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오이디푸스>
오랜만에 정통 연극을 보았다. 연극 공연의 메카라 불리는 대학로에서는 정통 연극을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공연이 로맨틱 코메디나 가벼운 소재의 작품들이다. 더구나 대규모의 공연은 뮤지컬 이외에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 <오이디푸스>는 특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연으로 천만배우 황정민을 캐스팅하고 고대 그리스 비극을 대규모의 무대에 재현한 이번 작품은 연극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교통이 불편하고 혼잡한 강남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예술의 전당은 다양한 예술적 무대와 음악과 미술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며 수준 높은 강좌가 연중 열리는 곳이다. 과거 예술원 자료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데 이번 연극을 본 것을 기회로 불편하더라도 다시 예술의 전당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찾는 것도 의미있다고 생각되었다.
연극 <오이디푸스>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최고 작품이다. 연극의 줄거리는 대략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무대에서 재현되는지는 처음으로 확인하였다. 2500년 전 작품임에도 극의 구성과 전개방식은 탁월했다. 이동이 제한된 무대에서 운명적인 신탁의 비극을 보여주는 전개는 과거와 현재를 긴밀하게 연결시키면서 파국을 향하여 강한 몰입도를 보여주었다. 데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괴물 스핑크스를 제거한 공로로 테베의 왕이 되고 왕비와 결혼한다. 평화로운 테베에 재앙이 시작되자 오이디푸스는 살해당한 전왕의 죽음을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 한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비극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재앙의 원인을 찾기 위한 신탁에 따라 전왕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찾는 과정은 일종의 스릴러물의 성격을 띤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오히려 코린토스의 왕자라고 알고 있었던 오이디푸스가 ‘부친을 죽이고 모친과 결혼한다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하던 중에 일어났던 일을 통해서 결정되었다. 오이디푸스는 방랑 중, 일단의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그들을 살해했던 일이 있었다. 그 중에 한 노인이 바로 라이오스였던 것이다.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찾기 위한 시도는 결국 오이디푸스가 살해범이라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불길함을 감지한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는 운명의 흐름을 막기 위해 절규했지만 실패한다.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졌던 운명의 저주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이오카스테는 절망 속에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보지 못했던 눈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한다. 그토록 피하려 했던 운명은 결국 인간의 힘을 넘어서 실현되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공포와 연민을 통한 카타르시스의 실현’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것을 급반전과 발견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플롯은 단순한 구성보다 복합적인 구성이 좋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효과적인 반전과 사건의 핵심을 발견하는 과정의 정교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가장 적합했던 작품이 바로 <오이디푸스왕>이었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모두가 거부했던 운명의 흔적은 도망치려 할수록 그들을 따라붙었다. 코린토스의 사신이 전해준 운명으로부터의 탈출 소식은 오히려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실현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거대한 반전이자 아이러니였다. 강렬한 운명의 손길은 결국 그들 모두를 파멸시켰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 관객들은 이러한 왕족들의 비극을 보면서 특별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비극은 왕들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도 특별한 것이 아님을,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정화시켰을 것이다. 공포의 크기가 클수록 그리고 그것이 치밀한 플롯에 의해 표현될수록 그들은 더 큰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마지막에 자신의 눈을 찌르는 장면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지혜의 화신이었다. 수수께끼를 통해 사람들을 죽이는 괴물 스핑크스를 수수께끼로 제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지혜는 개인적인 행복과 테베의 번영을 누리게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아내와 4명의 자녀, 안정된 테베의 상황은 어느 날 불어 닥친 운명의 바람 속에서 무너져야 했다. 오이디푸스가 바라본 세계는 거짓과 위선으로 구축된 가짜였던 것이다. 눈을 찌른 행위는 자신의 지혜에 자만하여 행동했던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었다. 진실을 보지 못한 자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착각한 것에 대한 분노이자 슬픔이었던 것이다.
4층 맨 꼭대기에서 연극을 본다는 것은 무대의 구체성과 배우들의 세세한 동작을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다만 무대의 느낌과 생생한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서 연극의 특별함을 경험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역의 황정민은 처음에는 오히려 다른 배우들에 비해 대사의 힘이 부족하고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배우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오이디푸스가 겪게 되는 고통과 불안의 정서를 세심하면서도 과장 되지 않게 사람들로 하여금 몰입되도록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렁찬 다른 배우들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단조롭고 고정된 느낌을 주고 있지만 황정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양성 속에서 표현되고 있었다.
정통 연극의 매력은 과거 대학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보았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후 다시 느끼는 경험이었다. 비록 거리가 먼 관계로 과거보다는 배우들의 동선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좋은 배우들의 앙상블로 연극의 고전을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은 괜찮은 시간이었다. 한참 막히는 차량 사이를 오갔지만, 그나마 평일 3시 공연이기에 이러한 관람도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대학로에서 좋은 정극 무대가 다시 많이 공연되길 바란다. 연극은 대학로에서 보는 것이 제 맛이다. 무대의 내용 못지않게 그것이 어디에서 상연되는가도 중요한 요소이다. 대학로의 문화적 분위기가 무대의 풍요함을 더욱 깊게 만들기 때문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에 만나게 되는 서초동의 복잡함과 문화적 황량함은 관람이 주었던 깊은 감동을 퇴색시키고 있었다.
첫댓글 다양한 체험을 갖는 것이 좋다. 가끔 '연극이 끝나고 난 후에 만나게 되는 문화적 황량함'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