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조 백말 띠를 사랑했던 조선인
원하건 원치않건 이웃을 같이 하다 보니
일본에서 여러 가지의 문물이 한국에 전해져왔다.
이중에 실소를 금하지 못할 어이없는 것이 있다.
백말띠 여성에 대한 속설이다.
말띠에 태어난 여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환갑처럼 60년마다 되풀이 되는 간지에 태어나는 여성에게
해당하는 악성 풍설이다.
일본에서 건너 올 때는 이 간지가 경오생을 의미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한국에 와서는 병오생 말띠 여성으로 변했다.
그러나 경오생이라고 우기는 역술인도 있으나 이런 미신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정답은 잘 모른다고 해두겠다.
백말,또는 백마[白馬]는 일본에서 쇼와 일왕이 일제 패망 전 군대를
사열 할 때 왜소한 체구로 위엄을 부리기 위해서 타고 나온 말이기도
했고 또는 젊은 사춘기 여성들의 꿈에 나타나는 환상의 기사님이
타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들과 어울릴 때는 그렇게 긍정적인 백마도
여자들과 매치가 되면 영 좋지않은 심벌로 변해버린다.
한국에 떠도는 속설에 의하면 백말띠 여자는 성정이 드세고
못돼서 팔자도 좋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여자를 일생의 반려자로 맞으면 남자의 팔자도 덩달아서
엉망이 되어버린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웃어 버릴 말이지만 사람에 따라서 이것은 연인이나 배우자면
선택할 때면 심각한 고려 사항이 될 수도 없다.
이 미신은 도쿠카와 이에야쓰[德川 家康]의 손녀이고 동시에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며느리인
센히메[千姬1597-1666]라는 여성에게서 나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센히메는 도쿠카와 이에야쓰의 아들로서 2대 장군인
도쿠카와 히데다다[德川 秀忠]의 딸이다.
전국시대의 상례대로 실력자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아직 살아 있을 때
그의 늦동이 아들 도요도미 히데요리[豊臣 秀賴]에게 미리
정해진대로 시집을 갔었다.
정략결혼을 한 것이다.
전국시대를 마감시키고 권력의 정점에 선 히데요시는 후대를 위해서
최고 실력을 가진 제후 이에야쓰를 정략결혼으로 잡아 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병을 얻어 죽고 나자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쓰는
세키카하라 전투에서 그의 정적 이시다 미쓰나리를 격파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한다.
한편 근거지 오사카 성에 남겨진 불안하게 남겨진
히데요리[秀賴]는 암암리에 이에야쓰의 마지막 제거 대상이 되었다.
아직도 젊은 히데요리는 노회한 이에야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히데요리
------------------------
그는 이에야쓰의 생트집과 어머니
요도기미[淀君]의 극성,
그리고 주변에 몰려든 불평분자들의
충동으로 이에야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두 번의 싸움 끝에
오사카성의 쌀 창고에서 어머니
요도기미와 함께 자결을 하게 된다.
기구한 팔자를 산 시어머니 요도기미. 아버지 어머니 둘다
난세에 자결했고 자신도 난세에 자결한 비운의 여인.
늙은 히데요시의 첩이 되고도 오오노 하루나가라는 신하와의
염문설에 끊임 없이 시달렸다.처녀때 이름 차차히메
-----------------------------------------
센히메는 남편과 시어머니와 함께 순사를 각오했지만
살아나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센히메가 백말띠여서 아주 못되고 팔자도 엉망이었다지만
그녀의 일생을 살펴보면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었던 일본
전국시대의 실력자 딸의 일생을 살았었뿐 별다르게 그녀가
악녀 노릇을 했거나 거친 팔자를 산 것 같지는 않다.
남편을 잃고 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에야쓰의 심복 무장 혼다 헤이하치로 다다카스의
손자 혼다 다다도키[本田 忠刻]와 재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된 혼다의 히메지 성으로
옮겨가서 두번째 신접살림을 차렸다.
히메지 성에 만들어놓은 센히메의 실물대 인형
미인이지만 물론 상상으로 만든 것이다.
---------------------------------------
첫 남편 히데요리와도 금슬이 좋았고 두 번째 남편 혼다와도
금슬이 나쁘지 않았다.무던한 성격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을 말해주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히데요리가 죽고 나서 그의 유신이나 도요도미 가문의 혈연을
이 잡 듯 찾아내서 죽이는 히데요리 잔당 사냥이 있었는데
히데요리 첩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여덟 살짜리 어린 아이가
민간에서 발견되었다.
그 어린아이도 예외 없이 강변으로 끌려나와 공개 참형에 처해졌다.
센히메는 연적의 씨앗이라고 할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양자 입적등 여러 노력을 한 기록이 있다 .
인정 많은 심성이 아니면 힘든 결정이다.
그녀는 두 번째 남편이 병으로 죽자 불문에 들어가 여승으로
나머지 인생을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떴다.
과부가 되면 여승이 되는 일은 고대 일본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무엇 하나를 보아도 그녀가 악녀였었고 센 팔자를 살았다는
흔적은 없다.
오히려 그녀의 시어머니 요도기미,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딸로서
히데요시의 첩이 된 그녀가 드센 성격으로 갖은 욕을 다 얻어
먹었었고 최후도 안 좋았던 것이 오히려 이 백말띠 풍설의 근원이
되어야 할듯하다.
하여튼 백말띠가 안 좋은 사주팔자라는 것은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는 것이 그녀의 일생을 잘 살펴만 보아도 알만한 일이다.
백말띠가 주제라면 이 블로그에서 별로 취급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백말띠 센히메가 남편과 시어머니가 참혹한 죽음을 맞은
오사카성에서 벗어나 얼마간 친정에서 안정을 취하고 다시 재가하는
역사의 한 순간에 홀연히 5만석 규모의 한 중견 다이묘
[大名-지방 영주]가 소란을 피우며 나타났다.
사카자키 데와노가미 나리마사[坂崎 出羽守 成正,1563-1616]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쓰와노 번의 영주였다.
현재 독도 문제로 딴지를 거는 일본 시마네 현에 있던 번이었다.
때는 임진란이 끝나고 20년이 거의 되어가는 1616년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조선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부역하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지방의 한 영주까지 된 순수 조선인이었다.
잠깐 백말띠 센히메가 혼다가가 있는 히메지 성으로 재가 할 때
일본의 중심 에도에서 그가 벌인 난동부터 먼저 알아보자.
센히메가 재혼한 혼다가의 히메지 성.
유명한 관광지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 유산.
일본 제일의 아름다운 성임
그녀가 시집을 오자 시부모인 혼다 영주는 천수각이 있는
본성을 내주고 옆성으로 옮겨가 살았다
-----------------------------------
그는 센히메의 결혼 소식을 듣자 에도[江戶- 지금의 도꾜]의
번저에 부하 일 천 명과 여자 60명을 모아놓고 센히메 탈취를
모의했다.
집단으로 삭발하고 난리를 쳤으니 전 에도[江戶]
시내가 공포에 떨었다.
전해온 말인즉 오사카 성 여름 싸움이 있기 전 도쿠카와가
그를 불러서 센히메의 구출을 비밀리에 지시했다는 것이다.
센히메를 구출해내면 그녀를 그의 반려자로 만들어주겠다는
비밀 약속도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그는 센히메의 남편 히데요리와 어머니 요도기미가
불을 지르고 자살한 쌀 창고에 목숨을 걸고 돌입해서 불길을
무릅쓰고 센히메를 구해냈다는 것.
불타는 쌀 창고에 난입해서 그녀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그는
큰 화상을 입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쿠카와가 센히메에게 사카자키와 재가 하도록 권했으나
그녀는 큰 화상을 입은 그의 흉한 외모를 보고 정이 떨어져서
할아버지의 지시에 완강히 저항하여 할 수없이 혼다 가문에
재가 시키게 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사카자키가 미쳐서 공공연한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오사카 성에 도쿠카와 병력이 진입하고 위기를 느낀 히데요리와
어머니 요도기미는 쌀 창고로 피신했는데 시어머니 요도기미가
같이 죽자고 따라오는 센히메를 도요도미의 가신 호리우치[堀內]를
붙여서 도쿠카와 진영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요도기미가 그녀에게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만나서 잘 탄원하여
히데요리를 살려 내라는 밀명을 주었다는
내용도 같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나 일이 잘 안 풀려서 교섭을 과정에서 오해가 생겼고
히데요리 모자는 자결을 하고 말았다.
불은 두 사람이 지른 것이 아니라 도쿠카와 군대가 시체를 거둔 뒤
방화했다고 한다.
그러니 사카자키가 화상을 입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센히메가 안내를 받아 도쿠카와 진영에 인도 될 때
그녀를 인수한 부대가 사카자키의 부대였고 사카자키가
센히메를 정중히 영접한 사람이 사카자키 당사자였다.
사카자키에 이때 소위 말하는 ‘필’이 꽂혀 상사병이 발병한 것이
나중에 정신 이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도쿠카와 막부에 공공연한 반란을 일으킨 사카자키
저택은 무려 일만 명의 병력으로 물샐틈없이 포위되었다.
그의 정신병은 가신들까지도 몰살의 위기로 몰고 갈 지경이었다.
이 순간에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경호 실장격인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가 찾아와서 그를 설득한다.
야규우는 그의 아버지 야규우 세키슈우사이와 함께 역사에
비중있게 등장하는 검도의 달인이다.
그는 장군가의 병법[검도]사범이었으며 도쿠카와 부자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또한 도쿠카와 막부의 영주 감시 비밀 조직인 온미쓰[隱密]의
책임자로서 막부의 실세라고 할만큼 세력이 막강했다.
야규우는 이 이국 출신인 사카자키와 대단히 절친했다.
친구의 간곡한 호소를 받고 제 정신이 든 사카자키는 자신이
꿈 꿀 수없는 꿈을 꾸었고 돌이 킬 수없는 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후사를 부탁하고 자결했다.
그리고 반란군은 모두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기록, 근처에서 사건의 전말을 지켜본
영국인 리차드 코츠의 기록은 다르다.
미친 사카자키가 말도 안 되는 반란을 꾀하자 그의 가신들은
망연자실했다.
이런 이상한 짓에 같이 따라 가다가 자신들도
멸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은밀히 자신들을 포위한 도쿠카와 측과 내통을 했다.
사카자키의 아들로 가문을 잇게 하고 자신들의 번을 지속케 하면
사카자키를 제거하여 이번 난을 중단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무렵만 해도 가신들의 충성도는 후일 유교 사상이 강화되어
무사들의 무조건적인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도쿠카와 막부
전성시절보다는 약했었다.
도쿠카와 막부의 긍정적인 답을 얻은 가신들은 미친 사카자키를
죽인 뒤 그의 머리를 도쿠카와 군에 내놓고 항복했다.
그의 작은 아들은 겨우 목숨을 건져서 가문을 이었지만 성을
나까무라로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막부는 이 이상하게 미쳐서 막부에게 반기를 든 번[藩]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의 번은 폐문 당하고 영지는 몰수당해
가메이[龜正] 가문에 주어졌다.
야규우가 절친한 친구 사카자키에게 약속했던 영토와 가문의
보존이 되지를 않게 되자 이를 미안 하게 생각하여 평생
자기집의 문장과 함께 폐문한 사카자키 집안의 두 삿갓 문장을
같이 썼다는 것을 보면 첫번째 설이 더 유력하기는 하다.
그리고 일본에 뿌리를 내렸던 조선인은 이렇게 백말띠의 여성과
얽힌 일화를 남기고 영원히 사라졌다.
사카자키의 영지 쓰와노 성의 폐허 - 조선인 사카자키는 영지민을
잘 다스린 명군으로 전해져 온다.
---------------------------------------------
사카자키[坂崎]는 누구인가?
앞에서 말했듯 그는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들과 같이 강제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조선에 온 왜군에 부역하다가 철수하는
그들을 따라 일본으로 도망쳐 온 조선의 반역자였고 배신자였다.
그러나 그런 점을 빼놓고 보면 이민족인 그가 타국 땅에 발을
들여 놓고 당대에 사만 사천석의 영주가 된 것은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이 시기가 창 한 자루 가지고 출전하여 행운을 거머잡는
난세의 전국시대가 아니라 비록 세키카하라 싸움이나 오사카 성
싸움이라는 큰 전투가 있기는 했지만 일본사회는 오타 노부나가와
도요도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통일된 제도와 신분이
고착된 사회였으니 말이니 그 부역자는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것이라 하겠다.
그는 조선 땅에서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 秀家]부대에
붙어서 부역을 하였다.
우키다는 지금 오카야마에 57만 4천석의 거대한 영지를 가진
일본 유력 영주였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1573-1655] 우키다 나오쓰쿠의 아들로서
히데요시의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 총애를 입어 그의 양자가 되었다.
히데이에[秀家]의 수[秀]자는 히데요시가 그에게 하사한 이름이다.
우키다 히데이에
----------------------------
분로쿠 전쟁이라고 일본인들이 부르는 임진왜란에서
우키다 히데이에는 사카자키의 덕으로 무사 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데려와 우키다 우쿄노스케 나오모리
[宇喜多 右京 亮 直成]라는 이름으로 우키다의 종형제로
가문 입적시켜 그를 가문의 일원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 천하의 운명을 가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편에 선 은인 우키다에게 등을 돌리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이에야쓰 편에 붙어 공을 세웠다.
사카자키에게 무장으로서의 능력과 인간적인 매력은 있었던 것 같다.
야규우 무네노리 정도 되는 사람이 조선의 배신자인 그를
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국인이지만 기골과 담력이 뛰어난 무사”라고 평했다.
세키카하라 전투때 그는 이에야스를 위하여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했다고 역사는 쓰고 있다.
이에야스는 그를 가상하게 생각하여 세키슈[石州]의 하마다[濱田]
에 삼만석의 영지를 주었다.
이 싸움에서 패장이 된 우키다가 영토를 몽땅 몰수된 것과 대비된다.
우키다 나오모리는 이렇게 이에야쓰의 은혜를 입으면서
우키다라는 이름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성을 사카자키[坂崎]로,
이름을 나리마사[成正]로 바꾸고 입신양명을 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사카자키라는 이름도 도쿠카와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10여년 뒤 그는 오사카 싸움에서 다시 활약을 하여 더큰 쓰와노 번을
하사받아 4만 4천석의 더 큰 번의 영주가 되었다
조국땅을 버리고 이국땅으로 온 그를 거두어 주어서 성공시켜준
우키다는 그가 승승장구 할 때 그의 큰 아들,부하 열 두 명과 함께
일본 남쪽의 낙도인 하찌조지마[八丈島]로 귀양 보내져 비참한
신세가 된 뒤였다.
북위 33도에 위치한 하찌조지마.
우키다는 여기로 귀양가서 50년을 가난하게 살고 죽었다.
그가 데리고 섬에 들어갔던 아들의 후손은 200년이 흐르고
도쿠가와 가문이 망한 뒤에야 도쿄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의 자손이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간바있다.
--------------------------------------------------
먹을 것이 떨어져 보리쌀을 구걸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기까지 했었다.
우키다는 결국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낙도의 50년 귀양 인생을
84살에 ‘소고기가 먹고 싶다’라는 말을 남기고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학생 시절에 야마오카 쇼하치가 쓴 ‘소설 도쿠카와’
[대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됨]를 처음 접했었고 그 뒤에도
자주 되풀이해서 이 전집을 읽었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사카자키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읽을 때마다 항상 소설의 끝부분에 홀연히 나타나서 해프닝을
벌이다가 사라진 이 미스테리한 조선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사카자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보았다
겨우 얻은 정보는 그가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와 위에서 소개한
그의 친구 야규우 무네노리와 함께 자랐다는 일본 역사 소설의 한
짧은 대목이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도 더 전이라
신빙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 정보로 그가 사카자키가 확실히 조선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우키다 히데이에를 따라서 간 것이 확실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 도대체 어떤 인간일까?
임진왜란은 조선역사에 수없는 충신들과 명장들 그리고 의병들의
애국지사들을 배출한 국난이었지만 혐오스러운 민족 배신자들도
양산된 전쟁이기도 했다.
국내 현실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왜군에 부역을 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이미 부산 동래성을 점령한 일본군을 수행하여 조령까지 길 안내를
한 자도 출현했고 이순신 제독이 부산을 공격했을 때 육지에서
왜군을 도와 조선제 대포를 조작해서 포사격을 하는 부역자도
나타나 이분을 분격케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함경도에서 왕자 임해군을 붙잡아 가토오군에게
넘긴 아전 국경인 같은 배신자들도 나왔다.
그러나 사카자키의 존재에 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었다.
작가 야마오카 쇼하지의 말대로 그가 위기에서 우키다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던가 야규우 무네노리의 말대로 그가 담대하고
어쩌고 하는 묘사를 참고해보면 그가 조선군의 무장 또는 의병의
간부 같았는데 우키다의 주변에서 그런 흔적이 있는지 임진왜란사를
다 뒤져 봤으나 그런 흔적은 찾아 보기가 힘들었다 .
우키다는 삼만 대군을 인솔하고 행주산성을 공격했다가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에게 대패를 당했지만
벽제관에서 이여송의 명군을 대파하는 솜씨를 보이기도 하였다.
우키다가 싸운 다른 주요 전투로 조선군이 전멸한 남원성 전투도 있다.
그는 갓 스물 넘은 나이에 조선에 와서 한양에 주둔했던 왜장이었다.
비록 명목상이었지만 히데요시에 의해 조선 침공군 총 사령관으로
임명된 왜장이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우키다의 조선내 행적을 뒤졌더니
희미한대로 짐작 가는 방향이 보였다.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선조가 도주한
한양에 입성하자 지금의 조선 호텔 자리에 주둔했었다
아직도 소년티를 못 벗은 그는 이국정서 넘치는 한양 생활에서
호기심과 욕정을 억지하지 못하고 조선 여자를 맞아 현지처를 두었다.
이 우키다의 첩이 여자 신분이 참 특이했다.
조선 이씨 왕조의 외척 집안이었다고 한다.
딸을 외적에게 성 상납시켜 재미를 보려고 했던 인간도 한심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여자가 그때 한 단계 아래로 천시 받던 첩의
소생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제 정신 가진 조선의 인간이라면 정실의 본가 딸을 왜적에게
성 상납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러고 이 우키다는 이 이국에서 얻은 측실을 극히 사랑하여
일본으로 데려 갔을 가능성이 크다.
임진왜란동안 조선에서 얻은 현지처를 일본으로
데려간 일본 영주로 유명한 애꾸눈 무장이며 센다이 영주
다데 마사무네[伊達 正宗]가 있다.
히데요시에게도 상납한 조선인 첩이 있었고 그 사이에 숨겨둔
아들이 한 명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으로 일본에 납치 되어와 에도성의
여관[女官]이 된 오타 쥬리아의 일화가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녀는 도쿠카와의 수청을 거부하여
일본 낙도 고오즈시마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40년을 살고
섬에서 일생을 마쳤다.
위의 일화들은 조선 여자들이 일본 제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우키다가 명색이 왕족이라는 이 조선 여자를 일본으로 데려갔을
가능성이 큰 이유로 조선 왕족의 여인을 측실로 거느렸다면 자기의
신분도 크게 선전한다는 부수 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사카자키가 이 우키다의 정인(情人)인 조선 여인과
무슨 관계가 있었고 이 조선 여인의 강한 지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키다가 사카자키에게 퍼부은 지원이 상식의 도를 넘는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키다는 사카자키에게 성을 준 정도가 아니라
자기 가문의 일원으로 만들고 자기와 종형제의 관계로 만들었다.
더구나 자기 아버지 우키다 나오이에[直家]의 이름 중에서
나오[直]의 한자를 주어 나오나리[直成]라는 일본 이름을 준 것은
비상식적인 후대였다.
사카자키가 뛰어난 능력이 있었고 또 우키다가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하나 외국인에게 지나친 것이었다
더구나 2만 4천석의 엄청난 영지까지 주었으니 이건 정말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것이다.
아무리 조선에서 신세를 졌다 해도 이 부역자를 입본에 데려와서
가신의 반열에 두고 먹고 살게만 해주는 것이 일반 상식 수준의
보은에 대한 대접일 것이다.
나는 한 때 조선인 사카자키가 그 때 일본 무사 사회에 유행하던
남색(男色-동성연애)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심도 해보았다.
그러나 사카자키의 나이가 우키다의 나이보다 훨씬 더 많았었다.
남색이란 대개 10대의 어린 소년들이 희롱의 대상이었다.
우키다는 사카자키를 자기 일족으로 만들고 가문을 만들게 해서
일본 사회 진입을 강력하게 지원했다.
되풀이 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사카자키의 능력이외
그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동양 권세자들은 자기 정인의 피붙이에 한 없이 약했다.
중국의 한무제가 자신의 총애하던 위부인의 오라비 위청을 장군으로
만들어준 것이라던가 원나라 순제의 후궁이었다가 황후가 된
딸을 둔 고려 기자오의 가문이 대를 두고 행패를 부렸다던가
숙종의 총희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득세라던가 ---
현대의 동양 가족사회에서도 절친한 처남이나 매제는
친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북한에서 승승장구하는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카자키는 우키다의 정인인 여인과 무슨 혈연이
있었던 같은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나의 추리력이 펼쳐보는 가능성의 세계이다.
나의 생각에 생판 낯 선 일본에서 출세한 인간인 사카자키는
이 우키다의 현지처가 된 여자의 친 오빠일 가능성이 높다.
그 추리의 강한 근거는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출세하기 위해서
우키다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사카자키가 우키다 조선인 첩과 무슨 관계라면 친 남매이고
첩의 동생이 아니라 오빠일 가능성이 크다.
일가붙이가 아닌 친 남매로 보는 이유는 여자의 친 혈육이 아니고
사촌만 되어도 결혼하는 일본 사회에서 애첩의 친 남매만이
우키다가 경계심없이 신임 할 수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더해서 임진왜란 발발시 그의 나이는 이미 30세로 20세인 우키다의
애첩인 여인은 더 어렸을 것이니 여자의 오빠로 추리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친 오빠만이 여동생의 연줄을 타고 우키다에게
접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겠다.
여동생이 왜군 실력자의 애첩이 되자 그는 국가고 민족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 연줄로 우키다의 주변을 파고들었고 조선 사정에
먹통인 우키다는 여러 가지로 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고
또 그를 활용했을 것이다.
그 사이 사카자키는 일본어도 배우고 일본 풍속에도 익숙해진
그는 부역의 업무를 훌륭히 해내 우키다의 신임도 두껍게
받았던 듯하다.
여기에 물론 그가 조선의 왕족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이
존재 했을 것도 있다.
사카자키가 조선인 첩과 연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감히 도쿠카와 가문의 딸을 넘보았다는 사실에서도
상상할 수가 잇다
일본의 실질적인 왕조인 도쿠카와 가문은 교토의 황실이라던가
큰 번의 영주 가문이라든가 또는 심복 가문이라던가 등등과에
제한한 혼인 관계가 대단히 엄격했었다.
외국인 출신 주제에 장군 가문을 감히 넘봤다는 것은 그가 자신이
비록 외국인이지만 조선의 왕족이라는 프라이드가 잠재의식에
내재되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의 신임아래 최고의 지위를
누렸고 히데요시가 죽을 때는 단지 27세의 나이로 도쿠카와나
마에다와 같은 반열인 오대로[5大老]의 위치까지 출세해 있었다.
그렇게 힘이 있었던 우키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사카자키는
일본의 핵심 사회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천하가 뒤집어지는 세키카하라 전투에서 재빨리
말을 바꿔 타고 도쿠카와의 뒤에 줄을 서는 배신의 부역자 처신을
되풀이해서 재미를 보았다.
우키다 가문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사카자키는 배신으로 다시 모신
도쿠카와에게 사랑과 신임도 받아 그의 앞날이
탄탄대로로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변절은 백말띠 센히메가 본의 아니게
촉발시킨 것으로 비참한 자폭의 최후로 끝났다.
근거없는 백말띠의 속설이 일본 항간에 퍼진 것에는 변신의 국제 명수
사카자키가 정신 이상자가 되어 자폭하게 만든 이 사건도 한목
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일설에는 센히메 사건은 조작이고 사카자키는
다른 사건으로 문책을 당해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는 것을 알려드린다.
일본의 역사에 유력한 실력자로서 사카자키가 최초의 조선인이었고
그가 죽고 나서 또 다른 조선인 실력자가 나타나기까지 300여년이
흘러야 했다.
2차 세계 대전 말기 패전의 분위기가 짙어지는 군국 일본의 마지막
외상을 지낸 도오고 시게노리[東鄕 茂德 1882-1950]는 임진왜란에
끌려간 도공의 후예로서 그 집안은 박씨 성을 쓰던 조선인이었다.
그가 다섯 살 때 그의 집안은 도오고로 개명하였다.
그러니까 그는 어릴 때 박무덕으로 불렸다.
아버지 박수승[朴壽勝]도 순수 조선인이었다.
도오고 시게노리.- 박무덕
외상을 지낸 이유로 전범으로 몰려서 스가모 전범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병에 걸려 미 육군 병원에서 병몰함. 부인은 독일인
-------------------------------------------
임진왜란은 능동적으로 부역한 조선인과 피동적으로 끌려간 조선인
후손 두 사람을 일본 정계에 배출했고 두 번째 침략인 한일 합방의
결과로 한민족에게 남겨준 일본 문화는 우리 사회에 백말띠라는
근거없는 미신을 수입하게 하였다.
확실히 일본이 미운 존재지만 버릴 수도 멀리 할 수도 없이
옆에 두고 살아야 할 숙명이 우리들 앞에 있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