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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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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12연기설(緣起說, 산스크리트어 Pratitya-Samutpa-da)>
촌놈 추천 0 조회 10 14.05.28 12: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2연기설(緣起說, 산스크리트어 Pratitya-Samutpa-da)>   


(1) 연기(緣起)의 원리                                                         


   연기는 산스크리트어 ‘Pratitya-Samutpa-da’의 번역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  ‘조건으로 생기는 것’,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산스크리트어 ‘Pratitya’는 서로 관련된다는 뜻이며, ‘Samutpa-da’는 함께(Sam) 일어난다(utpa-da)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起)’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緣) 형성되는 것’이며,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의지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 일체의 현상은 원인과 그에 따르는 결과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말인데, 존재하는 모든 현상계는 상관관계(相關關係) 속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부모님들의 인연의 부산물이다시피 우리가 나고 죽는 것은 다 이러한 인연에 따라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연기법(緣起法)은 불교의 중심사상으로 모든 현상계의 이치를 밝히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붓다가 깨달았다는 내용이 바로 12연기의 도리이다. 따라서 연기법은 모든 불교철학의 이론적 기반을 이루고 있으며, 아무리 복잡한 불교교리도 연기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같아서 연기의 이론은 불교전반에 걸쳐 있는 일관된 사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연기법은 모든 현상계의 일체법(一切法)이 서로 관계돼 조건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불변적 ? 고정적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공(空)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깨닫는다’는 말은 말들어낸다는 어떤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있어왔던 진리에 대한 발견이라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는 “연기의 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간에 이 법은 상주(常住)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해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잡아함 권12).

 


     ※상주(常住)와 법주(法住), 법계(法界)---모든 것은 무상하지만 덮어놓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사물의 생멸변화에는 인연화합(因緣和合)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 있다. 무상한 것들 속에 이렇게 일정한 법칙이 상주(常住)하고 있다. 이것을 ‘법주(法住, dharma-sth-iti)’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법칙을 요소로 해서 성립하고 있다. 즉, 물이 산소와 수소로 성립하듯이 모든 존재는 어떤 법칙을 요소로 하고 있다. 이것을 ‘법계(法界dharma-dhatu)’라고 한다.(잡아함경) 여기서 ‘계’는 구성 요소나 층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연기법은 붓다뿐만 아니라 붓다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이것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법계상주법(法界常住法)]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붓다와 같은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붓다는 단지 이 법칙을 발견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연기법의 발견자이지 발명자는 아니다.

   그리고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이 연기법을 관찰함으로써 붓다가 됐던 것이므로 연기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면 붓다의 가르침 전체를 이해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하셨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붓다]를 보며, 나를 보는 자는 곧 법을 본다.”라고도 하셨다. 즉, 연기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법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붓다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붓다는 이러한 연기법을 발견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리고 중생들의 문제를 위해 응용하고 실천했다. 붓다가 전 생애에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苦, dukkha)’에 관한 문제였다. 그가 출가한 것도, 6년에 걸쳐 힘든 수행을 한 것도, 그리고 성도(成道) 후 45년간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사람들을 가르친 것도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의 처음과 끝은 ‘고와 고에서의 해탈’이었다.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면 고(苦)의 고유성(固有性) 또는 실재성(實在性)은 인정될 수 없다. 고는 신(神)이나 절대자와 같은 어떤 존재가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을 제거해 버린다면 고도 사라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 고(苦)에 대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붓다의 설법 태도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붓다가 연기설을 설한 본래의 목적은 우리들 인간존재의 근저에 뿌리박고 있는 ‘고(苦)’ 문제를 어떻게든지 해결하려고 설한 것이었다. 즉, 고(苦)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상황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과 고(苦)의 문제가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제시한 가르침이 12연기법이다. 

 

 

   (2) 불교적 존재의 법칙


   연기법은 나의 존재를 위해서 타(他)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요, 그 역(逆)도 성립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연기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법칙이다. 서로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 있다는 말이다.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산스크리트어 idam-pratyaya-ta)---존재와 존재 사이에 인연화합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돼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이다. 상의상관성이란 말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술어이다.


   이러한 상의상관성에 대해 상응부경전(쌍윳따 니까야/잡아함경)에는 연기의 공식으로 알려져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유명한 연기송(緣起頌) 또는 차기송(此起頌)이라 하는 것이다.  


     ? 此有故彼有 -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 此起故彼起 -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 此無故彼無 -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 此滅故彼滅 -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동시적(同時的) 의존관계를 나타낸 것이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시적(異時的) 의존관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연기의 공식에는 무(無)시간적, 논리적 관계는 물론, 시간적, 생기적(生起的) 관계까지 고려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불교 술어로 표현하면 연기의 계기성(繼起性-시간성)과 구기성(俱起性-논리성)이다. 즉 연기의 발생 원리는 계기성과 구기성의 양면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인과론적인 종적(從的)관계로의 해석은 계기성(시간적)에 착안한 것이고, 인연론 중심의 논리관계로의 해석은 구기성(논리적)에 착안한 것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와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한마디로 존재에 대한 ‘관계성의 법칙’이요,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며, ‘원인, 결과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났거나 또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그리하여 생성 ? 변화 ? 발전 ? 소멸의 연결고리를 이루면서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성립시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변하거나 없어질 때 존재 또한 변하거나 없어져 버린다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그렇고 시간적으로도 그렇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영원한 것도 그리고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독립 ? 영원해서 불변하는 것이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사상의 핵심이다. 이러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시간적 개념에서 바라본 연기 - 제행무상(諸行無常) - 시간적 상의성

      ? 공간적 개념에서 바라본 연기 - 제법무아(諸法無我) - 공간적 상의성


   연기법의 관점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것들도 모두 다 일정한 법칙 속에 존재한다. 이 세상을 보면 불확실한 일들이 많고, 불확정적인 것들이 많으며, 복잡다단하고, 언뜻 보기에는 정신없어 보일 정도다. 이런 복잡한 세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지만 거기엔 일정한 법칙이 있다. 그것이 12연기법이다.

   또한 연기법은 전변설(轉變說)과 적취설(積聚說)의 치우친 존재론을 깨뜨리고[파사(破邪)],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한 구원의 논리로서 제시된 것이다. 즉 우주에는 일체 삼라만상을 전변해내는 어떤 선험적(先驗的)인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제법(諸法)]은 서로 연관돼 동시에 일어난 것이라는 뜻이다.


     ※적취설(積聚說)---우주는 많은 원자의 결합ㆍ집적에 의해 다양한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다원론적 세계관, 다분히 유물론적이다. 부처님 당시 신흥 사문인 자이나교(Jaina敎) 계통의 주장이다.

     ※전변설(轉變說)---적취설의 반대말. 우주를 신(神) 혹은 범(梵, 브라만/Brahman)이 창조하고, 절대적으로 섭리한다는 주장이다. 모두가 신에게서 우러나와 현상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바라문교 계통의 가르침이다.


   위의 적취설이나 전별설 모두 불교의 12연기법에 배치된다. 붓다는 연기법으로써 우주 창조의 중심이 초월적 신(超越的神)이라는 전별설을 부정하고, 인간 즉 살아있는 존재의 편임을 해명했고, 다시 존재 그 자체의 허구성[제법무아(諸法無我)]을 설해 적취설을 부정함으로써 삶의 무한한 해방된 공간을 깨우쳐 해탈의 길을 제시했다. 또한 연기의 뜻을 깨달아 공(空)을 체득하는 것만이 불생불멸하는 생명의 도(道)에 나아가는 것이며, 진정한 자아의 회복임을 강조했다.


   헌데 여기서 붓다께서 12연기의 가르침을 제시한 근본취지를 재확인해야 하겠다. 12연기는 원래 객관적인 실재의 발생과 소멸을 규명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었다. 즉 존재론을 규명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연기론은 괴로움의 현실을 해명하기 위한 가르침이었다. 붓다는 형이상학자도 자연과학자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괴로움의 극복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러한 이유에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경로를 드러냈을 뿐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든지, 또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이 단순한 원리가 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설하신 것이 12연기법이다. 즉, 12연기란 괴로움의 현실이 전개되는 과정을 12단계로 분석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가 설명된 본래의 목적은 어떠한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고가 생기고 또 어떠한 인연조건(因緣條件)에 의해서 고를 면할 수가 있는가 하는, 인생의 현실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또 그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과 길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연기법이 고(苦)와 고의 소멸을 해결하기 위한 교리로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전별설과 적취설에서 보이다시피 후대에 내려올수록, 특히 근래에 와서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제 현상을 설명하는 존래론에도 이 연기법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두에서도 말했다시피 연기법(緣起法)은 이제 불교의 중심사상으로 모든 현상계의 이치를 밝히고 있는 교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번 더 유념해야 할 것은 연기법의 본래 목적은 어디까지나 고(苦)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점을 망각할 때 12연기는 자칫 현상계의 구조를 밝히는 형이상학적 논리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3) 12지분(支分)  


   붓다는 연기법을 12의 지분으로 정리했다. 즉, 미혹한 세계의 인간관계를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등 12의 지분으로 설명해서, 이를 12연기라고 한 것이다.

   붓다가 설한 사성제(四聖諦)는 고(苦)의 집(集)과 멸(滅), 도(道)를 집중적으로 설한 진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12연기 또한 ‘왜 괴로움이 생기고, 어떻게 해야 괴로움이 소멸하는가’ 라는 주제를 같이하고 있다. 물론 사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실천적 행위규범의 제시에 더 큰 강조점이 주어져 있고, 12연기는 현실의 생기와 사멸의 논리적 이해에 더 큰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는 차이점은 있으나 12연기법도 고의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연기설을 12의 지분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12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다. 순관이란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행(行)이 있고, 행으로 말미암아 식(識)이 있고,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名色)이 있다고 하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해서 육입, 촉, 수, 애, 취, 유에 이른 다음 마지막에 생을 연해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순관은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연기를 유전연기(流轉緣起) 혹은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한다. 연기론에 있어서의 존재가 무명과 욕망 등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生死)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무명에서 시작되는 순관(順觀)은 중생이 집착과 괴로움에 얽매이는 순서를 보는 것인데 반해 역관(逆觀)은 고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즉, 노사가 소멸되기 위해서는 생이 소멸돼야 하고, 생이 소멸되기 위해서는 유가 소멸돼야 하고, 유가 소멸되기 위해서는 취가 소멸돼야 하고… 라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해서 취, 애, 수, 촉, 육입, 명색, 식, 행, 그리고 마지막엔 행이 소멸되기 위해서는 무명이 소멸돼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게 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관을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즉, 무명(無明)이 소멸하게 되면 행(行)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게 되면 식(識)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게 되면 명색(名色)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게 되면 육근(六根)이 소멸하고,… 이렇게 논리를 전개해서 마지막에 생이 소멸하게 되면 노사(老死)와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가 소멸하고,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고온(苦蘊)]가 소멸한다(상윳따 니까야).”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어떻든 노사에서 무명까지, 아니면 무명에서 노사까지 고(苦)의 사멸을 관찰하는 것을 역관이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관찰하는 연기를 환멸연기(還滅緣起) 혹은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한다. 즉, 생사윤회의 고뇌로 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관하는 것이 역관, 또는 환멸연기, 환멸문이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써 생사유전(生死輪轉)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순관과 역관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이 움직일 수 없이 확고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성제(四聖諦)에서 집(集)은 순관에 해당하고, 멸(滅)은 역관에 해당한다.

   불교에서 반야(prajna, 般若)란 제법의 실상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불교 교리에 제법이란 일체의 구조, 즉 사대(四大), 오온(五蘊), 12처(處)와 삼법인(三法印), 인연(因緣), 인과(因果), 상의상관(相依相關), 법칙성(法則性) 등의 속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법칙성에 대한 이해를 불교에서는 ‘명(明,vidya)’이라는 말로 부른다. 산스크리트어 ‘vid’는 실제로 존재한다. 또는 발견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서, ‘vidya’는 실재하는 것, 발견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것을 ‘명’ 즉 ‘밝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명의 유무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무상한 존재 속에 상주하는 법칙성을 발견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존재 방식이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명(明)’이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 그 죽음이 있게 되는 형성 과정을 12 단계로 자세하게 분석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이 12연기법이다. 이제 그 12 지분의 하나하나를 살펴보자. 

                                                       

   1) 무명(無明, 산스크리트어 avidy?)---12연기의 출발은 무명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글자 그대로 무명은 ‘명(明)’이 없다, 즉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 이는 부처님의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이며, 미(迷)의 근본이 되는 무지로서 사물의 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잘못된 일념을 가리킨다. 이 무명 일념이 일체번뇌를 낳고, 번뇌로 말미암아 악업을 짓고, 악업으로 말미암아 고(苦)의 결과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무명은 일체번뇌의 근본인 동시에 악업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 무명은 진리에 대한 무지인 동시에 실재(實在) 아닌 것 또는 실재성이 없는 것을 자기의 실체로 착각한 망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즉,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체를 ‘나’로 집착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명은 연기(緣起)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며, 자신의 존재 실상(연기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칭한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 실상을 알지 못하기에 사성제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고(괴로움)임을 알지 못하고, 고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고의 소멸을 알지 못하고,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무아(無我), 무상(無常)인 존재를 실재한다고 상(相)을 짓고,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이다. 실재가 아닌 것을 자신의 실체로 착각하는 망상이고, 주어진 존재의 일시적 형체를 참된 ‘나’라고 집착하는 무지로서 이러한 데에서 고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무명은 번뇌를 비롯한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갖은 악업을 짓고, 괴로움의 업보를 받게 된다. 이러한 무명은 무지로 인해 우리의 청정한 마음인 진여본성(眞如本性)에 번뇌라는 때가 끼어 광명이 가려진 상태이다. 따라서 무지를 극복해 번뇌의 때만 벗기면 바로 진여본성이 드러나서 다음 단계인 어리석은 행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을 텐데, 결국 무명으로 말미암아(조건으로 해서) 행(行)이 있게 된다. 이 말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업(業)이 형성된다는 말과 같다.

                        

   2) 행(行, 산스크리트어 samskara)---무명이 있으면 이에 연해 행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행이란 육체적인 행동 뿐 아니라 생각을 일으키거나 감정을 일으키는 모든 ‘의도된 행위’를 일컫는다. 결국, 행은 인간의 근원적인 행위로서의 업(業, karma)을 말한다.

   이와 같이 ‘행’은 행위. 동작 또는 업(業)이라는 뜻인데, 무지하고 맹목적인 생명의 원동력이다. 그리하여 무명의 끊임없는 활동상태 곧 생명의 의지가 몸[신(身)]과 입[구(口)]과 뜻[의(意)]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난다. 이것은 ‘행(行)’이 ‘결합하는sam, 작용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듯이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實在化)하려는 작용이라 하겠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면 내가 행했다고 할 것도 없지만 진아(眞我)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명의 상태에서는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니 따라서 내가 한 행위란 것도 있게 된다. 그리하여 행은 밝지 못한 상태[무명(無明)]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함으로써 습관, 성격, 소질, 체질, 인성 등 바르지 못한 자기가 형성돼 이른바 업이 지어진다.

   이와 같이 중생은 무명(無明)을 바탕으로 해서 행한 신?구?의(身口意) 3업(三業)이라는 원인을 짓고, 그 원인이 익어서 현재의 모습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 이 결과에서 새로운 원인을 지어 다음 순간의 새로운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행으로 말미암아 식(識)이 있게 된다.


    3) 식(識, 산스크리트어 vijnana)---행을 연해 식이 일어나는데, 식은 분별하는 인식작용을 말한다. 무명으로 인해 무아(無我)를 알지 못해 ‘나’라는 것을 세움으로 인해 ‘내가 아닌 가아(假我)’가 성립한다. 이때에 가아를 ‘나’로 인식하게 되는 주체가 식이다.

   그리고 이 작용이 보는 것이라면 안식(眼識)이라고 하고, 듣는 것이라면 이식(耳識)이라고 하며, 냄새 맡는 것이면 비식(鼻識)이라고 하고, 맛보는 것이면 설식(舌識)이라고 하며, 감촉을 느끼는 것이면 신식(身識)이라고 하고, 관념적인 것이면 의식(意識)이라고 한다. 이처럼 육근(六根)이 각각 그 대상(바깥 경계)을 식별하고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이 식이고, 이 식이 행위의 주동이 돼 선과 악을 짓는다.

   이와 같이 인식작용에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6식이 있고,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前五識)에 의한 감각작용과 제6식인 의식에 의한 지각 ? 추리 ? 기억 ? 판단 등 일체의 의식작용 및 이러한 작용을 하는 주체적 존재를 총칭해서 식이라 하는데, 과거의 모든 행위[행(行)]가 잠재의식이 돼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식(識)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된다. 장미꽃을 보고, 이 꽃이 장미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는 것은 과거에 장미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같은 사실을 인식해도 사람에 따라 느낌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예컨대 똑 같은 음악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즐거움으로 느끼는데, 성이 잔뜩 나 있는 사람은 즐겁기는커녕 시끄럽고 귀찮아서 고통으로 느낄 수 있다. 그 까닭은 인식 주체로서의 식이 백지와 같은 것이 아니라 무명과 행에 의해 기분이 좋거나 기분이 나쁜 상태를 마음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행(行)이 현재의 인식작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붓다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이란 태생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뿌리 깊은 무지와 습관적 경향들, 그리고 갈애와 집착 따위가 그 원인이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名色)이 있다.

                                     

   4) 명색(名色, 산스크리트어 n?mar?pa)---식을 연해 명색이 있게 되는데, 명색의 산스크리트어 n?mar?pa에서, na-ma는 명(名), ru-pa는 색(色)을 말한다.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심식(心識)을 명이라 하고 물질적 존재인 육체를 색이라 한다. 즉, 명(名)은 비물질적인  정신(마음)을 가리키고, 색(色)은 물질적인 몸을 가리킨다. 따라서 명색은 몸과 마음을 함께 말함이다.

   그래서 경전엔 오온(五蘊)을 명색이라 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색(色)은 물질적인 것이고,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은 정신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명색은 ‘정신과 물질(육체)이 하나로 결합된 혼합물’이라는 의미로서, 정신과 육체가 한 덩어리인 상태이다. 또한 오온도 한 덩어리로 결합돼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은 마찬가지이다.   

   헌데 부처님 당시에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라고 의심했었다. 붓다는 이러한 물음에 침묵했다. 정신과 물질 또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사유하는 하나의 잘못된 틀임을 직시하신 것이다. 본래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 우주 전체가 모두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돼 있기 때문에 분리해서 사유하는 것은 인간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부분을 ‘정신’이라고 하고, 변화해서 소멸해가는 부분을 ‘육체’라고 지칭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식(識)이 인식작용으로 주관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는데 반해 명색은 객관적 대상인 육경(六境)을 일컫는다. 즉, 육근(六根)의 대상인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의 육경을 일컫는다. 그리고 식(識)의 인식작용에 의해 매일 매일 마주하고 부딪치는 객관의 여러 대상에 대해 육경에 의해 형상을 구분하고 그에 따라 무엇이라고 이름을 짓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것을 명과 색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대상의 객관은 그때그때마다 이름과 형상이 우리들의 인식 속에 함께 자리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름과 형상 즉, 명색은 임시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짜인 양 그대로 의식 속에 각인시켜 버린다. 이렇듯 무명의 습기에 젖어 있으므로 중생은 끊임없는 무명에 의해 행위가 일어난다고 한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어떤 것이든 간에 반드시 서로간의 다른 조건과 환경 등이 인연이 돼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절대 혼자 독립적으로 생겨나거나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현상계의 이러한 성질을 인연소생법이라 하며, 이렇게 생겨난 존재를 상대적인 존재라고 한다.


   이러한 명색이 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데, 그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입(六入)이 있게 된다.      


   5) 육입(六入, 산스크리트어 sadayatana)---육입은 육근(六根) 혹은 육처(六處)라고도 하며, 인간 실존의 근저를 이루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인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를 말한다. 앞의 식(識)에는 6식이 있었고, 명색은 6경(境)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여기 육입을 합쳐 18계(界)가 되는 것이다. 일체의 구성요소인 18계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이라고 할 것 없이, 인간의 주관인 감관[6입]과 그 감관에 대응하는 대상[6경],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만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인식작용[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 감각기관[육입]을 통해 식[6식]이 작용하게 돼 명색[육경]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대상을 마주할 때 그 대상에 대해 일단은 명칭과 형상[명색]을 6근을 통해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육입으로 말미암아 촉(觸)이 있게 된다.


   6) 촉(觸, 산스크리트어 sparsa)---육입에 연해 촉이 있게 되는데, 촉이란 접촉을 말하며, 눈으로 보는 것도 접촉이다. 촉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육입)이 밖의 경계에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육근에 의해서 그 사물을 인식하게 되면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燭) ? 법(法)의 6경(境)이 발생하는데, 그것을 해석하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촉이라고 한다. 즉, 모든 중생은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6경을 인식하게 되면 반드시 촉(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으로 사물을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촉은 육근에 의해서 생긴다고 돼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육근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6식(識)], 명색[6경(境)], 육근(6根) 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써 발생한다. 즉, 촉은 인식기관인 육근(六根)과 그 대상인 육경(六境), 그리고 인식 기관의 인식 능력인 육식(六識), 이렇게 18계(界)가 만나서 인식이 성립된다. 따라서 촉은 단순한 접촉이나 자극이 아니라 인식 성립의 원초적 형태이며, 인식론적 경험의 현실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촉이 있으면 반드시 그 촉에 대한 느낌, 즉 감수작용(感受作用)이 수반되는데, 감수작용에는 즐거운 것, 괴로운 것,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 등 삼심수(三心受)가 있다. 이들의 화합으로부터 감각과 지각에 의한 인식조건이 성립된다. 그래서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7) 수(受, 산스크리트어 vedana)---촉에 연해 일어나는 감수작용[느낌]을 말하는 것으로, 접촉에 의해서 어떤 사물의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이 발생하게 되고, 그것을 느끼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즐거운 감정, 괴로운(싫은) 감정,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 즉 삼심수(三心受)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의 느낌이나 감정이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접촉해서 느끼는 괴로운 감정은 고수(苦受)이고, 즐거운 느낌은 낙수(樂受)이며,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또는 사수(捨受)라 한다. 

   감각기관[6입]과 그 대상[6경], 그리고 인식작용[6식]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촉(觸)]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受)가 발생하게 된다. 즉, 6입과 명색과 식의 접촉 위에서 생기는 고락, 불고락, 불고불락 등의 감수작용이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로 말미암아 애(愛)가 있다.

                       

   8) 애(愛, 산스크리트어 trsna)---수를 연해 애가 발생하게 되는데, 애란 앞서 수에서 좋고 싫다는 느낌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서, 모든 중생들은 수에 의해서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세 가지 감정 중에 어느 한 가지의 감정이 발생하게 되면, 그 세 가지 감정 중에 즐거움을 주는 그 대상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이 욕망의 만족을 바라는 열망인 갈애(渴愛)는 항상 능동적으로 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맹목적 욕망이다.  이런 현상이 다 무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애는 자비와 같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으로서의 사랑이다. 맹목적인 애념(愛念)을 말한다.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 강하면 그만큼 애증(愛憎)의 염(念)도 강해진다. 즉, 쾌락이 크면 그 쾌락을 가지려는 염이 강해지고, 고통이 크면 그 고통을 피하려는 염이 강해진다. 무명을 지혜를 가로막는 장애[소지장(所知障)]라 한다면, 애는 마음을 더럽게 하는 장애[번뇌장(煩惱障)]의 대표적인 것이다.

   산사에서 수행에 전념했던 젊은 승려가 모처럼 서울 조계사로 나들이를 갔다. 그리하여 기차에서 내려 복잡한 지하철을 타는 순간, 옆의 젊은 여인의 몸에 스쳤다고 하자, 승려의 몸[육근]에 여인의 부드러운 몸매가 부딪치는[촉] 순간, 아찔한 쾌감을 느낄 것이고[수], 이에 따라 숨어 있던 이성에 대한 애념[애]이 들끓을 것이다[번뇌].

   혹은 어린 승려가 고된 산사 수련을 겪다가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들이 모두 애념이다. 더구나 수행이 안 된 무명의 애념은 말할 수 없이 강렬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애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수행에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말한다. 애로 말미암아 취(取)가 있다.


   9) 취(取, 산스크리트어 upadana)---애(愛)를 연해 취가 일어나는데, 애에 의해 그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쏟아 부었을 때, 그 대상이 자신에게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추구된 즐거움의 대상을 자기가 가지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게 된다.

   다른 말로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서 애(愛)의 염(念)에서 일어나는 강한 취사선택(取捨選擇)의 행동으로서 취득해 가지려는 작용이다. 이러한 작용, 즉 집착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욕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취라고 한다. 

   앞의 애는 마음속에 생기는 심한 애증의 생각인데 반해 취는 생각 뒤에 생기는 취사(取捨)에 대한 실제행동이다. 즉, 욕망에 의해 추구한 대상을 자기 소유화하려는 현상이다. 강하게 자기 자신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집착을 말한다. 이러하기에 여기에서 바로 아상(我相)이 극대화된다. 따라서 무명에 젖은 강한 아상이 발생하면 결국 극심한 고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남자의 경우, 막연하게 이성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애(愛)라면, 많은 여성 중 어느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취(取)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을 추구하는 집착이 발생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된 여인이 순순히 말을 들어주면 일단 낙(樂)이 발생하겠지만, 사랑에는 늘 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고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반대로 빗나가게 되면, 즉 상대되는 여인이 말을 들어주지 않거나 거절당하면, 거기에도 그 나름대로 그릇된 소유욕으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괴로워하게 되거나 분한 나머지 잘못을 저지르거나 미워하는 고(苦)가 발생하게 된다.

   이런 사례 외에 직업을 선택한다거나 돈,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것도 취가 된다. 그리하여 자기가 추구하는 사업이 뜻대로 안 되면 마음이 상하고 빗나가서 고(苦)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취에는 보통 네 가지 취가 있다.

      ? 욕취(欲取) - 성욕, 재물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

      ? 견취(見取) - 그릇된 의견, 사상, 학설에 얽매여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

      ? 계금취(戒禁取) - 그릇된 행동을 옳다고 생각해 그에 따르는 것.

      ? 아어취(我語取) - 내 말만 옳다고 집착하고 고집하는 것.  


   10) 유(有, 산스크리트어 bhava)---취를 연해 유(有)가 발생한다. 모든 중생은 애에 연해 즐거움의 대상이 떠오르면 그것을 취하려 노력하고, 그렇게 해서 그 대상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하게 되는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유(有)라고 한다. 즉, 한번 취하면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하려는 소유욕으로서 이러한 집착에 따라 업(業)이 형성된다.

   그런데 업설에 의하면 집착 때문에 업(業)이 만들어지고, 그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有)를 업이라고 본다면 취(取)를 조건[집착]으로 해서 유라는 업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두 번째 항목이었던 행(行)이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애(愛)는 무명에 해당하며, 취(取)와 유(有)는 행에 해당한다. 즉, 무명에서 행이 생기고 행 속에는 실제행위와 그 여력이 포함되는 것처럼, 애에서 실제행위로서의 취가 생기고, 취에서 그 여력으로서의 유가 생기는 것이다. 즉, 애(愛)와 취(取)의 행위가 잠재의식화 되는 것에 의해 자신의 성품 ? 마음 ? 습관 ? 체질이 형성되고, 그것에 의해 현존재인 유(有)가 규정된다.

   이와 같이 앞의 애. 취의 인연으로 갖가지 업인을 지어서 장차 욕계,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중생의 생은 단 한번만의 삶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연결돼 생을 거듭한다는 것이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인데, 여기에는 인간의 태어남 역시 창조신의 의지나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태어날 인연을 지은 결과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 그 태어나게 하고 나아가 생존을 존속시키는 힘을 유(有)라 한다.  그런데 업인을 잘못 지으면 나쁜 고(苦)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라는 업을 조건으로 해서 생(生)이 있게 된다.

 

   11) 생(生, 산스크리트어 jati)---유에 연해 생이 발생하는데, 업(業)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유를 업이라고 했으니 그 업력에 의해 생을 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다르게는 유의 업인으로 말미암아 미래의 생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도 해석한다.

   그리고 유(有)에 축적된 업력의 작용에 의해 생(生)이 있게 되는데, 선업(善業)이 강하면 선과(善果)의 업보로 나타나고, 악업(惡業)이 강하면 악과(惡果)의 업보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차별적으로 태어나고 거기에 따른 행 ? 불행이 있게 마련인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추구하여 얻은 결론이 유(有)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에 의해서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그 다음에 사물이나 생각이 생성된다. 따라서 여기서 생이란 단어는 모든 존재의 태어남을 뜻한다. 즉, 태어나는 것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떤 새로운 경험이 생기는 것도 생에 해당한다.

   그리고 유정이 태어날 경우, 과거의 모든 경험(전생의 모든 경험)의 여력으로서의 지능 ? 성격 ? 체질 ? 인성 등을 지니고 태어나게 된다. 각 개인이 각기 일정한 소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소질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경험이 생기는 것이다. 한편 생이 바로 노, 병, 사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교의 입장은 생(生)조차도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즉,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등 여러 가지 고(苦)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12) 노사(老死, 산스크리트어 jara-marana)---생으로 말미암아 늙음과 죽음의 괴로움이 오는 것을 말한다. 생에 의해서 태어나는 모든 존재는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결국 늙어 죽을 수밖에 없다. 생이 있게 되면 늙음과 죽음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고(苦) 즉 근심, 비애, 고통, 번뇌, 번민[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이 발생한다.

   붓다는 늙음 ? 죽음이라는 실존적 괴로움이 태어남[생(生)]을 조건으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방식으로 있음이라든가 집착 따위를 거슬러 올라가 결국은 무명을 조건으로 일체의 괴로움이 생겨나는 과정을 밝혀냈다.

   그런데 노사는 단순하게 사람의 육체가 늙고 죽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생각이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 그 자체도 불교에서는 태어났다가 늙고 죽는다고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사는 비단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정(有情) ? 무정(無情), 삼라만상이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데, 이것 역시 노사인 것이다. 붓다의 교설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은 맥락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이 노사, 즉 성주괴공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아(無我)라 하고, 공(空)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의 12연기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인간의 죽음을 비롯한 모든 고통이 바로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생사 고통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을 멸해 없앰으로써 가능하다. 이와 같이 12연기의 각 지(支)는 모두 무명에서 일어나는 의식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는 것인데, 요는 무명이 있으면 연해 다음의 지(支)가 일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생사라는 중생의 괴로운 존재 방식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생사의 근본적인 극복은 무명의 멸진을 통해 가능 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에는 무명에서 생사의 발생 과정을 설한 다음에는 반드시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멸을 설하고 있다.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게 된다.


   그리고 12연기는 중생이 어떻게 윤회에 들어가서 태어나고 죽는지 그 인과관계를 하나의 둥근 고리 모양의 사슬구조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중생의 생명이 이런 윤회구조 속에 있으므로 함부로 끝낼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다. 짧게는 중생의 일생이 그렇고, 크게는 윤회구조 자체가 그렇다. 붓다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때, 실로 이 이치를 분명히 통찰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열 둘(12)’이란 것은 절대적인 숫자가 아니라 다소 자의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다. 이 말은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12연기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실제로 <아함경>에는 12지 연기만 설해지는 것이 아니라, 8지, 9지, 10지 등의 연기설이 다양하게 설해지고 있다.

   이 12연기설은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설해진 여러 가지 법문을 하나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형태임을 보여 준다. 우선 그 지분의 조직만 보더라도, 오온(五蘊) ? 12처(十二處) ? 생사(生死) 등의 여러 가지 법이 그 속에 하나로 짜여있으며, 연기라는 발생법에는 인과(因果) ? 인연(因緣) ? 상의상관(相依相關) 등의 모든 불교적 개념이 포섭돼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생노병사와 생주이멸(生住離滅)과 성주괴공(成住壞空)의 12단계를 설한 것이 12연기설이라 할 수 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형성된 사대육신(四大六身)은 찰나를 살다가 본래의 지수화풍으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유정(有情)은 생노병사의 과정을, 무정(無情)은 생주이멸의 과정을 거쳐 본래의 자리로 회기(回期)한다. 이를 포괄적 표현방식으로 성주괴공이라 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연기하는 것들이며, 이런 연기하는 것들은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생멸을 반복해서 이어져 나가는 것이다. 생멸윤전(生滅輪轉), 이렇게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것들은 그 실체가 없기에 신기루와 같고 물거품과 같기[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에 이를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항상 하지 않는 것들은 본래 스스로 있는 실체가 아니라서 무아(無我)라고 한다. 즉 그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시공간상의 모든 것은 연기해 일어나면서 항상 하지 않는, 그 실체가 없는 것들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이란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육체적 감정적 고통을 넘어선 좀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고통을 말한다.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에서의 고통이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이 업력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끊임없이 생사윤회 하는 양상을 12단계로 나누어 관찰한 것이 12연기설이다.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

 

   삼세양중인과설은 B.C. 3세기 ∼ AD1세기경의 부파불교시대에 등장한 소승불교의 연기법 해설방식으로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과 <구사론(俱舍論)>, <청정도론(淸淨道論)> 등에 실려 있으며, <아함경>의 내용에 충실한 해석이다.

   삼세(三世)란 과거-현재-미래를 의미하고, 양중(兩重)이란 두 번 반복된다는 것을 말하며, 인과(因果)란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말한다. 즉 삼세에 걸쳐 두 번의 인과를 가지고 윤회하는 과정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삼세양중인과설을 12연기에 적용시켜보면, 

    ? 무명(無明) ? 행(行)이 과거세의 2인(因)이 돼,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의 현재세의 5과(果)를 초래하고,

    ? 애(愛) ? 취(取) ? 유(有)가 현재세에 이루어지는 미래세의 3인(因)이 돼,

    ? 생(生) ? 노사(老死)라는 미래세의 2과(果)를 초래해 괴로운 생존을 되풀이 한다는 견해이다.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1 단계-무명(無明)

     2 단계-행(行)

     --------------------------여기까지가 과거 생

     3 단계-식(識)

     4 단계-명색(名色)

     5 단계-육입(六入)

     6 단계-촉(觸)

     7 단계-수(受)

     8 단계-애(愛)

     9 단계-취(取)

     10 단계-유(有)

     --------------------------여기까지가 현생

     11 단계-생(生)

     12 단계-노사(老死)

     --------------------------여기까지가 미래 생


   위의 표에서 1단계와 2단계의 무명과 행은 과거 생의 인(因)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3단계의 식에서 7단계의 수까지가 현생에서 받게 되는 과(果)가 된다. 다음의 8단계인 애에서 부터 10단계의 유까지가 현생에서 발생하는 인(因)이 된다. 마지막으로 11단계와 12단계의 생 ? 노사는 미래 생에서 받게 될 과(果)가 된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 3세에 걸쳐서 두 번의 ‘과(果)’를 받게 되므로 삼세양중인과라 한다.

   이와 같이 12연기법은 미혹한 상태에서 업을 지어 괴로운 과보를 받는 중생의 삶이 과거, 현재,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삼세양중인과설에 의하면 무명(無明)은 과거의 미혹(迷惑)이고 행(行)은 과거의 업(業)이다. 무명과 행은 과거 미혹한 상태와 그 상태에서 지은 업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과거의 원인에 의해 현재의 식(識)이 형성되며, 그 식에 의해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의 세계, 즉 명색(名色)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렇게 존재의 세계를 상대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생각된 것을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로 생각하는 가운데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이다. 즉 식, 명색, 육입, 촉, 수는 과거의 두 가지 원인에 의해 그 결과로 나타난 현재에 사는 중생의 다섯 가지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렇게 과거의 업에 의해 형성된 식을 토대로 살아가면서 삶을 통해 형성된 체험의 내용에 애탐(愛貪)을 일으키고, 애탐에 상응하는 것을 취해 자기의 존재를 구성한다. 여기에서 애탐을 일으켜 취하는 것, 즉 애(愛)와 취(取)는 미혹이고, 자기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 즉 유(有)는 업(業)이다.

   이러한 애, 취, 유는 미래의 새로운 생(生), 노사(老死)를 일으킨다. 따라서 애, 취, 유는 미래의 생을 일으키는 세 가지 원인이 되고, 그 결과 나타난 생, 노사는 미래의 과보가 된다.

  이와 같이 과거의 인에 의해 현재의 삶이 나타나고, 현재의 삶에서 미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애탐을 일으키고 취착해 미래의 자기의 존재를 구성하면 이것이 미래의 삶의 원인이 돼 다시 태어나 늙어 죽는 생사윤회가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이 삼세양중인과설이다.

 


     ? 태생학적 연기관(胎生學的 緣起觀)

   그리고 이 삼세양중인과설이 태내 오위설(胎內五位說) 등과 결합해 태생학적 연기관을 낳게 된다. 태내 오위설이란 사람이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나기까지의 기간, 즉 모태에서 자라나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설명이다. 그러니까 12연기를 사람이 육체를 중심으로 해서 태어나서 죽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해석이 태생학적 연기관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 무명(無明) - 사람이 죽은 후 오온(五蘊)이 사대(四大)로 해체돼 질서 없이 흐트러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죽은 후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기 이전의 상태로서 어디로부터 왔으며, 걱정과 괴로움은 왜 생기고,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캄캄한 암흑 속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어둠의 상태이다.

    ? 행(行) - 어두운 정신세계에서 무엇인가 요동하기 시작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즉 잠재적인 무의식과 충동력으로 인한 움직이는 기운을 뜻한다. 그러니 무명과 행은 과거세의 업(業)이다.

    ? 식(識) - 수태(受胎)하는 찰나, 즉 정자와 난자가 수정이 돼 어머니 뱃속에 들어간 순간으로서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 명색(名色) - 수태 후 약 1개월 사이, 즉, 명(名)은 형체는 없고 단지 이름만 있는 것이요. 색(色)은 형체는 있으나 아직 육근(六根)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단지 몸과 뜻만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명색이라 함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 육입(六入) - 어머니 태내(胎內)에서 눈 ? 귀 ? 코 등의 6근(6입, 6처)이 형성되는 시기. 즉, 어머니 뱃속에서 몸의 형태가 제대로 자리 잡아가는 것을 말한다.

    ? 촉(觸) - 출생해 단순한 감각작용을 일으키는 단계, 즉 촉이란 접촉을 말하는데, 태어나서 처음 외부세계와 접촉함으로써 느끼는 단순한 의식작용을 말한다. 세상에 나와 외적(外的)인 대상들과 부딪치는 촉(觸)이 일어나고, 외부와 접촉함으로써 감각과 지각의 인식작용이 생긴다. 촉(觸)에도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에 의한 6촉(六觸)이 있다.

    ? 수(受) - 단순한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 접촉에 의해서 어떤 사물의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이 발생하게 되고, 그것을 느끼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즐거운 감정, 괴로운(싫은) 감정,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의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의 느낌이나 감정이 발생하게 된다.

    ? 애(愛) - 재물이나 애욕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단계, 애란 앞서 수에서 좋고 싫다는 느낌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서, 개인적으로는 애착심을 느끼고, 이성을 느끼는 단계이다. 괴로움을 피하고 항상 즐거움을 추구하는 근본 욕망이다.

    ? 취(取) - 집착이 증대하는 단계, 애(愛)를 연해 취가 일어나는데, 애에 의해 그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쏟아 부었을 때, 그 대상이 자신에게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추구된 즐거움의 대상을 자기가 소유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게 된다. 다른 말로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서 애념(愛念)에서 일어나는 강한 취사선택(取捨選擇)의 행동으로서 취득해 병합하는 작용이라고도 한다.

    ? 유(有) - 집착으로 그릇된 행위를 일으키는 단계, 모든 중생은 애에 연해 즐거움의 대상이 떠오르면 그것을 취하려 갖은 방법을 다해 그 대상을 자신이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한번 취하면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하려는 소유욕을 가진다. 헌데 그 과정에 온갖 그릇된 행위를 한다.

    ? 생(生) - 미래세에 태어나는 단계, 유에 연해 생이 발생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애와 취가 바탕이 돼 태어난 존재가 삶을 시작하는 단계로서, 부부간에 2세가 태어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노사(老死) - 미래세에 태어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로 해석한다.

 


    ?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과 태생학적 연기관(胎生學的 緣起觀)에 대한 비판

   지금까지는 대체로 이와 같은 삼세양중인과설이 12연기설의 다양한 해석 가운데 가장 완벽한 해석이라 해서 연기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정설로 삼아왔다.

   그러나 현대 불교학자들 중엔 삼세양중인과설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런 해석은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인 12연기법의 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즉, 현대에 들어오면서 서구의 학문과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아 불교를 새롭게 조명하고 해석하는 현대학자들, 특히 대부분의 일본 불교학자들은 삼세양중인과설을 왜곡된 이론이라고 부정한다. 그 이유는, 불교는 무아설인데 삼세양중인과는 윤회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일부 부파불교에서는 연기를 잘못 이해해서 변견(邊見)으로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고집함으로써 12연기를 그와 같은 실유론적인 성격이 강한 생사윤회 하는 법칙으로 해석했던 것이 사실이며, 그래서 삼세양중인과설이 대두된 것이다. 

   헌데 삼세양중인과설은 ‘이것이 생기며 저것이 생긴다’는 12 연기법의 유전문(流轉門)의 설명이 될 뿐,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는 환멸문(還滅門)은 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삼세양중인과설은 엄밀히 말하면 12연기설 전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유전문에 대한 해석임이 사실이다. 그리고 세존께서 12연기를 설하신 목적은 환멸문에 있었다.

   특히 태생학적 연기관에서는 생사를 육체의 생사로 보기 때문에 12연기의 본뜻을 왜곡시킨다고 비판한다. 태생학적인 해석에 따른다면 무명이 사라지면 육체가 사라져야 하고, 따라서 무명이 멸한 부처님의 육체가 없어져야 하는데, 부처님은 우리와 다름없는 몸으로 우리에게 12연기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12연기에 대한 태생학적 이해는 잘못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론자에 대해 붓다의 12연기설에서의 윤회설은 붓다가 어리석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설한 속제(俗諦)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실제로 불교에서 비록 속제이기는 하나 윤회를 설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불하십시요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크? 해 가시는 분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며 이용해 주세요. 아니면 저적권법에 저촉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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