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만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이다.
이곳은 국립서울현충원 제2 사병묘역으로 1033명의 병사가 잠들어 있다.
이 중 971기가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병사의 묘다.이 묘역 선봉에 육군중장 채명신의 묘가 있다.
"내가 죽거든 나를 장군묘역에 묻지 말고 여기서 조국을 위해 죽어간 사병의 묘역에 묻어달라!"
채명신 장군은 병상에서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2013년 11월 25일 채명신 장군은 세상을 떠났다. 문 정인여사는 고인이 별세하기 3일 전인 11월 22일 고인의 뜻을
담은 편지를 써서 청와대에 전달했다. 국방부는 '관련 법규에 어긋나고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사병묘역 안장에
난색을 표했다. 발인 전날까지도 장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27일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가신 분의 유지를 따르는 것이 예의라고
박근혜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며 채장군을 병사묘역에 안장하도록 한다는 뜻을 전했다.
채명신 장군은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중장이다.
이 채명신 장군이 별들의 무덤 대신 사병묘역을 선택했다. 계급은 다르지만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이 실현된 것이다.
군 장성출신이 사병묘역에 안정되는 건 채명신 장군이 처음이다.
채명신 장군은 살아서는 '전쟁영웅'으로 죽어서는 '참군인'으로 후배군인들의 귀감이 되고 사표가 되었다.
"만절(晩節)을 보고 초심(初心)을 안다."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이 명언을 실감케 하였다.이는 많은이들에게 큰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장군묘역과 사병묘역의 차이는 무덤의 크기가 8배 차이가 난다.
장군묘역은 26.4㎡(8평)이고 사병묘역은 3.3㎡(1평)이다. 여기에 묘비도 큰 차이가 난다.
장교나 사병들의 묘비는 높이 76㎝ 가로 30㎝이지만 장군들은 높이 90㎝ 가로 36㎝이고
여기에 단(가로 106㎝ 세로 91㎝ 높이 15㎝)을 세울 수 있다.
장군묘역에 무덤에 봉분을 하고 시신으로 안장을 할 수 있지만 일반 묘역은 화장한 유골만 안장이 가능하다.
그의 묘 앞에는 군복 차림의 채명신 장군 사진과 함께 생전에 그가 좋아하던 글귀을 새긴 비가 있다.
"그대들 여기에 있기에 조국이 있다."
"Because you soldiers rest here, our country stands fall with pride."
그의 묘비 뒷면 위쪽에는 그 묘번이 34489를 알리고 있다.
오른쪽에 1926년 11월 27일 황해 곡산 출생, 왼쪽에는 2013년 11월 25일 서울 사망을 기록하고있다.
채명신 장군의 묘는 사병묘역에 1평 규모로 자리하고있다.
비록 공간이 좁아 참배하기에 불편하지만 병사들 품에 묻혔기에 진짜 명당일 수 있다.
풍수지리학자 김두규 교수(우석대학교)는 채장군 묘역을 이렇게 말한다.
“파월장병들은 곁에 온 사령관을 환영할 것이다. 그렇게 갈채를 받는 곳이 진짜 명당이다.
죽은 것을 억울해하며 탓하는 원혼도 있을 것이다.그럼에도 그들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동고(同苦)와
동락(同樂)을 하는 종명이 아니겠나. 명당은 아무리 공부해도 잘 모르겠다.교과서적으로는 잡을 수 있지만,
본인이 만든 업이 바르지 않으면 발복이 안 된다. 사람 마음을 잡아야 한다.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을
바로 쓰는 것보다 못하다는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땅은 남에게 나눠주고,
거친 땅에 들어가 고생한 이들과 동고동락한다는 마음이 진짜 명당을 만들지 않을까.”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는 [김동길 인물 에세이] <37>채명신(1926~2013)에서
인간 채명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그를 추모했다.(2018년 8월 18일 조선일보)
내가 아는 장성이 몇 있었다.
그러나 내가 형님처럼 가까이 대하던 장군은 오직 채명신이 있었을 뿐이다.
황해도 곡산 사람인 그는 경북 영덕의 명문가 규수 문정인을 만나 그 가문의 사위가 됐다.
문정인의 오빠 문태준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어 세계가 감탄하는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제도를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시골 사람 채명신이 어떻게 그런 부잣집 딸의 손목을 잡을 용기를 냈을까.
아마도 산신령을 방불케 하는 그의 눈썹에 그 처녀가 먼저 반한 것은 아닐까.
그는 1948년 목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하여 5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그 사실이 그의 일생과 조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가 5기생이기 때문에 박정희와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그때부터 박정희는 채명신이 유능하고 패기 있는 군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존중하기도 하였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채명신과 박정희 사이 의견 충돌이 불가피했던 경우가 세 번 있었다.
채명신은 군인의 정치 참여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군사 쿠데타에 가담할 수 없었다.
박정희는 5·16 전날 밤에야 조창대 중령을 보내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협조를 부탁하는 친서를 전달했다.
채명신은 그 군사혁명이 실패했을 때 국가가 겪게 될 혼란을 상상하고 아찔하였다.
그는 즉시 1군 사령관 이한림을 만나서 설득하였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Magruder)를 찾아가 협력을 요청했고,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뛰어들었다.
두 번째는 박정희가 2·18 민정 불참 선언을 번복하고 군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그는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군인답지 않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음을 깨닫고 줄곧 침묵을 지켰다.
세 번째는 박정희가 국민에게 유신체제를 강요하면서
"유신헌법은 찬성할 자유는 있지만 반대할 자유는 없다"고 못을 박았을 때였다.
채명신은 그런 독재체제에 순응할 수는 없다고 하였고 박정희는 노발대발하였다.
그래서 채명신은 별을 하나 더 달지 못하고 군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억울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는 한 번도 박정희를 원망하거나 못마땅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를 반대하는 능력 있는 군인이 군에 있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생각했을 것이므로
직업외교관도 아닌 채명신을 스웨덴이라는 먼 나라의 대사로 보냈던 것이다.
그의 군 생활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1948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제주도 9연대로 발령받아 4·3사태로 뒤숭숭할 뿐 아니라
남한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소대장으로 위험천만한 나날을 보냈다.
1949년에는 보병중대장으로 승진하여 송악산 전투에 참여하였고
그해 11월에는 남파된 게릴라를 토벌하기 위하여 태백산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전쟁 중에는 '백골병단(白骨兵團)'이라고 불리던 유격부대를 이끌고 여러 번 인민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 지어진 뒤에는 제3군단의 작전참모
그리고 이듬해에는 논산 제2훈련소 참모장으로 부임하여 비리 척결에 전심하며 훈련소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는 월남전에 한국군이 참여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겼고
월남 사람들의 우상인 호찌민의 군대와 싸우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주장했으나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불러 주월 한국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단호한 참전 의지를 표명한 박정희는 그에게 월남전 참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런 연유로 하여 채명신은 뜻하지 않았던 길을 또 한 번 걷게 된 것이었다.
그는 늘 식구들에게
"내가 장군이 된 것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니
내가 죽으면 나를 국립묘지의 장군묘역에 묻지 말고 월남에서 전사한 사병들의 묘역에 묻어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그러나 당국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미망인 문정인이 대통령에게 직접 탄원서를 올려 마침내 허락이 떨어져
그는 월남전의 사병 전사자들과 함께 거기 잠들어 있다.
흔히들 말하기를 '월남전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으로서는 명분이 뚜렷한 전쟁이었다.
김일성은 우리의 참전을 극구 비난했지만, 인민군의 재침을 사전에 봉쇄하는 일에 큰 공을 세웠다.
한·미 군사동맹은 한층 더 공고해졌고 미군은 한국군을 세계 최강의 군대라고 극찬하였다.
월남전에서 한국사령관을 지낸 채명신에게는 닉슨 대통령이 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끝으로 화랑도의 화신이며 우리 시대의 모범적인 군인 채명신에게
일제하에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투사들이 즐겨 불렀고 나도 좋아하는 시 한 수를 띄운다.
"공중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 있다."
그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채명신은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