원이 위치한 곳은 ‘완담’마을이다.

완담(浣潭)은 이 근처에 사는 동래정씨의 조상인 정귀령(鄭龜齡)의 묘터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신다’는 갈마음수혈(渴馬飮水穴)이므로 ‘완담’이라고 부른다 하였다. 그 후손들이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하여 가문을 보전하고, 자손이 번창해졌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라고 한다.

마산(馬山)은 약 600여 년 전 고려 말에 밀양박씨의 한 선비가 이곳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당시 마을 앞산이 나비같이 생겨서 나비는 꽃을 좋아하므로, 산은 나비, 마을은 꽃으로 여겨서 이름을 ‘화산(花山)’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난 후, 그 후손이 마을 주위의 산이 ‘말과 같이 용맹스럽고, 호연지기로 번창하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마산(馬山)’이라고 개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큰골은 ‘동녘지’라고도 불린다. 지금으로부터 50여 전에 처음으로 윤성경(尹成景)이라는 사람이 개척하였다. 양쪽 산이 서쪽을 향하여 길게 뻗어 있어 ‘큰골’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소(漁沼)는 ‘어와실’ 또는 ‘어화’라고도 불린다. 임진왜란 전에 권참봉(權參奉)이라는 사람이 처음 들어와 살았다는 마을로, 내성천과 나부산의 어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고기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마을이름이 지어졌다.

용포동(龍浦洞)은 ‘용이 모이고 날아간다’는 비룡산(飛龍山) 줄기에 내성천이 낙동강으로 합수되는 삼용득수형국(三龍得水形局)의 ‘시물나들이’에 위치하였다. 시물나들이는 ‘세 나루를 세 번 건너 세 번 살펴 보아야(三津·三渡·三省) 마을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19세기에 장복희(張復熙)가 입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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