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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무등산을 가다
편집부.
목차 1. 글 머리에 2. 무등산의 풍치 및 내력 3. 문화재 및 유적지
4. 교통편 5.등산로 6.일주등정에 올라
1. 글 머리에
山 -.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고 일깨워 준다. 사시사철 그 오묘한 변화와 조화는 자연의 신비한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산의 푸른 정기는 사람들에게 꿋꿋한 기상을 갖게 해주며, 또한 휴식과 즐거움의 공간을 제공해 준다.
여기 호남의 상징인 지리산과 더불어 남도인의 심성 속에 살아 숨쉬는 무등산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무등산은 사뭇 귀에 익고 우리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보지 못했거나 설혹 여러번 가봤다 하도라도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특집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무등산을 널리 소개하고 , 특히 무등산이 품고 있는 무궁무진한 아름다움과 문화재등의 소개에 중점을 두어 무등산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이번 편집기행을 5일동안 다섯차례에 걸친 답사로 이루어 졌는데 , 2차 답사때 25기 정행철, 김지현 회원과의 동행이외에는 필자 혼자만의 고독한 취재여행이었다. 한 번은 비가 온 다음날 답사에 나서서 길이 질퍽거리 애를 먹었고, 또 한번은 눈속에 갔다가 수없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이제 그 동안의 보고 듣고 느꼈던 무등산의 영상들을 한데 모아 본다.
※ 기행은 무등산 일주코스를 중심으로 하였고 각 지명이나 문화재에 대한 설명은 안내문을 그대로 옮기거나 함고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가지 사항들은 산행인들의 입으로부터 채득한 것이다.
2. 무등산의 풍치 및 내력
무등산은 노령산맥 가운데 가장 명산이며, 해발 1,187m이고 대체로 土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 천왕봉을 중심으로 여러곳에 깎아 세운듯한 돌기둥이 웅장한 경관을 자아낸다. 특히, 규봉, 입석대, 서석대등은 금강산의 절경에 비유되고 이중 서석대는 마치 해금강의 한쪽을 산위에 옮겨 놓은것 같다고 일러온다.
무등산은 산세가 유순하여 일찍부터 남도민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입석대는 원래 제단이었고, 천제단은 무등산 신사의 유적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무등산은 육당 최남선 선생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금강산에 비할 바 없다고 철찬한 산으로 백제시대에는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 이라 했으며, 고려시대에 와서 한때 서석산이라고 불리우나 무등산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광주를 백제때는 무진주라 했고, 통일신라후에는 무주라 불렀다고 한다.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녹음방초에 골짜기의 시원한 물줄기, 가을의 단풍과 갈대, 겨울의 빙하와 설경등은 어느 한 계절도 나무랄 데 없는 명산이며, 한국 온대식룸이 126과에 721종이 고루 분포되어 있고 그중 식용류가 292종, 약용류가 173종이 자생하고 있다.
3. 문화재 및 유적지
무등산에는 국난이 있을때마다 구국의 의병장들이 뜻을 닦았던 곳으로, 충장공 김덕령 장군과 고려말 무관으로 왜구를 몰아내고 절의를 지킨 명장 경렬공 정지장군, 정묘호란때 안주에서 순국한 귀성공 전상우 장군의 사우들이 있으며, 조선조 시가의 큰별인 송강 정철이 자랐던 환벽당, 건너마을 지실에 있는 식영정은 정철선생이 성산별곡을 창작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무등산은 원효, 의상, 철감, 지공, 라옹등 고승의 유적도 많으며, 산 기슭과 산 허리에 원효사, 증심사, 약사암, 규봉암등 사찰이 산재하여 그곳마다 천년의 세월과 더불어 숱한 전설과 소중한 문화재가 담겨져 있다.
1) 증심사 (證心寺)
증심사는 신라 법흥왕 4년에 양고승 철감(澈鑑)선사가 창건하였으며 보물 제131호로 지정된 철조비로자나불 좌상과 삼층석탑, 오백전등의 문화재가 있다.
- 철조비로 자나불 좌상 鐵造毘盧 咨那佛 坐像
보물 131호 소재지 광주직할시 동구 운림동
이불상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철불중 하나로서 광재와 대좌는 없어졌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하다. 머리는 나발에 육계가 높고 뚜렷하며 타원형의 얼굴에 가늘고 긴 눈, 코, 입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입 부근을 움푹하게 한것이 도피안사 철조비로 자나불상과 유사하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각이져서 건장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가슴이 넓게드러난 통견의 법의는 두꺼워서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 양손을 모아 지권인을 하고 있으나 왼손을 위로하고 일반적인 형식과는 반대로 표현하였다. 보림사 철조비로 자나불상, 도피안사 절조비로 자나불좌상등과 함께 9세기경의 작품으로 생각한다.
- 오백전 五百殿
이 오백전은조선 세종25년 1443년에 전라감사 김방 金倣이 오백나한과 십대제자의 성상을 조성 봉안하고 이고장의 민안을 기원하기위하여 지은 것이다. 증심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변 3칸의 단층 맞배와집이다.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위에 두리기둥을세워 쇠서를 둔 익공식 건축으로 처마는 겹처마이며, 양측 박공에는 풍판이 없다.
- 삼층 석탑
광주직할시 유형문화재 제1호
이중기단으로 된 삼층석탑으로 갑석에 귀기둥과 탱주가 새겨져 있고 하층기단에는 가늘고 긴 안상이 기단 각편에 3구씩 새겨져 있다. 각 탑신에는 귀기둥이 새겨졌고 옥개석은 경쾌하게 반전되어 있으며, 각개석의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위에 복발 대신 옥개석을 얹었으며 그위에 방형의 앙화仰花만 얹었다. 이 탑은 9세기경 통일신라때 철감국사가 증심사를 창건할 때 조성한 것이라 전한다. 많이 파손되었던 것을 1971년 12월에 해체 복원하여 원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2 ) 약사암 藥師庵
약사암은 통일신라시대에 철감선사가 창건하였으며 보물 제600호로 지정된 불상석여래좌상이 있다.
-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600호 소재지 광주직할시동구 운림동
이 불상은 통일신라말의 불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약사불상으로 얕은육체와 총총한 나발의 머리칼, 네모나고 반듯한 얼굴, 반개한 긴눈과 짧은 코, 두터운 입술의 표현과 넓고 당당한 어깨, 발달한 젖가슴, 잘쑥한 허리, 항마촉지인을 한 두손, 우견편단의 얇은 불의의 갈략한 옷주름등은 석굴암 본존불 같은 8세기 신라불에서 잘 나타나고 있지만 유난히 넓은 무릎과 형식화된 표현등은 신라말 불상의 특징이어서 이 불상이 설굴암 불상과 어느정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좌도 석굴암 불상과 비슷하게 이루어졌지만 상대앙련의 복잡한 꽃무늬, 8각중대의 3단 받침, 복련의 연꽃무늬 등은 대좌와 불상의 높이가 1:1인 점과 함께 신라말의 특징인 것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아 만든 신라말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병고에 시달리던 당대 신라인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던 약사불이라 하겠다.
3) 원효사 元曉寺
원효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 617~686)국사가 개창한 고찰로서 고려시대에는 화엄학의 대강당이었으나 선조30년 1597 정유재란시 불탄후 12차례나 증수해오다가 6.25의 전화를 입고 다시 불타버린뒤 대웅전과 부대건물을 복원하였다. 경내에 원효와 회운당의 부도가 있으며, 1980년 5월에 대웅전 옛터에서 발굴된 고려 소조불을 비롯한 많은 성보들이 지방문화재 제100호와 동부도가 제89호로 지정되었다.
4) 석불암 石佛庵
석불암은 지공너털과 규봉암사이에 있는 암자인데 6.25의 전화로 소실되고 현 건물은 최근에 지은것으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 마애여래좌상
이 불상은 천연암벽을 이용하여 마애불을 조각한 것이다. 불상의 양식은 아미타여래이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은 중품중생인이라 부른다.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나 형식이 확실치 않다. 오른쪽 어깨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처리되었고, 볼상 윗부분이 비교적 정교한데 반해 이랫부분이 엉성하게 조각되어 연대를 낮추어 보게 된다. 불상 높이는 136cm, 좌고 96cm, 얼굴, 옷주름, 연화대등의 딱딱한 윗부분은 두광위에는 범자 3자가 음각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해 판독하기 어렵다.
5) 충장사 忠壯寺
소재지 광주직할시 북구 금곡동
충장사는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1568~1596)장군의 사우 및 묘역이다. 본 사우와 묘역은 1975년 7월 정비되었다.
현재의 충효리는 장군이 태어난 마을인 석저촌을 이른다.
6) 충민사
광주직할시 기념물 제3호, 소재지 광주광역시북구 화암동
충민사는 정묘호란때 청나라 침략군을 맞아 안주성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한 구성도호부사 전상의 전상의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본, 사당건물은 유적정화사업으로 1982년 8월에 착곡하여 1985년에 완공하였다.
7) 문빈정사, 규봉암,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등의 설명은 생략함
4. 교통편 (시내버스)
1) 산장 : 18
2) 증심사 : 15, 15-1, 23, 27, 37
3) 제2수원지 : 1-1(2시간 간격)
※ 각 노선의 기점, 경유지 및 종점
1-1 : 제2수원지(용인)-학동, 도청, 금남로, 유동, 광주고속, 광주역, 요한병원, 무등경기장
15 : 증심사-학동, 노동부, 현대예식장, 한일은행, 구동 백운동, 대성여고 ,인성고
18 : 동운동-광주역, 공용정류장, 제봉로 , 동명로, 산수동, 무등산장
23 : 동운동- 무등경기장, 광천동, 돌고개, 대성국교, 충파, 전남여고, 학동, 증심사
27 : 증심사- 의대, 도청, 현대예식장, 광고, 동신고, 북구청, 전대후문, 오치, 교육원
37 : 증심사-의대, 조대입구, 법원, 북구청, 전대후문,오치, 기계공고, 교육원
5. 등산로
무등산의 등산로는 10여개에 이르는데 크게 5개 등산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 코스는 아래와 같다.
1) 증심사 - 중봉 - 장불재 - 입석대 - 서석대- 석불암- 규봉암 - 신선대 - 꼬막재 - 의상대 - 오성원 - 무등산장
2) 증심사 - 중봉 - 단군신전 - 봉황대 - 약수터 - 바람재 - 늦재 - 원효사 - 산장
3) 제2수원지 - 무당골 - 용추계곡 - 옹추폭포 - 중봉 -1). 2)
4) 화순 만년사 - 용추폭포 - 중봉 - 1_ 2)
5) 광주호 - 식영정 - 소쇄원 - 환벽당 - 풍암정 - 도요지 - 충장사 - 산장
무등산을 제대로 일주하려면 3~4일은 족히 잡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조금 무리이고 주말을 이용하여 토요일 오후에 출발하여 일박을 하고, 일요일 오후쯤에 일정을 마치는 1막 2일이나, 아니면 휴일을 이용한 하루일정으로 다녀오는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주요 등산로 및 코스는 별첨된 등산 안내도를 참고하면 이해가 쉽다.
6. 일주 등정에 올라
무등산 등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증심사 버스종점을 출발하여 문빈정사를 기웃거려보고 증심사로 향했다. 어느해 가을날 이곳 증심사 은행나무 아래에서 시 한편을 썻던 기억을 떠올리며 돌 계단을 올라 경내로 들어섰다.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뵈옵고 휘이 경내를 돌아보고는 돌아서 물러 나와 중봉으로 향했다. 이 등산로는 처음 신림마을에 이르는 곳까지 돌계단으로 이어지고 그 후에는 대부분 돌 자갈길이다. 길 옆으로 처음엔 빽빽하개 늘어선 소나무의 푸르름이, 중간쯤엔 참나무숲이, 그리고 정상 가까이에 가면 관목림이 양 옆을 호위하며 버티고 서 있다.
신림마을을 출발하여 30여분 정도를 오르면 대피소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야영이 가능하다. 이곳에서 중봉까지는 조금 가파른 길인데 20~25분정도가 소요된다. 드디어 중봉 마루턱에 올랐다. 이곳에 오르면 바람이 제법 분다. 중머리재, 승봉이라고도 불리우는 중봉 해발 560m 은 무등산의 한 중앙부로서 증심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세인봉에서 오는길, 그리고 산장에서 바람재를 넘어오는 길, 또 규봉암에서 장불재를 넘어 오는길, 화순 만년사에서 용추폭포를 거쳐오는 길들이 모두 여기에서 모인다.
윗쪽으로는 입석대와 장불재로 올라가는 억새밭이 펼쳐지고, 앞으로는 세인봉과 지산유원지 사이로 광주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중봉을 되로하고 쉬엄 쉬엄 장불재로 향했다. 중봉을 기점으로 장불재까지 2/3쯤 되는 지점에 샘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야영이 가능하다.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쉬엄쉬엄 오르다 보면 어느덧 장불재게 이르게 된다. 장불재 해발 900m 이곳은 광주와 화순의 경계지점이다.
문헌 비고에는 장불치長佛峙라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장불동이라 젹혀있으나, 이고을 사람들은 장골재라 한다. 장골재는 '긴골'이라는 뜻이며, 골위의 고개를 긴골재, 즉 장골재라 불러온다. 이곳은 입석대에서 서남쪽으로 뻗는 넓은 고산초원으로 가을철에는 사람키를 넘는 고운 억새밭이 마치 백마의 등처럼 하얗게 길게 깔려있어 고산미의 극치를 이루어 백마능선이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광주의 특산으로 이곳 장불재에서 철이 생산되었다고 젹혀있고 유서석록에는 쇳물이 흘럿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상쪽으로 왼편에 서석대, 바른편에 입석대의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고 화순쪽 능선을타고 동쪽으로 가면 규봉과 지공 너덜에 이른다. 서석대와 입석대는 무등산의 대표적 석경으로 무등산을 한때 서석산이라 부른것은 이런 수려한 석경이 많은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입석대는해발 1017m 원래 제단으로서 조선조 중기까지만 해도 입석암을 비롯 주변에 많은 사암이 있었다. 입석대를 흔히 강선대라 부른다. 안타까운것은 이렇듯 절경을 통행금지구역이라 직접 밟아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매년 신년초 1월1일 에는 이곳을 개방하므로 그때 독자여러분은 그 비경을 직접 가보시라.... 가보면 아마도 열이면 열 벌어진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못내 아쉬운 발길을 돌려 장불재를 뒤로하고 총총걸음으로 뛰다시피 석불암으로 향했다. 이 코스는 거의 내리막 길이고 길도 평탄한 편이다. 얼마 걸리지 않아 멀리 관목림 사이로 규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걸음을 재촉하여 산루턱 막 넘어서면 '지공너덜'에 이르게 된다. 지공너덜이란 꼬막재에서 규봉까지 사이에 무수히 깔려있는 큰 너럭바위들을 이르는 말이다. 무등산에는 산의 북사면에 덕산너덜과 동남사면에 지공너덜의 두개의 너덜이 있다. 지공너덜은 산의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3km 남짓길게 깔려 넓은 돌바다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을 지공너덜이라 부라게 된 것은 인도의 승려 지공 指空대사에게 설법을 듣던 라옹 懶翁선사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명명한 것으로 지공대사가 여기에 석실을 만들고 좌선수도하면서 그 법력으로 억만개의 돌을 깔았다고 전해온다. 지공너덜엔 크고 넓은 바위사이로 천연의 석실이 있는데, 이곳은 한국 불교에 큰 빛을 남긴 보조국사가 송광사에 가기전에 좌선한 곳이라 하여 보조석굴이라 부른다. 보조석굴 왼쪽에 높은 돌기둥으로 형성된 '문바위'가 있는데 충장공 김덕령장군과 애마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지공너덜 바로 옆에는 석불암이 있는데 이곳에는 샘터가 있고 취사시설이 갖추어져 있긴 하지만 겨울이라 샘이 말라 버려서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석불암에서 5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규봉이 있다. 임석대와 서석대의 신비를 재현하려는 듯 높게 솟은 암봉이 하늘을 이고 서 있다. 규봉 바로 밑에 규봉암이 있는데 이곳에서 물을 얻을 수 있다. 규봉에는 특이한 샘터가 있는데 이곳은 물이 고여 있는 샘이 아니라 도를 깨우친 사람에게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필자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봤지만 한 낱 중생이었기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규봉암을 나선 산길은 꾸불 꾸불 이리저리 흐르다가 꼬막재로 이어지는데 그 길 좌측으로는 빙화와 안개에 덮힌 천왕봉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솟아 있고, 우측으로는 노령산맥 줄기를 타고 남도의 고을들이 여기저기 열려있다.
규봉암과 꼬막재 사이의 3/4정도되는 지점에 옹달샘이 있어서 목을 축일수 있었다. 이곳으로 부터 꼬막재로 이어지는 길은 온통 억새밭 뿐인데 얼마쯤 가다보면 꼬막재와 신선대로 갈라지는 이정표에 이르게 된다. 꼬막재쪽으로 방향을 잡아 계속 발길을 옮기다 보면 길 옆에 꼬막재라고 쓴 안내판이 보인다. 사방을 휘휘 둘러봐도 억새뿐이다.
멀리 호남우유목장이 아담하게 그려지고 반대편에 천왕봉을 대한다. 이곳을 벗어나면 약수터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의상봉을 마주한다. 의상봉은 산장에서 보면 전체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큰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상봉을 나서면 꾸불 꾸불한 산길은 어느덧 억세밭을 지나 송림 사이로 빨려들어가고 오성원에 도착하게 되는데, 오성원은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이곳을 나서면 발걸음은 나는듯 가벼워진다. 이제 마지막 지점인 무등산장을 눈앞에 그리며 원효계곡 물소리를 귓등으로 흘리고 걷다보면 드디어 무등산장에 다다랐다. 무등산 정상의 물이 삼밭실에 고여 동북쪽으로 충효동까지 약9km 흘러 내리는 골짜기가 원효계곡인데 무등산장은 이 원효계곡의 중앙에 위치한다. 해발 650m에 이르는 원효계곡 일대는 활엽수가 울창한 혼합림을 이루어 그 경승이 뛰어나다. 남쪽 용추계곡과 함께 무등산이 대표적인 계곡이다. 이곳은 사철 물이 많아 여름철은 피서인파가 붐비고 등산객은 이곳에서 캠핑을 즐긴다. 계곡상류에는 주검동, 하류에는 도요지, 광주호, 식영정 사선이 풍류를 읇은 별뫼, 정철이 학문은 닦은 환벽당, 김덕령장군의 충장사, 민간정원의 의뜸인 양산보의 소쇄원등 수많은 정각과 사적이 산재하며, 북쪽기슭에는 신라시대 원효국사가 개창한 원효사가 있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이곳 산장에서 일정을 마무리짓는데, 더러는 충장사-충민사-4수원지-전망대-지산유원지롤 이어지는 코스(도로)를 밟거나 원효사-늦재-바람재-약수터-봉황대-중봉-세인봉-약사암-증심사로 이어지는 일주코스를 밟기도 한다.
필자는 후자의 코스를 역으로 밟기로 하고 일단 이곳 무등산장에서 일정을 마쳤다.
두번째 답사는 며칠후에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25기 정행철, 김지현회원이 동행해 주었다. 증심사 입구에서 약사암으로 향하는 길로 방향을 잡았다. 약사암까지는 꽤 넓은 길이 개을을 끼고 뚫려있어서 오르는데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약사암 입구에 있는 약수터에서 시원한 약숫물에 목을 축이고 경내로 들어섰다. 약사암은 현재 복원작업이 한창이라 사찰답지 않게 주위가 조금 어수선하였다. 약사암을 나서서 세인봉으로 향했다.
이 길은 울창한 소나무숲이 길 양옆을 지키고 있어서 산행의 기분을 한껏 돋구어 준다. 어느해였던가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이길을 오르며 수도없이 미끄러지고 한걸음 올라가면 두걸음 뒤로 미끄러져 내리며 기다시피 겨우 올라 세인봉에서 써클회원들끼리 어울려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일, 그리고 세인봉 바위밑에서 동기 민영이 규민이와 어울려 똘아이짓거리를 했던 일등등을 이야기하며 발길을 재촉하였다.
세인봉! 의상봉과 비슥하에 깎아지른 듯한 절병으로 되어 있어서 암벽 클라이머들이 종종 찾는 곳이다.
바위끝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벼랑을 이루고 있도. 여기에서 보면 윗쪽으로 중봉으로 향하는 개미능선과 그 너머로 장불재가 보이고 앞쪽으로는 무등산 2대 계곡의 하나인 용추계곡의 계곡미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호연지기를 기를 양이면 이곳 세인봉을 빼서는 아니되리라 감히 장담해 본다.
개미능선 = 세인봉에서 중봉으로 향하는 능선로를 이른다.
이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동행했던 김지현 회원은 계속 울상이다. 한참을 거북이 마냥 오르다보면 도착하는 곳이 바로 중봉이다. 망설임없이 중봉을 지나 봉황대로 향했다. 이쪽길은 산행하는 사람들이 무척 붐비는 길이다. 가는 길에 샘터에서 쭈그리고 앉아 밥을 지어 먹었다. 막 식사를시작했는데 저쪽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던 어느분이 된장찌게와 밥을 갖다 주셨다. 또 다른분이 커피와 고기를 가져다 주셨다. 고마운 분들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모두 인심이 후하다 .남이 어려울 때 조금씩 도와주고 또 자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기도 하는 상부상조하는 산사람들의 심성.! - 모든 사람들이 이렇듯 살아 갈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봉황대까지의 길은 너덜을 이루는 돌이 많아서 조금 주의를 요하지만 -특히 발목조심 - 경사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어서 산행은 수월하였다.
봉황대 조금 못미처 세갈래길이 나오는데 한길은 단군신전으로 향하고 다른 한길은 증심사로 마지막 한길은 봉황대로 향하는 길이다 .
봉황대(해발 460m)는 코스가 쉬워 가족단위로 가장 많이 찿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찿는곳이기에 훼손되기 쉬운곳이기도 하다. 실재로 이곳은 주위경관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빈병이나 휴지통이 쉽게 띄었다. 이런 모습들은 산행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러려니 생각하면서 못내 서운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봉황대를 나서서 빽빽하게 늘어선 소나무숲을 지나 일주도로를 향해 가다 보면 무등산에서 가장 붐비는곳 바로 증심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바람재로 가는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약수터이다. 이 약수터는 한국 100대 명수중의 하나인 너덜경 약수터와 같이 무등산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약수터이다.
이곳을 나서면 시원하게 뚫린 일주도로가 나온다. 일주도로 끝에 있는 너덜경 약수터옆으로 토끼능선이 이어지고 이 능선을 따라 너덜경이 펼쳐진다. 올려다 보면 정상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너럭바위들- 묻 중생들이 번뇌 만큼이나 많은 너럭바위들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이 너덜경 정면으로는 광주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너덜경을 지나면 바람이 쉬어 넘는다는 바람재에 이르게 된다. 바람재에 서 있노라니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목포의 눈물] 그리고 [애심] 또 [바람 위드 풍풍]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생각이 나고
이곳까지는 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다. 바람재를 넘어서 꾸불꾸불한 일주도로를 떠덜떠덜 걷다보면 늦재로 이어지느데 여기서 바라다뵈는 산장과 의상봉 그리고 꼬막재, 천왕봉등의 경관은 마치 한폭의 그림같다.
늦재를 지나 조금 내려가면 원효사 -
경내 샘터엣 목을 축이고 잠시 침묵속에 묻혀 보았다. 갑자기 숙연해재는 내 자신을 보면서 짧은 시간이나마 나를 뒤돌아 볼 수 있었음에 감사했었다.
원효사 돌 계단을 한칸, 한칸 내려오면서 '아이구 다리야'를 연발하는 김회원, 산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왠지 가볍다. "시내까지 걸어가 버릴까"하고도 생각했지만 두 회원들이 "죽여라 죽여!" 할것같아 오늘의 일정은 여기서 맺기로 했다. 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빵과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다음날을 기약하며 버스에 올랐다.
세번째 답사는 제2수원지에서 무당골을 지나 용추계곡을 타고 용추폭포를 지나 중봉에 이르러 세인봉-약사암을 거쳐 증심사 종점에 이르는 코스였고,
네번째 답사는 화순 만년사에서 목장을 지나 용추폭포를 지나 중봉에 이르는 코스였으며
다섯번째 답사는 증심사에서 바람재로 바로 넘어가 늦재-원효사-산장을 거쳐 충장사-충민사-4수원지로 이어지는 코스였다. 이코스들에 대한 답사 내용은 안타깝지만 지면상 생략하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광주호-식영정-소쇄원-환벽당-도요지코스는 미처 답사를 못하여 아쉬울 뿐이다
이글 한편으로 우리 회원여러분은 물론 이 페이지를 읽은 모든 사람들이 남도의 숨결이 살아있는 무등산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첫댓글 "편집부"라고 했는데, 누가 답사를 하셨을까 궁금??? / 또 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