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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폐염전의 달빛을 즈려밟고 세월에 잃은 노래가 있는가 하면, 잊혀진 노래도 있다. 잃은 노래와 잊혀진 노래가 그 결말에서는 같은 망실이지만, 그 과정에서는 사뭇 다른 과정과 곡절을 안고 있을 듯하다. 더군다나 별다른 악보나 없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되는 노동요(謠) 같은 경우는 그 망각의 속도가 가파를 수밖에 없으리라. 노동요의 문학적 진솔함과 현장성을 인정하고 그 내용을 노랫말만이라도 채보(採譜)해 두었더라면 하는 생각은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문짝보다 더 크게 부서지고 주저앉은 소금창고의 몰골 앞에 무색할 따름이다. 이젠 폐염이 된지 10 여년 가까이 돼 가는 소래염전(蘇萊鹽田)을 처음 알게 된 때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이었다. 그 때만해도 염전 전체가 소금 생산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열심히 소금 생산을 하던 곳도 많았지만 무슨 사정에서인지 의욕을 잃고 쉬고 있는 염전 구역도 더러 눈에 띄었다. 휴전(休田)이 된 소금밭에서는 금새 놀고 있는 티가 났다. 빗물이 빠지지 않아 갯물과 같은 염도로 맞춰진 함수(鹹水)에서는 망둥이가 뛰듯이 돌아다녔다. 염전 배미의 진흙 둑은 허리가 부실한 사람마냥 진흙 살이 뭉개진 곳도 눈에 보였고 염전 바닥에 깔린 옹기 파편이 드러나거나 떨어져나간 곳도 눈에 거슬렸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염부 아저씨를 한 번 보고 싶은 생각이 오롯했을 때도 있었다. 가끔 염부로 보이는 늙수그레한 할아버지가 염전 둑에 나와 하염없이 담배를 피워대는 뒷모습만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그런 지병이 있어 보이거나 늙은 염부 곁에는 노회(老獪)한 듯 보이는 개가 곁을 지키며 어슬렁거렸다. 좀 더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들어 소금 볕에 그을린 늙은 염부의 얼굴을 바라봤으면 하는 생각이 굴풋했던 적이 있다. 무언가 잘못 먹고 허천난 듯 변두리 염전 가를 어슬렁거리는 일도 아버지가 중풍에 드시고 나서부터였다. 부자(父子)가 한데 저수지 민물낚시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내게 그렇듯 큰 공백으로 다가서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학생의 본분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감성의 옆구리, 그것은 본격적인 연애의 시절이 도래하기 전에 내가 맞아야만 했던 시간의 옆구리, 그 공백이었다. 중풍의 아버지 곁을 잠시 벗어나 내가 가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번다한 시내가 아니라 늘 버려진 듯 적막이 감도는 들판이나 저수지 근처 야트막한 산야, 본격적으로 수평선의 바다가 보이지 않는 제철을 맞지 못한 소금밭 정도였다. 내 허천난 듯한 허허로움을 더 큰 허허로움이 있는 곳으로 찾아다님으로써 메꿔보려고 했던 것일까. 그렇듯 허전한 옆구리에 풍경이라는 엽낭을 차고 바닷가와 들판을 쏘다니기 버릇조차 하나의 벽(癖)이라면 벽일까. 이제금 풍경의 엽낭에서 꺼낸 염전은 아직도 뙤약볕에 검붉게 그을린 근육질의 웃통을 벗은 채로 한창 때의 염부들이 염전 배미 둑길로 외발수레를 당당히 밀고 가고 있다. 한여름 장맛비가 끝난 염전 가의 소금창고들은 당당하게 앞가슴 문짝을 풀어헤치고 쉼없이 드나드는 외발수레의 드나듦으로 적막할 틈이 없다. 텅 빈 가슴에 채워지는 눈부시도록 새하얀 소금은, 어떤 권태와 어리석음, 미망(迷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부신 깨달음의 결정으로 환원하고야 마는 성자(聖子)의 아랫도리 저 밑에서 삽으로 퍼올려진 각성제와 같았다. 바다, 저 바닷물에는 저처럼 많은 각성의 성분으로하여 무량한 세월에도 썩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다에 던져진 사람의 시체나 버려진 개의 주검은 온전히 썩어 뼈만 남을지언정 그 안에 원래부터 깃들었던 고기며 숨탄것들은 그 바닷물 속에 오히려 평안하다. 장수의 바다, 그 한 끄트머리를 쥐어짜든 졸이면 소금이라는 광물질이 버석거린다는 것이 신기했다. 방금 바닷물에서 몸을 건져나온 소금 한 줌을 주머니에 넣어 집에 가 중풍에 든 아버지 입 속에 흘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소금이 아니라, 죽은 핏줄과 신경을 살리고 반신불수의 몸을 일으키는 비약(秘藥)이에요, 라고 당당히 아버지께 얘기할 것만 같다. 그게 어리석다면, 눈부시게 새하얀 소금 한 줌을 당신 눈 앞에 펼쳐 보여드리자. 수수 억만년 누워서 출렁거리는 바닷물도 이렇게 하얗게 몸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아버지. 그런데 소금 한 줌은 끝내 내 호주머니에서 꺼내지지 못했다.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나는 풍경의 엽낭주머니만을 뒤적거리다 아버지 곁에서 잠들었다. 갯흙이 잔뜩 묻은 바짓단에만 신경쓰느라 바지 호주머니에 든 소금 한 줌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반쯤 녹아내려 소금버캐로 굳어버린 소금 한 줌의 몰골은 또 다르다. 그것은 반신불수의 아버지를 단숨에 일으켜세울 신비한 명약도 아니고, 그저 입에 넣어 혀가 닿으면 짜고 씁쓰레한 소금일 따름이다. 더군다나 일평생 아버지의 밥상에서 음식을 통해 몸으로 들어간 소금은 혈압을 높이고 혈관을 부실하게 만든 필요악일 수도 있었다. 호주머니 속에서 커다란 밥풀처럼 떼낸 소금버캐는 이내 부엌 개수대에 버려졌다. 보름 가까이 호주머니 속에 들어앉았던 작디 작은 염전은, 그렇게 싱겁고 맥없이 사라졌다. 기억 속의 소금은 기억 밖에서도 여전히 짜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편이 되지 않았다. 지독한 바닷물을 호주머니에 담고 다녔다고, 스스로 농담을 했다. 기억과 그런 기억이 주머니로 차고 있는 풍경 속의 소래염전에는 봄이 되면 훈풍을 맞은 소금창고의 문짝에 채워진 배가 불룩한 맹꽁이자물쇠가 풀리고 묵은 소금이 자루에 담겨 트럭에 실린다. 간수가 적당히 빠진 전 해의 소금은 오히려 맛이 뚜렷하고 잡맛이 없다 한다. 늙은 염부는 역시 늙은 마누라가 건강원에서 해온 개소주 즙(汁)을 먹고 다시 기운을 차린다. 흐릿하게 보이던 염전 바닥의 사금파리도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재산이 희망이 아니라, 마음이 몸을 꾸려 해나가려는 일이 희망이다. 털갈이가 거의 끝나가는 염부네 집의 개도 많이 늙은 몸이지만, 마지막 배라는 듯이 새끼를 뱃다. 십여 개가 넘는 젖이 선 것을 보니 새끼가 많이 들어선 모양이다. 운이 좋다면 배에 든 대로 새끼들 모두가 살아서 소금밭 위로 불어오는 훈풍의 살가움을 여린 털들로 느낄 수 있으리라. 그렇게 봄에 든 소금밭인데도 정작 거기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빗물과 섞인 함수가 차 있는 배미도 있고 황사와 흙먼지가 낀 마른 바닥의 배미도 눈에 띈다. 뭍의 논밭처럼 무슨 파종이나 이앙(移秧)의 설레임 같은 것은 도시 찾아볼 수가 없다. 소금밭에는 봄이 와도 별반 대단한 기지개가 느껴지지 않는다. 각기 염도가 다른 함수(鹹水)가 단계를 거치면서 최종 증발지에 이르는 고단한 기다림과 졸여짐이 있을 뿐, 뭍의 채마밭처럼 씨앗이 뿌려지고 묘종을 옮겨심고 푸성귀에 거름과 물을 대며 더러 웃자란 것을 솎아내고 벌레를 물리치며 가꿔내는 오밀조밀한 재배의 속사정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오히려 봄이 되면 염전바닥을 깨끗이 청소하여 함수을 들였을 때 불순물이 섞이는 것을 방지하는 대청소가 우선이다. 단단한 옹편(甕片), 그러니까 사금파리가 촘촘히 박힌 바닥을 깨끗히 청소하여 순도가 높은 새 소금을 구워낼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봄맞이의 우선처럼 보인다. 흙속에 씨앗이나 모종을 채워야 하는 뭍의 농사와는 달리 우선 빗물과 불순물이 섞인 함수를 완전히 빼내고 흙먼지 불순물 더께가 앉은 사금파리 염전바닥을 말끔히 비워내는 것이 염전 농사의 봄인 것이다. 채우고 시작하는 농사와 비우고 시작하는 농사의 방편이 다름은 뭍과 바다를 바탕으로 하는 두 농사의 근본적인 체위가 다름을 보여주는 대목이리라. 그런 봄맞이 대청소를 벌이는 염전들이 언젠가부터는 줄어들더니 이제는 봄이 와도 그런 최소한의 기척조차 보이지 않는 '침묵의 봄', '침묵의 염전'들이 속출하고 있다. 소래염전도 그런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소래염전의 모든 배미에서 소금 농사가 일어나던 때로 돌아갈 수야 없지만, 최소한 3할 정도의 소금밭에서 채염(採鹽)이 유지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바람은 허망한 노릇이 되었다. 소금 생산이 끊긴 염전바닥에는 사금파리 대신한 타일 틈새를 뚫고 나문재나물이며 화홍나물, 갈대, 통통마디라고 하는 함초(鹹草) 같은 염생식물과 심지어는 귀화식물인 개민들레꽃들이 점령하고 있다. 짠 소금기 속에서도 나름의 번식력을 자랑하는 소금밭 한켠에는 염전 배미에 함수를 대던 양수기 펌프가 시뻘겋게 녹슬어 나뒹굴고 있다. 녹 한 번 기가 막히게 잘도 스는구나. 나는 무슨 철골 괴물의 내장 덩어리 같은 모터를 발로 한 번 차본다. 한끝 메마른 염전바닥은 황량한 운동장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불과 십 년 남짓한 세월의 간극 동안에 소래염전은 폐허의 기운이 완연하다. 허리를 구부려 고무래로 물소금을 밀고 곰배로 긁으며 부삽으로 외발수레에 소금을 퍼담던 염부들의 실루엣은 어디에도 없다. 몸을 바꿔 환생한 노복(奴僕)들마냥 함수를 대던 물꼬와 도랑에는 바람에 쓸린 갈대들의 조아림만이 있을 따름이다. 갈대밭으로 변한 숲에서는 간간이 개개비 새들의 소란스런 울음소리가 허공에 매달렸다 흩어져버린다. 낮달은 저만치서 오래전에 두개골이 함몰돼 버려진 개의 그것처럼만 보인다. 짖을 수도 없는 개란, 이런 버려진 폐염전의 오랜 지킴이처럼 그 목청마저 잃은 것이 아닌가. 십여 년 전 저 너머, 둑방에 앉아 환약 같은 담배연기를 피워던 늙은 염부와 그 곁을 어슬렁거리던 노회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앉았을 법한 자리엔 시퍼렇게 소리쟁이가 잘라올라 있다. 개천 바닥이나 개울이 가까운 둑방 언저리에서 자주 보던 소리쟁이들이 이제는 소금기가 가시지 않은 염전에서도 당당히 초록을 일으켜세운다. 어스름이 끼쳐든다. 염전바닥에 깔았던 타일들은 누구의 장난인지 뒤집어져 소복하게 쌓여있다. 그대로 깔려있는 타일 틈새로 갈대의 뿌리줄기가 파고들어 대바늘 같은 촉(燭)을 밀어올린다. 소금 대신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 이처럼 은밀하고 여지없다. 얼마를 방치하면 이 소금밭은 수런거리는 갈대밭으로 완전히 탈바꿈을 도모할 것이다. 식물들이 더 잘 아는 모양이다. 소금밭에 소금이 나지 않는 것을, 그래서 소금기가 점점 옅어져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곧 자신들의 터전이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상황일 수 있다. 식물들에게는 예지(叡智)나 파노라마적인 인식의 힘이 없을지 몰라도, 그에 버금가는 생득(生得)의 힘이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그 순결한 힘 자체가 갖고 있는 본능적인 분별력 말이다. 그것은 한치의 오차나 오류를 포함하지 않는다. 번식과 유지라는, 생명 본연의 기능에는 선택적 인식이나 판단이 끼어들 새가 없어 보인다. 몇 개의 소금밭 배미를 넘어 제법 훼손이 덜 된 소금창고에 닿았다. 어두워질 무렵인지 사방에서는 개개비 새 소리 말고도 다른 여러 새떼들 소리가 끼쳐온다. 마치 커다란 가마솥에 생쌀을 씻어 앉히는 소리와 더불어 넓은 대나무 채반에 생쌀을 부어놓고 생솔가지를 꺾어 부비는 듯한 소리의 여운이 남는다. 생쌀에 생솔가지를 부비고 어루는 것은 아마도 향내를 좋게 하고 솔잎 진이 빠져 쌀에 배일 정도의 유익한 성분을 뒤섞어 먹기 위함일 터이다. 정작 그런 소란스러운 새울음 소리의 진원지는 가까이 있음에도 보이지 않고 의뭉스럽게 수런거리는 갈대숲만이 먼 발치에서 더 이상 가까이 오면 하늘로 새들을 쏟겠다, 으름장을 놓을 것처럼 바람보다 서둘러 등골을 세우듯 다시 수런거린다. 나는 차마 그 꼴을 보기 어려워 짐짓 의뭉스러운 눈치만을 던질 뿐 더 이상 가까이 가지 않는다. 아마도 소금창고 쪽으로 서둘러 방향을 뚜렷이 한 것도 그런 이유를 버릴 수가 없다. 소금창고에 저 수다스러운 새들을 가둘 수가 없으니, 다 빠져나간 소금과 소금자루는 옛 기억으로 텅 비어 있을 따름이다. 천창(天窓)이라도 낸 듯 휑한 지붕 한켠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이 보이고, 눈빛이 맑은 초저녁 별들도 보인다. 옆구리가 터져나간 바람벽엔 리기다소나무로 심벽 기둥을 삼은 몰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무너진 마룻바닥에는 드문드문 소금버캐의 흔적이 있으나, 그나마도 들이치는 눈비와 바람 등쌀에 흔적을 지울 날도 멀지 않아 보였다. 허공 중에 큼지막한 새소리의 가마솥 저녁을 앉히던 갈대밭의 새소리도 뜸을 들이는지 잦아들고, 소금창고 안에 든 난 칼마저 저잣거리에 팔아먹고 하룻밤 밤이슬을 피하려는 낭인(浪人)처럼 허허로울 뿐이었다. 폐염 된 지 십여 년 남짓의 시간 동안 염전바닥은 뒤집히고 쇠붙이라 칭할 만한 것들은 묵은 속내를 털어놓듯 붉게 녹슬어버렸다. 소금창고는 소금을 털리고도 소금기 가득한 해풍과 비바람에 사납게 뜯긴 몰골로 제 텅 빈 속내를 속수무책으로 드러냈다. 무너져내리고 뜯긴 마룻바닥 틈새로 개민들레꽃이 꽃 주둥이를 반쯤 닫은 채 낯선 인기척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아, 한낮에 나왔음에도 집을 나선지 몇 달을 넘긴 사내의 심정이 내 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무슨 서늘한 빙의(憑依)의 감정이란 말인가. 소금이 없는 소금창고에 낯선 사람과 개들민들레꽃 한 송이, 그리고 달빛이 무너진 지붕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비쳐들었다.
-<자염(煮鹽) 일소리 중 소금장사 소리 사설> 부분
천일염과는 차이가 있지만, 예전 소금물을 끓여 소금을 얻던 조상네 일꾼들이 일소리로 부르던 '소금장사 소리 사설' 대목이다. 경향 각지로 팔려나가는 소금의 원산지 중의 하나였을 이 소금창고는 그러나 더 이상 소금장사를 부르지 않고 모을 수도 없다. 우리 소금보다 짠맛이 더 강하고 잡맛이 있는 중국산 저가 소금의 물량공세를 버틸 수 없어 소금들마저 염전을 버리고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 같다. 텅 빈 반쯤 지붕이 날아간 소금창고 안으로 듣는 달빛은 직접적이라 너무 꼭닥스럽고 옆구리가 터진 소금창고 바람벽으로 듣는 보이지 않는 새소리는 때론 왈패처럼 강퍅할 때가 있다. 이 모두 성정이 곱고 애닯픈 구석이 완연한 것들에서마저 사나운 심사를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 소금이 날 자리에 소금이 나지 않는 그 단순 지극한 이유 말고는 달리 찾을 길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