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의 초원
그 호박밭은 해발 602m의 두리봉 중턱에 있었다. 해발 384m의 높다란 곳에 자리잡은 만 평 농장이다. 관모봉엘 올랐다. 도동항이며 저동항 풍경
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섬에 산봉이야 숱하지만, 두 항구와 마을의 모습을 한꺼번에 선연히 볼 수 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 두 항구가 있는 섬의 동남쪽은 물론, 고개를 돌려보면 내수전과 죽도, 말잔등, 성인봉의 유려한 능선도 한 눈에 넣을 수 있다. 성인봉 능선을 지나 서쪽으로 시선을 옮겨가는데, 굽이진 능선 한 자락 아래로 둥그렇게 다듬어진 널따란 초원 하나가 문득 눈길을 잡는다. 우거진 수풀 속에 들어앉은 푸른 밭이 마치 커다란 쟁반 같기도 하고 떡 벌어진 광주리 같기도 하다. 그 가운데 하얀색 지붕을 이고 있는 집이 하나 서 있다. 그야말로 언덕 위에 하얀 집이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다. 필시 누구네의 농장일 터이다. 저 높은 산자락에 누가 일군 밭일까? 어떻게 저 까마득한 곳을 올라갔을까? 무슨 농사를 짓고 있을까. 어떻게 오르내리며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못해 신비롭게까지 느껴진다.
관모봉에서 서쪽으로 내림길을 잡았다. 아득한 절벽 능선 길을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내리니 성인봉 등산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면 성인봉이요, 내리면 안평전이다. 돌길 등산로를 한참 내리니 경작지가 보이고 인가나 나타난다. 건너다보니 그 초원의 모습이 뚜렷하다. 마을 사람을 만나 그 초원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중평전을 거쳐 옥천동 골짜기로 완전히 내려가서 다시 한참을 올라야 가야 한다고 했다. 누가 저 높고 험한 곳에서 농사를 짓느냐고 물으니, 조상 대대로 내려온 농장인데 호박 농사를 짓고 있는 곳이라 했다. 주인은 그 호박으로 빵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도 했다. 저 산정의 호박이며 빵이라……. 호기심이 달아올랐다. 팍팍한 콘크리트 포장길을 한참을 타박타박 걸어서 중평전을 지나 옥천동 골짜기로 내렸다. 다시 해발이 시작되는 지표로까지 내려 선 것이다. 다리도 아프고 힘도 어지간히 빠져 버렸다. 그러나 그 산정의 신비로운 농장은 나의 걸음을 멈출 수 없게 했다.
호박밭을 찾아서
옥천동 골짜기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간다. 계곡을 낀 오르막이 이어진다. 계곡 돌 틈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지만, 오를수록 가팔라지는 오르막길의 구슬땀을 씻어주지는 못했다. 간간이 이끼가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 전에 닦여지고 포장된 길인 것 같다. 높은 산자락까지 포장도로가 나있다는 것이 섬에서는 귀한 일은 아니다. 단 한 집 혹은 단 몇 평의 경작지를 위해서도 포장도로 닦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가빠지는 숨결과 팍팍한 무릎이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젖게 했다. 굽이를 돌고 돈다. 비탈에서 떨어진 돌 부스러기가 널브러져 있기도 했지만, 길은 산정의 농장에 다다를 때까지 줄기차게 뻗쳐 있다. 지금이야 차를 몰고 오르내릴 수도 있지만, 차가 다닐 수 없던 시절엔 어찌 이 길을 일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을까. 땀을 그으며 한참을 오르니 길 양쪽으로 잡풀 자욱한 밭이랑이 펼쳐진다. 그 길 끝에 하얀 슬레이트지붕의 집이 초
록빛을 배경 삼아 나타난다. 이 높은 곳에 저 집인들 어떻게 지었을까. 밭 가운데 서 있는 집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ㄱ자 집 앞에 헛간을 두고 있다. 거처의 흔적은 역력했지만, 상시로 살지는 않은 것 같다. 섬의 산중 가옥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일 철에만 거처하는 모양이다. 지금은 심거나 가꾸어야 할 철이 아니라서 사람도 없고, 밭에도 작물보다 잡풀이 많다. 잡풀 사이로 봄에 채 거두지 않은 고비며 삼나물 들이 보이고, 비탈밭 자락을 온통 덮고 있는 것은 호박 넝쿨이 다. 집 주위의 밭은 평지지만, 비탈에 걸쳐져 있는 밭이 더 넓다. 섬의 밭이란 거의 모두가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데 비하면, 그래도 이곳은 평지가 넓은 편이다. 수 천 평은 족히 될 듯하다. 이 높은 곳에서 이만한 넓이의 밭을 개간하자면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었을까. 밭 자락 끝에 시리도록 푸른 물빛의 바다가 걸려 있다. 이 밭의 주인은 저 푸른 물빛 속에서 푸른 꿈을 건져 올리며 섬 살이의 고단을 다스려 갔는지도 모르겠다.
농장을 허위허위 내려왔다. 농장 주인이 경영한다는 호박빵 가게를 찾았다. 한쪽에서는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빵이며 젤리를 만들고 있고, 그 앞쪽에서는 노친이 가게를 지키며 손님을 맞고 있다. 주인인 아들은 바깥일에 바쁘다고 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요. 그 때는 말도 마소. 어린것을 들쳐업고 그 높은 곳을 오르내리며 농사를 짓자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니껴?"
섬에 차도도 뚫리기 전에 오직 손발의 힘으로만 농사를 짓고 모든 생활을 꾸려 나가야 했을 때를 회상했다. 농장으로 오르는 길이 포장된 것은 불과 십수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두 살 난 딸을 업고 농장에 올랐는데, 그 딸이 지금 쉰 둘이라고 한다.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고생한 것이야 말로 다할 수 없고, 그 고초 덕인지 지금은 그래도 숨은 쉴만하다고 했다. 그러나 농사만 지어서는 소용이 없더라고 했다.
저 산 위의 농장은 만 평쯤 되는데, 고비며 삼나물, 참두릅도 재배하지만 호박 농사를 주로 짓는다고 한다. 그 호박을 재료로 삼아 호박빵을 만든다는 것이다. 농장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인데, 윗대 조상은 섬의 개척기에 뭍에서 이주해 온 개척민이라고 했다. 개척기라면 지금부터 1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시대다.
개척 정신으로
섬 역사의 기록을 보면 울릉도, 독도를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고종 19년)부터다. 그 해 4월에 조정에서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檢察使)로 임명하여, 선박 세 척에 일행 80여 명을 태우고 울릉도로 보내어 4월29일부터 5월13일까지 섬을 순찰하게 한다. 순찰의 결과로 이규원은 '울릉도검찰일기'라는 보고서를 조정에 올린다. 보고가 있은 다음 해인 1883년(고종 20년)에 김옥균을 동남제도(東南諸島) 개척사로 임명하여 울릉도에 본격적인 개척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그 해 7월 드디어 16호 54명의 개척민이 선박 4척에 식량과 종자를 싣고 이주함으로서 섬의 개척사가 시작되어 이주민들이 잇따른다. 1896년 9월의 조사에 의하면 도내 동리 수는 11동(저포동, 도동, 사동, 장흥동, 남양동, 현포동, 태하동, 신촌동, 광암동, 천부동, 나리동)으로 호구 수는 277호, 인구는 1,134명(남 662, 여 472), 개간 농지는 4,774.9두락이었다고 한다.
그 농장 주인의 조상이 언제 섬에 들어왔는지는 들은 바는 없지만, 개척민으로 들어왔다면 이 시기 어름일 것으로 보인다. 개간된 농지의 숫자 속에는 이 조상의 농지도 들어 있을 것 같다. 개척이란 말 그대로 일을 처음으로 열어나가는 일이다. 처음의 일이란 결코 쉬울 수가 없다.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독을 겪은 다음에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불타는 투지와 노력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섬의 개척민들에게 있어서 개척이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어야 하는 것임에야 생사를 가름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엄청난 고초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후예의 시대가 되었다. 호박밭 조상이 물려 준 것은 농장만이 아니었다. 그 개척의 열정과 의지도 후손에게 전해진 것 같다. 그 후손이 섬 제1호의 벤처 농업인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만 평의 농장에서 지천으로 생산되는 호박을 농협에 수매하는 것만으로는 기대 소득이 보장되지 않아, 여러 가지 궁리 끝에 호박을 이용하여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보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미 섬에서는 호박으로 엿을 만들어 섬의 브랜드로 내놓고 있어 시장 경쟁이 치열한 터라, 엿이 아닌 새로운 제품을 만들
어 시장에 진출할 수 없을까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연구하고 노력한 지 3년 만에 방부제나 색소를 쓰지 않고 맛도 뛰어난 빵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으로 벤처 농업인이 되면서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호박빵을 만들기 시작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지금 그 빵 공장은 어엿한 식품회사가 되어 연 수 억의 매출을 올린다고 한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농토를 개척하던 그 투지며 용기와 지혜가 이 후손에게 물려진 게 틀림없다. 이 후손만 그러하랴. 섬의 많은 개척민 후예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인한 개척 의지로, 섬을 금새 집어삼킬 듯이 달려드는 사나운 파도와 단박에라도 날려 버릴 듯 불어제치는 폭풍도 이겨내며 망망대해 외딴섬의 험난한 섬 살이를 꿋꿋하게 지켜 왔을 것이다. 가파른 산비탈에 힘들게 몸을 붙이고 땅을 쫏아 농사를 짓고, 망망한 바다에서 목숨을 건 파도와의 싸움을 이기고 오징어를 건져 올리며 줄기찬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섬이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은 물론 초창기의 그 개척민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온 개척 정신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 102명의 청교도들이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낯설고 물 설은 대륙을 그들의 땅으로 일구어낸 불굴의 개척 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그러나
그러나, 오늘의 섬 살이가 옛날 같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개척의 의지도 처음 같지 않은 것 같다.
섬사람들이 섬을 떠나고 있다, 떠나려 한다.
오징어가 잘 잡히지 않는 탓일까.
툭하면 끊겨 버리는 뱃길 탓일까.
비싼 물가 탓일까.
뭍에서 불어오는 문명의 검은 바람 탓일까.
그래서, 나날이 각박해져만 가는 인심 탓일까.
-개척민의 순후하고 굳센 의지가 다시 돌아 보여지는 오늘이다.♣(200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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