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통일과정
1. 중대에서 하대로의 전환
신문왕(689) 녹읍폐지 → 경덕왕 16년(757) 녹읍부활
혜공왕대 : 진골내부의 상쟁
4년(768) 7월 대공의 난: 96각간의 난
6년(770) 8월 대아찬 金融의 난
11년(775) 6월 이찬 김은거의 난 8월 이찬 염상·시중 정문의 난
16년(780) 4월 이찬 지정의 난.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이 진압
김양상 즉위(선덕왕)→ 나물왕 10세손
785 상대등 경신 즉위(원성왕)→ 원성왕계 왕위계승 시작
왕위는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력이나 무장력의 우열에 의해 결정됨으로써 연립적 정치체제로 전환되게 되어 정치와 사회의 혼란은 더욱 가중
2. 육두품세력과 지방세력의 대두
중앙귀족이 분열하여 항쟁하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에 이 사회모순을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고 그 극복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던 계층은 육두품세력
왕거인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골품제와 관련된 이들의 불만은 그들 자신 역시 골품제에 기생하는 지배층의 일부였기 때문에 현실비판도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행동도 제한적일 수 없는 한계
호족 : 일정한 지역과 인민에 대해 직접 지배력을 행사하며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독립세력 또는 대토지소유라는 경제력을 근간으로 하여
권력이나 무력 및 문화의 독점력을 가진 지방의 유력한 족단으로 규정되기도 == 후삼국시대의 주체세력
① 군진세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집단 : 북진(삼척: 무열왕5년, 658) 패강진(평산: 선덕왕3년 782)
청해진(흥덕왕 3년, 828) 당성진(동왕4년) 혈구진(강화: 문선왕6년 844) ⇒ 장보고. 평산박씨세력. 패강진의 군진세력
② 해상세력의 성장 : 삼국통일후 가장 커다란 변화를 보인 부분이 해외무역. 활발한 해상무역활동을 국가적으로도 보호할 필요성에서 해상군진이 설치. 신라관, 신라소, 신라원⇒ 개성의 왕건집단과 강주(진주)의 왕봉규집단
③ 촌주(군현 아래의 촌락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촌락문서에 보이는 것처럼 몇 개의 촌락을 관장하면서 그 직책에 따라 많은 토지가 주어지고 있어서, 해당 촌락의 경제적 실권을 장악. 지방사회의 경제적 실력자일 뿐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실력자로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존재.)에서 성장하여 향촌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장악하며 지방성의 성주 또는 장군으로 불린 호족세력 -- 가장 전형적인 지방호족
④ 초적적 성격의 집단 : 죽산의 기훤, 북원의 양길, 철원의 궁예 -- 농민봉기나 유이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결집하고 중앙세력에 반기를 든 집단에서 성장한 세력
⑤ 寺院勢力 : 대토지 소유, 사병 양성 - 독자적 세력 형성
禪宗 대두(9山) - 신라 사회모순에 대한 개혁 주장
3. 후삼국의 정립과 고려의 후삼국통일
진성여왕 6년(892) 견훤 후백제 건국 - 상주 가은현 출신. 효공왕 4년(900) 정식으로 후백제 왕을 칭하며 관직을 설치. 경애왕 4년(927) 경주공격 경애왕 살해, 경순왕 옹립
궁예 : 신라 헌안왕의 서자출신. 세달사 승려 선종. 진성여왕 5년(891) 기훤에 복속, 이듬해 양길의 휘하로. 효공왕 5년(901) 후고구려 건국 효공왕 8년(904) 국호 摩震 연호 武泰 . 신라의 제도를 근간으로 광평성, 병부, 대룡부, 내봉성 등 정비된 정부관제를 마련
⇒ 후삼국 정립
918 궁예축출 왕건의 고려 건국
왕건 : 895 궁예의 휘하로. 900년 광주와 충주 그리고 청주의 3주와 당성, 괴양 등 군현을 공략. 903 수군을 이끌고 금성군(나주) 공략. 궁예의 실정을 계기로 홍유·복지겸·신숭겸·배현경 등의 추대로 왕위에. 고구려 계승을 표방. 신라에 우호정책
927(태조 10) 공산전투 -- 왕건패배
930 (태조 13년 정월) 고창전투로 고려측이 우세
931 경순왕의 초청으로 경주 방문
935 신라 병합. 견훤 귀부
936 一利川 전투. 신검 항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