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은 평택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월 9일 현덕면 기산리 옥녀봉에서도 전개되었다. 옥녀봉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안중, 현적지역의 천도교인들이었다. 이들은 다음 날 신왕리 고등산과 권관리 계두봉 시위까지 주도하여 평택지역 만세운동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다.
3월 10일에는 오성면 숙성리 뒷산, 양교리 오봉산, 청북면 현곡리 신포장터에서도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3월 11일에는 근대도시로 성장하던 경부선철도 평택역에서도 전개되었다. 평택역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평택시장의 미곡상 이도상과 목준상이었다. 이도상이 민중들을 선동하자 1천여 명에 가까운 군중이 운집하였다.
평택지역 만세시위는 3월 하순으로 갈수록 더욱 거세졌다.
3월 21일에는 천도교인들이 거주하였던 진위면 야막리와 봉남리 주민 500여 명이 박창훈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운동이 점점 격렬해지자 일제의 탄압도 더욱 거세졌다. 일제는 만세운동의 중심에 천도교인들이 있다고 판단하고는 닥치는 대로 천도교인들을 연행하여 손톱을 뽑거나 손가락을 자르는 고문을 실시하였다.
농촌지역의 만세운동은 4월 1일을 전후하여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평택지역도 4월 1일로 접어들면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만세운동이 점차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3월 31일에는 진위면 봉남리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주동자는 박성백, 최구홍이었는데, 이들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기층 민중들이었다.
4월 1일 평택지역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조직되었다. 이 날의 시위가 이전과 달랐던 것은 전 지역에서, 대규모 군중이, 조직적으로 시위를 하였다는 점이다. 시위 주동자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도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당시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4월 1일 밤 평택역 광장에 모인 군중은 3천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더구나 평택역광장에서 횃불을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자 사전에 밀약되었던 면(面) 단위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호응을 하였고, 팽성읍과 같이 일부지역에서는 군중들이 평택역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문화유적
-평택호 충헌탑
-3.1최초 기념비
거리:12km
도보여행난이도:(○●○○○)
소요시간:3시간30분
경로
평택여객터미날↔만호2리배수문↔신영1리마을회관↔신영2리마을회관↔장수리보건소↔왕자봉↔평택호버스종점
주요버스노선
갈때:평택지역↔평택 여객 터미널 810.
올때:평택호↔안중공용버스터미날 82-1
안중공용버스터미날(환승)↔평택행80.
평택 도보 여행 제12구간 지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