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신정통주의나 수정주의적 복음주의자가 아니다!
이 설교를 통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성경의 모오성'입니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제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깨닫던 날, 우리 교회 부목사 둘과 통합 교단 목사님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나중에 자료를 메일로 보내왔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흔히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신앙에도 이 두 가지 성향이 존재합니다.
뭘 근거로 그렇게 나누느냐? 성경에 대한 생각 차이입니다.
성경에 오류가 없다 ... 보수
성경에 오류가 있다 ... 진보
보수도 나누어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기계적으로 사용해서 기록하셨다.
축자영감설이라고 합니다. 글자 하나까지 다 영감받았다는 것인데,
이걸 근본주의라고 합니다.
이걸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른 생각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그런가 하면 언어영감설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했지만, 사람의 특징을 이용해서 사용했다.
유기적영감설이라고도 하지요.
이 주장은 다소 관대하고 포용적입니다.
이걸 복음주의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영감이라고 말할 때는 유기적 영감이라는 겁니다.
로봇처럼 사람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이야기할 때 조금씩 다른 표현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대한 증언인데요.
살펴보시면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을 겁니다.
성경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에 의한 것이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문체가 다르고, 표현이 다르고 ... 그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이론 중에 자유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이 고대문서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말이다.
기독교는 그냥 하나의 종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논할 가치도 없는 주장입니다.
여기에 반발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들고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런 주장을 합니다.
성경이 고대문서이다.
비록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있지만, 진리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잘 생각해야 합니다.
기존의 보수적인 입장과 조금 다르지요.
역사와 과학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다고 하는 것 이게 다릅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요! 여러분은 이 중에 어떤 견해를 지지하십니까? 저는 복음주의의 '유기적영감설'을 오래도록 믿어왔습니다. 신정통주의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가 최근에 깨달은 것이 신정통주의나 수정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을 버려야 하나?' 고민하며 더 알아보았는데, 얼핏 보면 비슷해 보여도 실제로는 다른 견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로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알지 못하고 설명을 들으면, 신정통주의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깨달은 것이 신정통주의와 어떻게 다른지부터 설명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저는 유명한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상권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무오성에 대한 최근의 이의들
이 단원에서 무오성의 개념에 대해 일반적으로 제기된 주요 반론들을 살펴본다.
1. 성경은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만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
가장 자주 제기되는 반론이, 성경의 목적은 '믿음과 행위'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가르치는 데 있다는 주장이다. 즉 우리의 종교적인 신앙과 윤리의 행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부분만을 가르친다는 주장이다. 이 입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사건의 경우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그와 같은 부분들이 틀려도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성경의 목적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종종 성경이 절대적으로 신빙성이 있다고(infallible) 말하면서도 무오(inerrant)라는 단어를 쓰기는 주저한다."
연이어 저는 글리슨 아처의 『성경 난제 백과사전』에서 이와 일치하는 두 가지 글을 발견했습니다.
"최근 수년 동안에, 과학과 역사 문제에 있어서 사실적인 오류의 출현을 인정하면서도 - 심지어 성경의 원본에 있어서까지도 - 일종의 성경의 무류한 권위, 곧 성경의 신빙성을 합법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는 입장을 옹호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미국 복음주의자들 안에 있는 수정주의자 운동에 의하여 시도되어 오고 있다. 성경은 결코 과학이나 역사 교과서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학과 교리의 교과서만으로 의도되었다는 것이 강조된다. 천문학이나 생물학 분야에서 오류가 때때로 있을 수도 있으며 과학 이전 시대의 후진적 견해를 반영하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실수들은 저 고대의 책들의 주요 주제를 형성하는 신학적 교훈들의 타당성을 위협하거나 손상시키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결코 없다. 또한 설사 우연히도 어떤 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한 본문의 진술과 다른 본문의 진술 사이에 모순이 가끔 발견되더라도, 형이상학과 신학 문제에 대한 무류한 교과서로서의 성경의 자격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그런 잘모슬을 자유롭고도 솔직히 시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융통성 있는 변호는, 성경의 여러 가지 사실적인 오류를 근거로 성경 각 책들이 진리라는 위치에 대하여 의심을 갖는 전문적인 역사가들과 과학자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서도 성경 권위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자세를 훨씬 쉽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요즘의 유오론자들이 흔히 쓰는 특히 매력적인 호소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경은 여러 가지 종류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냉철하고도 확고한 사실들'은 받아들여져야 하며, 또한 무류한 원본문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 마당에 우리는 차라리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무오한 원본을 변호하고자 하는 노력은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들이 촉구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단순히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성경을 인정하고,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그대로의 형태 - 사소한 종류의 실수가 가끔 나타나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구원의 지식으로 인도하는 데에는 여전히 현저하게 유용한 - 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유익을 얻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오류가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인정하고 단순히 거기서 계속 나아가 주요하고 핵심적인 가르침의 메시지들을 의지하고 골치 아픈 사소한 일들로 스스로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이 완전히 솔직해지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들은 말한다."
문제는, 두 저자 모두 이 견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글리슨 아처는 이런 경고까지 했습니다.
"수정주의적 복음주의자들과 신정통파 신학자들이 제시한 이 중용은 성공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 (역사와 과학의 문제에 있어서도) 무오성이 없는 무류성은 있을 수 없으며, 이 중용(via media)을 받아들인 학파들이나 교파들은 조만간 그들의 원래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빗나가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으로부터는 실제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이 경고는 제가 전에 WCC 소속 교단 교회들에게 한 경고와 유사합니다. 저는 그들이 지금 당장은 이단이 아니지만, 돌이키지 않는다면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이단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고가 저에게 다시 되돌아왔으니 제가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하지만 글리슨 아처의 이 경고는 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두 학자들이 소개한 견해는 신정통주의와 수정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인데, 그들은 성경의 내용을 '역사적 과학적 범주' 둘로 구분합니다. 그런 후 '전자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후자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과 기적들까지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과 매우 다릅니다. 그 증거로, 저는 글리슨 아처가 신정통주의와 수정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의 견해에 반대하면서 한 다음 말에 기쁨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역사적, 과학적 범주와 교리적, 신학적 범주로 나누는 이런 구분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공격은, 오늘날의 합리주의적 비평가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기각해버리는 초자연적 사건들을 말하고 있는 구약 본문들까지도 주 예수님 자신은 분명하게 승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보았듯이 그리스도는 다음의 사건들을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받아들이셨다.
(1) 아담의 역사성(마19:5),
(2)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의하여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사실(마24:38-39),
(3)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과 나눈 모세의 대화의 사실적 정확성(마22:32),
(4)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모세의 회중이 먹은 일(요6:49),
(5) 큰 물고기의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후에 요나가 구출된 사건의 역사성(마12:40),
그리고 (6) 요나의 전도를 듣고 이방 니느웨 백성이 회개한 일(마12:41).
구세주께서 구약성경의 모든 기록이 글자 그대로의 사실임을 - 그것이 교리에 관한 것이든지, 과학이나 역사에 관한 것이든지 - 믿었다는 것보다도 더 명백한 사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판단에 있어서 주님과 함께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왜냐하면 예수는 인간이면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창조주(요1:1-3)가 인간의 유한한 지혜에 의한 지도와 수정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저는 이 여섯 가지를 위시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건과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글리슨 아처의 경고가 저와 무관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편,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정리하면 신정통주의나 수정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역사나 기적을 부정합니다. 분명히 이단성이 있고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에 나오는 어떤 사건이나 기적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어떤 사건이나 기적에 대해 성경저자가 설명할 때, 부분적으로 잘못 알고 있거나 착각한 것 때문에 발생하는 지극히 사소한 오류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이나 진리를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착오나 오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는, 신적인 저자인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인간적인 저자인 인간에게 그런 착오는 인간성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다 들으면 여러분 모두 제 말에 동의하시게 될 것입니다.
다시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성경에 나오는 사소한 숫자나 지명 혹은 이름 나아가서 어떤 사건이나 기적을 설명하는 설명의 일부분이 부정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렇게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더구나 제가 이 설교를 통해 증명하기 원하는 것은, 사소하긴 해도 성경에 이런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무오하며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복음과 진리들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심어줌으로 교회를 종교다원주의나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이나 비성경적인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지키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보수주의 자는 물론이요. 자유주의자들까지도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굴복하게 하려는 것이 제가 이 설교를 하는 이유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열린 마음으로 이 설교를 끝까지 잘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