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년 업적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등의 국민운동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크게 일으키셨고.투철한 애국심과 헌신으로 국가재건에 공헌하셨니다. 가난한 농촌의 아들로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시대 속에서 성장해 온 박정희 대통령... 어려움과 아픔의 세월을 몸소 겪어 왔기에 그 누구보다도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남북의 부모형제가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릴 통일조국의 실현을 희구해왔습니다. 박대통령의 소원은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제건설 없이는 빈곤의 추방이란 없을 뿐 아니라, 경제건설 없이는 부정ㆍ부패의 온상이 되는 실업과 무직을 추방할 수 없고, 나아가,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 즉 자유의 힘이 넘쳐흘러 북한의 동포를 해방하고 통일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박대통령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1ㆍ2ㆍ3ㆍ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서, 공업입국의 터전을 튼튼히 닦아 놓았으며 바야흐로 중화학공업화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선대의 빛나는 전통과 문화를 계승발전 시키고 문예와 학술의 적극적인 창발로 문화한국 중흥에 진력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은 근면ㆍ자조ㆍ협동의 정신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정신혁명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일환으로 우리의 정신문화와 정치제도도 떳떳하게 그 국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분단의 논리가 지배하던 냉전의 대결구조에서 벗어나, 서로 번영을 추구하는 평화와 조화의 구조로 전환하는 세계 조류에 발맞추어 27년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간에 대화의 문을 열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국력배양의 가속화를 통해 번영된 통일조국을 구현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근로와 창의, 생산과 능률의 미덕을 사회윤리의 기본으로 삼고 일하는 국민에게는 안정 속에 보람있는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도록, 근로자의 이익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사회보장제도를 더욱 확충해 나갔습니다. 한민족의 엄청난 저력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도성장을 거듭하여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굳게 다지면서 세계 속의 한국으로 부상하게끔 했습니다. 일상 생활용품까지 우방의 원조에만 의존하던 국내 경제가 자립단계에 도달했고, 소총 한 자루 우리 손으로 만들지 못하던 우리나라 방위 산업을 국산 장거리 유도탄 시대의 막을 열게 함으로써 우리의 국력은 북한을 제압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분단된 국토를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데 신명을 다 바쳤습니다. 저마다 자질과 능력을 살릴 수 있도록 사회 개발정책을 계속 확충해 모든 국민이 밝고 보람찬 생활 환경에서 고루 잘 살 수 는 사회, 온 국민이 추구 하고 있는 생활의 미래상을 앞당기기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켰으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고,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중진국 상위권에 올려놓았습니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을 살다간 박대통령은 물욕은 물론 자신의 재산에 대한 욕심도 전연 없었습니다.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근검, 절약하고 청렴했던 박대통령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이 많습니다. 전기를 아끼려고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두었는데,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고, 대신 창문을 열어두곤 했으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파리를 잡기 위해 손수 파리채를 휘둘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목 부분이 해져 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는 낡은 러닝셔츠를 입었고 몇 십 년을 매었던지 두 겹 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 있는 허리띠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박대통령이 뇌리에 새기고 국민과 함께 나눠 가지려 했던 국방ㆍ경제 표어는 수없이 많습니다. 증산ㆍ수출ㆍ건설, 근검ㆍ절약ㆍ저축, 근면ㆍ자조ㆍ협동, 한 손으로 싸우고 한 손으로 건설하자, 수출입국, 조국근대화, 유비무환, 자주 국방, 부국강병 등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국민정신의 연구ㆍ함양ㆍ진작에 힘써왔습니다. 박대통령이야말로 혁명가ㆍ군인ㆍ교육자ㆍ행정가의 장점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지도자로서 임진왜란ㆍ병자호란ㆍ한일합방ㆍ남북분단, 6.25동란을 거치면서 쇠잔의 길을 걷던 우리 민족에 있어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초석을 확립한 위인으로서 주요 공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수출입국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입안할 당시, 우리 정부는 수출보다는 수입 대체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수입대체산업의 공업화에 따른 외화부족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국가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용단에 따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기본 방향을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경제개발 방향의 재정비는 선진산업국으로 도약하는 시발점인 동시에, 우리 국민을 치열한 국제 경쟁사회로 뛰어들게 한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수출제일주의를 모토로 수출진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64년 부터 매년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 수출진흥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나갔다. 특히 1967?69년도는 수출산업육성에 중점을 두고, 1967년에는 수출산업 기반의 확대, 1968년에는 수출산업의 양산체제 확립, 1969년에는 수출 산업 시설의 현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수출산업 육성에 주력했다. 이런 체계적인 계획을 통해 기업 중 수출특화산업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한편, 수출지원제도 및 행정체제를 개선하고 해외시장 개척의욕을 고취하여, 업계를 수출지향적으로 정비하고 수출추진 체제를 확립하였다. 우리나라 수출정책과 수출독려의 산실은 1966년부터 박대통령이 수출최고 사령관이 되어 매월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였다. 수출진흥회위원과 정부, 학계와 연구기관을 비롯해 수출지원기관과 업계 등 유관기관 대표들 약 250여명이 참석하여 월별, 품목별, 지역별 수출동향을 점검하는 이 회의는 수출증대를 위한 모든 시책과 업계의 애로타개 등의 매월 추진상황을 점검ㆍ보고하여, 수출진흥을 위한 시책과 제도를 하나하나 정착시켜 나갔다. 1979년까지 계속된 이 회의는 수출에 관한 최고전략회의로서 수출진흥종합 시책, 수출계획, 수출촉진제도, 수출독려 등을 논의하여 최종 결정하는 장이 되었다. 우리는 ‘한국의 수출’ 하면 박대통령을 연상하게 된다. 수출입국에 대한 노력의 결과는 점점 가시화되었다. 1962년이래 노동집약 중심으로 한 수출공업화정책이 성과를 나타내며 수출이 급속히 신장되고 고율의 경제성장이 유도되었다. 1962년 5천만 달러이던 수출은 1964년 1억 달러로 급신장을 보였으며, 1968년 5억 달러, 1969년 7억 달러, 그리고 1970년에는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상품 구조면에서도 1차 상품과 공산품의 수출 구성비가 1960년 83.2%대 16.8%이던 것이 1970년에는 공산품이 83.6%로 급속히 높아짐으로써 후진국의 수출구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 10월 유신을 거치며 박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 1,000 달러 소득” 이란 지표를 제시,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을 선언하면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자동차,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을 육성하여 수출의 획기적 증대를 이룩했다. 특히 수출산업의 중화학공업화는 전자산업의 전략적 육성, 조선 공업의 수출산업화, 기계공업의 국산화, 자동차 공업의 수출전략산업화 등에 역점을 두었다. 아울러 수출용원자재의 국산화, 수출취약산업의 육성 등을 통한 수출의 질적 고도화와 종합무역상사의 육성, 그리고 수출자유지역의 설치, 외국인 투자 유치, 중소기업의 수출능력 강화 등 수출산업의 저변확대에도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74년의 석유위기도 수출로 극복하고, 1977년 12월 22일, 당초 1980년 달성키로 한 대망의 100억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앞당겼다.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되는 수출입국 정책의 성공은 우리나라를 가난하고 힘겨운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농경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저개발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더 나아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경제의 부상과 남북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세계13위 무역대국의 위상 역시 박대통령의 수출입국에서 발원하고 있다.
2.경부고속도로건설 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67년 4월 박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대국토건설계획을 발전시켜 고속도로와 항만의 건설 및 4대강(한강ㆍ낙동강ㆍ금강ㆍ영산강)유역의 종합개발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기간 중에 착수하겠다”고 그 계획을 공표하고 나서부터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 고속도로건설이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부정 또는 회의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까지의 우리나라 교통문제를 조사한 IBRD 조사단도 교통 및 수송난을 고속도로망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건의는 물론 방향조차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원대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국가경륜의 일환으로, 1967년 11월 7일 건설부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후 본인 스스로가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국토개발계획을 비롯해 각 노선과 단면도의 비교검토 및 건설비 산출, 용지매수에 따르는 자료 등을 직접 지휘하였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공사비였고 박대통령이 노심초사한 문제도 바로 그것이다. 박대통령은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을 1967년 12월 15일 발족시키고 관련자료 검토와 분석을 거쳐 3백억원 선이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68년 2월 5일 제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건설 재원확보 계획을 확정했다. 1968년 2월 1일 원지동에서 서울?부산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첫 발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어 4월 3일 오산?대전간 공구(1백 6.6㎞), 9월 11일에는 대구~부산간(1백23㎞), 마지막 난공사 공구인 대전~대구간(1백 52㎞)은 1969년 1월 13일에 착공되었다. 재원확보 다음의 난제는 건설장비의 도입 문제였다. 정부는 비상조치로서 미ㆍ영ㆍ불ㆍ스웨덴 등의 유명업체와 협의하여 건설회사부담의 상업차관으로 도입하였다. 가장 난공사였던 대전~대구간은 전 노선의 약 3분의 1인 1백 52㎞이지만 토목공사는 전체의 약 47%, 절토량은 약 50%, 장대교는 17개소로 60%, 그리고 터널은 전체의 90%가 이 구간에 몰려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난관을 겪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재터널 공사가 가장 난공사로서 13회에 걸친 낙반 사고와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공기에 차질을 빚었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서울~부산 천리간에 거창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는 헬리콥터로 혹은 지프를 타고 수없이 현장을 시찰하며 공정을 살피고 현장 관계자와 인부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박대통령 친필의 ‘고속도로 구상도’, ‘서울~부산선 축선 확정도’, ‘용지 매수계획에 관한 노트’, ‘감독반 구성에 관한 지시’, ‘공정계획표’, ‘연도 조경을 지시한 메모’ 등은 박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건설 시초부터 완성까지 시종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세세히 알게 해 준다. 착공한지 2년 5개월만에 당초 3백 30억원으로 예상했던 공사비는 설계변경과 물가상승 등으로 4백 29억원,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 약 9백만명 및 장비 1백 65만대가 투입된 총 연장 4백 28㎞의 단군이래 최대토목공사인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드디어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교통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새로운 일대도약의 전기를 마련했고 전국을 하루생활권으로 묶음으로써 국토 및 국민생활의 균형적 발전을 이룩했으며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각을 전 국민에게 일깨워 집약된 국력으로 1980년 목표했던 1백억 달러 수출, 1천 달러 소득을 3년이나 앞당겨 달성하는 기적을 낳게 했다. 박대통령은 京仁, 경부, 호남, 남해, 영동, 동해, 구마, 언양~울산간 의 8개 고속도로를 완공시켜 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내세운 “조국근대화의 기본설계의 하나인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ㆍ강릉ㆍ부산ㆍ목포를 잇는 기간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지켜 전 국토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고속 도로망을 구축함으로써 전 국토를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부산~마산간 고속도로는 1978년 5월에 4차선으로 착공되어 박대통령 서거 후인 1981년 9월에 준공되었다. 박대통령이 단행한 2차선 고속도로의 4차선 폭 용지확보, 접도구역의 통제, 그리고 그린벨트의 설치와 엄수는 우리나라 국토개발 백년대계와 후세를 위한 위대한 선견지명이요 영단이라 하겠다. 박대통령은 한국형 고속도로의 건설원칙, 즉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고속도로 건설의 아이디어를 착안해내고 실천하였다.
3. 새마을운동 아직도 근대화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어려운 농촌, 이곳을 박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잘사는 마을로 만들자는 물결이 급속하게 전개됐으니,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1970년 10월 전국 농어촌 3만4천6백65개 부락에 300여 부대의 시멘트와 철근1톤씩 무료로 배급되었다. 반드시 마을의 공동사업으로 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배분된 이 시멘트들은 마을진입로의 확장과 농가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등에 사용되었는데....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정부의 기대를 훨씬 웃도는 성과를 가져왔다. 마을 주민들은 정부에서 배분한 시멘트에 자신들의 노동력을 투자하여 마을 공동사업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1차 연도의 새마을사업이다. 그 후 박대통령은 근면, 자조, 협동하여 우수한 성과를 올린 마을부터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세우고, 주민들의 참여도에 따라 전국 3만5천개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1972년 제2차 새마을운동 때에 박대통령은 반응과 성과가 좋았던 1만6천6백개 마을에만 지원하고 잔여 1만8천여 마을에는 지원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이는 해묵은 농민들의 의타심을 고치고 자조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무기력하고 태만하던 농민에게 경쟁심과 협동정신을 주입시켜 노동의욕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에서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하여,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승화, 지속시켰다. 새마을운동은 환경개선사업부터 시작했으나 그 저변에는 농민들의 자립ㆍ자조정신을 일깨우자는 뜻이 담겨있었기에 정신계발, 소득증대 등과 함께 삼위일체로 추진되었다. 특히 소득증대사업으로 농촌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가소득은 1974년부터 도시노동자 소득을 상회할 만큼 되었고 1977년에 이미 1981년 소득목표액인 140만원에 도달하였다. 모든 마을에 자동차가 드나들게 되었고, 모든 작은 하천에 둑이 개수되었으며, 예전의 볏짚지붕은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농가에 간이상수도 시설이 설치됨은 물론이고, 전 국토 어디에서나 전기불이 들어왔으며, 모든 법정 리, 동까지 전화가 가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마을에 마을회관이 세워져서 그야말로 살맛 나는 농촌으로 탈바꿈 하였다. 그 결과 새마을운동 10주년에 해당하는 1980년 4월까지, 정부 투입 자금 2조7천5백21억원, 운동참가 연인원은 약 11억명, 새마을회관 3만5천9백 50개소, 신설농로 4만4천㎞, 폭을 넓힌 마을도로 4만㎞, 신설용수로는 4천4백 40㎞가 이뤄졌다. 농촌새마을운동은 더 나아가 사회 전역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도시주민들은 농촌 새마을운동이 마을의 모습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태도나 마음가짐까지 함께 달라지게 된 것에 더욱 감명을 받았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실시해 온 남녀 새마을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이 공직자나 사회지도급인사들에게도 확대되어, 새마을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했다. 도시주민은 도시생활에 맞게, 학교는 학교대로, 기업인들은 공장새마을운동 확산, 추진에 앞장섰다. 이런 새마을운동의 물결은 기업 분위기와 농촌 여성 지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의 기업인들이 농민과 함께 새마을교육을 받은 후, 종업원들의 복지후생에 많은 노력을 하게 됐으며, 농촌여성들의 발언권과 지위는 새마을 운동에 의해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가난의 악순환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왔던 우리 국민에게 짧은 기간에 자신감과 자부심을 안겨준 새마을운동... 순전히 박정희 대통령 개인적 구상에서 범국민적으로 번진 새마을 운동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잘사는 농어민, 잘사는 내 고장, 번영된 조국’을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새마을사업 추진을 위한 의사결정을 주민총회에서 결정케 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의식을 실천적으로 정착시키는 계기조성과 함께 민주화의 기초를 닦게 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마을운동을 민주주의 훈련도장이라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4. 치산녹화 1960년대 당시 우리의 국토는 그야말로 벌거숭이였다. 과거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헐벗은 산에는 터전을 잃은 동식물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하지만 현재... 과거와 같은 산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푸르름이 눈이 부실 정도로 녹음이 우거진 대한의 산야... 이는 박대통령의 치산녹화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림황폐는 조선조 중반부터 인구증가와 국가의 산림관리능력 상실이 그 원인(遠因)이다. 여기에 한일합방과 일제말기부터 시작된 전쟁물자의 조달, 해방 후의 인구증가, 6.25 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를 위한 자재수요의 증가,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임산 연료 이외에는 대체연료가 거의 없었던 사회상황이 민둥산을 만들어내는 주범이었다.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한 우리나라 특유의 온돌은 막대한 양의 나무를 소비한다. 산림이 황폐해지면서, 우리 인간 생활은 물론 자연생태계도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복구할만한 국가의 산림관리기능 실종까지 가세하여 산림자원이 더욱 황폐화되어 갔다. 해방 직후 ‘사방사업 10개년 계획(1948~57)’과 전쟁 후인 1951년에 ‘산림 보호임시조치법’과 같은 복구노력이 있긴 하였지만, 재원과 기술 부족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본격적인 복구노력은 1961년의 ‘산림법’을 제정하여 3공의 전신이 총력을 기울인 사방사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어 ‘치산녹화 7개년계획(1965-1971)’과 ‘제1ㆍ2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 등이 세워져 치산치수정책이 추진되었다. 봄철 식목일 외에도 가을철에 ‘육림의 날’을 휴일로 정하여 온 국민이 나무를 심고 가꾸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3년 박대통령은 녹화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농림부 산하의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시킨 데 이어 연두기자회견에서 10년 이내 국토녹화를 완성할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식목 및 육림 현장을 수시로 직접 찾아 지도 격려했다. 치산녹화과정에서 사방사업 사상 최대의 난공사이며, 단일지구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 있었으니, 바로 영일지구 사방사업이다.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중에 실시된 영일지구는 일본에서 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할 때 관문으로 그 어느 곳보다도 민둥산의 모습이 흉물스러웠던 곳이다. 그런데, 지질구조상 한번 황폐되면 복구가 어려운 곳이어서 그 동안 50여 회에 걸쳐 소규모 사방사업을 실시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번 번히 복구에 실패한 곳이었다. 2-3년 내에 완전 복구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우량한 종자와 묘목을 선정하여 파식하고, 개량공법 등을 적용해 녹화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특히 황폐지에 노출된 암반의 등고선으로 단을 끊고 단상에 구덩이를 파고 객토를 하여 묘목을 식재 한 후, 3년마다 한번씩 추비를 주어 사방지 사후관리도 철저히 함으로써 영일지구 사방사업은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풀 한 포기 없는 벌거벗은 4,538ha의 집단 황폐지가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성공으로 완전 복구되었다. 치산녹화사업은 제1차 계획기간에 100만ha에 21억 본을 심기로 한 목표로 4년 앞당겨 108만ha에 29억 본을 식재했으며, 78년에 목표량을 초과 달성하여, 새로 2차 계획을 수립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 나무는 일부 산간오지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산림녹화운동 기간에 심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는 전국토의 어딜 가도 푸른 산을 쉽게 만나볼 수 있고, 독일, 영국,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 4대의 조림 성공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 최대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21세기... 치산녹화의 성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시대를 거슬러 현재에도 남아있다.
5. 중화학공업육성 1962년 이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공업입국ㆍ수출제일주의에 기반을 둔 경공업의 수출산업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근대화된 공업구조가 정착되고 중화학공업의 기반도 조성되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경제개발이 단순한 5개년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1980년대 1인당 GNP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경제개발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공업구조개편론”을 성안하고 1973년 박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추진선언과 함께 과학화운동전개를 강조했다. 1960년대의 정책이 공업입국, 수출제일주의였으며 1970년대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위한 중화학 공업화였다. 이를 위해 ‘중화학공업위원회’와 ‘기획단’을 두고 선진 산업국으로 나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 공업 등의 6개 업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화의 기본 바탕이며 중심이 된 포항종합제철, 아연ㆍ동ㆍ연ㆍ알루미늄 등 4대 전략품목을 육성할 수 있는 온산비철금속공업기지, 천혜의 기후조건과 항만, 그리고 양질의 인력을 바탕으로 한 옥포조선공업, 품질과 가격면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기계류와 플랜트의 국산화에 기여한 창원 기계공업기지, 반도체, 컴퓨터 산업 등의 고도정밀 전자기기 산업기지인 구미전자공업단지, 석유화학제품의 국내수요 충족과 비약적인 수출증대의 기반을 마련한 울산과 여천 석유화학단지들이 바로 당시 중화학공업 추진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중화학공업 정책이 추진되기까지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종합제철 건설의 경우 경제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반대의 벽에 여러 번 부딪혔으나, 박대통령의 단호한 추진력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놓았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진행되면서 관련 과학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대덕에 업종별로 전문연구단지가 들어서고, 산업기지별 실용연구소가 만들어 지면서 장기 기초연구를 수반한 전문연구가 추진되어 나갔는데, 이들은 모두 오늘날 기초 과학연구의 기반이 되고 있다. 중화학공업을 이끌어 나갈 기술인력 양성 노력도 함께 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기술교육제도를 도입하여 공고교육에 의한 기능사, 대학 교육에 의한 기술자를 양성하고, 현장에 맞는 일반 기능공 양성을 위해서 각종 직업훈련원 등을 설치 운영하였다. 이와 함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우리의 방위산업을 선진국형 체제를 갖추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미국의 대한방위 공약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탈피해 자주국방 태세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우리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80년대 경제 미래상으로 제시된 1인당 GNP 1,000불과 수출 100억불을 당초 계획보다 3년이나 앞당겨 1977년에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세계적인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공업화, 특히 중화학공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화의 획기적인 도약이 없었다면 한국의 산업과 경제는 현재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핵심이 바로 중화학공업이다.
6. 자주국방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남한보다 월등한 군사력으로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의 군사도발과 위협은 극심하였다. 북의 남침 위협을 저지하고, 무력침공 야욕을 근원적으로 포기케 하기 위해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의 확보가 우리에겐 절실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계획의 일차적인 목표는 "부국강병"에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에 부심한 기간이었다. 당시 북한은 총기류는 물론 화포와 대포, 군함, 잠수함까지도 생산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소총 한 자루 못 만드는 실정이었다. 북한에 병기산업이 뒤져있던 상황에서 박대통령은 무기생산을 계획하고, 무기생산의 소재가 되는 중화학공업을 더욱 육성시키면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여하한 무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 ‘여하한 무기도 규격의 소재를 설계대로 정확히 가공해서 결합하면 소정의 성능과 호환성을 갖출 수 있다’는 소신 아래 무기의 부품별, 뭉치별로 82개의 생산공장을 지정하되 평상시에는 그 공장능력의 80%는 민수용으로, 20%만 방산용에 충당토록 하여 평시 경제성을 제고시키고 유사시에는 전 능력을 방산에 충당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79년 말에는 최신 첨단무기를 제외한 재래식 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군의 기본 병기인 155mm 곡사포, 20mm 대공발칸포, 4.2인치 박격포, 3.5인치 로켓포 등 각종 화기와 5백MD 다목적 헬리콥터와 산악전용 경장갑차, 그리고 각종 실ㆍ포탄류의 양산체제가 갖추어졌다. 특히 1978년에 들어와서는 미 탱크와 동일한 화력과 기동력을 지닌 전차를 양산하고, 마침내 9월에는 평양까지 도달하는 한국형 지대지 중장거리 유도탄을 개발, 시험발사에도 성공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유도병기 등 각종 고도정밀병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됨으로써, 독자적인 한국형 무기체계의 개발과 무기성능의 개량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방위세 신설, 향토예비군과 민방위대 창설, 병기개발위원회를 통한 국산신무기개발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초를 닦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우리 군은 역사상 최초로 해외파병을 단행했다. 국군의 월남파병은 국군의 사기와 긍지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력 증강과 국가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미군 철수 문제를 고심하던 박대통령은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1978년 한ㆍ미 연합사령부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한ㆍ미간의 긴밀한 협력 하에 통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재임기간 중 미군 철수와 호전적인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라는 위기상황에서 국가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국가안보를 정책의 최상목표로 설정하고 자주국방을 적극 추진했다. 오직 자주국방의 일념으로부터 출발한 방위산업의 기반은 이제는 오히려 해외에 기술과 제품을 역수출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안보와 국방에 대한 집념은 오늘날 막강한 국군 육성으로 국가안보의 초석과 토대가 되고 있다.
7.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 창달 문화는 한 나라와 민족의 뿌리이며 정신이다. 수없이 많은 외침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그 힘은 무엇이고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느냐? 민족의 저력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질문과 해답이 박대통령의 모든 의식의 출발점이었다. 1ㆍ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국민소득 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국가재정에 여유가 좀 생기자 박대통령은 지금이야말로 국민들에게 우리 전통문화의 유산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계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호국과 관련된 유적을 보수ㆍ정화하였다. 그 속에 어려있는 호국자주 정신을 계발, 우리 국민들이 자주자립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함이었다. 다음, 신라의 삼국통일정신이 앞으로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통일전을 조성하고 전국 각지 선열의 유적들을 보수ㆍ정화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사상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온 선현들의 유적도 보수ㆍ정화하였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신화 유적에서부터 삼국시대와 고려ㆍ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민족 사상의 뿌리를 일깨우고 정립한 선현들의 유적들을 보수ㆍ정화하여 우리 민족문화를 재발견하고 자주성을 선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일반적인 전통문화유적에 대한 보수ㆍ정화와 보존전승사업도 함께 했다. 우리 고유의 문화적 바탕 위에서 외래 문물을 수용, 이를 독창적으로 창조 발전시킨 전통문화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선사시대와 신라ㆍ백제 문화의 연구ㆍ조사ㆍ발굴ㆍ보존사업들은 그 동안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우리의 문화사를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새로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은 문화보존을 위한 각종 사업과 함께 민족문화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할 문화시설도 건립하였는데, 경주ㆍ공주ㆍ부여박물관을 비롯해 국립중앙 박물관, 국립극장들도 모두 이 시기에 탄생된 것들이다. 1962년엔 ‘문화재보호법’이 처음 제정되면서, 음악, 연극, 춤 등의 무형문화재와 민속문화재를 문화재의 범주에 포함하고 법으로 지정해 보호받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유적총람>을 작성, 오늘날 문화재관리행정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호국정신의 계승이라는 연장선상에서 국적 있는 교육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국적 있는 교육의 발판을 마련하고, 한국적 가치관의 정립과 체계화를 위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창립, <민족문화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국적 있는 교육은 곧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새마을운동과 연계 되면서 국민적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국가개발지도이념으로 발전돼 나갔다. 그밖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민속박물관 개설, 1979년에는 해외공보관 산하 해외한국문화원을 일본, 미국, 프랑스의 수도에 각각 설치해 일찍부터 한국문화의 해외선양, 보급에 힘썼다. 찬란했던 전통문화를 하루속히 복원해 국민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을 일깨워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겠다는 박대통령의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창달 이념은 지금도 우리 민족이 살아가고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생명력으로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다.
2] 연인...아내...그리고
청와대 안주인의 역할과 이미지는 대통령의 국정수행능력에 버금가는 국민들의 관심사다.
이번 대선에서도 많은 유권자들, 특히 여성 유권자의 90%가 후보 부인을 보고 누구에게 표를 찍을 것인지 결정하겠다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육영수 (陸英修) 여사는 특유의 한국적인 이미지와 대통령 부인으로서 잡음 없는 내조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람직한 대통령 부인상 (像) 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에게 시중의 소문을 전해주고 충고를 아끼지 않은 '청와대 내의 야당' 이었으며 朴대통령의 그늘 속에서 소리없이 사회봉사활동을 한 조용한 내조자였다.
대통령 박정희에게 저항하던 인사들조차 陸여사의 인품에 대해서는 고개를 숙였다. 26세의 처녀 육영수는 처음 '멀대같이 키만 큰' 여자로 박정희에게 다가왔다. 결혼생활중에는 '마음의 어머니' 였으며 陸여사 서거 이후에는 '영원한 연인' 이었다.
옥천 처녀 육영수가 선산 출신 박정희를 만난 것은 1950년 8월 피난지 부산에서였다. 중매자는 陸여사의 이종육촌 오빠 송재천 (宋在千.78) 씨. 宋씨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이기도 하다.
맞선 두달 뒤인 10월 대구에서 약혼식, 다시 두달 뒤인 12월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반대한 陸여사의 부친은 끝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아 이날 신부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은사인 김영기 선생이 인도했다.
박정희 34세, 육영수 26세. 陸여사는 1925년 충북 옥천에서 1남3녀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만석꾼 집안으로 당시로선 드문 승용차에다 농사용 트럭이 따로 있었다. 부친이 취미로 제작한 16㎜ 필름으로 집안에서 영화를 볼 정도였다.
부친 육종관 (陸鍾寬.65년 작고) 씨는 본부인 (李慶齡.76년 작고) 외에 소실 7명, 자식만도 16명이나 됐다. 서울 배화여고 재학시절 陸여사는 한 소실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동창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창시절 陸여사는 늘 쓸쓸한 표정에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전쟁중이라 신혼부부는 한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다. 박정희는 결혼 3일만에 신부를 남겨두고 전선으로 이동했다.
틈틈이 陸여사가 면회를 가기는 했지만 이같은 생활은 53년 7월 휴전 때까지 계속됐다. 53년 3월 박정희는 꿈에도 그리던 '별' 을 달았고 52년에는 맏딸 근혜가 태어나 집안엔 활기가 돌았다.
그러나 이듬해초 박정희는 6개월간 미국 포병학교로 교육을 떠났다. 귀국 직전 박정희의 일기 한토막. "…인천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을 영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근혜를 안고 '근혜 아빠 오셨네' 하고 웃으면서 나를 반겨 맞아줄 영수의 모습!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다.
" (54년 6월14일) 박정희의 아내 사랑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 이상이다. 그 사랑은 74년 陸여사 서거후 진면목을 드러냈다. 아내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이 무렵 박정희는 거의 시인이 돼 있었다.
...
"…해마다 여름이면/그대와 함께 이 섬을 찾았노니/모든 시름 모든 피로 다 잊어버리고/우리 가족 오붓하게/마음껏 즐기던 행복의 보금자리/추억의 섬 저도 (猪島) /올해도 또 찾아왔건만/아, 어이된 일일까/그대만은 오지를 못하였으니/그대와 같이/맨발로 거닐던 저 백사장/시원한 저 백년 넘은 팽나무 그늘/낚시질하던 저 방파제 바위 위에/그대의 그림자만은 보이지 않으니…. " ( '저도의 추억' .75년 8월) 陸여사를 그리며 쓴 박정희의 시와 일기는 '독재자' 의 인간적 측면을 보여준다.
박정희는 아내 사랑을 글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다. 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아내의 초상화를 쓱쓱 그리기도 했고 지방순시중에도 불쑥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아내를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박정희식 아내 사랑법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대통령 부부에게만 쓰게 된 호칭이 있었다. '각하' 는 그전엔 장성들의 일반적인 호칭이었지만 점차 박정희 1인에게 국한된 것으로 바뀌었다.
영부인이란 호칭도 70년대 중반부터는 陸여사에게만 붙여 부를 수 있었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陸여사에 대한 호칭은 흔하디 흔한 '사모님' 이었다. 청와대생활 초기 동창생들은 '영수야' 하고 불렀으며 나중엔 '陸여사' '근혜 엄마' 로 돌려 부르긴 했지만 친한 동창생들과는 호칭은 물론 사생활까지 트고 지냈다. 60년대 후반 '경모 (敬母) 님 소동' 은 이런 과정에서 나온 해프닝이었다.
당시 한글학자 H씨가 청와대에서 陸여사를 '경모님' 이라고 부른 것이 신문에 짤막하게 보도된 적이 있다. 이를 본 모 변호사가 '陸여사는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기저귀 냄새를 풍겨야 제멋' 이라고 쓴 것. 이 글을 읽은 陸여사가 "하필 기저귀 냄새냐" 며 청와대 대변인에게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이 얘기를 들은 朴대통령은 '그런 것은 신문에서 세게 때리시오' 하면서 출입기자들 앞에서 오히려 陸여사의 약을 올리기도 했다.
'영부인' 이란 호칭에 얽힌 일화 한 대목. 언젠가 陸여사가 가수 이미자씨의 레코드 판 한장을 산 것이 보도된 후 백화점에 들른 적이 있었다.
한 여직원이 "영부인님, 이것도 하나 사주세요" 하고 물건을 내놓자 대뜸 陸여사가 "싫어요. 근혜 엄마라고 하면 몰라도 영부인이라고 하니까 깎지도 못하잖아요" 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다.
매사에 너그럽고 인자했던 陸여사. 그러나 남편 때문에 속 썩기는 여염집 부녀자와 마찬가지였다.
56년 7월 박정희 준장이 5사단장을 마치고 진해 육군대학에 입교할 무렵의 얘기다.
陸여사가 남편을 따라 진해로 이사가는 것을 거부하고 나선 것. 떨어져 살아도 남편의 불미스런 얘기가 다 들리는 판에 한집에 같이 살면 그것을 어찌 보겠느냐는 것이었다.
주위의 설득으로 결국 진해로 떠밀려 가다시피 했다. 당시 육대 (陸大) 는 전반기 교육이 끝나면 시험을 봐 60점이 넘어야 후반기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는데 탈락하면 원대복귀는 물론 진급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시험이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술타령을 하다 시험을 망쳤다.
몸이 달아오른 사람은 오히려 陸여사였다. "어느날 퇴근해보니 陸여사가 집으로 수박을 사가지고 오셨더군요. 당시 저는 총장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교육생들의 시험관리와 채점을 맡고 있었는데 어디서 그 얘기를 들으셨던 모양입니다.
" (H씨 증언) 청와대행 이후 陸여사는 대통령부인에 걸맞게 자신을 갈고 다듬었다. 박정희의 군시절 陸여사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몇년후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라야 했다.
陸여사는 남편의 여자문제로 평생 속을 끓이면서 살아야 했다. 朴대통령과 술자리에서 자주 어울렸던 K.P.L씨등은 그래서 陸여사로부터 더러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대통령 호주머니에서 립스틱이 묻은 손수건이 나오느냐" 는등의 이야기였다.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옆사람에게 '형님' 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朴대통령은 종종 와이셔츠나 손수건에 립스틱을 묻혀 들어가기도 했다.
陸여사는 한 나라의 대통령인 남편의 그런 모습이 싫었다. 한번은 陸여사가 '현장' 을 덮친 적도 있다. 70년대 초반 인기 절정의 모 여배우를 朴대통령이 청와대 인근 한 기업체 사장집에서 몰래 만난다는 정보를 들은 陸여사가 그 집을 찾아갔다.
방문 앞에서 "나예요, 문 열어요" 하고는 朴대통령과 맞부닥친 적도 있다. 체면 없기는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陸여사의 결혼생활 24년은 박정희를 향한 기다림과 인내의 세월이었다.
朴대통령의 말년 여성 편력은 陸여사란 '통제장치' 가 사라지면서 육욕 (肉慾) 의 탐닉으로 줄달음질한다. 중앙정보부와 청와대의 어떤 이는 탤런트와 배우, 모델과 가수중에서 박정희의 하룻밤 '수청' 들 대상을 찾아 대령하는 '채홍사 (採紅使)'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박정희시대의 공과 (功過) 를 따지고 오늘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취지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첫부인과의 불행한 결혼이후 여성을 향해 끊임없이 방황했던 박정희는 陸여사를 만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그의 삶도 화려하게 꽃피었다. 陸여사가 74년 흉탄에 쓰러지면서 박정희도 절대권력의 부패 속에서 시들어갔다.
38.집념과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 추종자들은 그를 세종대왕이나 충무공 이순신 (李舜臣.1545~98) 장군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뚜렷한 공과 (功過) 를 남긴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를 영웅화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역사적 평가는 후대의 몫이다. 박정희는 재임중 충무공을 유별나게 떠받들었다. 아산 현충사 관리소장의 직급은 충무공에 대한 박정희의 성심 (誠心) 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의 재임중 현충사 관리소장 12명중 6명이 1급 상당이었다. 충남지역에서는 차관급인 도지사 다음인 서열 2위의 공직자였다. 조선시대 왕릉을 관리한 능참봉이 품계중 가장 낮은 종9품이었던데 비하면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68년 1월8일 朴대통령은 이례적인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 '난중일기 (亂中日記)' 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나 훔친 사람은 오는 17일까지 청와대 특별민정반에 연락 또는 자수해 줄 것이며…자수하는 자에게는 그 죄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 임진왜란때 충무공이 기록한 '난중일기' 원본이 보관중이던 현충사에서 사라진지 1주일 넘도록 범인을 잡지 못하자 대통령이 직접 도둑에게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이틀 뒤인 1월10일 오전 신범식 (申範植) 청와대 대변인은 출입기자들에게 "朴대통령의 얼굴이 오늘같이 밝은 것은 요 며칠새 처음" 이라고 전했다. 범인들은 특별담화 하루만에 부산에서 시민 제보로 붙잡혔다.
이날 저녁 청와대 만찬석상. 집권 공화당 길전식 (吉典植) 사무총장.김진만 (金振晩) 원내총무.김재순 (金在淳) 대변인등 주요 당직자들은 朴대통령의 질책성 주문부터 들어야 했다.
"마이크로필름에 찍어 분산보존시켜 원자탄이 떨어지더라도 건재할 수 있도록 하시오. 보존대책이 마련될 때까지는 '난중일기' 를 청와대에 보관할 것이오. " 관련부처가 부랴부랴 특별법을 제정한 것은 물론이다.
박정희 사후 이순신 장군 후손들이 서울신당동 박정희 사저를 찾아가 유족들에게 "땅속에 묻혀 있던 충무공을 끄집어내 밝혀주신 분이 朴대통령" 이라고 고마워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맏딸 朴槿惠 정수장학회 이사장) .충무공이 4백년 시차를 뛰어넘어 '성웅 (聖雄)' 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박정희 시대였다.
이맹기 (李孟基.72.대한해운그룹 회장) 전 해군참모총장은 박정희를 아예 "4백년만에 되살아난 이순신 장군" 이라고 말할 정도다. 박정희의 충무공 섬기기는 5.16 직후부터였다.
그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 명실상부한 최고 실권자로 등장한지 며칠 안된 61년 7월 어느날. 5.16때 민간인으로 거사자금을 조달한 김용태 (金龍泰)가 장충동 의장공관을 노크했다.
그는 노산 (鷺山) 이은상 (李殷相) 선생이 주도하던 충무공기념사업회에서 사무국장을 지내는등 열렬한 충무공 추종자였다.
김용태 (71.전 공화당 원내총무.현 동서문화교류협회 회장) 씨의 회고. "막상 거사는 성공했는데 국민정서를 하나로 묶을 방안이 없어 고심하던 시기였지요.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난중일기 국역본 '충무공전서' 를 갖다 드리며 '이순신 장군의 애국애족정신을 국민정신의 귀감으로 삼자' 고 아이디어를 냈지요. " 박정희는 시름에서 확 깨어나는 표정이었다.
"맞아, 그거야. 李충무공 정신이야말로 천추에 빛나는 우리의 국민정신일세. 국민들의 정신무장을 반공 일변도로만 할 것이 아니야. " 박정희는 즉석에서 "현충사를 성역화하자" 는 김용태의 제안에다 "충무공탄신일 기념행사도 내년부터 아산군청에서 모시도록 하라" 고 자신의 아이디어까지 보탰다.
그러나 기념행사를 아산군청이 맡은 것은 62년 한해뿐. 박정희의 지시로 63년엔 충남도청, 64년엔 국방부, 65년 이후엔 아예 정부가 주관하는등 행사의 격이 거듭 높아졌다.
朴대통령이 꼬박꼬박 참석했음은 물론이다. 육영수여사 서거이후 외부행사 참석을 자제하느라 75년 딱 한번 행사를 거르긴 했으나 며칠뒤 둘째딸 (書永.43.육영재단 이사장).아들 (志晩.39.삼양산업 대표) 과 함께 참배하고는 현충사 직원들에게 "지난번에 오지 못해 미안하다" 고 사과한 일도 있었다.
69년 9월 마무리된 현충사 성역화사업은 약 30억원이 투입된, 당시로선 대역사였다. 이순신 장군의 15대 후손으로 현충사 운봉분소장인 이재왕 (李載旺.53) 씨는 "중수식때 朴대통령께서 '이제야 충무공을 떳떳이 모실 수 있게 됐다' 며 직원.수행원들에게 '오늘같은 날 한잔씩 안주느냐' 고 하시며 앉은 자리에서 제주 (祭酒) 를 23잔이나 받아 드셨다" 고 기억했다.
77년 대종상을 받은 영화 '난중일기' 에 얽힌 일화 한토막. 박정희의 지시로 만든 이 영화는 개봉전 청와대에서 시사회를 했다가 朴대통령의 지적사항을 고치느라 대종상 시상식 날짜마저 연기해야 했다.
제작및 주연을 맡은 원로배우 김진규 (金振奎.74.제주 베버리힐즈호텔 회장) 씨의 회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가며 보시던 그분이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이순신 장군이 감옥갔다 나오실 때 아산 어귀에서 막내아들과 껴안는 장면, 그거 틀렸어요. 아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해야지, 그건 요새 미국식 아니오. 마지막 장면도 그래요. 장군께서 돌아가셨다고 북을 치고 있는데 다른 배들이 장선 (將船) 으로 모여들어야지 멀뚱멀뚱 산재해 있으면 안돼요. 다시 만드시오' 그러십디다.
우리도 전문가들을 모셔놓고 일곱번이나 예비 시사회를 갖고 이만하면 됐다 싶어 보여드린 것인데 대번에 꼬집어내시더라고요. " 박정희가 집권 후반기 몇년동안 쓴 대학노트 5권 분량의 일기는 마치 '난중일기' 를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크메르.라오스에 이어 베트남마저 적화돼 "다음은 한반도 차례" 라는 안팎의 불길한 목소리들이 높아가던 75년 4월30일 밤, 박정희가 조국 사수의 결의를 다지며 써내려간 일기. "충무공의 말씀대로 필사즉생 필생즉사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과거 수천년동안 영고성쇠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나라다…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못 지킬리 없으리라. " 박정희와 충무공의 만남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민지청년 박정희는 셋째형 상희 (相熙.대구폭동사건때 사망) 씨로부터 춘원 (春園) 이광수 (李光洙) 의 소설 '이순신' 을 구해 읽으며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고 한다.
박정희를 다룬 전기류에는 그가 문경보통학교 교사시절 제자들에게 몰래 충무공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대목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러나 정순옥 (鄭順玉.71.여) 씨등 박정희의 문경학교 제자들은 "그런 기억이 없다" 고 말했다. 박정희가 충무공에게 심취한 것은 군인의 길로 들어선 뒤였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군신 (軍神)' 도고 헤이하치로 (東鄕平八郎) 원수조차 러시아 함대와의 일전을 앞두고 충무공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등 충무공이 일본에서 더욱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박정희는 집권후에도 "일본×들까지 적장인 이순신 장군을 그토록 존경하는데 우리가 넬슨 (영국의 유명한 해군제독) 이 어떻네 하는 것은 사대주의" 라고 비판하곤 했다.
박정희는 나아가 충무공으로 상징되는 호국정신을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지렛대라고 생각했다.
70년부터 79년까지 청와대 사회담당특보와 대변인을 지낸 임방현 (林芳鉉.67) 씨의 증언. "朴대통령은 '현충사 같은 호국문화재를 복원, 성역화해 후세들이 보게 하면 뜬구름 잡는 식으로 주체사상이네 뭐네 안해도 자발적으로 애국심이 우러나는 거야' 라고 일소에 부치곤 했지요. 그런 점에서 朴대통령은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 77년 5월 영릉 (세종대왕릉.경기도여주) 중수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박정희가 동승한 김성진 (金聖鎭.66.대우경제연구소 회장) 문공장관에게 털어놓은 내심. "참 잘됐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 그럼, 임금이라고 다 같은 임금인가' 라고 뿌듯해 하시더니 '사람들이 내가 무인 출신이라 충무공만 치켜세운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李장군이 안계셨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있었겠어' 라고 말꼬리를 돌리시더라고요. " 그의 가슴을 송두리째 점령한 우상은 어디까지나 충무공이었던 것이다.
39.새마을 운동
지금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평가를 받는 새마을운동. 마을길을 새로 닦고 공장을 지었으며 농가수익 증대사업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당시엔 반강제로 농가 지붕을 붉고 푸른 슬레이트로 바꾸도록 하는등 외형적인 성과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운동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국민들의 자주적 능력을 약화시켰다" 는 지적이 있는 반면 "반만년동안 잠자던 농심 (農心) 을 깨어나게 한 국민운동" 이란 평가까지 다양하다.
박정희 (朴正熙) 시대를 휩쓸었던 새마을운동은 그러나 80년 신군부가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의 동생 경환 (敬煥) 씨가 본부장을 맡으면서 관변단체의 하나쯤으로 전락해 갔다.
더구나 88년 3월 터진 '새마을 비리사건' 은 이 운동의 위상을 뿌리째 흔들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박정희가 농촌에 본격적으로 눈돌리기 시작한 것은 집권한지 10년이 다 돼가던 70년초였다.
당시 농림부장관 김보현 (金甫炫. 73. 백제문화 개발연구원장) 씨의 증언. "공업화 추진과정에서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농민이 급격히 줄어들고 식량 자급률도 눈에 띄게 떨어졌습니다.
춘궁기 (春窮期)에는 식량이 떨어진 농가가 상당히 많았지요. 朴대통령은 그 무렵 농촌을 어떤 식으로든 손대야겠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어렴풋하게나마 농촌운동의 방향을 찾은 것은 69년 8월 수해지구 시찰중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에 있는 두개 부락을 방문하면서였다.
주민들이 수해 복구뿐만 아니라 마을 안길을 넓히고 지붕 개량. 담장 정돈. 조림등 생활환경을 크게 개선시켜 놓았던 것이다. 박정희의 70년 4월 전국 한해 (旱害) 대책회의에서의 역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5천년 묵은 가난을 몰아내도록 그들의 의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먼저 농촌의 생활환경을 바꾸는 '새마을 가꾸기사업' 부터 벌여보도록 합시다." 때마침 그해 여름 쌍용양회가 시멘트 생산과잉으로 재고 처리에 어려움을 겪자 朴대통령은 정부가 구입해 전국 3만5천개 부락에 3백35부대씩 무료로 지급하게 했다.
그 결과 1만6천여 마을이 빨래터를 고치고 다리를 놓는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 이들 마을에 대해서만 시멘트 5백부대와 철근 1t씩이 추가로 지원됐다. 또 전국의 부락을 주민 참여도에 따라 기초.자조.자립마을로 나눠 참여도가 낮은 기초마을은 각종 정부지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당시 농협중앙회 지도과장으로 청와대에 차출돼 새마을운동을 담당한 한호선 (韓灝鮮.61.자민련) 국회의원의 증언. "새마을운동은 철저히 경쟁 원리를 도입했어요.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농촌에 전기가 들어간 마을은 20% 정도밖에 안됐습니다.
경제논리 대로라면 전봇대에 가까운 마을부터 전기가 들어가도록 해야 하는데, 朴대통령은 전봇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 하더라도 새마을운동의 성과가 있을 경우 그 마을에만 전기가 들어가도록 지시했어요. 중간에 있는 마을들은 전깃줄 구경만 하라는 식이었죠. " '새마을 가꾸기' 에서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72년부터 소득증대사업에 초점을 맞췄다. 새마을운동의 방향이 바뀐 것은 경북영일군기계면 문성동마을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마을지도자가 주민을 동원,가뭄으로 말라버린 내를 파 물을 얻은 후 각종 농산물과 특수작물을 생산해 10배의 수익을 올렸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새마을운동을 이끈 유태영 (柳泰永.61.건국대 교수) 박사는 "朴대통령이 이 마을을 둘러본 직후 소득증대사업을 벌일 결심을 했다" 고 말했다.
새마을지도자 육성 결심도 이때부터다.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살기 운동' 입니다.
소득이 증대돼 농촌이 부유해지고 보다 더 여유있고 품위있는 문화생활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72년 4월 광주 새마을 소득경진대회 치사) 박정희는 여기서 "환경개선사업보다 소득증대에 직접 기여하는 사업들을 검토하라" 고 정부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내무부는 68년 농어촌 소득증대 특별사업의 실패 이유를 "정부가 지역 특성을 무시한채 일방적으로 사업을 지정했기 때문" 이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마을에 사업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내무부 초대 새마을담당관을 거쳐 지방행정담당관.지방국장등을 지내며 새마을운동의 설계자 역할을 한 고건 (高建.59) 총리의 증언. "사업선택권을 각 마을에 준 것은 주민들의 자율적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업메뉴와 사업별 추진방법을 농민들에게 제시했어요. 각 마을에서는 주민총회를 열어 사업을 선정하고 세부계획을 세웠습니다." 새마을지도자 육성을 위해 발탁된 인물은 농촌운동의 외길을 걸어온 김준 (金準.71.초당산업대 총장) 당시 농협대학 교수였다.
'새마을운동의 교주' 로까지 불린 김준과 박정희의 만남은 새마을운동을 본궤도에 올려 놓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박정희가 일깨우려는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이 새마을지도자들에게 전달됐다.
'빚지기를 두렵게, 저축하기를 기쁘게' '겉치레보다 실속있는 생활을' '수입에 맞게 지출하라' 는등 농심을 일깨우는 정신교육이 실시됐다. 이 교육은 강의형식을 탈피, 사례 발표.분임토의등 농민들의 삶의 체험을 생생히 전달하는 형태로 진행해 큰 효과를 보았다.
농수산부장관을 지낸 정소영 (鄭韶永.65.고려종합연구소 회장) 씨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얘기가 부지기수였다" 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예고없이 불쑥불쑥 새마을연수원을 방문하곤 했다. 강의실에 슬며시 들어와 새마을운동의 성공 사례담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김준 원장이 전하는 일화 한 토막. "불시에 연수원을 찾은 朴대통령이 1백40명이나 되는 수료생들의 교육소감을 나보고 다 읽게 하더니 교육생 평가를 A.B.C로 나눠 A를 받은 지도자에게는 농림부에서 특별지원을 해주라고 지시했어요. 반면 C를 받은 연수생을 추천한 군수는 문책하도록 했습니다. 이러자 지방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군수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직접 입소자를 물색했지요. " 박정희는 일선에서 농민들과 접촉하는 면장.군수들에게 '밑을 보고 뛰라' 고 거듭 지시했다.
박진환 (朴振煥.70) 당시 대통령 경제담당특보는 "朴대통령은 길을 고쳤는지, 다리를 놓았는지 일일이 확인하며 면장과 군수들을 다그쳤다" 며 "대통령의 성화 때문에 이들이 마을을 직접 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고 말했다. 또 새마을운동이 정부 고위층에까지 스며들도록 하기위해 박정희는 한달에 한번씩 '새마을 국무회의' 를 직접 주재,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안건만 다뤘다. 매월 열리는 경제동향보고회의에도 새마을지도자를 참석시켜 성공 사례를 발표토록 했다.
전국민이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새마을 노래' 와 '나의 조국' 을 직접 작사.작곡해 보급시켰다.
이 운동은 '애국 헛구호 그만하고 집앞부터 쓸어라' 는 도시.공장.직장새마을운동으로 확산됐다. 67년 도시가구의 60%에 불과했던 농가소득이 74년부터 정부 통계상으로는 적어도 도시가구의 소득을 앞서기 시작했다.
또 주민들이 새마을사업을 비롯, 마을의 여러 문제를 함께 모여 토의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폐해도 만만찮았다. 일선 관료의 인사고과에 새마을운동 성과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자 허위.과장보고도 종종 발생했다.
한호선 의원의 증언. "전북남원의 한 교장이 새마을운동을 잘해 이상촌을 만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마을주민들이 공동이용하는 구판장.정미소.종이우산공장등을 세워 부자마을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현장 슬라이드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제가 잘 아는 마을이었어요. 협동조합에서 한 일을 그 교장이 협동조합 간판을 떼내고 자기가 한 것처럼 조작한 것이었지요.
" 또 새마을교육이 기업인.대학교수.언론인, 심지어 장.차관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로 확대 실시되자 '유신독재를 지속시키기 위한 세뇌교육' 이란 비판이 일기도 했다.
70년대 우리 사회를 휩쓴 새마을운동의 열기는 79년 박정희의 사망으로 급격히 식어갔다. 현재 경기도성남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은 70년대 뜨거웠던 새마을운동의 열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현주소다.
] 18년 업적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등의 국민운동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크게 일으키셨고.투철한 애국심과 헌신으로 국가재건에 공헌하셨니다. 가난한 농촌의 아들로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시대 속에서 성장해 온 박정희 대통령... 어려움과 아픔의 세월을 몸소 겪어 왔기에 그 누구보다도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남북의 부모형제가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릴 통일조국의 실현을 희구해왔습니다. 박대통령의 소원은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제건설 없이는 빈곤의 추방이란 없을 뿐 아니라, 경제건설 없이는 부정ㆍ부패의 온상이 되는 실업과 무직을 추방할 수 없고, 나아가,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 즉 자유의 힘이 넘쳐흘러 북한의 동포를 해방하고 통일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박대통령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1ㆍ2ㆍ3ㆍ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서, 공업입국의 터전을 튼튼히 닦아 놓았으며 바야흐로 중화학공업화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선대의 빛나는 전통과 문화를 계승발전 시키고 문예와 학술의 적극적인 창발로 문화한국 중흥에 진력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은 근면ㆍ자조ㆍ협동의 정신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정신혁명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일환으로 우리의 정신문화와 정치제도도 떳떳하게 그 국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분단의 논리가 지배하던 냉전의 대결구조에서 벗어나, 서로 번영을 추구하는 평화와 조화의 구조로 전환하는 세계 조류에 발맞추어 27년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간에 대화의 문을 열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국력배양의 가속화를 통해 번영된 통일조국을 구현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근로와 창의, 생산과 능률의 미덕을 사회윤리의 기본으로 삼고 일하는 국민에게는 안정 속에 보람있는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도록, 근로자의 이익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사회보장제도를 더욱 확충해 나갔습니다. 한민족의 엄청난 저력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도성장을 거듭하여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굳게 다지면서 세계 속의 한국으로 부상하게끔 했습니다. 일상 생활용품까지 우방의 원조에만 의존하던 국내 경제가 자립단계에 도달했고, 소총 한 자루 우리 손으로 만들지 못하던 우리나라 방위 산업을 국산 장거리 유도탄 시대의 막을 열게 함으로써 우리의 국력은 북한을 제압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분단된 국토를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데 신명을 다 바쳤습니다. 저마다 자질과 능력을 살릴 수 있도록 사회 개발정책을 계속 확충해 모든 국민이 밝고 보람찬 생활 환경에서 고루 잘 살 수 는 사회, 온 국민이 추구 하고 있는 생활의 미래상을 앞당기기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켰으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고,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중진국 상위권에 올려놓았습니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을 살다간 박대통령은 물욕은 물론 자신의 재산에 대한 욕심도 전연 없었습니다.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근검, 절약하고 청렴했던 박대통령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이 많습니다. 전기를 아끼려고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두었는데,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고, 대신 창문을 열어두곤 했으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파리를 잡기 위해 손수 파리채를 휘둘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목 부분이 해져 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는 낡은 러닝셔츠를 입었고 몇 십 년을 매었던지 두 겹 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 있는 허리띠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박대통령이 뇌리에 새기고 국민과 함께 나눠 가지려 했던 국방ㆍ경제 표어는 수없이 많습니다. 증산ㆍ수출ㆍ건설, 근검ㆍ절약ㆍ저축, 근면ㆍ자조ㆍ협동, 한 손으로 싸우고 한 손으로 건설하자, 수출입국, 조국근대화, 유비무환, 자주 국방, 부국강병 등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국민정신의 연구ㆍ함양ㆍ진작에 힘써왔습니다. 박대통령이야말로 혁명가ㆍ군인ㆍ교육자ㆍ행정가의 장점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지도자로서 임진왜란ㆍ병자호란ㆍ한일합방ㆍ남북분단, 6.25동란을 거치면서 쇠잔의 길을 걷던 우리 민족에 있어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초석을 확립한 위인으로서 주요 공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수출입국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입안할 당시, 우리 정부는 수출보다는 수입 대체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수입대체산업의 공업화에 따른 외화부족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국가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용단에 따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기본 방향을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경제개발 방향의 재정비는 선진산업국으로 도약하는 시발점인 동시에, 우리 국민을 치열한 국제 경쟁사회로 뛰어들게 한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수출제일주의를 모토로 수출진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64년 부터 매년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 수출진흥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나갔다. 특히 1967?69년도는 수출산업육성에 중점을 두고, 1967년에는 수출산업 기반의 확대, 1968년에는 수출산업의 양산체제 확립, 1969년에는 수출 산업 시설의 현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수출산업 육성에 주력했다. 이런 체계적인 계획을 통해 기업 중 수출특화산업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한편, 수출지원제도 및 행정체제를 개선하고 해외시장 개척의욕을 고취하여, 업계를 수출지향적으로 정비하고 수출추진 체제를 확립하였다. 우리나라 수출정책과 수출독려의 산실은 1966년부터 박대통령이 수출최고 사령관이 되어 매월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였다. 수출진흥회위원과 정부, 학계와 연구기관을 비롯해 수출지원기관과 업계 등 유관기관 대표들 약 250여명이 참석하여 월별, 품목별, 지역별 수출동향을 점검하는 이 회의는 수출증대를 위한 모든 시책과 업계의 애로타개 등의 매월 추진상황을 점검ㆍ보고하여, 수출진흥을 위한 시책과 제도를 하나하나 정착시켜 나갔다. 1979년까지 계속된 이 회의는 수출에 관한 최고전략회의로서 수출진흥종합 시책, 수출계획, 수출촉진제도, 수출독려 등을 논의하여 최종 결정하는 장이 되었다. 우리는 ‘한국의 수출’ 하면 박대통령을 연상하게 된다. 수출입국에 대한 노력의 결과는 점점 가시화되었다. 1962년이래 노동집약 중심으로 한 수출공업화정책이 성과를 나타내며 수출이 급속히 신장되고 고율의 경제성장이 유도되었다. 1962년 5천만 달러이던 수출은 1964년 1억 달러로 급신장을 보였으며, 1968년 5억 달러, 1969년 7억 달러, 그리고 1970년에는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상품 구조면에서도 1차 상품과 공산품의 수출 구성비가 1960년 83.2%대 16.8%이던 것이 1970년에는 공산품이 83.6%로 급속히 높아짐으로써 후진국의 수출구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 10월 유신을 거치며 박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 1,000 달러 소득” 이란 지표를 제시,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을 선언하면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자동차,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을 육성하여 수출의 획기적 증대를 이룩했다. 특히 수출산업의 중화학공업화는 전자산업의 전략적 육성, 조선 공업의 수출산업화, 기계공업의 국산화, 자동차 공업의 수출전략산업화 등에 역점을 두었다. 아울러 수출용원자재의 국산화, 수출취약산업의 육성 등을 통한 수출의 질적 고도화와 종합무역상사의 육성, 그리고 수출자유지역의 설치, 외국인 투자 유치, 중소기업의 수출능력 강화 등 수출산업의 저변확대에도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74년의 석유위기도 수출로 극복하고, 1977년 12월 22일, 당초 1980년 달성키로 한 대망의 100억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앞당겼다.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되는 수출입국 정책의 성공은 우리나라를 가난하고 힘겨운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농경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저개발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더 나아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경제의 부상과 남북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세계13위 무역대국의 위상 역시 박대통령의 수출입국에서 발원하고 있다.
2.경부고속도로건설 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67년 4월 박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대국토건설계획을 발전시켜 고속도로와 항만의 건설 및 4대강(한강ㆍ낙동강ㆍ금강ㆍ영산강)유역의 종합개발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기간 중에 착수하겠다”고 그 계획을 공표하고 나서부터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 고속도로건설이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부정 또는 회의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까지의 우리나라 교통문제를 조사한 IBRD 조사단도 교통 및 수송난을 고속도로망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건의는 물론 방향조차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원대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국가경륜의 일환으로, 1967년 11월 7일 건설부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후 본인 스스로가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국토개발계획을 비롯해 각 노선과 단면도의 비교검토 및 건설비 산출, 용지매수에 따르는 자료 등을 직접 지휘하였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공사비였고 박대통령이 노심초사한 문제도 바로 그것이다. 박대통령은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을 1967년 12월 15일 발족시키고 관련자료 검토와 분석을 거쳐 3백억원 선이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68년 2월 5일 제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건설 재원확보 계획을 확정했다. 1968년 2월 1일 원지동에서 서울?부산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첫 발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어 4월 3일 오산?대전간 공구(1백 6.6㎞), 9월 11일에는 대구~부산간(1백23㎞), 마지막 난공사 공구인 대전~대구간(1백 52㎞)은 1969년 1월 13일에 착공되었다. 재원확보 다음의 난제는 건설장비의 도입 문제였다. 정부는 비상조치로서 미ㆍ영ㆍ불ㆍ스웨덴 등의 유명업체와 협의하여 건설회사부담의 상업차관으로 도입하였다. 가장 난공사였던 대전~대구간은 전 노선의 약 3분의 1인 1백 52㎞이지만 토목공사는 전체의 약 47%, 절토량은 약 50%, 장대교는 17개소로 60%, 그리고 터널은 전체의 90%가 이 구간에 몰려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난관을 겪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재터널 공사가 가장 난공사로서 13회에 걸친 낙반 사고와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공기에 차질을 빚었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서울~부산 천리간에 거창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는 헬리콥터로 혹은 지프를 타고 수없이 현장을 시찰하며 공정을 살피고 현장 관계자와 인부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박대통령 친필의 ‘고속도로 구상도’, ‘서울~부산선 축선 확정도’, ‘용지 매수계획에 관한 노트’, ‘감독반 구성에 관한 지시’, ‘공정계획표’, ‘연도 조경을 지시한 메모’ 등은 박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건설 시초부터 완성까지 시종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세세히 알게 해 준다. 착공한지 2년 5개월만에 당초 3백 30억원으로 예상했던 공사비는 설계변경과 물가상승 등으로 4백 29억원,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 약 9백만명 및 장비 1백 65만대가 투입된 총 연장 4백 28㎞의 단군이래 최대토목공사인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드디어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교통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새로운 일대도약의 전기를 마련했고 전국을 하루생활권으로 묶음으로써 국토 및 국민생활의 균형적 발전을 이룩했으며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각을 전 국민에게 일깨워 집약된 국력으로 1980년 목표했던 1백억 달러 수출, 1천 달러 소득을 3년이나 앞당겨 달성하는 기적을 낳게 했다. 박대통령은 京仁, 경부, 호남, 남해, 영동, 동해, 구마, 언양~울산간 의 8개 고속도로를 완공시켜 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내세운 “조국근대화의 기본설계의 하나인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ㆍ강릉ㆍ부산ㆍ목포를 잇는 기간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지켜 전 국토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고속 도로망을 구축함으로써 전 국토를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부산~마산간 고속도로는 1978년 5월에 4차선으로 착공되어 박대통령 서거 후인 1981년 9월에 준공되었다. 박대통령이 단행한 2차선 고속도로의 4차선 폭 용지확보, 접도구역의 통제, 그리고 그린벨트의 설치와 엄수는 우리나라 국토개발 백년대계와 후세를 위한 위대한 선견지명이요 영단이라 하겠다. 박대통령은 한국형 고속도로의 건설원칙, 즉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고속도로 건설의 아이디어를 착안해내고 실천하였다.
3. 새마을운동 아직도 근대화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어려운 농촌, 이곳을 박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잘사는 마을로 만들자는 물결이 급속하게 전개됐으니,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1970년 10월 전국 농어촌 3만4천6백65개 부락에 300여 부대의 시멘트와 철근1톤씩 무료로 배급되었다. 반드시 마을의 공동사업으로 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배분된 이 시멘트들은 마을진입로의 확장과 농가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등에 사용되었는데....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정부의 기대를 훨씬 웃도는 성과를 가져왔다. 마을 주민들은 정부에서 배분한 시멘트에 자신들의 노동력을 투자하여 마을 공동사업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1차 연도의 새마을사업이다. 그 후 박대통령은 근면, 자조, 협동하여 우수한 성과를 올린 마을부터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세우고, 주민들의 참여도에 따라 전국 3만5천개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1972년 제2차 새마을운동 때에 박대통령은 반응과 성과가 좋았던 1만6천6백개 마을에만 지원하고 잔여 1만8천여 마을에는 지원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이는 해묵은 농민들의 의타심을 고치고 자조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무기력하고 태만하던 농민에게 경쟁심과 협동정신을 주입시켜 노동의욕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에서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하여,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승화, 지속시켰다. 새마을운동은 환경개선사업부터 시작했으나 그 저변에는 농민들의 자립ㆍ자조정신을 일깨우자는 뜻이 담겨있었기에 정신계발, 소득증대 등과 함께 삼위일체로 추진되었다. 특히 소득증대사업으로 농촌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가소득은 1974년부터 도시노동자 소득을 상회할 만큼 되었고 1977년에 이미 1981년 소득목표액인 140만원에 도달하였다. 모든 마을에 자동차가 드나들게 되었고, 모든 작은 하천에 둑이 개수되었으며, 예전의 볏짚지붕은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농가에 간이상수도 시설이 설치됨은 물론이고, 전 국토 어디에서나 전기불이 들어왔으며, 모든 법정 리, 동까지 전화가 가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마을에 마을회관이 세워져서 그야말로 살맛 나는 농촌으로 탈바꿈 하였다. 그 결과 새마을운동 10주년에 해당하는 1980년 4월까지, 정부 투입 자금 2조7천5백21억원, 운동참가 연인원은 약 11억명, 새마을회관 3만5천9백 50개소, 신설농로 4만4천㎞, 폭을 넓힌 마을도로 4만㎞, 신설용수로는 4천4백 40㎞가 이뤄졌다. 농촌새마을운동은 더 나아가 사회 전역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도시주민들은 농촌 새마을운동이 마을의 모습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태도나 마음가짐까지 함께 달라지게 된 것에 더욱 감명을 받았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실시해 온 남녀 새마을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이 공직자나 사회지도급인사들에게도 확대되어, 새마을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했다. 도시주민은 도시생활에 맞게, 학교는 학교대로, 기업인들은 공장새마을운동 확산, 추진에 앞장섰다. 이런 새마을운동의 물결은 기업 분위기와 농촌 여성 지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의 기업인들이 농민과 함께 새마을교육을 받은 후, 종업원들의 복지후생에 많은 노력을 하게 됐으며, 농촌여성들의 발언권과 지위는 새마을 운동에 의해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가난의 악순환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왔던 우리 국민에게 짧은 기간에 자신감과 자부심을 안겨준 새마을운동... 순전히 박정희 대통령 개인적 구상에서 범국민적으로 번진 새마을 운동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잘사는 농어민, 잘사는 내 고장, 번영된 조국’을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새마을사업 추진을 위한 의사결정을 주민총회에서 결정케 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의식을 실천적으로 정착시키는 계기조성과 함께 민주화의 기초를 닦게 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마을운동을 민주주의 훈련도장이라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4. 치산녹화 1960년대 당시 우리의 국토는 그야말로 벌거숭이였다. 과거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헐벗은 산에는 터전을 잃은 동식물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하지만 현재... 과거와 같은 산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푸르름이 눈이 부실 정도로 녹음이 우거진 대한의 산야... 이는 박대통령의 치산녹화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림황폐는 조선조 중반부터 인구증가와 국가의 산림관리능력 상실이 그 원인(遠因)이다. 여기에 한일합방과 일제말기부터 시작된 전쟁물자의 조달, 해방 후의 인구증가, 6.25 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를 위한 자재수요의 증가,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임산 연료 이외에는 대체연료가 거의 없었던 사회상황이 민둥산을 만들어내는 주범이었다.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한 우리나라 특유의 온돌은 막대한 양의 나무를 소비한다. 산림이 황폐해지면서, 우리 인간 생활은 물론 자연생태계도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복구할만한 국가의 산림관리기능 실종까지 가세하여 산림자원이 더욱 황폐화되어 갔다. 해방 직후 ‘사방사업 10개년 계획(1948~57)’과 전쟁 후인 1951년에 ‘산림 보호임시조치법’과 같은 복구노력이 있긴 하였지만, 재원과 기술 부족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본격적인 복구노력은 1961년의 ‘산림법’을 제정하여 3공의 전신이 총력을 기울인 사방사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어 ‘치산녹화 7개년계획(1965-1971)’과 ‘제1ㆍ2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 등이 세워져 치산치수정책이 추진되었다. 봄철 식목일 외에도 가을철에 ‘육림의 날’을 휴일로 정하여 온 국민이 나무를 심고 가꾸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3년 박대통령은 녹화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농림부 산하의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시킨 데 이어 연두기자회견에서 10년 이내 국토녹화를 완성할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식목 및 육림 현장을 수시로 직접 찾아 지도 격려했다. 치산녹화과정에서 사방사업 사상 최대의 난공사이며, 단일지구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 있었으니, 바로 영일지구 사방사업이다.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중에 실시된 영일지구는 일본에서 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할 때 관문으로 그 어느 곳보다도 민둥산의 모습이 흉물스러웠던 곳이다. 그런데, 지질구조상 한번 황폐되면 복구가 어려운 곳이어서 그 동안 50여 회에 걸쳐 소규모 사방사업을 실시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번 번히 복구에 실패한 곳이었다. 2-3년 내에 완전 복구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우량한 종자와 묘목을 선정하여 파식하고, 개량공법 등을 적용해 녹화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특히 황폐지에 노출된 암반의 등고선으로 단을 끊고 단상에 구덩이를 파고 객토를 하여 묘목을 식재 한 후, 3년마다 한번씩 추비를 주어 사방지 사후관리도 철저히 함으로써 영일지구 사방사업은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풀 한 포기 없는 벌거벗은 4,538ha의 집단 황폐지가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성공으로 완전 복구되었다. 치산녹화사업은 제1차 계획기간에 100만ha에 21억 본을 심기로 한 목표로 4년 앞당겨 108만ha에 29억 본을 식재했으며, 78년에 목표량을 초과 달성하여, 새로 2차 계획을 수립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 나무는 일부 산간오지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산림녹화운동 기간에 심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는 전국토의 어딜 가도 푸른 산을 쉽게 만나볼 수 있고, 독일, 영국,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 4대의 조림 성공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 최대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21세기... 치산녹화의 성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시대를 거슬러 현재에도 남아있다.
5. 중화학공업육성 1962년 이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공업입국ㆍ수출제일주의에 기반을 둔 경공업의 수출산업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근대화된 공업구조가 정착되고 중화학공업의 기반도 조성되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경제개발이 단순한 5개년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1980년대 1인당 GNP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경제개발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공업구조개편론”을 성안하고 1973년 박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추진선언과 함께 과학화운동전개를 강조했다. 1960년대의 정책이 공업입국, 수출제일주의였으며 1970년대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위한 중화학 공업화였다. 이를 위해 ‘중화학공업위원회’와 ‘기획단’을 두고 선진 산업국으로 나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 공업 등의 6개 업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화의 기본 바탕이며 중심이 된 포항종합제철, 아연ㆍ동ㆍ연ㆍ알루미늄 등 4대 전략품목을 육성할 수 있는 온산비철금속공업기지, 천혜의 기후조건과 항만, 그리고 양질의 인력을 바탕으로 한 옥포조선공업, 품질과 가격면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기계류와 플랜트의 국산화에 기여한 창원 기계공업기지, 반도체, 컴퓨터 산업 등의 고도정밀 전자기기 산업기지인 구미전자공업단지, 석유화학제품의 국내수요 충족과 비약적인 수출증대의 기반을 마련한 울산과 여천 석유화학단지들이 바로 당시 중화학공업 추진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중화학공업 정책이 추진되기까지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종합제철 건설의 경우 경제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반대의 벽에 여러 번 부딪혔으나, 박대통령의 단호한 추진력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놓았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진행되면서 관련 과학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대덕에 업종별로 전문연구단지가 들어서고, 산업기지별 실용연구소가 만들어 지면서 장기 기초연구를 수반한 전문연구가 추진되어 나갔는데, 이들은 모두 오늘날 기초 과학연구의 기반이 되고 있다. 중화학공업을 이끌어 나갈 기술인력 양성 노력도 함께 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기술교육제도를 도입하여 공고교육에 의한 기능사, 대학 교육에 의한 기술자를 양성하고, 현장에 맞는 일반 기능공 양성을 위해서 각종 직업훈련원 등을 설치 운영하였다. 이와 함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우리의 방위산업을 선진국형 체제를 갖추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미국의 대한방위 공약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탈피해 자주국방 태세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우리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80년대 경제 미래상으로 제시된 1인당 GNP 1,000불과 수출 100억불을 당초 계획보다 3년이나 앞당겨 1977년에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세계적인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공업화, 특히 중화학공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화의 획기적인 도약이 없었다면 한국의 산업과 경제는 현재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핵심이 바로 중화학공업이다.
6. 자주국방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남한보다 월등한 군사력으로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의 군사도발과 위협은 극심하였다. 북의 남침 위협을 저지하고, 무력침공 야욕을 근원적으로 포기케 하기 위해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의 확보가 우리에겐 절실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계획의 일차적인 목표는 "부국강병"에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에 부심한 기간이었다. 당시 북한은 총기류는 물론 화포와 대포, 군함, 잠수함까지도 생산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소총 한 자루 못 만드는 실정이었다. 북한에 병기산업이 뒤져있던 상황에서 박대통령은 무기생산을 계획하고, 무기생산의 소재가 되는 중화학공업을 더욱 육성시키면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여하한 무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 ‘여하한 무기도 규격의 소재를 설계대로 정확히 가공해서 결합하면 소정의 성능과 호환성을 갖출 수 있다’는 소신 아래 무기의 부품별, 뭉치별로 82개의 생산공장을 지정하되 평상시에는 그 공장능력의 80%는 민수용으로, 20%만 방산용에 충당토록 하여 평시 경제성을 제고시키고 유사시에는 전 능력을 방산에 충당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79년 말에는 최신 첨단무기를 제외한 재래식 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군의 기본 병기인 155mm 곡사포, 20mm 대공발칸포, 4.2인치 박격포, 3.5인치 로켓포 등 각종 화기와 5백MD 다목적 헬리콥터와 산악전용 경장갑차, 그리고 각종 실ㆍ포탄류의 양산체제가 갖추어졌다. 특히 1978년에 들어와서는 미 탱크와 동일한 화력과 기동력을 지닌 전차를 양산하고, 마침내 9월에는 평양까지 도달하는 한국형 지대지 중장거리 유도탄을 개발, 시험발사에도 성공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유도병기 등 각종 고도정밀병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됨으로써, 독자적인 한국형 무기체계의 개발과 무기성능의 개량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방위세 신설, 향토예비군과 민방위대 창설, 병기개발위원회를 통한 국산신무기개발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초를 닦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우리 군은 역사상 최초로 해외파병을 단행했다. 국군의 월남파병은 국군의 사기와 긍지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력 증강과 국가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미군 철수 문제를 고심하던 박대통령은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1978년 한ㆍ미 연합사령부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한ㆍ미간의 긴밀한 협력 하에 통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재임기간 중 미군 철수와 호전적인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라는 위기상황에서 국가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국가안보를 정책의 최상목표로 설정하고 자주국방을 적극 추진했다. 오직 자주국방의 일념으로부터 출발한 방위산업의 기반은 이제는 오히려 해외에 기술과 제품을 역수출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안보와 국방에 대한 집념은 오늘날 막강한 국군 육성으로 국가안보의 초석과 토대가 되고 있다.
7.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 창달 문화는 한 나라와 민족의 뿌리이며 정신이다. 수없이 많은 외침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그 힘은 무엇이고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느냐? 민족의 저력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질문과 해답이 박대통령의 모든 의식의 출발점이었다. 1ㆍ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국민소득 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국가재정에 여유가 좀 생기자 박대통령은 지금이야말로 국민들에게 우리 전통문화의 유산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계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호국과 관련된 유적을 보수ㆍ정화하였다. 그 속에 어려있는 호국자주 정신을 계발, 우리 국민들이 자주자립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함이었다. 다음, 신라의 삼국통일정신이 앞으로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통일전을 조성하고 전국 각지 선열의 유적들을 보수ㆍ정화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사상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온 선현들의 유적도 보수ㆍ정화하였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신화 유적에서부터 삼국시대와 고려ㆍ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민족 사상의 뿌리를 일깨우고 정립한 선현들의 유적들을 보수ㆍ정화하여 우리 민족문화를 재발견하고 자주성을 선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일반적인 전통문화유적에 대한 보수ㆍ정화와 보존전승사업도 함께 했다. 우리 고유의 문화적 바탕 위에서 외래 문물을 수용, 이를 독창적으로 창조 발전시킨 전통문화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선사시대와 신라ㆍ백제 문화의 연구ㆍ조사ㆍ발굴ㆍ보존사업들은 그 동안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우리의 문화사를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새로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은 문화보존을 위한 각종 사업과 함께 민족문화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할 문화시설도 건립하였는데, 경주ㆍ공주ㆍ부여박물관을 비롯해 국립중앙 박물관, 국립극장들도 모두 이 시기에 탄생된 것들이다. 1962년엔 ‘문화재보호법’이 처음 제정되면서, 음악, 연극, 춤 등의 무형문화재와 민속문화재를 문화재의 범주에 포함하고 법으로 지정해 보호받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유적총람>을 작성, 오늘날 문화재관리행정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호국정신의 계승이라는 연장선상에서 국적 있는 교육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국적 있는 교육의 발판을 마련하고, 한국적 가치관의 정립과 체계화를 위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창립, <민족문화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국적 있는 교육은 곧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새마을운동과 연계 되면서 국민적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국가개발지도이념으로 발전돼 나갔다. 그밖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민속박물관 개설, 1979년에는 해외공보관 산하 해외한국문화원을 일본, 미국, 프랑스의 수도에 각각 설치해 일찍부터 한국문화의 해외선양, 보급에 힘썼다. 찬란했던 전통문화를 하루속히 복원해 국민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을 일깨워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겠다는 박대통령의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창달 이념은 지금도 우리 민족이 살아가고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생명력으로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다.
2] 연인...아내...그리고
청와대 안주인의 역할과 이미지는 대통령의 국정수행능력에 버금가는 국민들의 관심사다.
이번 대선에서도 많은 유권자들, 특히 여성 유권자의 90%가 후보 부인을 보고 누구에게 표를 찍을 것인지 결정하겠다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육영수 (陸英修) 여사는 특유의 한국적인 이미지와 대통령 부인으로서 잡음 없는 내조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바람직한 대통령 부인상 (像) 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에게 시중의 소문을 전해주고 충고를 아끼지 않은 '청와대 내의 야당' 이었으며 朴대통령의 그늘 속에서 소리없이 사회봉사활동을 한 조용한 내조자였다.
대통령 박정희에게 저항하던 인사들조차 陸여사의 인품에 대해서는 고개를 숙였다. 26세의 처녀 육영수는 처음 '멀대같이 키만 큰' 여자로 박정희에게 다가왔다. 결혼생활중에는 '마음의 어머니' 였으며 陸여사 서거 이후에는 '영원한 연인' 이었다.
옥천 처녀 육영수가 선산 출신 박정희를 만난 것은 1950년 8월 피난지 부산에서였다. 중매자는 陸여사의 이종육촌 오빠 송재천 (宋在千.78) 씨. 宋씨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이기도 하다.
맞선 두달 뒤인 10월 대구에서 약혼식, 다시 두달 뒤인 12월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반대한 陸여사의 부친은 끝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아 이날 신부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은사인 김영기 선생이 인도했다.
박정희 34세, 육영수 26세. 陸여사는 1925년 충북 옥천에서 1남3녀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만석꾼 집안으로 당시로선 드문 승용차에다 농사용 트럭이 따로 있었다. 부친이 취미로 제작한 16㎜ 필름으로 집안에서 영화를 볼 정도였다.
부친 육종관 (陸鍾寬.65년 작고) 씨는 본부인 (李慶齡.76년 작고) 외에 소실 7명, 자식만도 16명이나 됐다. 서울 배화여고 재학시절 陸여사는 한 소실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동창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창시절 陸여사는 늘 쓸쓸한 표정에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전쟁중이라 신혼부부는 한동안 떨어져 지내야 했다. 박정희는 결혼 3일만에 신부를 남겨두고 전선으로 이동했다.
틈틈이 陸여사가 면회를 가기는 했지만 이같은 생활은 53년 7월 휴전 때까지 계속됐다. 53년 3월 박정희는 꿈에도 그리던 '별' 을 달았고 52년에는 맏딸 근혜가 태어나 집안엔 활기가 돌았다.
그러나 이듬해초 박정희는 6개월간 미국 포병학교로 교육을 떠났다. 귀국 직전 박정희의 일기 한토막. "…인천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을 영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근혜를 안고 '근혜 아빠 오셨네' 하고 웃으면서 나를 반겨 맞아줄 영수의 모습! 나의 어진 아내 영수, 그대는 내 마음의 어머니다. 셋방살이, 없는 살림, 좁은 울안에 우물 하나 없이 구차한 집안이나 그곳은 나의 유일한 낙원이요,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안식처다.
" (54년 6월14일) 박정희의 아내 사랑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 이상이다. 그 사랑은 74년 陸여사 서거후 진면목을 드러냈다. 아내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이 무렵 박정희는 거의 시인이 돼 있었다.
...
"…해마다 여름이면/그대와 함께 이 섬을 찾았노니/모든 시름 모든 피로 다 잊어버리고/우리 가족 오붓하게/마음껏 즐기던 행복의 보금자리/추억의 섬 저도 (猪島) /올해도 또 찾아왔건만/아, 어이된 일일까/그대만은 오지를 못하였으니/그대와 같이/맨발로 거닐던 저 백사장/시원한 저 백년 넘은 팽나무 그늘/낚시질하던 저 방파제 바위 위에/그대의 그림자만은 보이지 않으니…. " ( '저도의 추억' .75년 8월) 陸여사를 그리며 쓴 박정희의 시와 일기는 '독재자' 의 인간적 측면을 보여준다.
박정희는 아내 사랑을 글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다. 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아내의 초상화를 쓱쓱 그리기도 했고 지방순시중에도 불쑥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아내를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박정희식 아내 사랑법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대통령 부부에게만 쓰게 된 호칭이 있었다. '각하' 는 그전엔 장성들의 일반적인 호칭이었지만 점차 박정희 1인에게 국한된 것으로 바뀌었다.
영부인이란 호칭도 70년대 중반부터는 陸여사에게만 붙여 부를 수 있었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陸여사에 대한 호칭은 흔하디 흔한 '사모님' 이었다. 청와대생활 초기 동창생들은 '영수야' 하고 불렀으며 나중엔 '陸여사' '근혜 엄마' 로 돌려 부르긴 했지만 친한 동창생들과는 호칭은 물론 사생활까지 트고 지냈다. 60년대 후반 '경모 (敬母) 님 소동' 은 이런 과정에서 나온 해프닝이었다.
당시 한글학자 H씨가 청와대에서 陸여사를 '경모님' 이라고 부른 것이 신문에 짤막하게 보도된 적이 있다. 이를 본 모 변호사가 '陸여사는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기저귀 냄새를 풍겨야 제멋' 이라고 쓴 것. 이 글을 읽은 陸여사가 "하필 기저귀 냄새냐" 며 청와대 대변인에게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이 얘기를 들은 朴대통령은 '그런 것은 신문에서 세게 때리시오' 하면서 출입기자들 앞에서 오히려 陸여사의 약을 올리기도 했다.
'영부인' 이란 호칭에 얽힌 일화 한 대목. 언젠가 陸여사가 가수 이미자씨의 레코드 판 한장을 산 것이 보도된 후 백화점에 들른 적이 있었다.
한 여직원이 "영부인님, 이것도 하나 사주세요" 하고 물건을 내놓자 대뜸 陸여사가 "싫어요. 근혜 엄마라고 하면 몰라도 영부인이라고 하니까 깎지도 못하잖아요" 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다.
매사에 너그럽고 인자했던 陸여사. 그러나 남편 때문에 속 썩기는 여염집 부녀자와 마찬가지였다.
56년 7월 박정희 준장이 5사단장을 마치고 진해 육군대학에 입교할 무렵의 얘기다.
陸여사가 남편을 따라 진해로 이사가는 것을 거부하고 나선 것. 떨어져 살아도 남편의 불미스런 얘기가 다 들리는 판에 한집에 같이 살면 그것을 어찌 보겠느냐는 것이었다.
주위의 설득으로 결국 진해로 떠밀려 가다시피 했다. 당시 육대 (陸大) 는 전반기 교육이 끝나면 시험을 봐 60점이 넘어야 후반기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는데 탈락하면 원대복귀는 물론 진급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시험이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술타령을 하다 시험을 망쳤다.
몸이 달아오른 사람은 오히려 陸여사였다. "어느날 퇴근해보니 陸여사가 집으로 수박을 사가지고 오셨더군요. 당시 저는 총장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교육생들의 시험관리와 채점을 맡고 있었는데 어디서 그 얘기를 들으셨던 모양입니다.
" (H씨 증언) 청와대행 이후 陸여사는 대통령부인에 걸맞게 자신을 갈고 다듬었다. 박정희의 군시절 陸여사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몇년후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라야 했다.
陸여사는 남편의 여자문제로 평생 속을 끓이면서 살아야 했다. 朴대통령과 술자리에서 자주 어울렸던 K.P.L씨등은 그래서 陸여사로부터 더러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대통령 호주머니에서 립스틱이 묻은 손수건이 나오느냐" 는등의 이야기였다.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옆사람에게 '형님' 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朴대통령은 종종 와이셔츠나 손수건에 립스틱을 묻혀 들어가기도 했다.
陸여사는 한 나라의 대통령인 남편의 그런 모습이 싫었다. 한번은 陸여사가 '현장' 을 덮친 적도 있다. 70년대 초반 인기 절정의 모 여배우를 朴대통령이 청와대 인근 한 기업체 사장집에서 몰래 만난다는 정보를 들은 陸여사가 그 집을 찾아갔다.
방문 앞에서 "나예요, 문 열어요" 하고는 朴대통령과 맞부닥친 적도 있다. 체면 없기는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陸여사의 결혼생활 24년은 박정희를 향한 기다림과 인내의 세월이었다.
朴대통령의 말년 여성 편력은 陸여사란 '통제장치' 가 사라지면서 육욕 (肉慾) 의 탐닉으로 줄달음질한다. 중앙정보부와 청와대의 어떤 이는 탤런트와 배우, 모델과 가수중에서 박정희의 하룻밤 '수청' 들 대상을 찾아 대령하는 '채홍사 (採紅使)'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박정희시대의 공과 (功過) 를 따지고 오늘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취지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첫부인과의 불행한 결혼이후 여성을 향해 끊임없이 방황했던 박정희는 陸여사를 만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그의 삶도 화려하게 꽃피었다. 陸여사가 74년 흉탄에 쓰러지면서 박정희도 절대권력의 부패 속에서 시들어갔다.
38.집념과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 추종자들은 그를 세종대왕이나 충무공 이순신 (李舜臣.1545~98) 장군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뚜렷한 공과 (功過) 를 남긴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를 영웅화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역사적 평가는 후대의 몫이다. 박정희는 재임중 충무공을 유별나게 떠받들었다. 아산 현충사 관리소장의 직급은 충무공에 대한 박정희의 성심 (誠心) 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의 재임중 현충사 관리소장 12명중 6명이 1급 상당이었다. 충남지역에서는 차관급인 도지사 다음인 서열 2위의 공직자였다. 조선시대 왕릉을 관리한 능참봉이 품계중 가장 낮은 종9품이었던데 비하면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68년 1월8일 朴대통령은 이례적인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 '난중일기 (亂中日記)' 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나 훔친 사람은 오는 17일까지 청와대 특별민정반에 연락 또는 자수해 줄 것이며…자수하는 자에게는 그 죄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 임진왜란때 충무공이 기록한 '난중일기' 원본이 보관중이던 현충사에서 사라진지 1주일 넘도록 범인을 잡지 못하자 대통령이 직접 도둑에게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이틀 뒤인 1월10일 오전 신범식 (申範植) 청와대 대변인은 출입기자들에게 "朴대통령의 얼굴이 오늘같이 밝은 것은 요 며칠새 처음" 이라고 전했다. 범인들은 특별담화 하루만에 부산에서 시민 제보로 붙잡혔다.
이날 저녁 청와대 만찬석상. 집권 공화당 길전식 (吉典植) 사무총장.김진만 (金振晩) 원내총무.김재순 (金在淳) 대변인등 주요 당직자들은 朴대통령의 질책성 주문부터 들어야 했다.
"마이크로필름에 찍어 분산보존시켜 원자탄이 떨어지더라도 건재할 수 있도록 하시오. 보존대책이 마련될 때까지는 '난중일기' 를 청와대에 보관할 것이오. " 관련부처가 부랴부랴 특별법을 제정한 것은 물론이다.
박정희 사후 이순신 장군 후손들이 서울신당동 박정희 사저를 찾아가 유족들에게 "땅속에 묻혀 있던 충무공을 끄집어내 밝혀주신 분이 朴대통령" 이라고 고마워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맏딸 朴槿惠 정수장학회 이사장) .충무공이 4백년 시차를 뛰어넘어 '성웅 (聖雄)' 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박정희 시대였다.
이맹기 (李孟基.72.대한해운그룹 회장) 전 해군참모총장은 박정희를 아예 "4백년만에 되살아난 이순신 장군" 이라고 말할 정도다. 박정희의 충무공 섬기기는 5.16 직후부터였다.
그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 명실상부한 최고 실권자로 등장한지 며칠 안된 61년 7월 어느날. 5.16때 민간인으로 거사자금을 조달한 김용태 (金龍泰)가 장충동 의장공관을 노크했다.
그는 노산 (鷺山) 이은상 (李殷相) 선생이 주도하던 충무공기념사업회에서 사무국장을 지내는등 열렬한 충무공 추종자였다.
김용태 (71.전 공화당 원내총무.현 동서문화교류협회 회장) 씨의 회고. "막상 거사는 성공했는데 국민정서를 하나로 묶을 방안이 없어 고심하던 시기였지요.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난중일기 국역본 '충무공전서' 를 갖다 드리며 '이순신 장군의 애국애족정신을 국민정신의 귀감으로 삼자' 고 아이디어를 냈지요. " 박정희는 시름에서 확 깨어나는 표정이었다.
"맞아, 그거야. 李충무공 정신이야말로 천추에 빛나는 우리의 국민정신일세. 국민들의 정신무장을 반공 일변도로만 할 것이 아니야. " 박정희는 즉석에서 "현충사를 성역화하자" 는 김용태의 제안에다 "충무공탄신일 기념행사도 내년부터 아산군청에서 모시도록 하라" 고 자신의 아이디어까지 보탰다.
그러나 기념행사를 아산군청이 맡은 것은 62년 한해뿐. 박정희의 지시로 63년엔 충남도청, 64년엔 국방부, 65년 이후엔 아예 정부가 주관하는등 행사의 격이 거듭 높아졌다.
朴대통령이 꼬박꼬박 참석했음은 물론이다. 육영수여사 서거이후 외부행사 참석을 자제하느라 75년 딱 한번 행사를 거르긴 했으나 며칠뒤 둘째딸 (書永.43.육영재단 이사장).아들 (志晩.39.삼양산업 대표) 과 함께 참배하고는 현충사 직원들에게 "지난번에 오지 못해 미안하다" 고 사과한 일도 있었다.
69년 9월 마무리된 현충사 성역화사업은 약 30억원이 투입된, 당시로선 대역사였다. 이순신 장군의 15대 후손으로 현충사 운봉분소장인 이재왕 (李載旺.53) 씨는 "중수식때 朴대통령께서 '이제야 충무공을 떳떳이 모실 수 있게 됐다' 며 직원.수행원들에게 '오늘같은 날 한잔씩 안주느냐' 고 하시며 앉은 자리에서 제주 (祭酒) 를 23잔이나 받아 드셨다" 고 기억했다.
77년 대종상을 받은 영화 '난중일기' 에 얽힌 일화 한토막. 박정희의 지시로 만든 이 영화는 개봉전 청와대에서 시사회를 했다가 朴대통령의 지적사항을 고치느라 대종상 시상식 날짜마저 연기해야 했다.
제작및 주연을 맡은 원로배우 김진규 (金振奎.74.제주 베버리힐즈호텔 회장) 씨의 회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가며 보시던 그분이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이순신 장군이 감옥갔다 나오실 때 아산 어귀에서 막내아들과 껴안는 장면, 그거 틀렸어요. 아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해야지, 그건 요새 미국식 아니오. 마지막 장면도 그래요. 장군께서 돌아가셨다고 북을 치고 있는데 다른 배들이 장선 (將船) 으로 모여들어야지 멀뚱멀뚱 산재해 있으면 안돼요. 다시 만드시오' 그러십디다.
우리도 전문가들을 모셔놓고 일곱번이나 예비 시사회를 갖고 이만하면 됐다 싶어 보여드린 것인데 대번에 꼬집어내시더라고요. " 박정희가 집권 후반기 몇년동안 쓴 대학노트 5권 분량의 일기는 마치 '난중일기' 를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크메르.라오스에 이어 베트남마저 적화돼 "다음은 한반도 차례" 라는 안팎의 불길한 목소리들이 높아가던 75년 4월30일 밤, 박정희가 조국 사수의 결의를 다지며 써내려간 일기. "충무공의 말씀대로 필사즉생 필생즉사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과거 수천년동안 영고성쇠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나라다…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못 지킬리 없으리라. " 박정희와 충무공의 만남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민지청년 박정희는 셋째형 상희 (相熙.대구폭동사건때 사망) 씨로부터 춘원 (春園) 이광수 (李光洙) 의 소설 '이순신' 을 구해 읽으며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고 한다.
박정희를 다룬 전기류에는 그가 문경보통학교 교사시절 제자들에게 몰래 충무공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대목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러나 정순옥 (鄭順玉.71.여) 씨등 박정희의 문경학교 제자들은 "그런 기억이 없다" 고 말했다. 박정희가 충무공에게 심취한 것은 군인의 길로 들어선 뒤였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군신 (軍神)' 도고 헤이하치로 (東鄕平八郎) 원수조차 러시아 함대와의 일전을 앞두고 충무공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등 충무공이 일본에서 더욱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박정희는 집권후에도 "일본×들까지 적장인 이순신 장군을 그토록 존경하는데 우리가 넬슨 (영국의 유명한 해군제독) 이 어떻네 하는 것은 사대주의" 라고 비판하곤 했다.
박정희는 나아가 충무공으로 상징되는 호국정신을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지렛대라고 생각했다.
70년부터 79년까지 청와대 사회담당특보와 대변인을 지낸 임방현 (林芳鉉.67) 씨의 증언. "朴대통령은 '현충사 같은 호국문화재를 복원, 성역화해 후세들이 보게 하면 뜬구름 잡는 식으로 주체사상이네 뭐네 안해도 자발적으로 애국심이 우러나는 거야' 라고 일소에 부치곤 했지요. 그런 점에서 朴대통령은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 77년 5월 영릉 (세종대왕릉.경기도여주) 중수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박정희가 동승한 김성진 (金聖鎭.66.대우경제연구소 회장) 문공장관에게 털어놓은 내심. "참 잘됐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 그럼, 임금이라고 다 같은 임금인가' 라고 뿌듯해 하시더니 '사람들이 내가 무인 출신이라 충무공만 치켜세운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李장군이 안계셨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있었겠어' 라고 말꼬리를 돌리시더라고요. " 그의 가슴을 송두리째 점령한 우상은 어디까지나 충무공이었던 것이다.
39.새마을 운동
지금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평가를 받는 새마을운동. 마을길을 새로 닦고 공장을 지었으며 농가수익 증대사업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당시엔 반강제로 농가 지붕을 붉고 푸른 슬레이트로 바꾸도록 하는등 외형적인 성과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운동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국민들의 자주적 능력을 약화시켰다" 는 지적이 있는 반면 "반만년동안 잠자던 농심 (農心) 을 깨어나게 한 국민운동" 이란 평가까지 다양하다.
박정희 (朴正熙) 시대를 휩쓸었던 새마을운동은 그러나 80년 신군부가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의 동생 경환 (敬煥) 씨가 본부장을 맡으면서 관변단체의 하나쯤으로 전락해 갔다.
더구나 88년 3월 터진 '새마을 비리사건' 은 이 운동의 위상을 뿌리째 흔들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박정희가 농촌에 본격적으로 눈돌리기 시작한 것은 집권한지 10년이 다 돼가던 70년초였다.
당시 농림부장관 김보현 (金甫炫. 73. 백제문화 개발연구원장) 씨의 증언. "공업화 추진과정에서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농민이 급격히 줄어들고 식량 자급률도 눈에 띄게 떨어졌습니다.
춘궁기 (春窮期)에는 식량이 떨어진 농가가 상당히 많았지요. 朴대통령은 그 무렵 농촌을 어떤 식으로든 손대야겠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어렴풋하게나마 농촌운동의 방향을 찾은 것은 69년 8월 수해지구 시찰중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에 있는 두개 부락을 방문하면서였다.
주민들이 수해 복구뿐만 아니라 마을 안길을 넓히고 지붕 개량. 담장 정돈. 조림등 생활환경을 크게 개선시켜 놓았던 것이다. 박정희의 70년 4월 전국 한해 (旱害) 대책회의에서의 역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5천년 묵은 가난을 몰아내도록 그들의 의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먼저 농촌의 생활환경을 바꾸는 '새마을 가꾸기사업' 부터 벌여보도록 합시다." 때마침 그해 여름 쌍용양회가 시멘트 생산과잉으로 재고 처리에 어려움을 겪자 朴대통령은 정부가 구입해 전국 3만5천개 부락에 3백35부대씩 무료로 지급하게 했다.
그 결과 1만6천여 마을이 빨래터를 고치고 다리를 놓는등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 이들 마을에 대해서만 시멘트 5백부대와 철근 1t씩이 추가로 지원됐다. 또 전국의 부락을 주민 참여도에 따라 기초.자조.자립마을로 나눠 참여도가 낮은 기초마을은 각종 정부지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당시 농협중앙회 지도과장으로 청와대에 차출돼 새마을운동을 담당한 한호선 (韓灝鮮.61.자민련) 국회의원의 증언. "새마을운동은 철저히 경쟁 원리를 도입했어요.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농촌에 전기가 들어간 마을은 20% 정도밖에 안됐습니다.
경제논리 대로라면 전봇대에 가까운 마을부터 전기가 들어가도록 해야 하는데, 朴대통령은 전봇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라 하더라도 새마을운동의 성과가 있을 경우 그 마을에만 전기가 들어가도록 지시했어요. 중간에 있는 마을들은 전깃줄 구경만 하라는 식이었죠. " '새마을 가꾸기' 에서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72년부터 소득증대사업에 초점을 맞췄다. 새마을운동의 방향이 바뀐 것은 경북영일군기계면 문성동마을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마을지도자가 주민을 동원,가뭄으로 말라버린 내를 파 물을 얻은 후 각종 농산물과 특수작물을 생산해 10배의 수익을 올렸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새마을운동을 이끈 유태영 (柳泰永.61.건국대 교수) 박사는 "朴대통령이 이 마을을 둘러본 직후 소득증대사업을 벌일 결심을 했다" 고 말했다.
새마을지도자 육성 결심도 이때부터다.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살기 운동' 입니다.
소득이 증대돼 농촌이 부유해지고 보다 더 여유있고 품위있는 문화생활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72년 4월 광주 새마을 소득경진대회 치사) 박정희는 여기서 "환경개선사업보다 소득증대에 직접 기여하는 사업들을 검토하라" 고 정부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내무부는 68년 농어촌 소득증대 특별사업의 실패 이유를 "정부가 지역 특성을 무시한채 일방적으로 사업을 지정했기 때문" 이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마을에 사업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내무부 초대 새마을담당관을 거쳐 지방행정담당관.지방국장등을 지내며 새마을운동의 설계자 역할을 한 고건 (高建.59) 총리의 증언. "사업선택권을 각 마을에 준 것은 주민들의 자율적 참여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해 사업메뉴와 사업별 추진방법을 농민들에게 제시했어요. 각 마을에서는 주민총회를 열어 사업을 선정하고 세부계획을 세웠습니다." 새마을지도자 육성을 위해 발탁된 인물은 농촌운동의 외길을 걸어온 김준 (金準.71.초당산업대 총장) 당시 농협대학 교수였다.
'새마을운동의 교주' 로까지 불린 김준과 박정희의 만남은 새마을운동을 본궤도에 올려 놓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박정희가 일깨우려는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이 새마을지도자들에게 전달됐다.
'빚지기를 두렵게, 저축하기를 기쁘게' '겉치레보다 실속있는 생활을' '수입에 맞게 지출하라' 는등 농심을 일깨우는 정신교육이 실시됐다. 이 교육은 강의형식을 탈피, 사례 발표.분임토의등 농민들의 삶의 체험을 생생히 전달하는 형태로 진행해 큰 효과를 보았다.
농수산부장관을 지낸 정소영 (鄭韶永.65.고려종합연구소 회장) 씨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얘기가 부지기수였다" 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예고없이 불쑥불쑥 새마을연수원을 방문하곤 했다. 강의실에 슬며시 들어와 새마을운동의 성공 사례담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김준 원장이 전하는 일화 한 토막. "불시에 연수원을 찾은 朴대통령이 1백40명이나 되는 수료생들의 교육소감을 나보고 다 읽게 하더니 교육생 평가를 A.B.C로 나눠 A를 받은 지도자에게는 농림부에서 특별지원을 해주라고 지시했어요. 반면 C를 받은 연수생을 추천한 군수는 문책하도록 했습니다. 이러자 지방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군수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직접 입소자를 물색했지요. " 박정희는 일선에서 농민들과 접촉하는 면장.군수들에게 '밑을 보고 뛰라' 고 거듭 지시했다.
박진환 (朴振煥.70) 당시 대통령 경제담당특보는 "朴대통령은 길을 고쳤는지, 다리를 놓았는지 일일이 확인하며 면장과 군수들을 다그쳤다" 며 "대통령의 성화 때문에 이들이 마을을 직접 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고 말했다. 또 새마을운동이 정부 고위층에까지 스며들도록 하기위해 박정희는 한달에 한번씩 '새마을 국무회의' 를 직접 주재,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안건만 다뤘다. 매월 열리는 경제동향보고회의에도 새마을지도자를 참석시켜 성공 사례를 발표토록 했다.
전국민이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새마을 노래' 와 '나의 조국' 을 직접 작사.작곡해 보급시켰다.
이 운동은 '애국 헛구호 그만하고 집앞부터 쓸어라' 는 도시.공장.직장새마을운동으로 확산됐다. 67년 도시가구의 60%에 불과했던 농가소득이 74년부터 정부 통계상으로는 적어도 도시가구의 소득을 앞서기 시작했다.
또 주민들이 새마을사업을 비롯, 마을의 여러 문제를 함께 모여 토의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폐해도 만만찮았다. 일선 관료의 인사고과에 새마을운동 성과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자 허위.과장보고도 종종 발생했다.
한호선 의원의 증언. "전북남원의 한 교장이 새마을운동을 잘해 이상촌을 만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마을주민들이 공동이용하는 구판장.정미소.종이우산공장등을 세워 부자마을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현장 슬라이드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제가 잘 아는 마을이었어요. 협동조합에서 한 일을 그 교장이 협동조합 간판을 떼내고 자기가 한 것처럼 조작한 것이었지요.
" 또 새마을교육이 기업인.대학교수.언론인, 심지어 장.차관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로 확대 실시되자 '유신독재를 지속시키기 위한 세뇌교육' 이란 비판이 일기도 했다.
70년대 우리 사회를 휩쓴 새마을운동의 열기는 79년 박정희의 사망으로 급격히 식어갔다. 현재 경기도성남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은 70년대 뜨거웠던 새마을운동의 열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