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고 김삿갓의 생애와 문학세계 & 난고문학관
김삿갓은 국문학사에 있어서 특이하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방랑시인이자 풍자시인이다. 또한 김삿갓처럼 전설화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희자된 시인은 거의 없다 할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해학과 풍자,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으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호방하면서도 소탈한 성격, 번뜩이는 기지와 결합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독특한 시세계를 이루게 하였다.
김삿갓은 그의 시가에서 당대의 암울한 현실에서 자기의 기개와 재능을 펼칠 수 없게 된 데 대한 비분강개의 정을 토로하고 불합리와 모순으로 충만한 세상에 대한 불평과 반감을 보여 주었다. 일련의 역사적 재제의 영사시편들과 우감자탄시(偶感自嘆詩)들은 이를 보여준다.
김삿갓은 대체로 청년시기에 중국고대의 '전국책', '연책', '사기' 등에서 취재하여 "섭정이 있은 후 이백년만에 진나라에 형가의 일이 있었다", "역수가의 작자는 장사이며 시인", "초나라는 굴원으로 울었다", "항우가 죽은 후 고제도 늙어 죽었다" 등 낭만주의적 경향의 많은 영사시를 썼다.
청년시기의 이러한 낭만주의 시편들에서 그는 굴원, 형가, 항우 등 고대의 이름난 충신, 영웅걸사들의 사적을 회고하면서 그에 기탁하여 당시의 혼탁한 세상에서 장한 뜻을 펼 수 없고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자신의 울분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의 이러한 비분강개의 정은 장기간의 방랑과정에, 특히 그 만년에 쓴 많은 우감자탄시들에서 더욱 강렬한 낭만적 색조를 띠고 표현되고 있다. 여러 종류의 '자탄', '자영', 시들, '난고평생시', 그리고 '고향생각', '넓은 여울을 지나며', '삿갓을 읊노라' 등은 그 주요작품들이다.
시 '자탄'에서 시인은 거문고와 책을 벗삼아 보낸 40년, 불공평한 세상에서 청운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삼천리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개탄과 자기 위안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난고평생시'는 시인의 한많은 한평생을 자서전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시에는 죽장망혜로 풍월행장의 빈주머니 하나 들고 박정한 세상의 온갖 학대와 모멸을 당하며 온 나라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한평생의 기박한 운명이 여실히 그려져 있으며 또한 그러한 역경 속에서 체험한 시인의 끝없는 한, 고독과 울분의 심경이 그대로 토로되고 있는 것이다.
김삿갓은 일생의 방랑과정에 사회 각 계층 인간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생활속에 깊이 침투하면서 양반과 평민,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 이 서로 대립되는 판이한 두 세계를 점차 발견하였으며 그들의 상이한 생활현실을 주의 깊게 통찰하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가에는 이 대립되는 두 세계의 인간들의 생활과 정신적 세계가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김삿갓은 우선 그의 많은 풍자시에서 양반들의 무위기생하는 기생충적 생활, 그들의 온갖 추태와 말기적 현상들을 기발한 풍자적 수법으로써 무자비하게 폭로비판하였다. '양반을 시비함', '온종일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나그네', '양반의 아들을 조롱함', '원생원', '농시', '훈장', '훈장을 훈계함' 등이 그러한 시들이다.
파격시 '양반을 시비함'에서 시인은 양반이라는 사족의 칭호에 의해 행세하고 뽐내며 세도 쓰는 자들을 사회적으로 아무 쓸모없는 가소로운 존재로 낙인하고 그들의 신분적 존엄을 완전히 부정하였으며 여지없이 풍자조소하였다.
그의 다른 풍자시 '온종일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나그네'에서는 양반들의 출세욕과 아첨, 허장성세를 풍자적 과정과 예리화의 수법으로 타메조소하였다. 이 시에서는 여름날에 당나라 가죽신에 두툼한 송나라식 버선을 신고 땅에 끌리는 두루마기를 입고 하늘을 가릴듯한 당나라식 부채를 들고서 새벽에 집을 나와 날 저물러서야 돌아가며 한두 권의 시서나 겨우 읽고서 시율이 어떠니 하고 뇌까리며 천금을 다 쓰고도 모자란다고 떠드는 양반행세객들의 거드럼과 방탕, 권세가 문앞에서 온종일 머리 숙여 굴종하다가도 시골서 고향사람이 오기만 하면 천하에 자기밖에 없노라 뽐내는 양반들의 출세욕과 아첨, 탐욕과 허장성세 등을 가차없이 폭로하고 날카롭게 풍자 조소하였다.
'양반아들을 조롱함'에서는 무서워할 주제에 글이나 읽는다고 뽐내는 양반자식들을 갓낳은 '원숭이새끼'로, 황혼에 연못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떼'로 조롱하였으며 민간에 널리 알려진 '원생원'과 '농시' 등 풍자시에서는 한자의 동음이어를 우리말의 표현에 재치있게 이용하여 양반토호들을 원숭이, 모기, 벼룩, 쥐, 파리, 까마귀 등에 비유하여 사회의 기생충적 존재로 낙인하였다.
이러한 풍자시들의 예봉은 직접적으로는 지방의 양반, 선비, 토호 등의 계층에 돌려졌지만 그것은 기실 사멸되어 가는 양반사회 전반에 걸친 존재들에 대한 증오와 풍자조소와 타매였던 것이다.
그밖에 '개성', '강좌수가 객을 쫓아내다', '인심도 박절하다', '자탄', '스무나무 아래서' 등의 시에서는 방랑의 여로에서 하룻밤의 숙식도 거절당하며 학대와 수모를 당하는 시인 자신의 구걸생활의 쓰라린 회포를 해학적으로 표현하면서 양반부호계층 인간들의 극단한 인색과 몰인정, 야박한 세상인심을 쓰다쓴 웃음속에 풍자하였다.
김삿갓은 이같이 양반 귀족사회의 온갖 말기적 부패상을 폭로 풍자하고 당시의 야박한 세상 인심을 풍유,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많은 시작품들속에서 지배계층의 착취 밑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운명을 동정하고 그들의 불평의 목소리도 대변하였다.
'비를 만나 촌집에서 자고서', '농가에서 자고서', '가난한 집', '무제', '노상에서 걸인의 시체를 보고' 등은 이 부류에 속하는 주요 작품들이다.
시 '비를 만나 촌집에서 자고서'에서 시인은 당시 농가의 쪼달리는 살림을 재현하였다. 다리를 펼 수 없는 정도로 좁은데다 쥐구멍으로 연기가 나서 그슬고 쑥창을 짚으로 막은, 어둠컴컴한 오막살이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도 집주인에게 그래도 의관만은 비에 젖지 않게 되었다고 사의를 표시하는 등 시에는 가난한 농민의 가식없는 후의에 감사하는 뜨거운 감정이 흐르고 있다.
시인은 '가난한 집'에서라는 시에서 반찬이란 고기 한 점 없는 나물뿐이고 땔나무도 없어 울타리를 뽑아 때며 밥그릇도 없어서 며느리가 시어머니하고 한그릇을 같이 써야 하며 심지어 입을 옷 조차 없어서 부자 간에 서로 바꿔 입고 나들이 할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생활 형편을 매우 진실하게 그렸다.
시인은 '노상에서 걸인의 시체를 보고'에서 노상에 쓰러진 한 걸인의 비참한 정경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아주 절절한 동정을 보내고 있다. 보잘것없은 ㅉ은 지팡이와 쌀 두어 되를 세상에 남기고 길가에 쓰러진 걸인의 시체에 파리떼만 달려들고 까마귀만 그의 혼을 조상하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 걸인의 가련한 신세를 그리면서 김립은 '한 삼태 흙을 가져다가 이 시체에 풍상이나 가려주라'고 하면서 최하층 민중들에 대한 깊은 동정을 표시하였다.
김삿갓은 가난한 민중들을 동정만 한 것이 아니라 '가난을 비난함', '가난한 사람' 등의 시에서는 빈부의 차이로 인한 불합리한 사회를 비판하면서 미래 사회에 대한 자기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가난을 비난함'이라는 시에서 가난이 곧 죄가 되는 당대 사회의 불합리를 비판하면서 빈부의 차 별이란 결코 하늘이 준 운명이 아니요, 사람의 처지란 변할 수 있는 것으로서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다같은 하늘아래의 인간이라는 인간평 등의 소박한 이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가난한 사람'에서는 산간벽촌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가난한 농민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함께 그들의 행복한 삶을 열망하였다.
김삿갓은 그의 시가에서 이조말의 근대적인 사회경제적 동향과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이 백성들에 게 미친 영향을 반영한 작품들도 썼는데 '대동난'과 같은 시는 대동미법으로 하여 더욱 심한 화난을 당하게 된 백성들의 고통을 보여주고 그들의 불평의 목소리를 대변하였으며 또한 '돈'과 같은 시에서는 천하를 주유하며 나라도 집도 흥성케하고 산 사람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화폐의 경제적 위력과 사회생활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황금만능의 새로운 경제적 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근대적인 경제적 동향을 민감하게 반영하였다.
김삿갓은 일생의 방랑과정에 조국의 명산대천과 자연풍물들을 민족적 긍지 가득 찬미한 서경시들을 써서 열렬한 향토애, 조국애의 감정을 노래하였다. 여러 종류의 '금강산시'들을 비롯하여 '묘향산', '구월산', '광한루에 올라', '부벽루', '안변에서 표연정에 올라', '넓은 여울을 지나며' 등은 그의 주요 작품이다.
이러한 서경시들은 시인의 자연에 대한 세련된 심미감과 섬세하고도 참신한 경물묘사의 우수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김삿갓은 조선말기 사회 각 계층의 인정세태, 남녀간의 애정윤리와 개성해방의 지향을 반영한 시들을 썼으며 기타 다양한 재제의 허다한 영물시와 동물시들을 썼다. 그는 실로 자기가 견문하고 체험한 모든 것을 시화할 줄 안 천재적인 시인이었다.
그는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사회생활, 변화무쌍한 자연계, 푸른하늘에 높이 날고 대지 위에 기어 다니는 크고 작은 모든 생명있는 물건들을 다 무심히 보지 않았으며 그것을 자기의 시창작의 세계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김삿갓 시가의 주요한 묘사대상은 자기 시대 각 계층 인간들의 사회생활, 특히 양반과 평민, 부자와 빈자 - 이 대립된 계층들의 현실생활이었으며 그의 시가의 사상적 주류를 이룬 것은 바야흐로 무너져 가는 봉건적 통치제도를 고수하고 시대조류를 거슬러 나가는 양반사회의 온갖 추태에 대한 가차없는 폭로와 비판, 풍자와 조소하였으며 고통받는 하층민의 운명에 대한 다함없는 동정, 그들의 불평에 대한 공명과 지지였다.
그의 시는 중국 한시의 다양한 격식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도 그 언어가 참신하고 평이하며 필치가 자유분방할 뿐만 아니라 기발한 풍자와 해학적이어서 민중에게 친숙하였다.
그는 묘사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보다 생동감있고 심각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비유, 비의(比擬), 과장, 상징 등에다 풍자적, 해학적 웃음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는 양반사회의 모든 부패하고 가증스러운 존재에 대해서는 극도로 과장되고 예리화된 풍자적 수법으로써 무자비하게 폭로 조소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그 풍자는 낡고 부패한 사회세력들에 대한 비판과 결부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금할 수 없는 쓰디쓴 웃음,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게 하였다.
재능있는 풍자시인으로서의 김삿갓 시가에서 웃음은 또한 사회의 비극적 현상들에 대한 묘사에서, 특히 하층민들의 눈물 겨운 생활처지에 대한 묘사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경우에 웃음은 주로 백성의 비참한 처지와 운명에 대한 다함없는 동정, 뜨거운 연민의 정과 연결되고 있다.
여로에 지친 나그네-시인에게 멀건 죽 한 사발밖에 대접 못하는 농민의 어려운 처지를 목격하였을 때 오히려 그 죽사발 안에 거꾸로 비친 청산을 구경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시인의 기발한 해학은 그 한 예이다.
김삿갓은 한자어에 우리말의 표현과 같은 특수한 작시기교로써 한시형식을 창조하였는 바 이것은 그의 시문학형식의 근대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즉 율시, 절구, 고시 등 전래의 한시형식에 의거하면서도 그 언어와 율조 등을 당시 조선 사람들의 근대적인 미학적 기호에 맞게 창조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스무나무 아래서', '원생원', '농시', 여러 종류의 소제시(訴題詩)들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어 우리말(구두어)를 재치있게 표현하기도 하고 한시의 칠언 형식에 3·4(또는 2·5조)와 같은 조선의 민족적인 시가율조를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4·4조에 의한 파격적인 한시형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자와 한글을 결합하는 시를 썼고 순수한 한글에 의한 언문시, 특히 해학적인 언문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의 파격적인 시형식들은 조선말기 민족시가 발전에서의 하나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삿갓의 주요한 시들에 대한 이상의 개략적인 분석을 통하여 시인 김삿갓의 사상은 초기에는 자기의 청운의 뜻을 이루지 못한데로부터 오는 울분을 토로하였다면 방랑생활 과정에서 사회현상에 대한 인식이 점차 심화됨에 따라서 멸망에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허장 성세하며 허례 허식에 빠진 양반사회를 신랄히 풍자조소하고 불합리한 사회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양반의 천대를 받으며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기층민중들을 동정하는 데로 발전하였으며 더 나아가 빈부의 차이가 없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염원하는 데로 이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삿갓의 시가는 그의 전설적인 생애와 함께 평민적이고 반봉건적인 사상, 기발한 풍자예술과 창 작기교등으로 하여 그의 생존 당시에서부터 민중속에서 민요처럼 널리 전파되고 애송되었다.
따라서 김삿갓은 조선말기의 가장 재능있는 민족적인 서정시인의 한사람이며 탁월한 풍자시인으로서 고전문학사의 마지막 시기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 스스로 김삿갓이라 부르니..> 김삿갓 그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그렇다면 김병연 그가 왜 김삿갓을 자처하고 한평생을 방랑했는가!!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구차할지 몰라도 상황설명이 꼭 필요하다. 1826년(순조 32년)에 김병연은 백일장을 보게 되었다. 백일장이란 초야(草野)에서 학문을 닦고있는 무명유생(無名儒生) 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단위로 글짓기대회를 하는 일종의 지방과거((地方科擧)와 같은 것이다. 이때 김병연의 나이는 갓스물, 자(字)는 성심((性深)이요, 호(號)는 난고(蘭皐)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 통달 하였다. 게다가 시재(詩才)가 남달리 특출하고 역사에 각별한 흥미를 느껴 오고 있었던 그는, 고금의 시서(詩書)와 사서(史書)를 닥치는 대로 섭렵(涉獵)해 왔기 때문에 모르는 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시 글공부만 좋아했을 뿐이지 공명심이나 출세욕같은데는 관심이 없었던 김병연이 이날 백일장을 보러 온 것은 홀어머니 이씨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늘날의 공무원시험 과도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는 다음과 같았다.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 論鄭嘉山忠節死 (논정가산충절사) 嘆金益淳罪通于天 (탄김익순죄통우천)> 이였다. 이 시제는 홍경래의 난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홍경래가 평안도 용강(龍岡)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순조 11년인 1811년 신미년(辛未年) 12월의 일이었다. 홍경래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고 자칭해 가면서 반란군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대는 가산(嘉山).박천(搏川)을 함락 시키면서 서울로 남진(南進)하였고, 다른 1대는 서북(西北)으로 진격하여 곽산(郭山). 정주(定州) . 선천(宣川) 등을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 석권(席捲)해 버렸다. 그 통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정 시(鄭蓍)는 반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가산 군수 정 시는 문관(文官)이면서도 그러했건만,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 김익순(金益淳)은 국가 안보의 중책을 맡고 있는 무관(武官)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싸우기는커녕 즉석에서 항복을 해버렸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시키고 나자, 김익순을 역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참형에 처해버렸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시제로 나오자 김병연은 평소부터 반란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가산 군수 정 시를 <천고의 빛나는 충신>이라고 존경해 왔던 반면에, 김익순을 <백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만고의 비겁자>라고 몹시 경멸해 오고 있었다. [비겁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김익순이란 놈을 백일장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마침 잘 만났다. 오늘은 나의 필봉(筆鋒)을 마음껏 휘둘러, 비겁하기 짝없는 네 놈을 뼈도 못 추리게 탄핵(彈劾)하리라.] 하며 거침없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하라고 불려 오던 너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은 문관이면서도 충성을 다하지 않았더냐 너는 적에게 항복한 한나라의 이 릉(李陵) 같은 놈이요 정 시의 공명은 송나라의 악비(岳飛)처럼 길이 빛나리로다. 曰爾世臣金益淳 (왈이세신김익순) 鄭公不過卿大夫 (정공불과경대부) 將軍桃李 西落 (장군도이롱서락) 烈士功名圖未高 (열사공명도미고) 시인은 이런 일에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칼을 어루만지며 물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자고로 대장이 지켜 오는 큰 고을이기에 가산보다도 의를 앞서 가며 지켜야 할 곳이 아니었더냐. 詩人到此亦慷慨 (시인도차역강개) 撫劍悲歌秋水 (무검비가추수사) 宣川自古大將邑 (선천자고대장읍) 北諸嘉山先守義 (북제가산선수의) 두 사람은 다 같은 조정의 신하였는데 죽어서야 할 곳에서 어찌 두 마음을 먹었더란 말이냐 태평 성대와 다름없던 신미년 그 해에 관서에서 풍운이 일었으니 그 무슨 변괴이더냐 淸朝共作一王臣 (청조공작일왕신) 死地寧爲二心子 (사지영위이심자) 升平日月歲辛未 (승평일월세신미) 風雨西關何變有 (풍우서관하변유) 주 나라를 존중하려고 충신 노중련이 나왔고, 한 나라를 돕기 위해서는 제갈량이 나왔듯이 우리나라에도 만고의 충신 정가산이 나와 풍진을 맨손으로 막아 내려다 죽지 않았더냐 尊周孰非魯仲連 (존주숙비노중련) 輔漢人多諸募亮 (보한인다제모양) 同朝寯臣鄭忠臣 (동조준신정충신) 抵掌風塵立節死 (저장풍진립절사) 전사한 충신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 갈 것이니 그 이름은 가을 하늘에 태양처럼 빛날 것이요, 혼백은 남묘로 돌아가 악비와 같이 살게 될 것이고 뼈는 서산에 묻혀 백이 숙제와 이웃하게 될 것이로다. 嘉陸老吏揭名族 (가륙노리게명족) 生色秋天白日下 (생색추천백일하) 魂歸南畝件岳飛 (혼귀남무건악비) 骨埋西山傍伯夷 (골매서산방백이)
서북으로부터 개탄할 소식이 들려 오기에 어느 가문에서 나온 벼슬아치냐고 물어 보았더니 문벌은 명성이 드높은 장동 김씨요 항렬은 장안에서 소문난 순(淳)자 돌림이 아니더냐. 西來消息慨然多 (서래소식개연다) 問是誰家食綠客 (문시수가식록객) 家聲壯洞甲族金 (가성장동갑족김) 名字長安行列淳 (명자장안행열순) 가문이 훌륭하여 성은도 두터웠을 것이니 백만 대적 앞에서도 의를 굽히지 않았어야 할 것을 청천강물에 고이 씻긴 병마는 어디다 두고 철옹산에 간직했던 궁시(弓矢)는 어떻게 했단 말이냐. 家門如許聖恩重 (가문여허성은중) 百萬兵前義不下 (백만병전의불하) 淸川江水洗兵波 (청천강수세병파) 鐵甕山樹掛弓枝 (철옹산수괘궁지) 임금님 앞에 꿇어 엎드리던 바로 그 무릎으로 서북 흉적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으니 너는 죽어 황촌에도 못 갈 놈이라 저승에는 선대왕이 계실 것이니 말이다. 吾王庭下進退背 (오왕정하진퇴배) 背向西域凶賊股 (배향서역흉적고) 魂飛莫向九泉去 (혼비막향구천거) 地下猶存先代王 (지하유존선대왕)
너는 임금도 배반하고 조상도 배반한 놈 한 번 죽어서는 너무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 춘추의 필법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치욕적인 이 사실은 역사에 남겨 길이 전해야 하리라. 忘君是日又忘親 (망군시일우망친) 一死猶輕萬死宜 (일사유경만사의) 春秋筆法爾知否 (춘추필법지부) 此事流傳東國史 (차사유전동국사) 이런 시로 그는 장원급제를 했고 술한잔 걸쭉하게 걸치고 행복한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그의 홀어머니에게 자랑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웬 일인가! 이야기를 듣는 도중 어머니가 갑자기 기절하시고 이내 정신을 차리시며 이제까지 숨겨오셨던 그의 집안 내력을 눈물 흘리시며 가르쳐 주시니 바로 김익순이라는 사람이 김병연의 할아버지이였던 것이다. 반역자는 3대를 멸하라는 그때의 법에 따라 마땅히 김병연도 죽어야 했지만 어머니가 김병연을 데리고 깊은 곳에 숨어사시고 때로는 도망도 다니시면서 김병연의 공부 뒷바라지를 하신 것이다. 언젠가는 그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집안내력을 숨겨왔는데 오늘과 같은 일이 터지고야 만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장원급제를 하였으니 그것도 반역자의 후손으로 말이다. 뒤에 어머님이 말씀해주시길. 그의 할아버지는 술취해 주무시고 계시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히신 것이였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반항하실 틈도 없으신 것이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 말에 김병연은 스스로를 용소하지 못하고 죽을 생각도 하며 울기도 하다가 문득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고 그의 아내와 이제 낳은 지 얼마안되는 아이와 김병연만 바라보며 한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와 가슴아픈 눈물을 뒤로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으니. (앞으로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는 죄인이니 삿갓을 쓰도록 하며 이름도 김병연을 지우고 김삿갓으로 스스로 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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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시인으로서의 김삿갓의 시 세계
김삿갓은 한평생 방랑을 통해 참으로 많은 글을 전국 방방곡곡에 남겼다. 위로는 강계, 금강산 뿐 아니라 아래로는 여산, 지리산, 동북까지 끝없는 방랑의 길이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시가 쏟아졌고, 그의 숨결이 닿은 곳마다 해학이 넘쳐 흘렀다. 그는 세상을 환히 알고 있었다. 거들먹거리는 양반의 모습, 거짓에 찬 훈장의 몰골, 정에 굶주린 기생,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민, 수탈을 일삼는 벼슬아치 등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 가식과 위선이었다.
이런 현실을 보며 그가 쓴 시는 단순히 풍자와 해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고 민중과 벗하며, 한문을 한국화하고 한시의 정형을 깨부순 것이었다. 당시 한시를 짓는 사람들은 문자를 맞추고 글자의 고저를 따졌다. 그래야만 시의 격이 높고 품위를 지킨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이런 것을 거부했다. 그의 시가 기본적인 한시의 형식을 빌고 운자를 달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외형에 불과했으니, 그가 다룬 시의 주제는 인간의 모든 일이었고, 시어는 더러운 것, 아니꼬운 것, 뒤틀린 것, 그리고 우리말의 속어나 비어가 질펀하게 깔려있는 것이다.
한 농부의 처가 죽어 그에게 부고를 써달라고 하자 그는 '유유화화(柳柳花花)'라고 써주었다고 한다. '버들버들하다가 꼿꼿해졌다'는 뜻이다.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현한 것이요, 그 되지 못하게 한자로 쓰는 부고가 못마땅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또 그가 개성에 갔을 때 어느 집 앞에서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자, 집주인이 나무가 없어 못재워 준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시를 썼다.
읍명개성하폐문(邑名開城何閉門) - 고을 이름이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
산명송악개무신(山名松岳豈無薪) - 산 이름이 송악인데 어찌 나무가 없다하는가
위 시를 단순한 해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문을 대중화한 것이다. 이 아니 놀라운 솜씨인가? 김삿갓은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 도전하고 민중과 함께 숨쉬며 탈속한 '참여시인'이었고 '민중시인'이었다 할 수 있다.
김삿갓은 왜 세상을 떠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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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사에는 소위 기인(奇人)으로 평가받는 인물들이 많다. 세조의 찬탈에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김시습, 선조때 예조정랑까지 지냈다가 당파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낸 임제, 순조때 풍자와 해학으로 위선된 세상을 시로 표현한 김삿갓 등이 그들이다.
특히 조선의 기인들 중에서도 김삿갓은 서민적인 이미지와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로 가장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삿갓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더욱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방랑 시인’의 배경은 수수께끼에 싸여있다고 할 수 있다. 기인 김삿갓에 대해 알아봤다.
김삿갓의 출생배경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炳淵)이고,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해서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라고 흔히 부른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익순(益淳)이고, 아버지는 안근(安根)으로 그는 안근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19세기에 조정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안동 김씨로 그가 태어날 적에 그의 집안은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 익순은 높은 벼슬을 하다가 그가 다섯 살 적에 평안도의 선천(宣川) 부사로 나가 있었다. 그런데 1811년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면서 그의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조선의 19세기초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로 국가경제가 무너지면서 농토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이때 양반출신인 홍경래는 서북인들에 대한 차별과 김씨 세도정권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
홍경래의 농민군은 거병한지 10일만에 가산, 곽산, 정주, 선천 등 이북의 10여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항복을 않고 저항하다가 칼을 맞아 죽었는데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은 몸을 재빨리 피했다.
그후 김익순은 농민군에게 잡혀 직함을 받기도 하고 또 농민군의 참모 김창시가 잡혔을 적에 그 목을 천냥에 사서 조정에 바쳐 공을 위장하려 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참형을 당했다. 그 뒤 정시는 만고의 충신이 된 반면 김익순은 비열한 인물로 회자되었다.
김삿갓의 집안은 폐가가 될 수밖에 없었고 역적의 자손이어서 익순의 자식, 손자들이 법에 따라 죽임을 당하거나 종이 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들의 비호로 죄는 김익순에게만 묻고 손자들은 종이 되는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아들 병하와 작은 아들 병연은 종을 딸려 황해도 곡산으로 가서 숨어살게 하고, 자신은 막내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광주의 촌구석에서 살았다.
과거시험과 방랑 결행
세상이 잠잠해진 뒤 김삿갓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모으고 집안 내력을 숨긴 채 살았다. 남달리 영민한 둘째 아들 병연은 서당에 다니게 했다. 어린 병연은 열심히 공부를 했고, 스무살이 되자 출세를 위해 지방 향시(鄕試)에 나갔다.
시제(詩題)는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한다”였다. 병연은 자신있게 시를 써내려 갔다. 시의 끝구절은 다음과 같이 매듭지었다. “임금을 잃은 이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 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네 아느냐 모르느냐 이 일을 우리 역사에 길이 전하리”
그는 장원급제를 했고 어머니에게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옛일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병연은 방황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물두살적에 장가를 들게했다. 그러나 병연은 아들을 본 뒤에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가족과 이별을 하였다.
삿갓쓰고 세상 풍자
병연은 집을 나온 뒤 삿갓을 쓰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삿갓을 쓰고 시로 세상을 풍자하면서도 신분을 밝히지 않아 김삿갓으로 통했다. 그는 형 병하가 세상을 떠나자 2년만에 집에 들렀다. 잠시 집에 머무르는 동안 둘째아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집을 떠났다. 어머니와 아내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그후 그는 발걸음이 안닿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을 떠돌았다. 북으로는 강계, 평양, 금강산 아래로는 여산, 지리산 자락까지 방랑을 계속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거침없이 시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양반의 허세와 벼슬아치들의 탐학,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민, 정이 그리운 기생 등을 대하며 위선에 찬 현실과 고단한 인생들을 목격했다. 그는 그러한 현실을 풍자와 해학으로 일삼았다.
그는 술만 보면 통음을 했다. 실컷 마시고는 시가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형식을 깨고 거침없이 시를 지었다. 또 늘 겹옷을 입고 살았는데 누가 따뜻이 재워주고 먹여주고 솜옷을 지어주면 마다않고 입었다가 헐벗은 사람을 만나면 솜옷을 벗어주고 다시 남루한 겹옷을 걸쳤다고 한다. 그는 57세때 전라도 땅 이름없는 곳에서 숨졌다. 그의 둘째 아들이 시신을 거두어 영월땅 태백산 기슭에 묻어주었다.
김삿갓의 참모습
김삿갓의 삶은 그 자체가 시였다. 그는 위선에 찬 양반세계를 해학으로 풍자하며 양반의 형식적이고 음풍농월식의 시를 거부했다. 그의 시에는 더럽고, 뒤틀리고, 아니꼬운 서민들의 속내들이 편편이 배어 있다. 김삿갓과 관련한 일화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한다. 김삿갓이 개성에 갔을 적에 어느 집 문앞에서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자, 그 집주인은 문을 닫아걸고 나무가 없어 못재워 준다고 했다. 이때 그가 지은 시는 이러했다.
“고을이름은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邑名開城何閉門) 산이름은 송악인데 어찌 나무가 없다 하느냐.(山名松岳豈無薪)”
거들먹거리는 양반을 풍자적으로 희롱하는 문재(文才)가 번득이는 장면이다.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김삿갓에 대해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고 민중과 벗하며, 한문을 한국화하고 한시의 정형을 깨부순 시인”이라고 평했다.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 도전하고 민중과 함께 숨쉬며 탈속한 ‘참여시인’이었고, ‘민중시인’이었다는 것이다.
민중 시인으로서의 김삿갓의 시 세계
김삿갓은 한평생 방랑을 통해 참으로 많은 글을 전국 방방곡곡에 남겼다. 위로는 강계, 금강산 뿐 아니라 아래로는 여산, 지리산, 동북까지 끝없는 방랑의 길이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시가 쏟아졌고, 그의 숨결이 닿은 곳마다 해학이 넘쳐 흘렀다. 그는 세상을 환히 알고 있었다. 거들먹거리는 양반의 모습, 거짓에 찬 훈장의 몰골, 정에 굶주린 기생, 굶주림에 허덕이는 농민, 수탈을 일삼는 벼슬아치 등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 가식과 위선이었다.
이런 현실을 보며 그가 쓴 시는 단순히 풍자와 해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고 민중과 벗하며, 한문을 한국화하고 한시의 정형을 깨부순 것이었다. 당시 한시를 짓는 사람들은 문자를 맞추고 글자의 고저를 따졌다. 그래야만 시의 격이 높고 품위를 지킨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이런 것을 거부했다. 그의 시가 기본적인 한시의 형식을 빌고 운자를 달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외형에 불과했으니, 그가 다룬 시의 주제는 인간의 모든 일이었고, 시어는 더러운 것, 아니꼬운 것, 뒤틀린 것, 그리고 우리말의 속어나 비어가 질펀하게 깔려있는 것이다.
한 농부의 처가 죽어 그에게 부고를 써달라고 하자 그는 '유유화화(柳柳花花)'라고 써주었다고 한다. '버들버들하다가 꼿꼿해졌다'는 뜻이다.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현한 것이요, 그 되지 못하게 한자로 쓰는 부고가 못마땅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또 그가 개성에 갔을 때 어느 집 앞에서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자, 집주인이 나무가 없어 못재워 준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시를 썼다.
읍명개성하폐문(邑名開城何閉門) - 고을 이름이 개성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며
산명송악개무신(山名松岳豈無薪) - 산 이름이 송악인데 어찌 나무가 없다하는가
위 시를 단순한 해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문을 대중화한 것이다. 이 아니 놀라운 솜씨인가? 김삿갓은 삐뚤어진 세상을 농락하고 기성 권위에 도전하고 민중과 함께 숨쉬며 탈속한 '참여시인'이었고 '민중시인'이었다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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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드리며 새삼 읽어보니 감회가 깊군요 회장님 가내두루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다음부터 김삿갓시 한편씩 올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