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파 주먹시대 .....
●3자 구도
폭력을 생업으로 삼는 한국 주먹의 본격적인 장은 1930년대에 열렸다.
피 끓는 젊은이들이 식민시대의 울분을 토해낼 길이 없어 폭력배로 전락
했다는 일부의 해석은 사회과학적인 논리가 결여된 유치한 발상이다.
사회현상은 구조적인 틀 속에서 입체적으로 설명돼야 한다.
3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공고해지는 시기로 토지수탈과 상업자본주의의 침투로 농업을 기반으로 한 봉건제 사회가 부분적으로 해체되는 변화를 겪는 시기다.
그 과정에서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먹고 살 길이 나은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 가운데 힘깨나 쓰는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암흑세계’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당시 경성은 조선인이 주도하던 종로상권과 일본인이 밀집한 명동상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먹패들은 상권에 기생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당시 주먹세계도
자연스레 양분돼 있었다.
명동의 지존은 하야시로 알려진 한국인 선우영빈.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거물정치인이자 최대 야쿠자 조직인 ‘현량사’의 보스 도오야마 마쓰루(頭山滿)의 휘하에서 성장한 만큼 조선 내 야쿠자의 우두머리로 막강한 조직 장악력을 과시했다.
반면 종로의 주먹패는 명목상 ‘구마적’ 고희경이 오야붕의 위치에 있었지만 조직력과 자금력이 취약해 하야시처럼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종로를 장악한 주먹이 조선 최고의 오야붕으로 인정받던 당시 주먹판의
권력판도는 구마적을 비롯해 학생패를 이끈 보성전문 출신의 ‘신마적’ 엄동욱,‘쌍칼’ 김기환 등이 형성한 삼자구도라는 분석이 타당하다.
엄동욱은 학생패라는 충성도 낮은 조직의 한계로 패거리의 전체적인 힘에서 다소 약했지만
뛰어난 싸움 실력으로 구마적의 반열에 올랐다.
김기환도 구마적의 하부조직에 편입돼 있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조직력으로 구마적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왕십리의 김남산, 마포의 정춘식 등도 조직 편제상 ‘구마적’ 휘하에 있었지만
자신들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주먹 계보로 활동했다.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갈취한 일종의 세금이 이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만큼 협객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게 객관적인 평가다.
●김두한의 천하통일
삼자구도를 형성하던 조선 주먹계가 1934년 김두한에게 평정됐다.
김두한의 당시 나이는 18세. 김기환이 구마적에게 패해 조직을 넘겨받은
김두한이 신마적과 구마적을 차례로 때려눕히고 주먹세계를 통일했다.
이후 조선의 주먹판도는 하야시와 김두한의 양자대결 구도로 전환하게 된다.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의 항일의식을 부각하기 위해 하야시와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둘은 갈등보다 동반자적인 관계로 각자의 수익구조를 유지했다.
김두한 역시 생존 당시 동아방송 대담프로그램인 ‘노변야화’에 출연해
“하야시패와 장충단에서 일전을 벌인 뒤 하야시를 형님으로 모시며
형제관계를 맺었다”고 두 사람 간의 공생관계를 시인하기도 했다.
주먹패들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김두한이 창설한 ‘반도의용정신대’도
총독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야시의 도움을 받았다.
●광복 공간의 암흑세계
광복 후 좌우의 이념대립 바람은 주먹세계에도 몰아쳤다.
우익 주먹들은 김두한이 선봉에 서 ‘민주청년동맹’을 이끌었고 이북 출신이 주축이 된 ‘서북청년단’이 뒤를 이었다.
좌익 주먹패는 김두한의 친구인 정진용(야인시대에는 정진영으로 나오지만 문헌상으로는 정진용이 올바른 표기)이 이끈 ‘조선청년전위대’가 대표적이다.
좌익에 대한 김두한의 백색테러는 악명 높았다.
파업현장에서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했고 친구인 정진용을 살해한 ‘시공관 사건’으로 김두한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주먹패들의 좌우대립은 권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활동 영역이 정치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주먹세계의 경쟁도 외부 유입 세력의 가세로 한층 치열해졌다.
6·25가 터지고 이북 출신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광복 후 하야시패가 떠난 명동을 장악한 이화룡, 명동 동부의 중앙극장을 차지한 정팔 등이 대표적인 이북 출신 주먹패.
일제시대 중원을 떠돌던 시라소니 이승순도 광복 후 동향인 신의주 출신 정팔의 요청으로 ‘중앙극장파’에 잠시 몸을 담았다.
낭만파 주먹들은 일제 식민지배와 광복 뒤 좌우이념대립, 그리고 전쟁이라는 혼란기를 겪었다.
생존을 위한 기생형 폭력 조직의 성격을 띤 제1기 주먹시대는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뜯는 것을 주 수입원으로 삼아 폭력의
사회적 폐해는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조직 끼리의 대결도 흉기에 의존하기보다 맨손으로 치러 어떻게 보면 인간미 마저 느껴진다.
매춘 아편 등 쉬운 수입이 보장된 반사회적인 행위를 자제하고 조직원 끼리의 의리를 중요시하는 등 주먹 철학도 엿보인 시기다.
이 때를 낭만파 주먹시대라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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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는 사실을 그린 실화가 아니다.
그냥 재미있는 "깡패드라마"로 보시길...
카페 게시글
-하고 픈말-
김두한의 진실...야인시대 (잡 글)
고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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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1.1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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