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던 중 경상남도 남해에 대한 좋은 정보가 있어 이곳에 옮깁니다. 다음 글은 현직 지리교사 유종철 선생님이 경상남도 남해를 다녀온 뒤 직접 작성한 답사기입니다. 참고로 다음 답사기는 2003년 10월에 작성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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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교사 유종철선생님]
유종철(劉鐘哲) ▶1962년 7월 20일 강원 춘천생 ▶ 1986년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졸업 ▶ 1992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리교육과 졸업 ▶ 1989년 서울 한광 고등학교 교사 ▶ 1995년 포항제철 중학교 교사 ▶ 1996년 포항제철 고등학교 교사▶ 현재 포항제철 고등학교 교사 <참고>전국 여행 다수및 자전거 전국여행 제주도 일주(90년), 백두대간 자전거 일주(91년), 서해안 일주(92년), 남해안 일주(93년), 동해안 일주 (96년), 휴전선 일주(97년) 일본규슈일주(2001년), 대만일주(2002년), 라인강 전구간 자전거일주(2003) <저서> 전천후 한국지리, 전천후 세계지리 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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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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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남해를 방문했을 때 그 아름다움과 포근함에 처갓집이 있었으면 했던 섬인 남해, 지금은 육지와 2곳으로 연결되어 섬인지 육지인지 구별이 안가는 섬 남해,
국내 유일의 해상국립공원이 있고 수산업과 농업이 발달한 현재의 풍요의 뒤에는 가난과 유배지 그리고 임진왜란과 일제시대의 아픈 흔적이 남아있는 현장인 남해, 이름 그대로 남해바다를 대표하는 섬인 남해를 이번 달에 같이 돌아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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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의 관문 남해대교 위에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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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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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와 영역
경상남도의 가장 서쪽에 있는 섬으로 북으로는 경남 하동군과 사천시, 서쪽으로는 여수시와 광양시 동으로는 경남 통영시와 인접하며 남으로 넓은 바다와 인접한 외관상 나비모양 혹은 표주박 모양으로 된 섬이다. 남해섬 만의 면적은 302.77㎢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의 네번째로 큰 섬인데 강화도(302.14㎢)와 면적이 비슷하다.
창선도는 54.18㎢로 11번째의 크기를 가진 섬이다. 남해군 전체의 면적은 357.33㎢로 경남에서 3.3%를 차지하는데 창선면이 남해군에서 15.2%로 가장 넓고 삼동면, 이동면, 남면, 서면, 고현면 등의 순이다. 행정구역은 1읍과 9면이 있으며 남해도와 창선도 외에 노도, 조도, 호도의 유인도와 65개의 무인도를 갖고 있다.
역사
남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것는 신라 경덕왕 16년 (757)의 일로 강주(康州)에 속하였고 창선도는 이때 고성군 흥선현으로 소속되었다. 고려 현종9년(1018)에 남해현이라 개칭하고 공민왕 때에는 왜구들의 약탈로 진주관내 대야천 부곡으로 행정관서를 옮겼다.
그 후 조선 태종 14년(1414)에 하동과 병합하여 하남(河南)현이 된후 하동현이 독립하여 진주의 금양부곡과 합쳐 해양(海陽)현이 되고, 그 후 금양이 진주에 병합되어 남해현으로 다시 되었다.
선조25년(1592)부터 7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무인지경이 되기도 했다. 고종 32년(1895)에 남해현에서 남해군으로 개칭되고 1906년에 진주목에 속하였던 창선도가 남해군에 편입되었다. 1979년 남해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상주면, 미조면 등이 출장소에서 면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기후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항상 난류가 흘러 비교적 겨울에 온난하며, 여름에는 더위가 심하지 않다. 연평균 기온은 14.0℃로 경상남도 평균(11~14℃)보다 높은 편이며 최고기온은 37.8℃(94.7.20) 최저기온은 -12.8℃(76.1.24)기록하였는데 겨울철 기온은 조금씩 높아지는 추세이다.
장마전선이 상륙하고 태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 위치에 있어 강수량이 많으며, 봄철에 양쯔강 기단에 의한 저기압의 동진(東進)으로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 비해 강수량이 많으며 일 최대강수량은 303.0㎜(2001.6.24)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구분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평균 |
평균기온(℃) |
1.7 |
3.3 |
7.6 |
13.3 |
17.7 |
21.3 |
24.8 |
25.7 |
21.6 |
16.3 |
9.9 |
4.2 |
14.0 |
최고기온(℃) |
6.8 |
8.5 |
13.1 |
18.9 |
23.3 |
26.1 |
28.8 |
30.1 |
26.4 |
21.9 |
15.3 |
9.6 |
19.1 |
최저기온(℃) |
-2.7 |
-1.5 |
2.5 |
7.9 |
12.5 |
17.3 |
21.9 |
22.4 |
19.6 |
11.3 |
5.1 |
-0.7 |
9.5 |
강수량(㎚) |
33.3 |
54.9 |
94.6 |
176.4 |
188.2 |
270.6 |
322.0 |
298.6 |
188.4 |
75.3 |
61.3 |
25.9 |
1789.5 |
지형
소백산맥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후빙기 해수면의 상승에 의해 침수되고 남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산이 많고 높으며 해안의 경사가 급하고 파도침식에 의한 절벽을 이룬 부분이 많다. 가장 높은 망운산(786m)을 비롯해서 금산(681) 응봉산(412) 설흘산(481)과 창선도의 대방산(470)등이 있으며, 하천은 짧고 유속이 빠르며 평야는 강진만의 서부해안지대인 고현면과 남해읍, 이동면 등의 해안에 주로 분포하는데 좁은 편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302㎞로 굴곡이 심하고 주로 해안을 따라 형성된 도로의 기울기의 변화도 심하다. 그러나 복잡한 해안선은 어족자원을 풍부하게 하고 항구발달에 좋은 여건을 제공하여 연 근해 어업 발달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해군의 안쪽 강진만을 중심으로 갯벌이 분포하며 섬의 바깥쪽에 모래질의 해안이 분포하여 해수욕장으로 개발되고 있다.
인구
2002년 12월31일 기준으로 남해군의 인구는 56,179명으로 경상남도 전체인구의 1.86%를 차지한다. 이중 남자는 27,005명 여자는 29,174명으로 여자의 비율이 높으며, 우리나라의 다른 농어촌 지역과 같이 유소년과 청장년층의 인구는 감소하고 65세 이상의 노년층의 인구는 증가하고있는 추세이다.
1964년 137,914명으로 가장 많은 인구를 기록한 후 계속 감소추세에 있으며 매년 약 1500~2000명의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가구당 인구도 1960년대 중반 6.2명에서 최근에는 2.6명으로 줄어들었다. 읍ㆍ면별로는 남해읍이 14,368명으로 남해군의 25.6%을 차지하고 다음으로 창선면(12.9%), 이동면(9.6%), 고현면(9.4%)의 순서이며 상주면이 4.2%로 가장 적다.
산업
남해지방은 협소한 경지로 인해 수산업이 중심산업으로 발전해왔다. 강진만은 섬진강의 하천수가 유입되어 풍부한 플랑크톤을 공급하고 연안의 20m내외의 평탄한 수심과 넓은 갯벌은 어패류의 양식장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넓은 연안의 양식장에서 우럭ㆍ광어ㆍ전복ㆍ우렁쉥이ㆍ피조개ㆍ굴ㆍ미역ㆍ바지락ㆍ보리새우 등의 다양한 종류가 양식되고 있으며, 연안에서는 강성돔ㆍ삼치ㆍ멸치ㆍ도다리 등의 고급어종이 다양하게 잡히고 있다.
1986년 미조항을 어업전진기지로 지정 개발하고, 상주에 국립수산진흥원 수산종묘배양장이 설치되었으며 창선면과 삼동면 일대를 수산자원보전지역으로 지정하는 등 수산업 발달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인근에 광양제철소와 여천시의 석유화학단지가 조성되면서 수산업의 환경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상대적으로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어 농업은 불리한 편인데 경지면적이 8,113㏊이로 경남의 4.2%에 불과하며, 이중 논은 4,900㏊(60.4%) 밭이 3,213㏊(39.6%)이다. 가구당 경지면적은 0.72㏊로 경남에서는 통영 다음으로 가구당 경지면적이 가장 작다.
이런 자연조건의 불리함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하천의 물을 이용하기 편리한 계곡의 주변에 계단식 논과 밭을 만들어 마늘과 쌀을 이모작 하면서 고구마와 유자, 시금치 등의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마늘은 전국적인 주산지로 전국의 6%와 경남의 44%를 차지하고 있으며 유자, 시금치 등의 생산량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공업부분은 미약한 편으로 고현논공단지의 주방용품을 생산하는 동은산업(주)이나 보화스텐레스(주)가 대표적이나 규모면에서는 작으며 그 외 몇몇 농수산물 가공업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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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서 앞으로 가장 발전이 기대되는 부분은 관광이다.
주5일제 시행과 소득의 증가 등으로 관광여건이 좋아지면서 깨끗한 자연경관과 문화적 관광자원을 가진 이곳은 창선-삼천포 대교의 개통으로 더욱더 발전이 기대된다.
2001년 약 26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으며 관광지로는 상주해수욕장 일대와 금산 지역이 대표적이다. |
< 이동면 입구의 마늘가공공장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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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특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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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나라의 섬이 모두 그렇듯이 남해도 섬으로서 작지 않은 크기에 물은 풍부하지만 경지가 좁아 농업이 주산업이던 과거에는 생활환경이 열악한 절해고도(絶海孤島)였다. 육지에서 가까이 있지만 국토의 중심에서 먼 끝에 위치하고 조류도 거세 멀리 있는 섬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관리의 유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남해 똥배"라는 말은 이 지역의 과거를 한마디로 대변해준다. 가까운 도시인 여수로 어렵게 노를 저어 나가서 해산물을 팔아 생필품을 구입하는 것 외에 배가 여수항에 도착하면 여수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뒷간의 똥을 퍼 타고 온 배에 싣고 돌아와 한군데 모아두어 삭힌 후 이듬해 봄의 보리농사에 거름으로 사용한데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이런 똥배는 50년대 말 국산 비료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남해똥배기질' 이라고 이야기되는 이곳사람들의 삶에 대한 억척스러움은 어려운 자연환경을 극복해 자식들의 교육에 전력을 다했음을 보여준 증거이다.
이곳이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을 잘 이용한 것으로는 지족해협의 죽방렴 어업과 노량 앞바다의 노량대첩이 이었으며 군내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계단식 논과 밭은 어려움을 극복한 남해사람들의 슬기로움을 느끼게 한다.
현재
남해바다의 가운데 위치하고 남해라는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남해군은 밖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빼어난 자연환경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사람들의 문화가 어울러진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 어려운 환경에서 부지런하게 생활하고 키워낸 자녀들이 이제 전국각지로 나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훌륭하게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육지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해지고 국민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많은 사람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주변에 광양제철소와 여천 석유화학단지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의 가장 큰 소득원이었던 수산업의 환경이 나빠지면서 어려움을 겪고있다. 대신 인근의 대도시가 발전하므로 많은 사람이 찾게 되고, 최근에 개통된 창선과 삼천포간의 창선-삼천포 대교의 개통은 삼천포, 고성지역으로 향하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보이고 있으며, 과거 이 지역이 남해대교를 건너 다시 돌아가는 불편함이 있었으나 이제는 통과해서 지나갈 수 있는 여건이 됨으로서 더욱 많은 발전이 기대된다
미래
이 지역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이 지역이 쉽게 변화할 수 있다는 점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남해는 다른지역과 차별화된 점, 지금의 도시생활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싶어 찾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편리함이나 쾌적함과는 또다른 생각이다. 최근에 남해를 방문해보니 확실히 변화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너무 편리성만 생각하는 개발은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수준의 향상을 무시할 수 없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가는 개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근의 광양이나 여천처럼 개발위주의 정책은 사람들의 떠나 보내고 산업시설만 남게 한다.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은 이 지역에 환경 친화적인 곳으로 언제나 찾아가도 고향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남기를 바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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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가 볼만한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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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로 가기
남해로 가는 길은 과거에는 노량을 통해 남해대교를 건너가는 육로와 선박을 이용해서 삼천포에서 창선도로 들어가거나 여수-부산 간의 추억의 엔젤호를 이용한 방법이 있었으나 지금은 삼천포와 창선도간도 연륙교가 생겨 주로 육로를 이용하게 되고 여수항에서 남해 서면 서상까지 하루 2회 운행하는 선박을 이용하는 방법이 선박을 통해 들어가는 방법이다.
필자는 항상 남해를 여행할 때면 섬에 들어간다는 느낌을 가지기 위해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더라도 삼천포에서 창선도의 단항까지 건너가는 도선 금남호를 이용해서 들어가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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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 해도 남해는 내마음속에 섬으로 남아있으니까. 이제 금남호는 어디로 간지 모르겠고 그 자리에 현대식의 아름다운 다리와 넓은 회집들이 들어서 번화하고 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든다.
앞으로 더 돌아가더라도 여수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을 이용해야 할 것 같다. 이번 답사에서는 첫 번째는 남해대교로 들어가 삼천포로 두 번째는 삼천포로 들어가 남해대교로 나오는 방법을 택했다. |
< 창선연육교 > |
남해대교 건설로 인한 노량마을의 변화
남해고속도로에서 진교로 들어가면 조금만 달리면 기다렸던 바다가 보이면서 남해섬이 보인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으면서 노량리 뒷산인 산성산의 높이에 아직 섬이 아니라고 느껴지기도 하는데 조금더 달리면 유명한 남해의 얼굴인 남해대교가 나온다.
1973년 완공되어 당시 동양최대규모를 자랑했던 현수교인 남해대교는 길이 660m에 폭 12m로 해수면으로부터 높이가 25m에 이르는 빨간색의 다리 모습이 주변경관과 잘 어울린다.
94년 이 다리를 회색으로 칠 한적이 있다는데 보지는 못했지만 어울리지않다고 생각되며, 역시 남해대교는 빨간색이 어울린다. 남해대교는 차로 건너는 것 보다 걸어서 건너야 재미있다. 버스 같은 대형차량이 지나가면 흔들거림이 느껴지고 다리 아래로 빠르게 흘러가는 노량해협의 물은 두렴움을 느끼게 하며 이곳이 그 유명한 노량대첩의 역사적 현장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건너는 것이 좋다.
원래 노량(露梁)이라는 이 지역의 지명을 풀이하면 '이슬다리'라는 뜻이니 이곳에 다리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다리 아래의 노량리는 남해안을 서에서 동으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로서 교통의 요지였으며 우리에게는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의 현장으로 더 잘알려져있다.
노량해협에서 감암마을을 돌아오면 관음포라는 곳에서 조선 선조 31년(1598)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이곳에 이락사(李落詞)에는 전몰유허비가 있고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가매장한 노량리 옆에 충렬사를 세우는 등 그분의 마지막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남해안에서는 곳곳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적을 볼 수 있고 잘보존해놓았지만 이곳은 그분의 마지막 모습이 남아있던 곳이라 더욱 의미 있다. 또한 이 관음포는 고려 우왕 9년(1383)에 정지(鄭地)장군이 이끄는 고려 수군이 왜구의 정예군사2000여명을 죽이고 큰 선박 17척을 수장시킨 곳이다.
이것을 기리기 위해 관음포 인근의 고현면 탑동마을 오일장이 서는 장소 입구의 탑동 삼거리에 당시의 승전을 기리는 '정지탑'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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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량해협의 거북선과 남해대교 > |
< 정지탑 > | 1973년 남해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건설된 남해대교로 인해 이 지역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다리가 건설되기 전에 강이나 섬을 연결해주는 길의 양쪽의 포구에 자연스럽게 마을이 발달하게 된다. 강이나 바다를 건너려면 사람이 멈추거나 기다리게 되고 그곳에는 이런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숙박이나 음식점 및 관리를 위한 관청이 들어서게 되면서 마을이 발달하게 된다.
이런 마을을 나루터 취락 혹은 도진(渡津)취락이라고 하는데 벽란도ㆍ삼전도ㆍ 송파ㆍ마포ㆍ당진ㆍ삼랑진ㆍ신탄진과 같이 마을 이름에 도(渡)ㆍ진(津)ㆍ포(浦)라는 지명이 붙게 된다. 해수면의 상승으로 생긴 노량해협은 경남 남해군의 노량과 하동군의 노량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약 400년 전에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온다 이곳을 옛날에는 작은 뗏목, 돛단배 등을 이용해서 물살이 빠른 이곳을 힘겹게 건너다녔으며 1930년대부터 일제에 의해 부산과 여수사이를 오가는 기선들이 기착하게 되면서 수상교통의 요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1961년에 노량항에 기항한 여객선은 부산~여수 구간의 보성호(정원 422명)ㆍ경복호(416)ㆍ갑성호(230명)ㆍ금양호(394)ㆍ태안호(263)ㆍ금성호(350)ㆍ한양호(404) 등과 마산~여수간의 제11 천신호(173)ㆍ제7 천신호(173)과 부산~완도간의 한일호(136)가 취항하는 등 삼천포 충무와 함께 남해안의 대표적인 항구였다. 1966년 6월에는 승용차를 실을 수 있는 금남호가 정기적으로 오고가면서 시외버스가 배에 실려 운반하게 되었고 1973년에 남해대교가 개통되면서 이 배는 창선도와 남해사이의 지족해협으로 옮겨가게 되며 대중적인 선박은 사라지고 한려수도를 관통하는 여수-부산 간의 엔젤호가 기항하게 된다. 남해대교의 개통은 이 지역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선박이 기항하는 항구로서의 기능은 점차 약해지고 도진취락으로서의 마을의 규모나 역할은 축소된다. 차량이나 사람이 머무르지 않고 그대로 통과함으로써 다른 도진취락과 마찬가지로 이곳 노량도 과거에 비해 쇠퇴의 길을 걷게된다.
그러나 남해대교의 개통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해를 찾으면서 남해의 관문의 역할을 하는 이곳에 머물렀다 남해로 들어가게 되면서 관광의 기능을 가진 촌락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현재 양쪽 노량마을은 횟집이나 기념품 가게, 숙박시설 등이 몰려있는 전형적인 관광취락이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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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신마을 위 언덕에서 내려다본 남해쪽 노량리와 건너편 하동쪽 구노량 > |
< 하동쪽에서 본 남해대교 > |
우리나라 갯벌의 남해끝 남해섬 갯벌
우리나라의 갯벌은 전체면적이 약 2,815㎢로 국토면적의 3%에 이른다. 갯벌은 '자연의 콩팥'으로 하천을 따라 흘러 들어온 오염물질을 최종적으로 걸러주고 중금속과 유해화학물질을 무해한 상태로 바꿔주며, 부영양화를 일으키는 질소와 인을 흡수한다. 경제적 가치도 커서 연안생물의 60%가 갯벌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농지로 매립하는 것보다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3배이상의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
현재 전체갯벌의 26%가 기능을 상실했으며 현재 간척이 진행되고있는 곳까지 합치면 48%가 사라질 예정이다. 일찍이 갯벌이 쓸모 없는 땅으로 매립해서 간척지를 조성해야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준 이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었다. 갯벌이 거의 없는 일본에서는 갯벌의 귀중함을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조선 땅에서의 갯벌을 쓸모 없고 매립의 대상이었지 모른다.
지금 북해에 세계 최대의 갯벌을 가진 독일은 80년대 중반부터 갯벌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미국이나 네델란드는 간척지를 다시 갯벌로 복원하는 사업이 한창이다. 우리나라의 갯벌은 인천만을 중심으로 서해와 남해에 많이 넓게 분포하는데 이곳 남해섬의 갯벌이 사실상 인천에서 출발한 갯벌의 남해안 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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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항마을 갯벌 > |
< 문항마을앞 긴섬 > | 남해갯벌은 서해의 갯벌과 달리 배후에 큰 강이 적어 입자가 비교적 큰 모래질이 섞인 갯벌으로서 바지락과 같은 조개류가 많이 잡힌다. 남해에 현존하는 갯벌은 33개소에 14,024㎢정도인데 창선면 동대만 일대가 가장 크다. 설천면을 지나 내리막을 내려가다 보면 왼쪽에 보이는 문항마을은 남해섬 갯벌의 대표격이다.
마을 앞에 멀리보이는 긴섬일대는 썰물이 되면 갯벌이 드러나 모래톱으로 연결되어 걸어들어갈수 있으며 이곳의 갯벌에서 게구멍같은 작은 구멍에 소금이나 된장을 물에 풀어 뿌려두면 그 된장국물 맛을 보려고 올라왔던 놈을 붓대롱으로 흔들어 '쏙' 하고 잡아올리는 쏙잡이는 이곳이 어촌체험관광마을로 지정되어 실시되는 갯벌체험중에 가장 재미있는 체험이다. 쏙은 모양이 새우와 가재의 중간쯤으로 구수하면서도 단맛이 있어 구어 먹거나 된장국에 넣어 먹기도 하고 튀김을 먹기도 한다.
이곳 옆의 고사마을은 음력 2월 초하루에 갯벌에서 우럭 같은 해산물을 캐어 가는 어촌축제도 열리고, 이곳에서 좀더 내려가면 있는 동도마 마을의 갯벌에는 갯벌과 함께 주변에 논이 있어 붉은부리갈매기ㆍ검은머리갈매기ㆍ노랑발도요ㆍ중부리도요ㆍ검은머리물때새 등의 새와 홍머리오리ㆍ비오리ㆍ흰죽지ㆍ청둥오리 같은 철새서식처로 유명하다. 고현면의 진목마을에는 진목갯벌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생태학습장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 진목 갯벌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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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항마을앞 긴섬 > |
남해 개발의 미래 서상 남해 스포츠 파크
설천을 돌아 19번 도로를 만나면 항상 갈등이다. 남해읍을 향해 갈 것이냐? 혹은 갈화리 해변을 따라 서면 서상리로 향할 것이냐? 그러나 무의미한 갈등이다. 왜냐하면 이번만 남해를 오는 것이 아니고 다음에 다시 온다고 생각하면 어디로 가느냐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오후에 해가 넘어갈 때는 서면 해안을 따라 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서면 서상리 까지의 해안도로는 전형적인 남해의 도로모습이다. 도로아래에 마을이 있고 마을 앞에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으며 멀리 여수시가 건너 보인다.
간간이 있는 오래된 큰 나무 아래의 평상에는 마을 노인들이 한가하게 구릿빛 건강함을 보이면서 인자한 미소로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남해가 장수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나이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하며 막상 실례를 무릅쓰고 나이를 묻게되면 그 많음에 놀라게 된다. 서상리의 매립지에는 군민과 관광객의 운동휴양시설과 국내외 축구팀과 야구팀의 겨울철 전지훈련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복합 스포츠 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을 보면 남해를 행정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남해사랑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그냥 상투적인 언어로 남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실질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남해사랑의 면을 볼 수 있고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을 볼 수 있어 좋다.
유럽의 선진국에 가면 중소도시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포츠 시설이지만 봄이 가장먼저 오고 겨울기온이 온화한 것을 이용하여 국가 전체의 행사와 잘 맞아떨어진 장소라 할 수 있다. 물론 개발은 파괴를 동반하지만 인간과 환경 친화적인 적절한 개발은 오히려 그 지역에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축구장ㆍ야구장ㆍ테니스장ㆍ수영장의 스포츠 시설과 공원ㆍ야외공연장ㆍ호텔 등의 편의시설 그리고 아천문화관과 향토역사관 등 아직은 미흡하지만 문화적인 면까지 갖추어진 하나의 복합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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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스포츠 파크 > |
< 남해 향토역사관 내부 > |
외부의 침입에 대한 저항과 흔적을 가진 임진성과 선구리의 해안동굴
서상리를 나와 덕월을 향하다 보면 언덕 위에 임진성이라는 안내 표지가 보인다. 습관처럼 길옆에 차를 대고 걸어서 올라가니 차로 성바로 앞까지 갈 수 있음을 확인 후에 힘들게 걸어왔음을 후회하지만 임진성에서 덕월리 앞 멀리 여수가 보이는 바다를 내려다 보면 이곳이 적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주요한 지점임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작은 산봉우리를 둘러싼 성은 잘 보존이 되어있으며 시간이 있으면 한번 성벽 위의 돌을 따라 걸어봄도 좋을 듯 하다. 남해는 고려 중엽부터 오랜세월동안 왜구의 침략과 약탈이 있어 이를 방어하기 위해 산성을 쌓았다.
<임진성에서 내려다본 덕월리 앞바다 > |
남해에는 모두 21개의 성이 섬전역에 축조되었다고 하니 왜구의 침탈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이중 복원을 거쳐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섬은 남면 임진성과 고현면의 대국산성이 대표적이다.
임진성은 상정상부에 높이 6m, 둘레 2000m로 작은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임진왜란때 왜적을 막기 위해서 쌓았다고 한다. 비교적 원형이 잘보전되어있으며 성안에는 집터와 무기고, 서당 등 여러 가지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성은 평산리로 향하는 길에서 보아도 전체적으로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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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산리로 향하는 길에서 본 정상부의 임진성 > |
< 임진성 입구 > |
사촌해수욕장의 방풍림과 모래사장을 내려보면서 언덕을 오르면 선구라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길에서 급경사의 내리막을 내려가 마을의 해안의 방파제를 지나 해변의 절벽을 돌아가면 일제시대 일본의 강요에 의해 파놓은 동굴을 볼 수 있다.
이런 동굴은 제주도의 성산 일출봉과 송악산 등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이곳에도 아픈 우리 역사의 현대사가 숨어있다.
이곳으로 가려면 마을 뒷산의 안테나 탑이 있는 곳에서 내려가는 방법도 있지만 위험하고 그냥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볼 수가 있다. 가는 도중의 길은 크게 위험하지는 않지만 조금도 방심하면 안 되는 해안의 절벽길이다.
높이 약 2m에서 3m정도의 폭을 가진 동굴을 들어가면 상당히 넓은 광장이 나타나며 동굴은 Y자 형태로 계속된다.
누군가 많이 왔다간 흔적이 있으며 촛불을 키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흔적도 있는데 이 동굴을 파면서 고생한 우리 조상들의 뜻을 기리면 몰라도 신앙의 대상으로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이 아닐까? 동굴 속에서 보면 여수로 들어가는 배가 한눈에 보이고 여수만과 광양만을 방어하는데 좋은 위치라고 생각된다.
돌아오니 온몸은 땀으로 젖었지만 방파제 옆에 군 초소가 있고 그 앞 바위에 깨어진 유리병을 바위에 붙여 누군가의 출입을 막으려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은 일제시대와 현재를 통해서 누군가를 방어하고 감시하려는 시설이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어 역사의 반복으로 생각하기에는 슬픈 생각이 든다. 당시 선구마을에는 100호를 넘었으며 석굴을 뚫는데 500~7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현대적인 설비가 없어 정과 망치, 곡괭이 등 단순한 기구를 가지고 밤낮 24시간 동원되었다고 한다.
본인은 1개만 확인해보았는데 남해 군지(郡誌)에 따르면 석굴의 흔적은 8개였으며 거의 완성된 석굴은 2개로 하나의 길이는 38m고 다른 하나는 16m정도이며 모두 완성되면 들어가는 구멍은 9개이고 안에 큰 광장을 만들어 요새화된 병영을 구축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 요새와 남면의 일본군 주둔은 건너편인 전남 돌산면에 일본군이 주둔한 것으로 보아 일본은 여수를 연합군의 상륙지점으로보고 이곳에 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선구해안의 자갈을 당시 일본은 여수로 실어가 여수 오동도 연육공사에 사용했다고 하니 이곳 선구는 우리역사의 한만은 부분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
< 일본군이 파놓은 해안 동굴 >
< 일본군이 파놓은 해안 동굴 >
< 동굴 속에서 본 여수만 >
< 선구리 마을, 왼쪽 끝 해안에 동굴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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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와 연결된 섬인 육계도가 있는 항촌
선구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마을이 항촌이다. 멀리 여수항과 하얀색의 높은 건물이 한눈에 보이고 여천공단을 향해 가는 거대한 배가 주변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선구와 향촌을 양쪽에 낀 작은 만은 참으로 아늑하고 남해다운 모습니다. 남해는 어디를 가나 아름답지만 특히 고현에서 가천까지의 서쪽 해안 길은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처갓집 같은 느낌을 받는 곳이다. 남해를 자전거로 여행하던 중 남상리 근처의 마을에서 그늘에 앉아 계신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남해에 처갓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시던 할머니 생각이 난다.
향촌도 그런 마을중의 하나로 작은 포구와 맑은 바다 그리고 아담한 방풍림이 있는 곳이다. 어디를 가나 그늘에 않아 있는 노인들이 지도를 가지고 두리번거리는 나를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어디로 가냐'무슨 일이냐' 는 호기심과 관심을 가져주시는 그들의 따뜻함에 어떻게 먼저 말을 건넬지 항상 걱정하는 나로서는 궁금함을 해결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주로 낚시꾼들이 많이 찾은 이 마을은 마을에서 보면 작은 산 한 개가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산을 넘어가면 다시 작은 산이 또 나타난다.
그 작은 섬은 밀 물때는 섬이 되었다가 썰물이 되면 육지와 연결되는 육계도(모래 등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 섬)화 된 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육계도를 목섬(項島) 또는 이의 음(音)을 다서 항도(項島)라고 부른다. 육계도의 모양이 마치 목과 같으므로 목섬 또는 항도라도 불린다. 항도(項島)라는 지명은 남해군, 완도군, 무안군, 화성군 등 각지에 많이 분포하는데 이곳도 항도로 불리며 마을 이름도 항촌이라고 한다. 그곳에 가려니 입구에서 주차비를 받으려는 아저씨가 말린다.
한참을 가야하고 위험하다고. 시간도 없고 다음에 다시 올 것이라는 생각을 위안 삼아 건너편 선구에서 찍은 사진으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다음에 여유를 가지고 다시 들리면 꼭 한번 걸어가 볼 생각이다. 선구에서 바라보면 확연하게 육지로 연결된 섬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육계도를 볼 때면 항상 음흉한 상상(?)을 해본다. 마음에 둔 여성과 저곳에 썰물 때 건너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밀물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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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촌의 육계도, 오른쪽의 섬이 항목이라 하는 육계도로 썰물이 되면 건너갈 수 있고 왼쪽의 마을이 항촌 > |
육지와 연결된 섬인 육계도가 있는 항촌
항촌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멀리 망망대해가 눈에 들어와 남해의 끝에 오고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곳곳에 예쁜 모양의 숙박시설이 들어서는데 왠지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것이 없이 그냥 적막한 바다와 해안의 모습이 더욱 좋은데.... 가천마을은 여름이었다. 푸른 바다와 녹색의 마을이 여름이 지나 가을로 향하는 길목에 유난히 비가 많이 온 여름이었지만 푸른 여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봄이 가장 먼저 상륙하는 마을로 이른봄에 각종 나물이 나서 사람의 미각을 돋군다고 하지만 여름이 가장 늦게 머물다 가는 느낌이었다.
마을을 내려다보는 도로에 내리면 작은 정류장과 암수바위로 가는 안내판이 보인다. 새로 정비를 잘해놓은 모습이다. 주변에 보이는 계단식 논은 사실 이 마을을 대표하는 풍경이며 경탄의 대상이 되는 풍경이지만 우리가 흔하게 보는 논의 풍경이라 그런지 오히려 암수바위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시선을 끈다. 다른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나도 우선 그 표지를 따라 급경사의 마을 골목길로 내려간다. 너무 급경사라 걷기도 힘든데 경운기는 잘도 지나가고 골목에는 차도 서있다. 도중의 큰 나무 밑 넓은 바위에서 따가운 햇살을 피해있던 노부부가 함께간 아들놈이 귀엽다며 말을 건넨다.
여유롭고 정겹다. 마을의 작은 집을 감싸고 있는 돌담들의 곡선을 따라 마을의 골목길이 미로처럼 달려간다. 바람이 많은 해안지역 특히 섬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담은 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하는 방풍(防風)의 역할을 하며 바람이 심한 지역은 지붕의 처마높이까지 올라가는데 이곳의 돌담은 중간정도의 높이에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왔음을 알 수 있는 풀과 이끼가 묻어난다.
이 마을도 개발과 현대화의 물결에 예외 없이 변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이런 돌담과 좁은 골목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이는 외양간, 왠지 균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집들이 옛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마을 가운데 비교적 넓은 공터 옆의 가게를 지나 아래로 밀리듯이 내려가면 할매 막걸리라는 간판을 단 작은 집이 보이고 이곳을 돌아서면 가천마을 가장 큰 자랑인 암수바위가 나타난다.
암수바위 앞에는 인근의 폐교된 학교에서 가져온 듯한 작은 걸상이 몇 개 놓여있어 이곳에 앉아 아래 해변과 먼바다를 바라보면 한없이 평화로와 보인다. 숫바위와 암바위는 남녀의 성기를 상징하는 자연석인데 높이 5.8m 둘레 2.5m의 숫바위는 중간에 돌출된 선이 있어 누가 보아도 상상이 되어 웃음만 나오게 하는 실감나는 모습이다. 이날도 한 무리의 40대 후반의 아주머니 관광객들은 도착하자마자 특유의 웃음으로 즐거워하며 숫바위를 끌어안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바위에 치성을 들이면 자식 없는 사람이 자식을 얻게 된다는데 그 아주머니들이 모두 자식을 다시 얻게된다면 어떻게 될까? 암바위는 숫바위에 비해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옆의 언덕에 기대어있는 높이 3.9m 둘레 2.3m의 자연석으로 아랫배가 불룩한 임산부의 몸뚱이를 닮았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아주면 그런것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관광객들은 모두 다시 길로 올라가 차에 오르고 떠나버린다. 이 마을에 와서 암수바위만 보고 떠나면 산비탈을 깍아 석축을 쌓고 어렵게 논을 일군 이곳사람들의 노력을 알 수 있을까? 가천마을은 바다를 끼고 있으나 해안이 절벽과 암초로 이루어지고 파도가 높아 배를 댈 수가 없어 일찍부터 육지의 땅을 일구어 왔다. 그러나 경사가 심하고 평지가 없기 때문에 농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남해사람 특유의 인내와 끈기로 계단식 논을 일구어 왔다.
다행히 설흘산에서 시작하여 마을을 감싸 흘러가는 하천의 유수량이 풍부하여 이곳 사람들은 남해의 다른 마을이 모두 그러하듯이 사람의 노동력만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논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나라처럼 비가 많이 오고 여름이 무더운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데 가장 적합한 농업의 방법이 논농사이다. 논농사를 하기 위해서는 다시 많은 사람이 필요하며 이 많은 사람을 먹이기 위해서는 다시 논농사를 해야하는 순환이 거듭된다. 이곳을 밭농사로 이용하면 힘이 덜 들고 만들기가 쉬울텐데 농업의 가장 발달된 단계인 논을 일구어낸 이곳사람들에게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108층의 논이 계단식으로 되어있다는데 나는 20층까지 세어보다 포기했다.
이 마을에 가면 논이 몇 층인지 한번 세어보는 것도 좋은 즐거움이다. 하천에서 내려오는 물을 작은 수로를 통해 논으로 가게한 후 위 논에서 아래 논으로 물이 떨어지게 하여 물을 대고 있었다. '옛날 한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보니 한배미(이곳에서 논을 세는 단위)가 모자라 아무리 찾아도 없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쓰고 왔던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논 한배미가 있어 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은데 큰 것은 300평에서 작은 것은 팔 벌리면 다 감싸쥘 정도로 작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다랑이(썩 좁고 작은 논배미)논이라하기도하고 사투리로 다랭이라고도 하며 이 마을을 다랭이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차고 맑은 물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해풍, 그리고 마을사람의 따뜻하고 순박한 부지런함이 담겨있는 이곳의 쌀은 다른 어떤 곳의 쌀보다 좋은 품질을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거 120가구가 있던 이곳은 지금 58가구에 164명이 살고있고 노인들이 대부분이라 마을 옆에 폐교되어 버려진 학교처럼 이곳도 우리농촌의 전형적인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마을은 환경부로부터 자연생태마을과 농촌진흥청으로부터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 받아 각종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있는데 농사체험으로는 각종 농산물 수확체험과 다랭이 만들기, 농사체험, 몽돌바닷가 산책, 짚공예, 쥐불놀이, 시골학교 운동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마을은 그냥 지나치는 마을이 아니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시는 민박집에 묵으면서 삶의 이야기도 듣고 각종 체험을 하면서 하루는 지내는 것이 제격이다. 이런 농촌의 개발이 현재 우리농어촌 마을의 개발모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이런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고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본인의 희망은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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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천마을의 돌담길 > |
< 다랭이 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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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랭이 논 > |
< 암수바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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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교된 학교 내부 > |
< 가천마을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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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천마을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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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얼굴 지족해협의 죽방렴(竹防簾)
2주만에 다시 찾아간 남해는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해안은 제방이 무너지고 집이 부서지는 등 많은 피해가 보였으며 사포마을은 배가 도로에 올라와 있었다. 그래도 TV를 통해본 다른 지역보다는 덜한것같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고 모두들 복구에 열심이었는데 이곳을 여행 삼아 둘러보는 필자는 그분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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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포마을의 수해현장 Ⅰ> |
< 사포마을의 수해현장 Ⅱ > |
창선대교 밑의 죽방렴은 처참했다. 모두 무너지고 바다에 박아놓은 항목은 쓰러지고 물살에 사라지고 설치한 그물은 흔적도 없었다. 주변 지족항에도 부서진 선박이 많았다.
남해를 대표하는 것은 남해대교도, 충무공이순장군의 유적도 아닌 이곳 죽방렴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망가져 안타깝고 빨리 복구하여 남해의 얼굴을 다시 찾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죽방렴은 독살(바닷가에 돌을 쌓아 밀물 때 물고기 들어온 후 썰물 때 가두어서 잡은 어업방법)과 함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어업방법의 하나이다. 과거 우리근해에 풍부한 어족자원이 많았을 때 우리 조상들은 자연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고기잡는 법을 생각해내었다. 죽방렴은 말 그대로 대나무로 발을 엮어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기가 들어올 때는 자유로우나 나가기가 힘들게 만든 일종의 함정그물이다.
약 500년전부터 행하여 졌다고 하는데 수심이 깊지 않고 조류가 빠른 곳에 길이가 5~10m정도의 참나무 말목을 수백개 박고 대나무 살로 엮어 만든 그물을 조류가 흐르는 방향과 거꾸로 해서 'V'자 형태로 만드는데 이것의 길이는 80여m이 이른다. 말뚝이 좁아지는 곳에 원통형의 대나무 발을 쳐놓으면 고기들이 말뚝을 피해 가다가 원통형의 대나무 통발에 고기가 모이게 되는데 불통이라고 불리는 이 통발은 물살에 의해 고기가 들어오는 입구가 저절로 여닫히게 되어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물이 빠지면 배를 타고 나가 그물을 치거나 뜰 채로 떠오면 되는 것이다.
예종 원년(1496)에 편찬된 ≪경상도 속찬 지리지≫의 남해현조에 "방전(防箭)에서 석수어ㆍ홍어ㆍ문어가 산출된다" 라고 적혀있는데 여기서 방전이 곧 죽방렴이다. 최근에는 참나무 대신 철제 H빔을 박아 놓은 곳이 많아 죽방렴이라고 하기에 무색하지만 아직도 이곳에서 잡히는 어류는 신선도가 뛰어나기 때문에 많은 값을 쳐주고 있다. 죽방렴을 설치하려면 바닷물의 깊이가 통나무 말뚝을 설치할 만큼 얕아야 하며 이곳처럼 폭이 좁은 해협을 이루고 물살의 속도도 빠르고 항상 일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조건을 잘 만족하는 곳이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이곳에서 잡히는 고기의 종류는 숭어ㆍ도다리ㆍ갈치ㆍ가자미ㆍ삼치ㆍ문어 등 다양하지만 가장 많이 잡히는 대표적인 어종은 멸치이다. 이곳은 물살이 세어 고기의 질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산 멸치를 그대로 떠오기 때문에 상처도 없고 잡은 후 바로 인근의 육지에서 삶아 가공처리 할 수 있기 때문에 타지역의 멸치와는 품질면에서 비교가 안된다. 주민들에 따르면 한창때 일반 멸치가 ㎏당 2~3만원 선이지만 이곳의 멸치는 12만원을 호가한다고 하니 멸치 한 마리에 2,000원정도 하는 셈으로 소고기 값보다 훨씬 비싼데 없어서 팔지 못 한다고 한다.
현재 죽방렴 한 개는 1억5천에서 2억에 거래가 된다고 하니 도시의 30평대 아파트 한 채 값에 육박한다. 죽방렴은 면허제로 운영되어 그 수가 줄거나 늘지는 않는데 약 23개가 있다고 하며 과거에 비해 고기는 적게 잡히는데 그 원인은 치어(稚魚)의 남획과 인근에 광양제철소와 여천만의 석유화학단지의 영향일거라고 주민들은 생각하고 있다.
물론 환경오염도 큰 역할을 하겠지만 우리나라 어민들이 연안에서 치어까지 싹쓸이하여 잡고있기 때문에 이곳뿐만 아니고 전 해역에서 현재 어획고가 감소하고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민들의 자성은 물론 정부의 철저한 지도가 있어야 하겠다. 하지만 이곳 역시 그냥 죽방렴만 쳐놓고 무한정 고기를 잡는 것은 아니고 수시로 말뚝을 고정시키고 그물을 정비하며 죽방렴에 붙은 조개류를 떼어 내어야 하니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작은 고기는 그대로 빠져나가고 큰고기만 잡아내면서 자연이 준 만큼만 잡아내는 이러한 어업방법은 첨단의 세계로 가고있는 요즘에는 어쩌면 한심해 보이고 보잘것없이 보일지라도 바다와 함께 공존하면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남해사람들의 품성과 지혜를 엿볼 수 있어 찾을 때마다 교훈이 된다. 남해군에서는 지족1리의 바닷가에 죽방렴까지 관람용 다리를 만들어 죽방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놓았지만 역시 이번 태풍때 다리아래 죽방렴이 망가져 빠른 보수가 필요하며 좀더 욕심을 낸다면 죽방렴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죽방렴을 골라 원형대로 잘 보존하면서 관광객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창선-삼천포 대교의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죽방렴이 있는 삼동면의 지족리는 현재 인구의 감소가 약간은 주춤하지만 앞으로 교통의 요지로서 또 남해관광의 또 다른 중심점으로 발전이 기대되며 이 지역의 변화를 좀더 치켜볼 필요가 있다. |
< 창선대교와 지족리 전경 >
< 창선대교밑의 죽방렴, 태풍의 피해로 많이 망가져 보수중 Ⅰ>
< 창선대교밑의 죽방렴, 태풍의 피해로 많이 망가져 보수중 Ⅱ>
< 창선대교밑의 죽방렴, 태풍의 피해로 많이 망가져 보수중 Ⅲ>
< 망가진 죽방렴 >
< 지족 1리의 관람용 죽방렴, 태풍으로 많이 훼손됨 > |
< 죽방렴의 구조 >
가인리 공룡발자국
창선대교를 건너 단항으로 향하다가 수산리에서 가인리로 가는 길은 포장은 되어있지만 오지의 느낌이 나는 남해에서도 가장 외딴 곳이다. 이곳도 예외 없이 태풍의 피해가 있어 큰길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약 200m를 걸어가니 공룡발자국을 알리는 안내판과 몇 개의 커다란 발자국이 있었다. 좁은 암반 위에 4종류 10여마리의 공룡발자국 100개가 찍혀있다고 하는데 태풍의 영향으로 돌들이 덮여있어 몇 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반도에 공룡이 등장했던 중생대에는 인접한 사천과 하동을 둘레로 하는 경상분지라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유추해보건데 호숫가에 공룡들이 다가왔다가 발자국이 찍힌 듯 한데 사실 이곳에 가보면 앞바다의 모습이 큰 호수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고, 주변 풍경의 조용함과 적막함에 산모퉁이를 돌아 거대한 공룡한마리가 다가올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이곳 공룡발자국이 나타난 지역은 1억1천만년전 백악기의 퇴적층이 나타나는 곳으로 남해의 다른 해안과 달리 바닥이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마치 빨래판처럼 부서진 암석조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곳에는 공룡발자국 외에 빗방울 흔적, 나무화석, 물결무늬 등 당시 상황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많다고 한다. 주변 도로는 포장이 되어있지만 큰길로 나오는 길은 현재 공사 중에 굴곡이 심하지만 남해의 또 다른 명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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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리 공룡발자국 지역 Ⅰ> |
< 가인리 공룡발자국 지역 Ⅱ> |
< 가인리 공룡발자국 지역 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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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리 공룡발자국 지역 Ⅳ> |
< 가인리 공룡발자국 지역 Ⅴ> |
< 가인리 공룡발자국 지역 Ⅵ> |
숲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물건리 방조어부림(防潮魚府林)
남해를 돌아보면 마을 앞 바다와 접하는 부분에 숲을 잘 가꾸어 놓은 곳이 많다. 특히 마을이름이 정말 특이해서 절대로 잊지 않을 마을인 물건리의 숲이 보존상태, 규모, 식생의 밀도면에서 으뜸이다. 이런 숲은 방풍(防風)의 기능을 하며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으로부터 주민과 농작물을 보호해주고, 방사(防沙)의 기능으로 바람에 의해 날아오는 모래를 막아주며, 방조(防潮)의 기능으로 거센 파도를 막아주고, 어유(魚遊)의 기능으로 고기들이 그늘과 녹색을 따라 고기가 모여드는 등 그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또한 평소에는 나무그늘이 휴식과 작업공간으로서 해안가 마을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마을 앞에 숲을 조성해놓고 잘 보존하면서 제사까지 지내오는데 일부지역에서 이 나무를 훼손시킨 후 많은 재앙이 닥쳤다고 한다. 이번 태풍에서는 남해의 마을이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덜한 것은 바로 이 방조림 덕분이며 특히 물건리는 남해안에서도 방조림의 덕택으로 피해가 거의 없다고 한다.
이 마을의 숲은 약 300년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매년 10월에 이 숲에서 마을사람들이 풍어를 비는 동제를 지낼 정도로 잘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어있다. 길이 1500m, 폭 30m의 이 숲에는 수령이 300년이 넘는 나무들이 모여있는데 느티나무ㆍ팽나무ㆍ상수리나무ㆍ참느릅나무ㆍ푸조나무ㆍ말채나무ㆍ이팝나무ㆍ아카시아나무ㆍ보리수ㆍ산딸나무ㆍ때죽나무ㆍ소태나무ㆍ동백ㆍ광대싸리ㆍ윤노리나무ㆍ병꽃나무ㆍ화살나무ㆍ모감주나무ㆍ쥐똥나무ㆍ누리장나무 등이 있으며 그사이에 인동ㆍ담쟁이ㆍ새머루ㆍ줄딸기ㆍ청미래덩굴ㆍ청가시덩굴ㆍ노박덩굴ㆍ마삭덩굴이 얽혀있다고 하는데 나무에 지식이 없는 본인으로서는 그냥 다양한 나무가 있다는 느낌만 받았다. 숲 앞에는 둥그런 몽돌로 된 해변이 있으나 태풍으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에 길가에 멸치액젖을 담은 그릇이 널려있어 들어가 물어보니 집에서 직접 재래식 방법으로 담가 판다는데 8리터 한 통에 2만원 정도의 가격을 하였는데 이 지역 사람들의 좋은 수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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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리 방조림 전경 Ⅰ> |
< 물건리 방조림 전경 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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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리 해안 > |
< 방조림 내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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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조림에서 바라본 물건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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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역개발의 모델 독일 마을
물건리를 마을 위 산 아래 이국적인 모습의 주거지가 조성되고 있다. 이번 여름에 유럽을 다녀온 필자로서는 단번에 유럽의 어느 마을 모습이라고 느껴져 올라가 보니 2층 건물의 유럽풍의 아름다운 집들이 놓여있었다. 입구의 집 배란다에 할머니로 보기에는 젊고 아주 세련된 분이 앉아있어 몇 가지 질문도 할겸 집에 들어가 보니 검소하고 잘 정돈된 집안이 유럽가정의 모습이었다.
이곳은 남해군이 3년전부터 조성하기 시작한 독일마을로 60~70년대 광부와 간호원으로 낯선 독일로 건너가 이제 노인이 된 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와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 남해군이 직접 기획 조성한 마을이다. 독일에서 20년 이상 근로자로 일했던 사람만 입주할 수 있으며, 입주하는 사람은 대지를 구입하고 주택을 자비로 건축해야 한다. 주택은 반드시 독일식으로 지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70여 가구가 입주를 신청한 상태로서 14세대가 입주해있다.
대부분 예순을 넘긴 노년층이며 영구 귀국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는 고국의 땅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고 남해군은 일본의 하우스텐보와 같은 관광지를 가지게 됨으로써 서로에게 좋은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이 마을 뒤에 예술인 마을도 조성한다고 하니 인근의 해오름예술촌과 함께 문화적인 주제를 가진 하나의 마을이 조성될 듯 하다.
할머니에 말에 의하면 수퍼마켓 등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에 대한 불편 외에는 만족스럽다고 하는데, 왜 고향에 돌아가지 않느냐는 물음에 35년 만에 돌아와 보니 너무도 고향이 달라져 있어 적응하기 어렵다고 했다. 어려운 시기에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고국의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그들에게 남해라면 편안한 여유를 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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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마을 Ⅰ> |
< 독일마을 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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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마을 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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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전진기지 미조항
미조항은 아름답다. 특히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는 무민사(武愍祠) 앞에서 바라보는 미조항은 그림 같다. 이런 아름다움에 어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하는 미조항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남해안의 섬에 있는 어항으로 과거에 발달하다가 현재는 현재 쇠퇴한 어항은 욕지도와 나로도 등이 대표적인데 남해의 미조항만은 과거의 번영이 그대로 남아있다.
미조항은 항구적인 조건을 잘 갖춘 천연의 어항으로 호도와 조도가 거친 남쪽의 파도를 막아주고, 남해바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에 인구 밀집지역인 여수 진주 통영 등이 인접해 좋은 소비지시장도 갖추었다.
남해바다는 연중 일정한 수온으로 다양한 어종이 있는 곳이며 많은 고기가 잡히는 곳인데 그 중심에 미조항이 있다.
미조항은 1486년(성종17년) 수군첨사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뒤에 일시 폐진 되었다가 1522년(중종17년)에 복구되었다는 역사가 말해주듯 조선시대에는 수군 기지가 있던 해상 방어의 요충지였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마치고 첫 출전한곳도 이곳 미조항이었다. |
<무민사에서 내려다본 미조북항>
< 최영장군 사당 무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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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조 북항 Ⅰ> |
< 미조 남항 > | 1920년대 일본인들이 어업전진기지로 개발하고부터 미조항은 남해군의 어업의 대표가 되었다.
미조항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는 북항은 주로 낚싯배와 유람선이 정박하는 곳이고 반대쪽 남항은 각종 수산물이 내려지는 어항으로 활어위판장과 건어물위판장이 들어서 있고 호도와 조도로 가는 일반 여객선인 갈매기호가 출발한다.
그사이에 어촌특유의 도시적인 색채의 마을이 조성되어있는데 제법 규모도 크고 구색도 잘 갖추어져있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만 해도 고등어와 전갱이가 주요 어종이었으나 지금은 해류의 변화로 멸치나 삼치, 장어,갈치가 주로 거래되는 중심항이 되었다. 570여 가구에 2200여명의 인구가 거주하며 연간 22억정도의 생산액을 올리고 있다.
1986년 4월1일 미조는 상주와 함께 면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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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조 북항 Ⅱ> |
< 미조 북항 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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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조 상록수림 > |
| 미조항 뒤로도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해안일주도로를 따라가면 팔랑마을 설리마을 처럼 이름도 예쁜 마을들이 깨끗한 백사장을 끼고 연이어 나타난다. 이 도로는 송정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백사장 설리마을을 지나 고개를 넘어가면 멀리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안과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송정해수욕장을 내려다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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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해수욕장 > |
< 송정해수욕장의 생태주차장 > |
국도3과 19호선의 출발지
한반도의 길은 모두 바다에서 시작된다. 삼면에 바다를 끼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곳 남해에도 의미 있는 도로 2개가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도로는 짝수는 동서방향 홀수는 남북방향으로 되어있는데, 3번 국도는 이곳 남해에서 출발해서 진주-산청-함양-거창-김천-문경-충주-이천-성남-서울-의정부-철원으로 연결되는 도로로서 목포에서 서울-문산-개성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와 함께 남북을 서울을 통해서 연결하는 한반도 도로의 척추가 되는 도로이다. 그 도로의 출발점이 바로 남해 미조면의 초전 3거리이다.
미조항으로 들어가는 19번 도로와 만나는 이곳은 작은 식당과 기념품 가계가 있는 마을이지만 이곳을 잊지 않고 3번 도로의 출발이라는 도로표지판을 써놓은 남해군의 세밀함이 돋보인다. 삼천포에서 창선까지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도로가 사실상 끊어져 어떤 이는 삼천포가 3번 도로의 출발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제 다리가 놓여져 연결성이 좋아졌고 언젠가 통일이 되면 이곳 남해까지 3번 국도를 따라 원산까지 자전거 여행을 해보리라.
남해 미조항에서 출발해서 하동-구례-장수-무주-영동-괴산-충주-원주까지 연결되는 19번 도로는 남해대교를 건너 섬진강을 따라 올라가는 도로이다. 이 도로는 미조항을 벗어나 최영 장군 사당 전에 19번 도로의 출발이라는 푯말이 있다.
3번 도로가 출발하고 19번 도로와 교차하는 초전마을은 바로 옆에 몽돌로 된 해변이 있는데 초전해변 혹은 삼정개 해변이라고 한다. 찾는 이는 거의 없지만 얕은 수심과 높은 수온을 해수욕하기 좋은 곳으로 이곳사람들은 삼정개의 파도는 선영이 잠들어 계시면서 구천에서 후손을 쉴새 없이 부르는 소리라고 한다.
미조항과 인근 주변의 초전리는 도로의 출발점으로 커다란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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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전3거리의 3번도로 시점 표지 Ⅰ> |
< 초전3거리의 3번도로 시점 표지 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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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전 3거리, 왼쪽이 미조항 방향 > |
< 초전 3거리에서 본 초전해변 > |
여성이 가장 좋아하는 상주해수욕장
우리나라 해안에서 모래질의 해수욕장이 가장 잘 발달한 곳은 동해안이다. 동쪽이 높은 지형을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급경사의 동해로 빠르게 하천의 물이 흘러 침식된 모래질의 토양을 해안까지 직접 운반함으로써 동해에는 전 해안에 걸쳐 모래질의 해안이 발달하였다.
반면 서해는 완만한 지형으로 하천의 유속이 느려 무거운 모래 질은 도중에 놓아두고 결국 미립질의 점토만 해안에 쌓아 놓는다.
따라서 서해안은 돌출된 해안에 파도작용에 의한 해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갯벌로 이루어져있다.
남해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 어느 해안의 해수욕장이 가장 좋으냐고 물으면 나는 남해안이라고 대답한다.
동해는 너무 단순하고 서해는 청결하지 못하지만 남해는 적당히 변화가 있으면서 깨끗한 바다가 인상적이다.
언젠가 어느 여성잡지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해수욕장에 대한 설문이 있었는데 1위가 남해 상주해수욕장이었다고 한다. 나는 항상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라는 물음을 상주해수욕장을 보기 전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맨 처음 상주해수욕장을 찾아와 보고는 단번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반월형을 완벽하게 그린 2㎞의 백사장, 고급 카페트 위를 걷는 느낌을 주는 0.3㎚이하의 고운 모래, 거친 바닷바람을 막다주는 울창한 송림, 그 뒤에 든든함을 주는 금산의 믿음직함, 의외로 따뜻한 수온, 해안에서 100m까지 2m내외의 얕은 수심과 조용한 파도, 그리고 맑은 물 등 가만히 이곳에 있으면 지극히 여성적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한여름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로 붐벼 그 느낌을 알기 어렵지만 피서철이 지난 상주해수욕장에 와보면 여성스러움을 느낄수 있다.
상주해수욕장은 한해 60만명이상이 찾은 곳으로 해수욕장 뒤에 병풍처럼 둘러친 금산과 함께 남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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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해수욕장 Ⅰ> |
< 상주해수욕장 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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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주해수욕장의 송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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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아닌 섬 금산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형승편에 남해를 '진도ㆍ거제와 함께 솔발처럼 우뚝한 것이 하늘 남쪽에 휼륭한 곳이다'라고 써놓았듯이 남해에는 최고봉인 망운산부터 금산ㆍ송등산ㆍ호구산ㆍ납산ㆍ응봉산 등 여러 산이 많이 있지만 가장 사람이 많이 찾고 사랑 받는 산은 금산이다. 금산은 인근에 상주해수욕장을 끼고 있고 최고 기도도량이라는 보리암을 끼고 있어 그런 것 같다. 금산으로 가는 길은 과거에 상주해수욕장에서 올라가는 등산로와 신전리에서 복곡저수리로 해서 차량으로 보리암 근처까지 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하지만 않다면 3시간30분 정도의 발품을 파는 것도 올라갔을 때 주는 만족감이 크다. 바다를 끼고있는 산은 올라갈 때 힘이 덜 든다. 그만큼 바다가 주는 청량감이 크다는 것이다. 금산에 올라서면 초승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과 앵강만의 노도, 미조항부근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남해에서는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산에 오를 때면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전설을 생각해 본다.
'본래 이름은 보광산이었는데 이성계가 큰 뜻을 품고 백두산과 지리산에 들어갔으나 산신이 받아주지 않자 이곳 보광산에 들어와 백일기도를 들이며 만일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 이산을 비단으로 둘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후 기도가 효험이 있었는지 조선왕조를 창업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이산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려고 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 한 신하가 비단으로 감싸기는 어려우니 차라리 이름을 비단 산(錦山)으로 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자 이를 받아들여 보광산의 이름을 금산을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도 금산의 삼불암 아래 그 옛날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태조기단이 남아있다.
나는 이 전설을 백성이 아닌 왕이 된자가 지은 이름이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아름답고 자랑할 만큼 좋은 산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금산에 오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보리암이다. 신라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절의 규모나 문화재는 별것이 없지만 절이 위치한 장소와 주변 경관은 그야말로 전국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절 앞에 서있는 고려 초에 세웠다는 삼층석탑과 최근에 세운 멀리 세존도를 바라보고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이 눈에 띤다.
많은 사람들이 올라갈 때마다 해수관음보살상앞에서 치성을 드린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와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치성을 드리면 효험을 본다는 이곳 보리암에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효험이 있는 절은 모두 바다를 끼고있는 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해수관음상에서 눈을 뒤로 돌리면 우뚝솟아있는 바위가 대장봉이다.
그곳부터 능선을 따라 형리암ㆍ농주암ㆍ화엄봉ㆍ일월봉ㆍ제석봉ㆍ상사바위 등이 차례로 보인다. 그러나 금산에서 꼭 챙겨보야할 것이 정상이 있는 봉수대이다. 과거 통신시설이 없었을 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적의 침입을 알렸던 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망의 종점은 한양이다.
금산 봉수대는 동래 다대포진에서 서울에 이르는 제2거선으로 최남단에 자리 잡아 남해원산과 미조항의 두개 산봉에 간봉을 가진 규모가 큰 봉수였으며 사천-진주-각산-단성-삼가-합천-지례-금산-황간-영동-옥천-회덕-문의-청주-진천-충주망이산-죽산-용인-관주 천임산을 거쳐 한성의 남산에 전달된다.
고려 명종때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서 축조되었다고 하며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교대로 근무했다고 하니 그 중요성을 알만하다. 높이 3.5m 둘레56m의 돌담으로 비교적 큰 규모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다. |
< 상주해수욕장에서 바라본 금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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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에서 바라보 상주해수욕장 > |
< 봉수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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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의 해수관음불 > |
< 보리암 3층석탑 > |
남해 12경
제1경 : 금산과 보리암 제2경 : 남해대교와 충렬사 제3경 : 상주해수욕장 제4경 : 창선교와 원시어업죽방렴 제5경 : 이충무공전물유허-이락사 제6경 : 가천암수바위와 남면해안 제7경 : 서포 김만중 유허-노도 제8경 : 송정해수욕장 제9경 : 망운산과 화방사 제10경 : 물건방조 어부림과 물미해안 제11경 : 호구산 용문사 제12경 : 창선-삼천포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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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특산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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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역이나 특별한 먹거리나 특산품이 있지만 본인은 여행중 먹는 부분에 관심이 많지 않아 남해를 여러 번 방문해서도 특별하게 소개할만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탑동시장의 작은 보리밥집의 3000원짜리 보리밥이 생각이 나는데 이곳에서는 남해군에서 소개한 책자에 나오는 특산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남해지방의 특산물은 모시(南紵), 유자(柚子), 치자(梔子), 비자(榧子), 마늘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남저(南紵)는 양과 질이 전국에서 이름났지만 지금은 화학섬유에 밀려 부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유자ㆍ치자ㆍ비자는 남해의 삼자(三子)라고 해서 이곳의 기후와 풍토와 알맞아 아무 곳에나 잘 자라고 품질도 좋아 농가소득증대에 큰 몫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생산량과 수요가 늘고 있다. 또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오염되지 않는 바다에서 피조개ㆍ새조개ㆍ바지락 등의 어패류와 멸치ㆍ삼치ㆍ우럭 등 각종 고기가 풍부히 잡히고 있다. 양자강 상류가 원산지인 유자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인 남해ㆍ거제ㆍ충무ㆍ고흥ㆍ강진ㆍ해남ㆍ장흥 등과 일본, 인도의 아샘지방에서 주로 생산된다. 연평균 기온 13~15℃이어야 하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강수량이 많은 곳이 적합하다.
남해는 이런 조건을 잘 갖춘 곳이다. 유자는 비타민C의 함유량이 많고 위장 기능의 강화와 해독제로 쓰며 껍질은 거담제와 건위제로 사용하고 유자차(柚子茶)와 유자청(柚子淸)으로 인기가 높고 향기가 좋아 관상용을 많이 쓰인다. 치자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자생하여왔던 식물로 추위에 약하고 따뜻한 기온에 잘되며 6월에 피는 백색의 꽃은 진한 향기가 있어 조경수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공해에 강한 습성이 있다. 10~11월에 따는 열매는 무공해 천연염료로서 공업용과 약용으로 쓰이고 1973년 12월 24일에 군화(郡花)로 지정되었다.
비자는 맛이 달고 떫으나 약으로 요충, 촌충의 제거와 치질을 낳게 하는 약용작용을 하며 목재는 특수용재로서 공예품이나 바둑판의 재료로 최상품을 인정받고 있다. 1979년 1월 27일 군목(郡木)을 지정되었다. 마늘은 이 지역에 소규모로 재배되어왔으나 타지역의 마늘보다 알이 굵고 독특한 매운맛으로 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고 1970년대 남해대교의 개통부터 경작규모가 확대되어 농가소득에 커다란 보탬이 되고 있다.
피조개는 다른 지역에서 꼬막, 털꼬막, 새꼬막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성장하면 120㎚정도의 크기가 된다. 청정해역인 남해 강진만의 피조개는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으며 대량생산을 위해 많은 양식을 하고 있어 생산량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피조개는 혈액을 맑게 하고 장수 및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수출도 꾸준하다. |
< 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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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자 Ⅰ> |
< 유자 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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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 Ⅰ> |
< 마늘 Ⅱ>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