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폴리스 (Akropolis)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도시국가)에서 아고라와 함께 중심시의 중요부를 구성하였던 얕은 언덕.
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요지가 선택되어 폴리스의 수호신을 비롯한 신들의 신전이 건설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긴급할 때 피난처와 요새로서의 역할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신전의 내부는 폴리
의 국고로 이용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코린트의 아크로코린트, 테베의 카드메이아 등이 유명하다.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동서 약 300m, 남북 약 150m의 가늘고 긴 언덕이다.
이미 BC 13세기 미케네시대에는 거석을 쌓아올린 성벽이 주위에 구축되었고 왕궁이 건조되었다.
아크로폴리스로서 대규모의 신전건설이 시작된 것은 BC 6세기 후반의 참주(僭主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건설중인 것을 포함하여 이들 신전은 BC 480년 아티카에 침입한 페르시아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BC 450년대에는 페르시아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페이디아스가 제작한 거대한 청동제의 아테네 여신상이 설치되었다.
그 뒤 페리클레스의 정책에 따라 델로스동맹의 공조(貢租)를 유용(流用)한, 본격적인 신전 재건이
시작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도 건설은 계속되어 BC 5세기 후반부터 BC 4세기 초에 걸쳐 파르테논·프로풀라이아·에레크테이온·아테나니케신전 등이 완성되었는데, 그 이후의 건축활동은 미미하였다.
아크로폴리스의 주변지역에서는 남쪽 기슭에 있는 BC 500년 무렵의 디오니소스극장, BC 443년 무렵의 페리클레스음악당 등이 유명하다.
로마 지배하에서 6세기 이후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은 제정 후기의 그리스도교 국교화와 함께 그리스도교회로 쓰였다.
*알함브라
에스파냐 그라나다에 있는 중세 이슬람건축의 유구(遺構). 세련되고 화려한 아름다움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성채·왕궁·욕장·모스크 등을 성벽으로 둘러싼 성채도시였다. 이슬람의 마지막 왕조인 나스르왕조 모하메드 1세(재위 1230∼72) 때 조영이 시작되었으나, 오늘날 유구의 대부분은 14세기 유수프 1세와 모하메드 5세 치하에서 건설된 것이다. 궁전 전체 대지는 부정형으로 되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중정(中庭) 3곳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금양중정(桃金孃中庭)>에는 직사각형연못의 동서쪽으로 도금양이 심어져 그 주변 알현공간(謁見空間) 등 왕의 공적(公的) 공간이 즐비하다. 유명한 <사자중정(獅子中庭)> 주위에는 왕의 사적(私的) 공간이 만들어져 있고, 중앙의 사자분수와 주위에 즐비한 대리석 원기둥 등이 섬세하고 조화된 공간을 만들고 있다. <두 자매의 방> 등 각 방의 천장·벽·바닥은 회반죽과 채색 타일을 써서 아라비아식으로 장식되었는데, 인공미를 느낄 수 있다.
*앙코르와트 (Angkor Wat)
고대 캄보디아왕국(앙코르왕조, 9세기∼1432)의 왕도(王都)에 있던 사원. 앙코르 바트(Angkor Vat)라고도 한다.
캄보디아 북서부 시엠레아프시 근교에 있다.
앙코르와트란 크메르어로 <사원(에 의해 세워진)도시>라는 뜻이다.
수르야바르만 2세의 통치 아래 1113년 무렵부터 약 30년에 걸쳐서 건립된 사원이다.
이 사원은 해자(垓字)의 길이가 5.4㎞, 나비가 190m, 사원의 서쪽 진입로가 540m이고, 3중회랑,
본전의 높이가 65m나 되는 중앙사당을 중심으로 둘러싼 5기(基)의 탑당(塔堂)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원의 규모가 매우 크고, 크메르건축의 정연한 기하학적 평면과 탑당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조화와 원숙미를 보여주는 웅대한 가람이다.
서쪽 진입로에는 포석이 깔려 있고 양쪽에 나가(큰 뱀)의 난간이 있으며 진입로의 좌우에
경장(經藏)과 성지(聖池)가 있다.
동쪽 진입로는 흙으로 쌓은 성채 그대로 남아 있고 남북 진입로 자취도 남아 있다.
사원건립의 사상적 배경은 크메르적 신의 세계(우주관)를 지상에 구현한 것이다.
5기의 탑당이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메루산)을, 주위의 벽이 히말라야의 영봉을 모방하였고, 해자는 깊고 무한한 대양을 상징한 것이다.
이 사원의 주신은 비슈누신이며, 왕과 비슈누신을 합체(合體)한 특별한 신상(비슈누신왕)이 안치되어 있다.
그 당시 왕은 생전에 시호(諡號)를 가졌으며 신의 화신으로 여겨졌고, 이 사원은 신의 현재(顯在)의 의미를 지닌 왕이 죽은 뒤의 무덤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분묘사원설로 추측되고 있는 근거는 제3회랑이 장례의 순례용으로 보인다는 점,
중국인 주달관(周達觀)의 <노반(魯般;앙코르와트)의 무덤(眞臘風土記)>의 기록,
그리고 진입로가 서향으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의미하는 점 등이다.
제1회랑(200m×180m)에는 띠모양 내벽에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입체적인 두루마리 그림과 같다.
제재는 주신 비슈누와 그의 화신 크리슈나, 라마왕자, 신과 합체한 수르야바르만 2세 등이다.
부조의 화면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취재한 대전쟁그림(서면 남측), 크리슈나가 폭풍우에서 목자와 가축을 지키는 장면(南西隅塔), 수르야바르만 2세의 위업을 칭송한 역사이야기
(남면 서측), 천국과 지옥의 장면과 죽음과 재판을 다루는 신 염마천(閻魔天, 남면 동측),
천지창조에 관한 유해교반(乳海攪拌)의 그림(동면 남측), 가루다(독수리신)의 어깨에 타고 적을
공격하는 비슈누신(동면 북측), 크리슈나와 괴물 바나의 전투(북면 동측), 라마야나에서
채화(採話)한 라마군과 악마 라바나군의 치열한 전투장면(서면 북측) 등이 볼 만하다.
이 회랑부조는 구도·묘사·도상 등에서 솜씨의 차이는 있지만 약동적인 묘사와 파도치는 표현으로 서면과 남면의 회랑이 미술적으로 특히 우수하다.
먼 곳을 화면 상부에 겹치는 방법을 썼고, 2중·3중으로 그려서 입체감을 주는 기법 등으로
수㎞에 달하는 회랑의 벽에 조금의 빈틈도 없이 새겼으며 전체적으로 웅장·절묘하다.
3층으로 쌓은 흙 위에 제1회랑이 세워져 있고 십자형 중회랑(프리아 포앙;千體佛)의 계단을 올라가면 약간 높아진 제2회랑이 나타난다.
안뜰을 빠져나가면 급경사의 큰 계단이 나오는데 높이 솟은 5기의 탑당과 제3회랑으로 연결된다. 앙코르와트의 조영에 이르기까지는 약 10차례에 걸친 건축양식의 변천이 있었는데,
건축기술의 개량과 경험을 축적하여 미술양식이 발전하면서 이 대가람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이 건물벽의 공간을 메운 아름다운 모습의 네바타(여신)상 및 문미·합각(合閣) 등의 아름다운 조각, 줄지어 늘어선 기둥과 네모기둥에 새긴 정교한 장식무늬, 원주창(圓柱窓)과 포탄형(砲彈形)의 탑당 등 독창적인 조형과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방대한 석재(회색사암)는 북동쪽 약 40㎞ 떨어진 푸논쿠렌구릉의 채석장에서 채취하였다.
이 사원의 건축에는 수십만 명의 인부와 포로가 동원되었고, 또한 수천 명의 석공과 불사(佛師)·
대경사(大經師) 등 기능인들이 동원되었다.
1432년 앙코르왕도가 다른 곳으로 천도된 뒤 상좌부(上座部;소승)불교의 사원이 되었고 중앙사당에는 5m 크기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앙코르와트는 1908년부터 프랑스의 극동학원에 의해 보수가 시작되었으나 1971년부터의 내전으로 중지되었으며, 이 내전으로 회랑벽에 탄흔이 생겼고 일부가 파괴되었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유적 가운데에서 백미를 이루는 사원이다
* 콜로세움
로마의 포로로마노(고대명은 포룸로마눔) 동쪽 저지에 있는 원형투기장. 긴지름 188m, 짧은지름 150m.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라고 한다.
이 저지는 네로황제가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못을 만들었던 장소로, 근처에 거대한 헬리오스상(콜로수스)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와 혼동되어 원형투기장을 콜로세움이라 통칭하게 되었다.
고대의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 투기장>이었다.
72년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착공하여 80년 티투스황제가 헌당식을 올렸다.
이때, 기념흥행으로 100일에 가까운 투기(鬪技)가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는 도미티아누스황제시대에도 계속 이어졌고 네르바황제와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도 개축 또는 증축공사를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벼락을 맞아, 그때마다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6세기 전반까지 행해졌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외관(外觀)은 4층으로 되어 있고, 밑에서부터 도리스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콤포지트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층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아레나 지하에는 맹수우리와 기구 보관실이 있다.
* 이스터섬 (Easter I.)
남태평양 동부에 있는 섬. 면적 117㎢. 파스쿠아섬 또는 라파누이섬이라고도 한다.
칠레 해안에서 서쪽 3760㎞ 멀리 위치한 절해의 고도이다. 원주민이 남긴 모아이라고 하는 거대한 석상(石像)을 비롯한 유적의 섬으로 유명하다.
722년 4월 5일 부활절(영어로 Easter, 에스파냐어로는 Pascua)에 네덜란드 군인 로게벤에 의해 발견되어 이스터섬 또는 파스쿠아섬이라고 불린다.
1888년 칠레령이 되었으며, 현재는 발파라이소주에 속해 있다.
동태평양 해저산맥에서 동쪽으로 서칠레해저산맥이 뻗어나가는 지점에 생긴 화산섬으로, 삼각형의 윤곽을 이루는 섬이 20여 개의 화산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활화산은 없다.
그 중 삼각형 각 꼭대기에 있는 3개의 화산이 가장 큰데, 동쪽각의 푸아카치키화산, 북단에 있는 섬 안 최고봉인 해발고도 450m의 라노아로이화산, 지름 1㎞ 정도의 화구(火口)를 가진 남서단의 라노카우화산 등이다. 푸아카치키화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라노라라크화산의 화구는 원주민들이 모아이를 제작했던 곳이어서, 특히 많은 모아이가 늘어서 있다.
섬의 기후는 따뜻하고 물기가 많은 아열대기후이며, 연평균기온은 20℃, 2월 평균기온 24℃ 8월 평균기온 18℃로서 기온의 연교차가 작다.
1850년대 이전은 약 4000명의 주민이 있었으나, 천연두의 유행과 노예로 빠져 나갔기 때문에 칠레의 영토가 된 1888년 무렵에는 겨우 180명이었다고 한다.
1992년 약 28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그 중 1/4이 칠레 본국에서 온 백인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서안에 있는 앙가로아에 살고 있다. 밭작물로는 토란·고구마·카사바가 재배되며, 유칼리숲이 흩어져 있는 낮은 구릉지 초원에서는 양을 방목하고 있다.
1967년 이스터섬을 경유하는 산티아고와 타히티섬 사이의 항공로가 개설된 이래 많은 관광객이 이 섬을 찾게 되어 1월부터 2월에 호황을 누린다.
유적 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섬의 1/3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또한 섬을 출입할 때는 엄중한 식물검역(植物檢疫)이 실시되고 있다.
* 터키 이스탄불의 성소피아성당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스탄불(현재 터키의 수도이며 이슬람이 많은도시라는 뜻)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
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써 아야 소피아(Aya Sophia)라는 현지어로 불리며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현재의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532~537년)으로 세계의 교회 중 4번째(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로 크며,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됐다.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의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 황제 때 화재로 무너졌으며 그 후 데오도시우스 2세 때 두 번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완공(415년)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니카의 반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비인 데오도라(이집트 출신의 댄서) 때문에 생긴 반란이었다.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과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성론(콘스탄티노플에서는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
자신이라는 양성론을 채택했다)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히포드롬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려 했으나
그를 데오도라가 저지했다.
다음 순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단숨에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제2차 소피아 성당이 파괴되었으며, 그 잔해 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황제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걸맞는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수학자
이시도르를 투입하였다.
건축을 시작한 후 5년 10개월 만인537년에 소피아 성당은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추픽추유적 (-遺蹟 Machu Picchu)
페루 남부 쿠스코지방에 있는 잉카시대의 대표적인 유적.
해발고도 2500m가 넘는 험준한 산의 허리 부위에 있으며, 북·동·서쪽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는 특수한 입지조건으로 볼 때 평시(平時)의 도시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곳이 이용된 것은 16세기 초 에스파냐인에 의해 잉카제국이 정복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피난구역적(避難區域的)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잉카 특유의 본격적인 건축을 많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체가 신전군(神殿群)·궁전·주거지역 등으로 나누어져 통로나 수로까지 제대로 갖춘 완전한 계획도시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주위에는 넓은 계단식 밭이 만들어져 있어 상당한 인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형조건 등의 이유로 이 도시는 에스파냐인들의 점령을 모면하여 남모르게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백년에 걸쳐 전형적인 잉카양식의 건축이 남아 있으며, 잉카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911년 H. 빈검의 발견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오늘날에는 수복되어 페루 유수의 관광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