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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룡(巽龍)골에 위치한 신촌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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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민신문 webmaster@js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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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하면 단전리 신촌마을은 손룡산을 등진 서향마을이다. 노령산맥의 한 줄기인 백암산이 남쪽으로 뻗다가 서쪽 가닥이 다시 바심재를 거쳐 용구산(龍龜山 일명 병풍산 882m)을 만들고, 병풍산의 한 가닥이 북으로 올라 송대봉(451m), 장군봉(577m), 매봉(475)을 만들며 30리를 뻗다가 용두리에서 끝나는데 이 산맥을 손룡산이라고 한다. 손룡이란 풍수지리에서 내룡(來龍, 산맥)이 동남쪽으로 뻗은 것을 말한다. 명당은 주로 내룡이 끝나는 지점에 있으며 이를 혈(穴)이라고 하는데 산맥의 기운이 뭉쳐 있는 곳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특히 산맥이 직선으로 뻗지 않고 꿈틀거리듯이 좌우로 또는 위 아래로 움직이는 산맥(용)이 좋은 명당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손룡은 좋은 명당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 신촌마을의 형국은 화산형국으로 용수촌에 마을이 있을 때는 소손룡이 마을에 비치기 때문에 불이 자주 났다고 한다. 그 뒤 소손룡을 가리기 위해 대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신촌마을은 오래전에 배씨와 우씨가 그릇을 굽고 쇠부리를 하며 살다가 용수촌으로 내려왔는데 마을이 불타는 바람에 현재의 신촌마을로 새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서 가장 오래살고 있는 성씨는 해주오(海州吳)씨로 3백여 년 전 오시주(時周)가 남원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김해김(金海金)씨는 150여 년 전에 평우(平愚, 1825-1884)가 고창에서 들어왔으며 밀양박씨는 진원면에서 평산신씨는 담양에서 들어와 살고 있다. 도강김(道康金)씨는 단전마을에서 들어왔다. 도강김씨는 단전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시조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殷說)의 7대 손인 김희조(金希祖, ?~1199, 호는 강성, 시호는 문효)다. 김희조는 고려 때 문하시중으로 병부상서를 지내고 도성부원군이 되었으며 그가 도강백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도강을 본관으로 하였다. 신촌마을에는 도강김씨 재각(齋閣)이 있었으나 지금은 훼철되어 흔적조차 없고, 조선 선조 때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왜적과 싸우다 의사(義死)한 선무원종공신(宣撫願從功臣) 경재(敬齋) 김충노(忠老)의 묘가 있다. 그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屍身)을 수습하지 못했기에 무덤 속에는 시신이 없이 초혼장(招魂葬)을 했다. 선무원종공신(宣撫願從功臣) 의재(義齋) 김충남(忠男)은 김충노와 형제 사이로 역시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의롭게 죽은 사람이다. 신촌마을에는 1925년 정봉길 전도사가 창건한 신촌교회가 있는데 미국인 선교사 타마자 등 많은 교역자가 다녀가는 등 한 때는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요람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농촌인구의 감소에 따라 그 수가 많이 줄었다. 1969년 창설한 시온산 기도원은 총건평이 1천여 평이 넘고, 매년 찾아오는 신자만 20만 명이 넘는 등 우리나라 기도원 가운데 몇 번째 안가는 대형 기도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신촌은 1백여 년 전 박명수가 장골에 한지(창호지, 백지, 장판지 등)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후손들이 영산제지공장을 설립 화선지를 생산했으나 지금은 중국산에 밀려 생산하지 않고 있다. 장골은 긴 숲길과 맑고 깨끗한 개울물이 그치지 않는 아름다운 골짜기로 산세가 매우 아름답다. 하지만 지금은 모 메리야스 회사 회장이 대부분의 임야를 구입하여 별장을 지어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게 하고 있다. 신촌마을의 재미있는 지명 용댓골 : 장골입구, 소손룡에 있으며 해주오씨가 피난했다고 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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