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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섰다. 안개가 자욱했다. ‘화양교’를 건너 강둑으로 접어들어 ‘검율리’쪽으로 달렸다. 안개 속에서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희미한 시야 너머로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 밭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농사일 가운데 안개가 걷히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콩 베기, 들깨 베기다. 안개가 걷히고 해가 나면 콩 꼬투리가 말라 다 튀기 때문이다. 들깨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라 다리가 뻐근하다. 겨우 10 리도 못 왔는데 이마에 땀이 나고 등줄기가 후줄근 하다. 기름 값이 너무 비싸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전거 동호인들도 주말이면 무리를 지어 길을 따라 달린다.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를 처음 탄 사람은 누굴까? 1883년 통역관으로 미국에 다녀온 윤치호가 자전거를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이 놀라운 물건을 윤치호가 갖고 들어왔다면 신문 등에 기록이 남아있을 터인데 남아있지 않고, 윤치호 일기 등 어떤 자료에도 그 해 자전거를 갖고 들어왔거나 탔다는 기록이 없다. 윤치영 전 서울시장이 쓴 <나의 교우록>에 윤치호가 1895년 자전거를 갖고 귀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윤치호가 전한 일기에는 1907년에 자전거를 탔다는 대목이 나오니 대략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열심히 자전거를 탔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들어온 것은 윤치호 설보다 대략 1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을 세웠고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허레이스 알렌(Allen, Herace Newton)은 '조선견문기(Things Korean, 1908)'에서 1884년 미국 공사관 무관을 지낸 해군장교가 자전거를 타고 들어왔다고 기록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설립한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은 1886년 미국 선교사 달젤 벙커(Dalzell A. Bunker)가 처음 자전거를 탔다고 기록했다. 두 사람이 전한 기록이 지금으로선 가장 빠르니, 이 시기쯤 자전거가 들어왔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본다. 애비슨은 1893년 고종황제에게 자전거를 소개하기도 했다. ‘와동뜰’을 바라보며 ‘만남의 광장휴게소’를 지난다. 뒤로는 ‘홍천 장례식장’이 들어서 있다. 운구차가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이승의 생을 마감하고 저승의 생으로 가나보다. 어느 죽음인들 슬프지 않으랴. 그 슬픔이 산자의 몫이리니 나도 슬프다. ‘와동’과 ‘굴운’의 경계를 지난다. 작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붓못골’이다. 이곳에 이색적인 공원이 있다. ‘붓못골’ 산 밑으로 가지런히 서 있는 로봇들, 한복 입은 인형들 등 폐품을 이용한 ‘정크아트 공원’이 있다. 김영모(54, 홍천군 화촌면 군업리)씨의 작업실이다. 한때 공무원이었던 김 씨는 퇴직 후 우연히 농기계센터를 하는 친구를 만나 많은 폐자재 및 폐품이 고물상으로 넘겨지는 것을 보고 2005년부터 생각대로 느낌대로 만들어 세우기 시작한 것이 작은 소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밤새는 줄 모르고 용접을 하며 재미에 푹 빠져있었는데 갑자기 시력이 떨어지고 눈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강한 불빛에 상처를 입었다고 하여 지금은 치료 중이다. 그래도 인근지역의 고물상에 찾아가 폐품을 모아들이며 눈이 나아지면 다시 시작한다고 모형을 만들고 있다. 그는 길가의 공원을 만들고 그 공간에 초, 중등 교과서에 나오는 곤충 등을 만들어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어디서 배운 적도 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느낌대로 만든 이런 형태의 조형예술을 ‘정크아트’라고 한다. 정크아트란 일상생활에서 나온 부산물인 폐품, 쓰레기 등을 소재로 하여 갖가지 폐기물을 만들어내는 현대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자 하는 작품들이라고 정의한다. 1950년과 196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전통적 조소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전위적 미술경향으로 길거리에서 주운 물건, 신문, 타이어, 의자, 콜라병, 화장지, 흙, 나뭇잎 등의 여러 종류의 폐품을 끌어 모아 만든다는 의미에서 스크랩 아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런 정크아트의 출발점은 팝아트의 거목이라고 인정되어지는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컴바인, 오달리스크 같은 컴바인 페인팅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헌 신문지 조각에서부터 망가진 전기제품까지 주로 도시문명의 폐기물을 이용해 회화와 조소의 중간 형태를 창조해 내었다. 이른바 회화와 조각이 결합된 형식인 것이다. 로버트 라우션버그 이후로 점차 산업폐기물, 폐품, 고장 난 부품, 파손된 부자재 등에서 작품의 재료를 얻으려는 작가들이 많아지면서 버려진 소비 물자를 오브제로 구체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여 정크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정크 아트라는 명칭도 이후부터 유래되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새로운 삶으로 태어난 수십 명의 로봇들이 무슨 말을 한듯 한데 알 수 없다.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현대문명에 대한 새로운 발로가 아닐까? 함부로 깡통을 차지마라. 그 삶이 내겐 새로운 생명의 미적 가치이다. ‘굴운’으로 들어서서 ‘응달말’을 지날 무렵 어느 집에서 풍기는지 무국 냄새가 났다. 아직도 토속적인 맛에 회가 동하는 걸 보면 촌놈티를 벗지 못했나보다. 자전거를 타고 ‘소니고개’를 넘는다. ‘소니고개’는 ‘굴운’과 ‘와동’을 잇는 고개다. 소나무가 우거져서 붙여진 고개 이름이지만 실제로 호랑이가 나타나 ‘소니<노(努) :여러 개의 화살이나 돌을 잇따라 쏘는 큰 활 >’를 많이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만큼 산골짜기였지만 왕래가 많았던 길이었음을 말해준다. 고개를 넘으면 ‘가래골’ 어귀이다. 둔덕을 이룬 이곳은 소나무 보데기가 빽빽하게 들어섰던 ‘송금번들이’다. 이안산업(주)과 삼진고려인삼(주) 공장이 자리하고 그 뒤로는 인삼농장이다. ‘송금번들이’를 지나 내려오면 ‘기왓골’이라하는 ‘진흙구렝이’가 나온다. ‘와동’은 ‘와촌’과 ‘동막’을 합쳐 ‘와동’이라 했다고 홍천군지에 소개되고 있다. 마을사람들에게 ‘동막’을 물어보니 아는 사람이 없다. ‘동막’은 어딜까? 아마도 ‘와촌’과 함께 큰 부락이었을 듯 하지만 어딘지는 알 수 없다. 난감하다. 그러나 어디쯤인지 짐작은 할 수 있다. ‘동막리(東幕里)’는 산막이 있던 마을이고. ‘와촌(瓦村)’은 ‘동막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했으니 와촌의 남쪽인 ‘무소골’ 어디쯤이 아닐까 여겨진다. ‘와동’은 ‘수태골’을 중심으로 2개의 행정리로 나뉘어 있다. 마을 뒤로는 ‘공작산’ 능선이 ‘오성산’을 향해 내리뻗고 앞으로는 ‘와룡산’이 나직이 감싸고 그 너머로 ‘화양강’이 흐르는 서북향의 마을이다. ‘무사봉’과 ‘백자봉’ 사이는 ‘무사골’이고, 백자봉 오른편은 ‘수태골’이 계곡을 이루고 있으며, ‘무사골’어귀는 넓은 ‘와촌’을 이룬다. ‘와촌’은 ‘무사골’이 펼쳐놓은 부채꼴 같은 마을로서 옛날에는 기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기와를 구어 ‘수타사’의 지붕에 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는데 기와를 굽던 터는 ‘진흙구렝이(기와골)’ 어귀라고 한다. 그 안으로 이어지는 ‘가래골’ 안으로 인삼밭이 펼쳐진다. 와동의 물길은 ‘공작산’ 자락의 능선에서 비롯되는 ‘가랫골’, ‘무소골’, ‘잣나무골’, ‘안상골’, ‘갈매기골’을 꼽을 수 있다. 골짜기 어귀마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무소골’의 ‘와촌’, ‘수태골’ 어귀의 ‘둔덕가람(부채가람)’과 ‘안산골’ 어귀의 ‘새터(새말)’, ‘가래골’의 ‘송금번들이’다. 딱히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이는 마을이지만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 전설과 함께 아기자기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 말만 믿고 ‘무사골’로 들어갔다. 자전거가 좋은 점은 이런 골짜기까지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올라갈 때는 힘들지만 내려올 때는 ‘다운 힐’을 즐긴다. 양편에 우뚝 선 봉우리가 예사롭지 않다. 오른편의 봉우리는 ‘백자봉(柏子峰)’이고 오른편 봉우리는 ‘무사봉’이다. ‘백자봉’ 정상에는 봉화대가 남아있다. 전쟁시 이 봉우리에서 봉화를 올리면 그 봉화를 신호로 ‘무사봉’ 골짜기에 숨었던 무사들이 움직였다 한다. ‘무사봉’에는 문등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볼만하다고 한다. 일단 ‘무사골’로 접어든다. 어귀에 소나무가 멋스러움을 내뿜는다. ‘코코비치 펜션’인데 큰길 입구에 ‘새낙원’이란 이정표가 서있다. 문은 걸려있고 어디선가 새 소리가 났다. 새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새 농장이었다. 칸칸마다 여러 마리씩 동거한다. 문을 열고 주인을 찾으니 강아지가 달려 나온다. 빈집을 지키느라 외로웠나보다. 그때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지금은 산란중이라 예민하여 촬영은 곤란하다며 주변을 둘러보라고 한다. 저마다 울고 있는 저 많은 울음이 무슨 뜻일까? 공허하게 남는 목소리일 뿐일까? ‘무사골’안으로 ‘쐐기골’과 석이버섯이 많이 났다는 ‘석이바위’를 보고자 올라갔으나 안막어귀에 군 사격장이 있어 더 이상 출입이 불가능하다. 한때는 나무하러 ‘피난골’, ‘진삼밭골’, ‘황철골’, ‘광산등’까지 갔다가 한 짐 지게에 지고 내려오다가 ‘큰쉼터’에서 쉬며 목을 축였다는데 요즘은 그런 기억만이 뻐꾸기처럼 숨어 운다고 한다. ‘무사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와춘’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개울 옆에 ‘주봉초등학교 와동분교’가 있다. 분교가 본교보다 학생수가 1명 더 많다고 한다. 학교 앞으로 펼쳐진 들녘은 ‘곡창둔지’다. ‘소니고개’에서 뻗어 내린 ‘와룡산’이 감싸 안았는데 용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자리에 장례식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좁은 길을 오르내린다. ‘동살이’에서 ‘와룡산’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가재바위’가 나오고 ‘장고개’를 넘으면 ‘와춘 솔무정’이다. 농로를 따라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을 달리면 ‘새말 둔덕가람’이다. 생긴 모양이 부채 같다 하여 ‘부채가람’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수태골’이 만들어낸 땅이 아닐까? ‘수태골’을 따라 능선을 넘으면 ‘수타사’가 나온다. 마을사람들은 그곳을 ‘줄베이’라고 하는데 바위능선이 이어져 내려 악산이지만 등산로를 개설하면 ‘공작산’과 잘 어울리는 명산이 될 것이라며 ‘수태골’로 이어지는 수많은 골짜기들의 전설이 하나하나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 하여 안타깝다고 했다. ‘수태골’ 막치미는 ‘망밭’이다. 너른 버덩을 이루고 있으며 ‘승방이’는 어느 스님이 암자를 짓고 살던 곳이라 한다. 또한 ‘절고개’는 ‘수타사’로 넘나들던 고개라는데 고갯마루에서 ‘공작산’ 등산로와 만난다. ‘절고개’ 건너골짜기는 ‘줄베이(줄바위)’다. 바로 바위를 캐내 자갈을 만드는 광산이 있는 곳이다. ‘물프레골’, ‘치락골’, ‘좁싸리골’, ‘은도막골’을 지나면 ‘중보’가 나온다. 지금은 양수시설이 되어 있어 보는 다 허물어졌지만 그래도 ‘와동뜰’을 적시던 물길이었다. ‘수태골’에는 보가 ‘백자봉’ 밑에도 있었는데 ‘백자봉’의 약물단지의 물을 귀새로 물길을 텄다 하여 ‘귀새보’라고 한다. 그러나 약물이 좋아 지금은 물 맞으러 가기도 하는 마을 피서지라고 한다. ‘중보’를 지나면 ‘승지골’, ‘잣나무골’, ‘덕거리’, ‘갈매기골’이다. ‘수태골’을 나와 ‘새말’로 들어선다. ‘새말(새터)’은 ‘와동1리’고 마을이 중심이다. ‘새터’는 와동의 초입이다. 예전에는 ‘와동’과 ‘결운’을 건너다니는 배 터가 있었다. 마을의 숙원이던 다리(잠수교)를 놓았는데 비만오면 건널 수가 없었다가 1980년대에 들어 지금의 큰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새터’는 ‘큰새터’와 ‘중새터(작은새터)’가 부락을 이루고 있는데 ‘중새터’에는 아기장수전설과 ‘용마무덤’이 있다. 이야기는 ‘안상골’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안상골’ 입새에 권씨네인지 김씨네인지 열두 식구가 살았는데, 어느 날 아기를 낳았다. 산모는 산후조리를 할 겸 웃방에서 쑥물찜질을 하는데 아기는 태어난 지 삼일 만에 천장에 가서 달라붙고 대들보에 가 달라붙으며 집안을 누비고 다니다가 밖으로 휙 나가더라는 것이었다. 산모가 뒤를 따라 나가보니 ‘잣나무골’ 여울로 날아가 잣나무를 훌쩍훌쩍 넘으며 개울을 건너다니면서 ‘참 좋다’ 하며 노는 것이었다. 산모는 겁이 더럭 나 식구들한테 알리고 장수가 나면 반란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리게 되고 그 결과 삼족이 멸할까봐 노심초사하는데, 아이가 들어와 잠을 자더란다. 잠자고 있는 아기를 보니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 것을 보고 불로 지지고 팥 열섬을 아기 위에 얹어 놓았는데도 들썩거려 겁에 질린 식구들이 지둘러 죽였다고 한다. 그 후 ‘와룡산’에서 장수를 기다리던 ‘용마’가 나와 ‘결운 구름베루(베루도루)’까지 건너뛰고 난리를 치다가 ‘안상골 ’어귀의 잣나무 아래서 죽었다고 한다. 그곳이 ‘용마무덤’인데 지금은 그 어귀에 저수지를 막고 아래 뜰은 다 논이 되었지만 아직도 ‘용마무덤’의형태는 남아있다고 한다. 그 후 아기장수가 태어난 식구들은 염병(말라리아)에 걸려 죽고 망했다고 한다. ‘와춘’과 ‘새터’ 사이에는 ‘솔무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새말(새터)’에는 토속음식점 등 여러 음식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새터’를 지나 ‘갈매기골’로 들어간다. 너른 들을 이루고 있는 버덩은 ‘와동 뜰’이다. 뜰을 가로 질러 달린다. 갈매기골‘의 개울이 ’와동뜰‘ 한가운데로 흐르고 ’갈매기골‘을 오르는 길은 개울 따라 안막으로 이어진다. 낙엽이 떨어진 시골길. 그 안막에 자리 잡은 펜션마당에는 밤이 떨어져있다. 다람쥐가 달려 나와 물고 간다. ‘갈매기골’ 아래에서 ‘빗금이’를 지나면 와동을 감싸는 ‘당뿌리’ 자락이 강가에 닿는다. 와동에서 ‘동면 덕치 소구니’로 넘던 ‘지루고개’는 잘록한 고갯마루만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논길을 달리는 재미가 여간 즐겁지 않다. 메뚜기가 날고 잠자리가 따라 날아온다. 벼 익는 구수한 냄새가 감돈다. 길은 ‘검율 당뿌리’ 고개를 넘어 ‘성전천(덕치천)’을 따라 ‘야루정’으로 이어진다. ‘태학교’를 건너며 강을 바라본다.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에 햇살이 자글자글 하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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