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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관점
오늘 본문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 직전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고난주간이 임박했음을 절기적으로, 또 요한복음의 이야기 흐름 속에서 알려준다. 본문은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돈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수의 십자가를 향한 길에 자신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예수에게 바친 충성스런 제자 마리아와 공동 기금에서 돈을 훔치고 예수를 배반한 불충한 제자 유다가 동행한다. 요한이 이 두 대조되는 인물을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포함했다는 것은 십자가의 의미와 하나님의 은총의 포용적인 성격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마리아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도의 사례를 보여준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세례 요한이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요1:29, 34) 라고 하면서 예수에 대한 증언을 했다. 그와는 다르게 마리아는 말로서가 아니고 행동으로, 즉 값비싼(costly) 향유를 예수의 발을 닦기 위해 사용하는 낭비적 행동으로, 예수에 대한 증언을 했는데, 이는 앞으로 일어날 훨씬 더 비싸고 더 낭비적인 행동에 관한 충실한 증언이었다. 예수가 이미 요한의 세례를 통해 그의 값비싼 사명(요3:16처럼 보내심을 받음)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다면, 이제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값비싼 죽음을 위해 예수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다. 요한처럼 마리아도 증인이고 제자이다. 그러나 말로서가 아니고 행위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
오늘 본문은 충성스런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고 불충한 유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다는 비싼 300 데나리온(거의 1년 치의 급여)의 가치가 있는 향유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이렇게 허비되는 것에 분개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유다의 속셈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가 훔칠 수 있는 돈에 관심이 있었다. 예수는 그를 나무랐는데, 베드로를 나무랐던 것(막8:33)과 비교하면 좀 가볍다. 요한복음에서는 유다가 배신자로 묘사되지만, 배신자는 유다 한 사람이 아니다. 베드로도 예수를 세 번 부인함으로(18:15-27) 예수를 배반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요21:15,16;17)는 명령을 받은 자는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관심있는 유다가 아니고 베드로였다.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 중 선택론(doctrine of election)에 500쪽을 할애하는데, 그 중 가룟 유다에 관한 해설을 작은 글씨로 48쪽에 걸쳐 하고 있다. (Church Dogmatics, II/2 (Edinburgh: T&T Clar, 1957),458-50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다도 구원할 수 있는 효력을 갖는가? 이것은 쉬운 질문이 아니라고 바르트는 인정한다. 유다는 예수를 배척한 배반자이지만 아직 선택받은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불린다. 유다는 배반과 <예수를 그를 죽일 자들에게 넘겨줌>으로 “잃은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목적”을 위해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끝까지 사랑함”이 예수의 죽음을 포함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나게 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제자인 가룟 유다에게 예수의 “끝까지 사랑함”의 효력은 미치지 않는 것일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가 잃은 자를 구하기 위해 오셨다면, 복음서 이야기 중에서 예수를 배신한 유다보다 더 잃어진 사람이 있을까? 선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먼 데까지 나설 때, 유다는 선한 목자의 구원의 손길 바깥에 있는 것인가? 예수가 사랑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있는가? 예수의 구원의 팔은 한계가 있는가? 바르트는 신약성서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다를 단순히 예수를 배척한 사람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유다는 우선 선택되었다. 배제됨(being rejected)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독립된 존재 양태를 갖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를 배제하기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배제된 “선택된 인간”(a rejected man elected)으로 규정짓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유다는 요한의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마리아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자는 이 둘 중 누구와 동일화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마리아도 아니고 유다도 아니고, 이 둘의 역설적 결합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의롭게 하고 성화시킨다. 마리아는 성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마리아라는 인물 안에서, 제자도는 홀로 거룩한 분께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형태로 드러난다. 침묵 속에서 마리아는 우리의 관심을 그 자신이 아니라 그가 기름 부은 사람에게로 돌린다. 유다라는 인물 안에서, 제자도는 예수를 배척하고 배반한 사람들의 “의롭게 함”(making righteous) 혹은 칭의(justification)로 표현된다. 요한의 복음서 전체는 단순하게 마리아를 의로운 선택받은 자로, 유다를 불의한 배신자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이 충성 되고 불충한 두 사람을 다 포함한다. 둘 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비치는 밝고 변혁적인 십자가의 빛을 받는다.
주석적 관점
▶ 나사로의 소생, 공의회의 모의, 예수에 대한 상반된 반응, 유월절, 그리고 식탁공동체는 예수를 위한 기름 부음 사건의 배경이다.
1. 나사로의 소생은 전제와 문제를 모두 야기한다. 첫째, 그것은 예수를 “부활과 생명”으로 강하게 성격 짓는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과 일반적 부활의 증거가 되면서 또한 예수를 믿음으로서 생명의 풍성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11:24-25). 예수는 이러한 가능성을 나사로와 그의 가족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은 예수를 위한 식탁 공동체에서 이를 잘 보여주었다(12:2). 둘째로, 나사로의 소생은 필사적 반대를 유발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예수의 죽음을 초래했다.
2. 예수의 죽음을 요한은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찬양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목적은 로마제국의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을 직접적으로 상대하는 것은 거의 드물다. 보통 제국은 왕이나 총독 또는 지역의 유지들의 뒤에 숨어 있는데, 그들은 제국에 저항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공의회에서의 토론은 민족의 자치를 유지하기 위해(11:47-50) 로마에 저항하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저항은 협력을 포함한다. 사실 공의회를 유지하는 것은 로마에 협력함으로써만 가능했다.
3. 저항과 협력은 예수에 대한 상반된 반응을 가져온다. 어떤 주석가들은 요한복음이 예수에 대해 “반유대적”으로 기술한다고 말한다. 사실 기독교역사에서 요한복음은 유대인들을 비방하는데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대응은 부정적이지 않다. 도리어 그들은 이상한 행동을 했는데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11:45;12:11).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특별한데 그것은 목자를 따르는 양같이 소리내지 않고,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며, 포도나무와 가지가 그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와 예수는 포도나무와 가지 같은 관계를 보여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동전에서 “백성들의 구원자”로, 또한 모든 먹을 것의 풍성함을 주는 추수의 신으로 묘사되는 황제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생명의 빵인 예수는 강력한 대조를 보여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제도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야바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성전과 민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가야바는 또 다른 예수에 대한 대응을 누설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공의회를 위하여 좋은 것이요”(11:50). 가야바의 뜻은 만약에 공의회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얄궂게도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한다(12:10). 그들의 전략은 이중적이다. 둘 다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인들이 책임이 크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변호할 여지가 없지만, 이는 또한 요한의 반유대적 편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이 전체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관여한 것은 아니다. 협력자들은 특정한 유대인들이지 민족 전체가 아니다. 제국의 권력에 협력하여 특권을 유지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도 어느 정도는 적용하고 있는 전략일 것이다. 만약에 과테말라에서 만든 코트를 입거나 말레이시아에서 제조한 컴퓨터를 사용한다면 나도 지구촌의 경제적 불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고, 불리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보는 제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4. 유월절 또한 배경이다. 요한복음에서 세 번째 유월절이다. 첫 번째 유월절에 예수는 장사하는 사람과 동전 바꾸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면서 성전을 “내 아버지 집”(2:16)이라고 했다. 두 번째 유월절은 예수가 5,000명을 먹일 때 언급되는데(6:4), 이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인 것을 기억하도록 했다. 세 번째 유월절은 요한복음 후반부에 나온다. 아마도 유월절 어린양을 잡는 오후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우연일 것이지만, 이는 단순히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유월절 배경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보여주고 있다.
5. 예수께 기름붓는 사건의 설정은 식사자리이다. 저녁식사 전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예수와 대화하는데 나사로는 말이 없다. 마리아도 향유를 붓는 장면에서는 말이 없는데 그 행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사로의 소생과 가족으로의 복귀이다. 이번에는 유다가 말한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없었기에 항의한다.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나누어주자는 것이다. 마리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면 유다의 논리가 더 맞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런데 화자는 독자들이 그런 논리에 서지 않도록 미리 알려준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려 하고 가난한 자에게 갈 돈을 훔치려 한다. 그런데 유다같은 사람에게 손가락질하기 전에 과테말라에 산 코트나 말레이시아에서 산 컴퓨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리아의 행동에 대한 예수의 해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리아의 향유를 그의 장사와 연관시킨다. 마리아의 기름부음은 또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예고한다. 이스라엘 왕에 대한 기름부음이다. 군중의 열광은 예수가 나사로에 행한(12:18) 표적에 의한 것이다.
예수는 그의 임박한 부재를 가난한 자의 약속과 비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12:8). 믿을 수 없지만 이것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 왔다. 예수의 말은 신명기 15:11에서 왔는데 이스라엘사람들이 손을 뻗어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실은 가난한 자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에는 다른 차원이 있다. 그의 떠나기 전의 기간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 같은 정상적 활동들을 대신하는 특별한 기간으로 묘사한다. 마리아의 기름 부음은 말로 담을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있고 예수의 처형 5일 전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
목회적 관점
교회의 재정담당자가 누군가 큰 액수를 헌금했다고 발표한다면 회의의 분위기는 달라질 것이다. 기증자가 무슨 의도로 기증했는지에 대한 의혹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치를 부릴 때, 선물은 꼬리표를 달고 올 수 있다. 더 논란이 되는 것은 아무런 제한이 없는 풍성한 선물이다. 선물은 그것의 사용을 두고 논쟁을 일으킬 뿐 아니라, 결정하는 사람의 숨겨진 우선순위를 드러나게 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요한복음 12장의 이야기는 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향유를 붓는 이야기와 비슷해 보인다. 어떤 복음서에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의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고(눅 7:36-49), 다른 복음서에서는 우리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일깨워준다(막 14:3-8). 요한복음의 서술은 다르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에게 부으니까 유다의 모습이 드러난다. 요한복음은 유다에게 단호하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기 전에 이미 그가 위선자요 도둑이라고 밝힌다.
이 본문은 과도한 선물을 둘러싼 태도에 대해 설교자로 하여금 숙고하게 한다. 선물은 동기에 대한 의혹을 일으킬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관용이 일반적인 자기만족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불평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관용에 대한 비판이 그 힘을 피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이라고 인식한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돈과 그 유혹하는 힘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관용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모인 에큐메니칼 목회자 그룹의 청지기 콘퍼런스에서 촉발된 격렬한 반응을 잊을 수가 없다. 한 발표자가 하나님께 직접 선물을 바치는 것에 관해 말하자, 목사들이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발표자는 지갑에서 100달러를 꺼내서 재떨이에 있는 불에 넣고는 기도했다. “주님, 이 선물을 주님께, 오직 주님께만 드립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목사들은 그들의 의자에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 지폐가 마치 향처럼 연기가 되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떤 사람은 화폐를 태우는 건 불법이라고 속삭였다. 다른 사람은 웅얼거렸다. “그가 돈을 저렇게 없애는 건 돈이 더 있기 때문일 거야.” 방안에는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해 못하시겠습니까?” 발표자가 물었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말은, 이것이 나머지 우리들에게 유용한 것이기를 중단했다는 뜻입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우리는 선물에 대해 실용주의적인 접근을 발전시켜 왔다. 교인들은 그들이 기부한 것에 자기가 했다고 표시하기를 좋아한다. 주요 기부자는 선물이 주는 영향력, 현판을 달아서 이름을 알리는 일, 그리고 상당한 크기의 세금 감면을 위해 기부한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에게 낭비했다. 우리는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특히 그녀가 어떻게 그녀의 머리로 예수의 발을 닦았는지를 들으면 그렇다. 문자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가 그녀의 오빠를 다시 살려서 그녀가 고마워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요한복음을 공부해보면, 예수가 나사로를 일으켜서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요 11:45-53). 만약 예수가 말한 대로 그녀가 예수의 장례를 위하여 향유를 구입했다면, 그 선물은 엿새 앞선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 이후에는 필요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예수는 선물의 본질에 대한 오늘날의 쟁점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예수는 그 순간에는, 특히 임박한 죽음이라는 빛으로 볼 때, 그것이 적합하다고 선포한다. 예수는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을 만큼 충분히 관대하시다.
많은 과도한 선물들은 곧바로 증발되어 공기 중에 사라진다. 교회 찬양대가 복잡한 찬양을 준비하느라 애쓰지만, 3분만 지나면 사라지고 만다. 문상객들은 슬퍼하는 사람의 명예를 위하여 커다란 화환을 제공한다. 성도들은 그들의 교회가 지출하도록 많은 금액을 기부한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하는가? 사랑이 그 이유이다.
관용의 기적에 대해 숙고하면 예수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제4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축복된 풍요를 제공했다. 가나에서 680리터의 새 포도주를 만들어서 결혼식 하객들이 마실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포도주가 있게 했다. 갈릴리의 바닷가에서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게 하고 열두 바구니의 음식이 남았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시몬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지시대로 배의 다른 쪽으로 그물을 던졌다. 그 즉시 153마리의 물고기들이 그물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요한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는 그를 통해서 모든 것이 만들어 진 단 한 분이시다. 그가 있는 곳에는 풍성함이 있다. 마리아가 아낌없이 향유를 부을 때, 예수는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그녀를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관용은 관용을 낳는다. 유다는 마리아가 한 일 때문에 그녀를 비판할 수 있지만, 이야기는 부수적으로 그의 위선을 드러낸다.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일에 이미 참여하고 있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것들을 비밀스럽게 쌓아두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종교는 무엇이 유용하고, 실용적이고, 비용이 효율적인지에만 집중한다. 자원이 부족할 때는 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재정이 우리의 첫 번째 관심사라면 우리의 마음이 위축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돈을 헤프게 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낭비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정말 아니다. 그러나 선물이 낭비되기 훨씬 전에, 먼저 선물을 받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그를 요구하지 않은 세상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는 전적으로 세상의 유익을 위해 행하셨다. 그는 계속 자기 방식으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드러내며 행하셨다. 나사로는 그의 자매의 소원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예수의 시간표에 맞춰 죽음에서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그렇게 하도록 요청받아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기로 스스로 선택해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바칠 것이다(요 10:17-18).
설교적 관점
베다니에서의 기름붓는 장면만큼 아름답고 진실되게 표현한 본문은 없는 것 같다. 마태와 마가는 이 일을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것으로 하고 있고 기름부은 여인의 이름도 보여주지 않는다. 요한은 이 장면을 사랑하는 세 친구의 집에서 일어났고 (요 11:5) 기름부은 사람을 마리아라고 말하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과 각각의 구절들은 설교 준비에 가장 좋은 가이드가 된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이 구절은 수난의 서곡으로 사역을 통하여 어느 곳에도 머리둘 곳도 없는 분이 집처럼 느꼈던 곳에서 가족과 같은 이들과 함께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RSV).
거기에 마르다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전 장에서 (11:27)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였었다. 거기에는 또 나사로가 있었는데 그는 예수께서 그를 위아여 울었었고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며 지금은 부활 후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또 거기에는 마리아가 있었는데 그녀는 누가복음 10:38-42에 따르면 예수의 발 앞에 앉아 배웠던 “모범적인 제자” (ideal disciple)였다. 이 잔치는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표지이며 제자들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
예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취하여 그의 발에 부었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그것은 과도한 헌신의 행동이었다. Evelyn Underhill은 예배는 “희생으로 요약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희생적인 구속행위에 대한 응답이고 거기에 우리가 참여하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녀의 희생에는 고귀한 것이 있었고[향유] 그것은 모든 성인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연민과 자애로움을 드러내는 놀랍고 과도한 것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값을 계산하지 않고 예수께 그것을 부었다. 마태와 마가에서는 그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기술하는데 그것은 그를 로마제국의 왕이요 메시아로 기름붓는 예언자적 행동이다. 사울이 여전히 왕으로 있을 때에 젊은 다윗왕을 기름부은 예언자 나단의 위험스러운 행동을 생각해보라.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붓는데 그것은 또 다른 예언자적 행위로 예수의 임박한 죽음을 뜻하며 묻히기 전에 기름붓는 것을 한다. 그녀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 곧 그들의 스승이자 메시아인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장면에서 다시 모범적인 제자의 행동 즉 발을 씻기는 행동이 나타났다. 예수는 여기서 자신이 곧 제자들에게 할 행동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예수의 발을 그녀의 머리털로 “닦음”(wiping)같이 그도 제자들의 발을 수건으로 “닦을 것”(will wipe)이다 (같은 헬라어 동사). 여기에서 제자의 삶에 대한 거룩한 상징이 있다: 씻어주고 씻기움을 받는 것(washing and being washed)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마리아가 솔로몬의 아가를 불렀는가? (아가 1:12, 임금님이 침대에 누우셨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내뿜었어요) 우리는 보통 증언행동을 (acts of witness) 냄새라는 감각과는 연결시키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면 안되는가? 누군가에게 줄 바로 구워낸 빵 냄새, 휴식 후에 어린 아이들로 가득찬 주일학교 교실의 냄새, 손님을 위해 준비된 방 냄새. Charlotte Food Rescue를 창설한 Anne Smith는 어느 무료식사제공처 (a food shelter)에 보낼 도너츠가 가득찬 마차를 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은 Bank of America가 된 어느 은행의 임원에게 후원을 요청하려고 들렀다. 꼭대기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누군가 “당신에게서 도너츠 같은 냄새가 납니다”(You smell like donuts!)라고 말했다. 그녀는 웃었고 왜 그러죠라고 물었을 때 문이 열렸고 새로운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사랑의 행동에서 나오는 향기는 바람을 타고 우리가 보지 못한 곳으로 불어간다.
유다의 반박: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유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는가? 마태와 마가는 이 반박을 제자들이 한 것으로 기술한다. 요한은 유다를 빛에서 어둠으로 옮긴 사람이라고 말하며 비난받을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반박은 그 점을 보여준다. 제자됨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는 교회가 예배라는 아름다운 행위에 사용된 돈과 가난한 자들을 대신해 사용된 돈 사이의 갈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가?
예수의 응담“ 그대로 두어라”
여기에 이 여인을 향한 날카롭고 분명한 변호가 있는데 이 변호는 교회에 의해 소통과 은사가 막혀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기도하다. 예수는 누가복음 10:42에서 한 것처럼[눅 10:42-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변호한다. 그런다음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곳에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RSV).
지금까지 교회는 이 구절을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정당화하거나 비난하는데 사용하여왔다. 예수는 분명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고 있는게 아니다.그의 말은 신명기 15:11의 인용이고 그 메시지는 분명하다: “당신들은 반드시 손을 뻗어, 당신들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주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신 15:11) 윤리학자이자 신학자인 Stanley Hauerswas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와 항상 함께 있는 가난한 자는 예수다. 과도한 (extravagance) 모든 것은 가난한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진정한 교회는 언제나 그 안에 가난한 자들이 있고 그들의 삶을 소중히 한다.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곳 즉 수난의 서곡으로 돌아온다. 마리아의 행동은 세상과 예수의 제자들의 기만과 배신 한가운데서 나왔다. 우리는 십자가의 그림자 속에 살고있고 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가운데 살고 있다. 그래서 만찬의 식탁에서, 넘치는 연민과 사랑의 행동에서,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와 매일매일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초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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