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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화의 시대적 고찰
제1절 역사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본 논문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초는 일제의 침략 아래 민족의 주권을 빼았긴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자주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던 시기이다. 1909년 10월 26일에는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 이또오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사살하였으며 다음해 한일합병이 되며 그 조약문 제1조를 보면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 함” 이라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일제의 압제 하에서 이 땅의 민중들은 1919년 3월 1일, 식민지 민족 해방을 외치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1929년 11월 3일에는 광주에서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민족적 갈등이 고조되면서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비화되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렇듯 항일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시기에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영화인들과 관객 모두의 가슴속에는 독립에 대한 갈망과 항일의 의지가 한층 고조되어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영화제작에 대한 검열이 한층 더 강화되어 조선영화인들의 창조적 활동은 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2. 한국영화 탄생배경
프랑스인 루이 뤼미에르(1864-1948)형제가 최초로 대중 앞에서 활동사진을 공개한 것은 1895년 3월 22일이다. 천문학자이자 한림원의 회장인 마즈카르의 주재하에 《국립 산업 장려회》에서 이루어진다. 동년 12월 28일부터 파리에 있는 ꡒ그랑카페ꡓ의 지하실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대중의 구경거리로 등장한다. (앙마뉘엘 툴레, 영화의 탄생, 시공사,1996,15쪽)
조선에 영화가 처음 소개된 시기는 그 직후인 1897년에서 1898년 사이로 알려져 있다. ‘조선영화사업발달사’를 쓴 일본의 영화사가 이치가와 사이 (市川 彩)의 주장이다.
“...1897년에 경성의 니현(泥峴.현재의 충무로부근))에 있던 본정좌라는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이듬해인 1898년 서대문 밖에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영국인 아스트 하우스가 남대문 거리에 있던 어느 중국인 창고를 빌려 프랑스 파테회사의 단편영화를 상영한 것이 한국에 영화가 소개된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을 밝히고 있다.”
(조휘문, 초창기 한국영화사 연구: 영화의 전래와 수용(1896~1923), 중앙대 박사학위논문, 1992 p17-18에서 재인용)
조휘문의 논문에 의하면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 (E. Burton Holmes)가 그즈음 한국에 와 영화를 상영하고 촬영을 했다고 한다.
“버튼 홈즈 (E. Burton Holmes)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와 황실에서 영화상영을 하고 서울의 여러 가지 풍물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 따라서 한국에 처음 영화가 소개되는 시기도 최소한 1899년 5월부
터 10월 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책 p25-29)
영화연구가 김정혁도 1897년 유래설을 주장한다.
조선에 영화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97년 10월 영인(英人) ‘애스트․하우스’가 서울 남대문통 어떤 중국 상인의 창고에서 와사등사(瓦斯燈寫) 한 때로부터 비롯한다는 설이 있다. 그때의 상영 영화는 불란서의 파데 단편과 실사 등이었고 입장료 대신에 자기가 경영하는 담배회사 발매의 공갑(空匣) 열 개를 지참하는 사람에게 한하여 무료로 관람시켰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이 1897년은 영화가 미, 불 양 본국에서 발명된 1895년으로부터 불과 2년밖에 경과되지 않은 때의 사실이 되는 것으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편 1896년에 벌써 일본에 영화가 수입 공개되었다는 사실 암기창(岩崎昶) 「일본영화사(日本映畵史), 관견항부(管見恒夫) 저「영화50년사」, 길산욱광(吉山旭光) 저 「일본영화계사물기원(일본영화계 事物紀元)」에 비쳐 그 지리적인 점으로는 이 설도 유력하지 않을 수 없다.
(朝鮮映畵史1897~1945 金 正 革 1946.1.2)
그러나 영화연구가 강소천은 1901년 유입설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조선에 처음으로 영화(그 당시는 활동사진이라고 불렸다)가 들어오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여년(1901년경) 전 일이라고 본다. 그 당시의 업자는 왜적 길택(吉澤)이란 자인데 이 자가 경영하는 길택상회(吉澤商會)에서 영사기와 필름을 제공했었다. 그때에 영미연초회사(英美煙草會社)에서 연초 선전을 하기 위해서 서울서(지금 전기회사 자리) 일반에게 공개한 것이 한양에선 활동사진 상영의 시초였던 것이다.
(조선영화가 걸어 온 길 -그 발전사의 한토막 姜小泉)
그러나 기록에 근거한 최초의 유입설은 1903년이다. 皇城新聞에 조선 최초의 영화 광고가 실린 것이다. 개봉관은 동대문 안에 있었던 한성전기회사 기계창(漢城電氣會社 機械廠)이고 개봉시기는 1903년 6월 24일에서 6월 29일 까지로 광고 전문은 아래와 같다.
“ 동문내(東門內) 전기회사기계창(電氣會社機械廠)에셔 시술(施術) 활동사진(活動寫眞)은 일요급음우(日曜及陰雨)를 제(除) 외(外)에 매일(每日) 하오(下午) 십시(十時)지 설행(設行) 대한급구미각국(大韓及歐美各國)의 생명도시(生命都市) 각종극장(各種劇場)의 절승(絶勝) 광경(光景)이 구비(具備)외다 입요금(許入料金) 동화(銅貨) 십전(十錢). ”
(황성신문,1903년 6월 24일)
이렇듯 이 땅에 영화문물이 들어온 지도 벌써 100년이 넘는 것이다. 한국에서 영화가 제작된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이다. 이렇게 영화제작이 늦어진 이유는 당시 영화제작환경이 열악했던 탓도 있지만 영화제작비가 웬만한 갑부 집의 전 재산과 맞먹는 거액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첫 제작된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부터 단성사에서 공연된 연쇄극 <의리적 구토> 인데 당시 단성사 경영주였던 박승필이 제작하고 신파극단 신구좌를 이끌던 김도산이 각본과 감독을 맡고, 일본에서 데려온 촬영기사가 무대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야외장면을 필름에 담아 연극 사이에 상영한 것이다. 다음 기사를 보면 촬영한 곳과 입장료 등을 알 수 있다.
來十月이십 七日부터
第一回
新派大活悲劇 義理的仇討 全八幕이십八場
이번에 한하야 매일 오후 졍(?)시부터 꼭 개연하오니 지쳬치 마시고 일즉 왕림하시기 바라나이다
撮影場所 (박힌곳)
漢江鐵橋, 獎忠壇, 淸凉里, @美橋, 南大門停車場, 纛島, 箭@橋電車, 汽車, 自動車, 鷺梁津, 公園 其 他
入場料
特等 一圓五十錢
一等 一圓
二等 六十錢
三等 四十錢
단 군인 학생 반액
경성부 @은동
활동사진상설
전활회사특약 단성사
전화 구오구번
매일신보 1919년 10월 26일
<의리적 구토>는 한국인이 한국을 배경으로 처음 찍은 영화로 당시 관객들에게 대단한 구경거리로 소문나며 흥행에 성공하였다.
단성사의 초일
관객이 물밀 듯이 들어와
신파신극좌 김도산 일행의 경셩에서 촬영된 신파활동사진이 됴션에 처음으로 지나간 이십칠일부터 단셩샤 무대에 샹장된다 함에 쵸저녁부터 됴수가치 밀리난 관객 남녀는 삽시간에 아래위창은 물론하고 빡빡히 챠셔 만원의 폐를 달고 표까지 팔지 못한 대성황이엇더라. 그런데 뎨일 번화한 것은 각 권반의 기생 온 것이 무려 이백여명이나 되야 더욱 이채를 내엿더라. 영사된 것이 시작하는 내위션실사로 남대문에셔 경셩전시의 모양을 비치아매 관객은 노상갈채에 박수가 야단이엇고 그뒤는 졍말 신파사진과 배우의 실연등이 잇셔셔 처음 보는 됴션활동사진이므로 모다 취한 것이 흥미잇게 보아 젼에 업는 성황을 이루엇다더라.
매일신보 1919. 10. 29.
연쇄극을 영화의 한 형태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분분하다.
그리고 1923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하고 윤백남이 감독한 저축장려계몽영화 <月下의 맹세>가 별 이견 없이 한국 극영화의 효시로 인정되어 왔으나 근래에 들어 <國境>이란 영화가 조휘문에 의해 한국영화의 효시로 제기되었다. <國境>은 조선총독부가 기획하고 제작한 선전용 영화라는 주장인데 구체적인 증거가 현재로는 없다. 다음은 <국경>의 신문광고이다
朝鮮映畵大活劇 國境 全拾卷
朝鮮初有의大映畵요
斯界最先의 大 福 音
京城府授恩洞
松竹特約 團 成 社
電話(本)九五九
(동아일보 1923.1.11)
<국경>은 조선영화라고 광고는 하지만 일본의 송죽영화사와 계약(특약)한 영화로 일본 제작진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러나 배우 박순일과 20여명의 조선인이 참여한 영화로 처음부터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해 조선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는 것을 다음 기사로 알 수 있다.
演劇과 活動
우리조선안에활동사진(活動寫眞)샹셜관이만흐나 오늘까지 일으도록우리죠선의 사정을 표본으로 삼어가지고 우리조선사람들의 배우로써활동사진을 백이여 일반관람자에게보이게된 것은 업섯슴으로금번에 쳐음으로 오만원이란 큰돈을 들이여 두달동안을 허비하야이십여인의조선배우가활동하여서 국경(國境)이라는활동사진을송죽화사에셔백이게 되앗다는데 이사진으로말하면 중국과조선간에 잇는 안동현에셔 생기인사실을 백인것이라하여 이중에중요배우로 활약을한박순일(朴順一)군은셔양활동사진에서 력사로자칭하는「로로이상의강력자라하며이사진은오날부터시내단성사에셔영사한다더라
(조선일보 1923.1.13)
그러나 <국경>은 무슨 사정인지 1923년 1월 13일 단 하루만 상영을 하였다.
됴선영화라는 국경『國境』전 열권은 십삼일 밤에 상장하엿스부득이한 경위로 하루만 하게되고 중지한 대신에 너무 유감이라 하일간 문예영화 대회를 열고 고급봉절인 서양문예영화를 상장코저 지금쥰비중이라고 하더라.
(매일신보 1923.1.15)
그 다음 신문에는 사고라는 기사가 났다.
연극과 활동
단성사에셔는 수일젼에영사하든 사진(국경)은 사고에의하야영영 저지하기로되엿고불일간새로수입된사진을영사하기로되얏는데...
(조선일보 1923.1.17)
사고의 경위가 없는 이 글로 보아서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하루만 상영한 이유는 이 영화가 처음의 제작의도와는 달리 조선 관객들에게 흥행은 커녕 오히려 역효과가 나 사고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설득력 있다. 일년 후 다시 공개된 당시의 신문기사이다.
평양에서 국경을 관람하던 사람들이 난동을 부려 상영이 하룻만에 중단됐다
(동아일보1924.1.5)
<국경>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아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조선인들을 자극한 내용이 관람객들로 하여금 난동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나 짐작케 한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제작 및 스탭 구성이 일본인인 관계로 순수한 일본영화라고 주장하는 영화평론가 이영일로 대표되는 기존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근래에 들어 조휘문에 의해 <국경>의 우리 영화의 효시설이 대두되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내용이 당시 조선인과 관련된 소재이고 처음부터 조선인을 대상으로 만든 조선영화라는 것이다. 당시 제작된 조선영화들이 대개 일본인이 제작하거나 일본인에 의존해 만들어졌기에 <국경>도 한국영화사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우리 영화설이 조휘문과 영화평론가 김종원에 의해 새롭게 주장되었으나 송죽영화사라는 기존의 일본영화사가 제작하였다는 영화사의 국적 문제로 학계의 폭넓은 인정은 받지 못하였다. 또한 송죽영화사가 촬영 전반과 배급 등 모든 것에 관여되어 있어서 이 영화의 한국영화 효시론은 부정적이다.
결국 1923년에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제작하고 윤백남이 각본과 감독을 맡은 <月下의 盟誓>라는 저축장려 홍보영화가 한국 극영화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다.
貯蓄寫眞試映
재작야 경성ㅎ텔에서 사진은 윤백남군 각색
톄신국(遞信國)에서는 저금 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야 저금활동 사진을 영상하든 중 재작일 밤에 톄신국에서는 시낸 경성『호텔』에서 각 신문 통신사 긔자와 밋 관계자 백여명을 초대하야 그 『필림』의 시험영사를 하엿는바 각본은 윤백남(尹白南)군이 만든 월하의 맹서(月下의 盟誓)라는 이천척의 긴 사진으로 내용이 매우 잘되야 크게 갈채를 받엇으며 그 『필림』은 경성을 비롯하야 각 디방으로 가지고 다니며 저금을 선전할 터이라더라
(동아일보 1923.4.11)
비록 일제의 기획과 자본에 의해 제작되었지만 <월하의 맹서>는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인 윤백남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영화의 효시로 기록된다.
제2절 초창기 주요 작품소개 및 제작 의의
1. 주요작품 소개
이렇듯 조선영화는 그 출발부터가 우리의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일본인의 상업적 목적과 일제의 정책적인 선전도구로서 출발하였던 불행한 시작이었다. 이 시기에 우리 영화인들은 자연스럽게 그 영화제작과정에 유입되었다. 조선영화는 1919년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1945년까지 총 171편이 제작되었다.
(전범성, 한국영화총서, 한국영화진흥조합, 1972)
이 중 신파조의 주제의식을 탈피한 영화는 극히 일부이며 거의가 주권을 잃은 민족의 아픔을 비탄과 한의 정서로써 표현한 것들이나 후반기에 나타나는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정책에 동조한 어용영화들이었다.
왕필렬이라는 한국이름을 썼던 일본인 다까사 (高佐) 가 각본, 제작, 감독한 <海의 秘曲>은 부산에 세워진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창립작품으로서 이주경, 안종화, 이월화, 등이 출연하였고 이경손이 조감독을 맡았다. 이 작품을 마친 다까사는 소설가 윤백남을 감독으로 해 <雲英傳>을 제작하는데 역시 안종화가 출연하였으며 이때의 조감독도 이경손 이었다. 특기할 것은 이 영화에 나운규가 가마꾼으로 데뷔한 것이다.
<雲英傳>을 마친 윤백남은 다까사의 회사에서 독립할 것을 결심하고 뜻을 함께 한 휘하의 영화인들을 이끌고 상경하여 황금정 5정목의 길가 일본식 집에 ‘백남프로덕슌’을 세운다.
그 멤버로는 이경손, 나운규, 주삼손 등이었다. 그리고 <沈淸傳>을 제작하는데 이경손이 감독을 맡고 김정숙과 남궁운이 출연하였다. 특히 나운규가 심봉사 역을 맡아 그의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나 <심청전>은 관객동원에 실패하고 두 번째 영화를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로 정하고 촬영에 들어간다. 이 영화 역시 이경손이 감독을 맡는데 이 영화를 통해 정기탁과 전창근이 배우선발대회를 거쳐 공식 데뷔를 하게된다. <개척자>를 통해 망명파 주요 3인이 만나게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촬영 중반 윤백남은 일본으로 돈 구한다고 떠나고 이경손은 그의 부인에게 돈을 타다가 촬영을 하는 등 빚을 져가며 겨우 촬영을 마친다. 결국 윤백남프로덕션은 문을 닫게 되고 이경손을 비롯한 연기자들은 전 每日新聞 기자 趙一齊의 계림영화협회로 자리를 옮긴다. 이 회사의 첫 작품으로 조일제 원작의 <長恨夢>을 찍게 되는데 여주인공 심순애역은 김정숙, 이수일역은 주삼손, 정기탁은 다이아몬드 반지로 심순애를 유혹하는 김중배 역을 맡았다. 그런데 주연배우인 주삼손이 촬영 중반에 행방불명이 되며 주인공이 심훈으로 바뀌어 1역 2인이 된 이상한 영화로 완성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관객들이 몰렸다.
開封 첫날 團成社 벽은 터질 듯했다.(...) 一齊는 「長恨夢」에 자신이 붙었는지 둘째映畵를 시작하자고 했다.
(같은 책 337p-339p)
일본원작인 ‘金色夜叉’와 조일제의 번안원작인 ‘수일과 순애’가 워낙에 알려진 덕도 봤을 것이다. 이어서 이경손은 조일제의 두 번째 영화제의에 윤백남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山寨王>을 권했고 스케일은 로빈후드 활극인 이 영화를 열악한 상황에서 흉내만 내며 찍게 됐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배우인 강홍식이 주연을 맡고, 정기탁, 김정숙이 출연한 <산채왕>의 흥행은 기대 이하였다. 이경손 감독의 영화에서 계속해서 빠져있었던 나운규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완성하는데 피압박민족의 울분을 상징화한 <아리랑>이 그것이다.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요도 도라조(淀虎臟)사장의 지원아래 <아리랑>의 각본, 감독, 주연을 맡게 된다.
주) 신문 광고나 광고 전단 등 인쇄물상에는 감독이 津守秀一로 되어있다.
2. <아리랑>의 역사적 의의
1926년에 공개된 <아리랑>은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나타난 현대극인 동시에 이 땅의 관객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 영화였다. <아리랑>으로 영화계에 그 존재를 확실히 인식시킨 나운규는 이후 민족영화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며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된다. ‘抗日’이란 것을 대놓고 말못하던 그 때 검열을 의식해 우회해가며 만든 민족영화 <아리랑>만 하더라도 많은 부분 삭제를 당한 후 공개된다. 民族映畵의 개념은 여러 정의로 서술되는데 김수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민족영화가 민족문화의 우월성 및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그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면 (...) 일제시대 조선인의 생활과 정서를 묘사한 모든 한국영화는 일단 우리의 민족영화라 간주할 수 있다.”
(김수남,『한국영화의 쟁점과 사유』, 문예마당, 1997, 274 - 287쪽)
이렇게 일제치하의 강점기인 조선에서 만들 수 없었던 항일영화는 결국 완성도 및 내용, 외형을 담보로 민족영화라는 소극적 형태로 기이하게 변형된 것이다. 한국영화에 목말라 했던 관객들은 그래도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몇 영화는 오히려 그 과정에서 예술적으로 승화되었고 한 맺힌 내용이 감동적으로 관객들의 가슴에 와 닿았다. 바로 <아리랑>이 민족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리랑>에 대한 자세한 제작 의도는 “명우 나운규씨 <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에서 알 수 있다.
“이야기도 모두 혼자 생각해 냈지요. 나는 거기에 표현하려 한 정신은 한 개의 아무 구속도 아니 받는 인간을 그리려 했지요. 그러자면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하지요. 미친 사람 눈에는 세상의 모든 권위도 무서운 것도 머리 숙일 곳도 아무 것도 없지요. 제가 웃고 싶으면 언제든지 웃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무 말이나 하고요―그래서 이 주인공을 철학을 연구하다가 미쳐버린 사람으로 만들었지요. 이 미친 사람의 누이가 있었지요. 누이가 오빠의 친구와 연애하는데 그 집 머슴이 누이를 탐내지요. 그래서 이 머슴을 미친 사람이 죽이지요. 죽이고 나자 그 사람 정신이 바로 돌아가지요. 그래서 살인죄를 쓰고 옥에 들어가는 것으로 전편의 끝을 삼았지요.” (...)
(名優 羅雲奎氏 <아리랑> 等 自作 全部를 말함, 월간 삼천리, 1937.1월호 136p-144p)
또 다른 대표적인 민족영화로는 1932년에 제작된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가 있다. 이 작품은 <아리랑>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공감을 불러일으킨 영화이다. 나운규의 <아리랑>과 더불어 한국영화사의 위대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임자 없는 나룻배>는, 1932년 9월 단성사에서 공개되어 대성공을 거둔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룻배 뱃사공으로 살아가는 수삼, 딸은 아버지의 사공일을 돕고, 화평한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어느날 일제가 철도를 깔면서 이곳 강에도 철교가설공사가 시작된다.
수삼에게 있어서 철교가교는 못마땅하다. 그러던 중에 철도공사판 기사가 수삼의 딸을 겁탈하려 덤벼든다. 수삼은 분노에 차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 도끼를 들고 그에게 달려가는데, 석유 등잔불이 쓰러져 집은 불이 붙는다.
수삼은 기사와 격렬한 싸움 끝에 그를 죽이고 도끼로 철교를 내리친다. 불꽃이 튀는 가운데 기관차가 달려오고 도끼를 든 수삼은 기관차를 향해 달려든다.
수삼의 딸은 불타는 집의 불길 속에서 쓰러지고, 기관차에 짓밟힌 수삼의 눈엔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다. 다음날 잿더미가 된 수삼의 집에서는 연기가 피어나고, 강가의 나룻배는 임자가 없이 잔물결에 흔들린다.’
(전범성, 한국영화총서, 한국영화진흥조합, 1972)
이 영화는 <아리랑>에서 망명파 영화 <애국혼>으로 이어진 민족영화의 혼을 이어받고 있는 작품이나 역시 필름은 남아있지 않다.
3. <아리랑>을 둘러싼 논쟁
<아리랑>의 감독설 또한 두가지이다. 이영일로 대표되는 기존의 나운규 감독설과 조휘문으로 대표되는 일본인 쓰모리히데이찌(津守秀一) 감독설인데 다음은 이남호 화백(1908년생)의 현장 증언이다.
우리 형이 배우 이명호야,(...) 내가 <아리랑> 촬영 현장에 서너번 갔었지. 도남동에서 정능 넘어가는 집에서 찍었는데 나운규가 흰옷입고 낫들고 연극하다 말고 배우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거 봤어... 확실해.
(이남호 구술, 2000년 2월 14일 서초동 자택)
이 증언은 나운규가 연기, 연출을 했다는 중요한 증언이다. 이남호 화백은 실제적인 연출인 카메라 연출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그는 단지 연기지도 하던 나운규에 대한 기억뿐인 것이다. 이 증언에 대한 조휘문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나운규가 연기지도로 연출의 일부분을 담당할 수는 있다. 쓰모리 히데이찌가 조선의 민속에 대해 몰라 나운규에게 연기지도를 맡길 수도 있다. (조휘문 구술, 2000년 3월 12일,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실)
그당시 연출을 맡은 쓰모리가 연기지도 부분을 연기자 나운규에게 맡길 수 있는 상황은 설득력이 있다. 다음은 나운규의 감독설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1936년 ‘조선영화’ 창간호에 나운규가 쓴 “조선영화 감독 고심담-『아리랑』을 만들 때”란 글에서의 나운규 본인의 주장이다. <아리랑>이 공개된지 10년 후의 일이다.
그때 누가 날더러 한작품 만들어 달라고 주문이 왔다. 그때까지 출연만 해왔고 출연 이외에는 아무 자신도 없는 나에게 이런 주문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요 아무 자신도 없는 내가 이런 일을 맡은 것도 지금 생각하면 기막힐 일이나 ... 할 수없이 내가 각색을 하고 메가폰을 쥐고 출연한다는 괴장면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스스로 부끄러워서 이름만은 출연 이외에는 내지 않고 전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외형만은 면목을 지킨 셈이다.
(나운규, 조선영화 감독 고심담, 조선영화, 1936년 11월호)
자신이 <아리랑>을 감독했으면서도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못하고 다른 이의 이름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본인이 밝힌 이 사정에 대해 당시 영화인들의 다른 반론의 기록은 없다. 그것은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나운규 감독설의 시비를 따지는 반론은 없었으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쓰모리 히데이찌 감독설이 조휘문에 의해 제기되었다. ‘1997 영화학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영화『아리랑』의 재평가”란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아리랑』개봉을 예고하는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26년 10월 1 일, 매일신보 1926년 10월 3일) 등에는 이 영화를 감독한 인물은 쓰모리 슈이치, 촬영도 일본인 가토 교헤이를 중심으로 (...)
나운규가 담당한 부분은 원작과 각색 그리고 주연이다. 같은해 12월 일본에서 이 영화가 상영될 때 상영사실을 광고항 일본의 영화잡지 「키네마순보」의 광고와 소개기사에도 감독은 쓰모리히데이치(津守秀一)로 표시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영화의 자막 상에도 같은 내용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뿐만 아니라 감독이자 평론가였던 이구영은 『아리랑』이 제작된 해의 한국영화를 결산한 ‘1926년도 영화계를 보내며’란 글에서, 한국영화가 전반적으로 부진한 가운데서 “그나마 <아리랑>이 제일 좋았으며, 나운규씨가 각색에서 훌륭한 솜씨를 보인 것이 즐거운 일”이었다고 적고 있다. 감독과 배우, 각색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이구영이 굳이 각색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 감독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 같은 시기에 배우로 활동했던 김태진 (남궁운) 또한 「영화계의 풍운아 -고 나운규를 논함」 이란 3주기 추도문에서 “제1회 원작. 각색. 감독. 주연의 독재기 작품 <풍운아>---”라고 서술함으로써 풍운아를 나운규의 첫 감독작으로 정리하고 있다.
(조휘문, 영화 아리랑의 재평가,한국영화학회 세미나,1997)
그리고 동료배우 윤봉춘의 글을 통해 감독 쓰모리히데이치의 존재를 제시하는데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배우로 입사한 윤봉춘이 감독 쓰모리로부터 무시당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 그때 「쓰모리」라는 일본인 감독이 있었다.(...) 쓰모리감독은 “일 본에서는 감독이 심지어 팬티까지 빨라해도 아무 불평없이 빠는데 신입생이 건방지게 무슨 소리냐”고 오히려 역정을 냈습니다.(...)
(윤봉춘, 나의 고백적 자전, 주간경향 1970.12.2)
조휘문은 이상과 같이 <아리랑> 신문 광고에 나와 있는 쓰모리히데이치 감독명과 그외 당시 영화인 이구영, 김태진, 윤봉춘 등의 증언, 그리고 1926년 일본 영화잡지 ‘키네마쥰보’ 광고, ‘오사카아사히’ 신문 광고의 감독명, 또한 ‘대조키네마’라는 영화사를 설립한 쓰모리가 감독한 문화영화 <자랑스러운 소방대> 등의 기록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총독부키네마’의 문화영화 제작 기록에서 발굴하여 제시하며 쓰모리히데이치 감독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 학설에 대한 논쟁은 양측이 팽팽해 앞으로도 더 확실한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하겠다. 나운규 본인의 말처럼 어떤 사유로 대명을 한 것인지 단순히 연기지도를 맡았던 나운규가 영화 전체를 연출한 것으로 왜곡되어 기정사실화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양측이 수긍할 수 있는 자료의 발굴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4. <아리랑>이 망명파 영화인에게 끼친 영향
1926년에 공개된 <아리랑>은 한민족의 울분을 대변하는 민족영화로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 후로도 계속 인기리에 상영되어 전국판권을 산 흥행사는 큰 재미를 보았고 <아리랑>은 1946년까지도 흥행을 했다 한다. 대를 이어 영화감독을 하고 있는 나운규의 3남인 나봉한의 증언이다.
아버지의 영화 <아리랑>을 광복되고 난 후인 1946년 우미관에서도 봤어요. (필름이) 전쟁 때 없어진 것 같아...
( 나한봉 구술, 1997년 2월, 영화사 )
나운규의 <아리랑>이 향후 영화제작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후 제작된 영화 <들쥐>,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등이 다루고 있는 계급과 계급간의 투쟁과 소외된 방랑인생을 다룬 나운규 영화 주제에서도 볼 수 있으며 나운규와 이론적으로 부딪치면서도 계속해 그의 영화를 표방했던 카프계열의 영화 <유랑>과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등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저항의식은 <아리랑> 이후 우리의 민족정신과 함께 이어져 간다. 그리고 그 직접적 영향 내지 민족적인 자각으로 상해망명파 영화인들의 항일영화 제작에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上海로 망명한 일단의 영화인들은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보여주었던 민족의식이 고취된 영화혼을 이어가고 있다. 서지가 김종욱은 자신의 소장자료를 바탕으로 영화 <아리랑>의 민족의식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장장 2시간 30분여의 대장편 영화 「아리랑」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당시 신문보도를 통해서 「아리랑」내용 가운데에 컷트 당한 부문이 사실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실성한 영진이가 서슬이 퍼런 순사의 빰따귀를 때렸다는 대목. 엿장수가 엿목판을 엿가위로 딱딱 치면서 세상살기 더럽더라는 영탄조의 노래부르는 장면, 영진 아버지가 야학을 개설하고 학생들을 모아 시국에 대한 비탄의 강연이 문제되어 숫제 「아리랑」에서는 야학에 관계되는 대목은 모조리 잘라내었다는 사실, 영희의 애인 영구의 계몽적인 대사, 동리사람들 앞에서의 농촌현실에 대한 피폐상을 시장에서 토론하는 분노의 장면도 잘려나갔고, 지주계급의 타파를 역설하는 미치기 이전 영진의 회상 시인, 농악대의 흐들어지는 장단에 맞추어 동리잔치에 때마침 휘영청 높이 뜬 만월(滿月)을 올려다보고 영진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달아달아 끼울어져라. 끼울어져라.」하는 대목이 검열당국자는 달이 기울어진다는 것은 대일본을 상징하는 히노마루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서 그 장면도 없애버렸다는 것이고 (…)
(김종욱, 아리랑 재조명, 영화「아리랑」에 관한 몇가지 문제1995)
김종욱에 의하면 <아리랑>은 항일영화의 계기를 촉발시켰고, <愛國魂>과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아리랑>은 총독부 검열에서 상기부분은 삭제되었고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일반공개 되었다. <아리랑>은 항일영화로 볼 수는 없지만 다분히 항일성을 상징한 대립요소의 드라마 트루기를 갖고 있으며 우회하여 표현된 영화적 상징이 대중의 환영을 받는 요소로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그들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 한계성을 갖게 되면서 마음껏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본격적인 저항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절름발이 항일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현실인식과 아울러 결국 일단의 영화인을 상해로 망명케 한 동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