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내일은 몇 시에 출근 할까요?”
“이군 내일은 식전에 나온나!”
“이군 내일은 좀 일찍 나온나!”
“이군 내일은 아침 먹고 일찍 나온나!”
“이군 내일은 아침 먹고 나온나!”
“이군 내일은 아침 먹고 천천히 나온나!”
“도대체 전 몇 시 몇 분에 나와야 되죠... 여러분?”
처음에 제가 출근 시간 때문에 얼마나 헷갈렸는지...
대다수 도시 출신 사람들처럼... 제게도 항상 정확한 출근 시간만이 존재했기에...
앞뒤 상황 설명도 없이 이야기를 하시는 사장님의 의도를 알아 체기 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
육묘장이란 곳은 말 그대로 모를 키우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 상황과 맞물려... 각 가정에서 모를 키우기보다는... 모를 공급하는 육묘장에서 구입해 벼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전에 저는 모를 키워서 모내기를 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도 잘 몰랐습니다...
2.
참!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이곳 육묘장에서 “이군”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리고 제 호칭그대로 제가 육묘장에서 ‘일군’이 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기란 무척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처음으로 경험한 농사일임과 동시에... 조금 전에 언급한 출근 시간에 대한 ‘사례’처럼 낯선 환경과 문화를 접하였기에... 이해가 늦은 경우가 무척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꾼으로 열심히 일했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는 있습니다(참으로 오랜만에 자부심이 생기네요!)...
3.
육묘장에서 제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씨앗일 때는-대다한 전문가를 제외한-그 누구도 그 것의 품종을 알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심지어 씨앗이 발아해서 한 달 이상을 성장해도... 외관상 뚜렷이 차이 나는 품종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품종여하에 상관없이... 비닐하우스에서 물을 줄때는 모든 모에게 공평하게 물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사람을 대할 때-특히 아이들-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가 성장하는 과정이 우리 사람의 성장과정과 유사하다는 개인적 생각도 들었습니다...(문득 전체구조는 세부 구조의 끊임없는 반복 즉 자기 유사성이라는 물리학의 프랙탈 이론이 여기에서도 또 떠오르네요... 자연을 닮은 사람들...아니... 자연을 닮고 싶은 사람들인가?)
4.
자연을 닮은 저는(?) 당연히 처음에는 실수를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군 답 안나온다...”라는 약간 심한 말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들은 적이 참 많았었기에... 그 탓을 그 누구에게도 전가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존심이 상당히 상한 전 곰곰이 생각하기를 시작했고... 때마침 읽고 있던 책에서 복잡한 머릿속의 교통을 말끔히 정리해주는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홀이라는 문화인류학자가 지은 네 권의 시리즈가 제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5.
문득 홀의 저서에 대해서 소개하고 싶어지네요...
혹시라도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침묵의 언어』,『문화를 넘어서』,『생명의 춤』,『숨겨진 차원』등 총 네 권으로 구성된 홀의 책은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저처럼 어렵다는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읽다가 포기하기를 여러 차례 했었거든요...
그런데 시골에서의 경험과 육묘장에서의 뜻밖의 여러 경험 덕분에 홀의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저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6.
홀의 저서의 핵심은 문화, 인류, 개인, 우리, 시간, 공간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맥락에 관한 이야기라는 개인적 생각이 듭니다...
고맥락과 저맥락...
기층문화, 이차적 수준의 문화, 삼차적 수준의 외재적․명시적 문화...
모노크록릭한 시간과 폴리크로릭한 시간...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조상태...
문화적응... 프로세믹스... 행동연쇄...
그리고 홀이 여러 번 강조하는 연장의 전이(extension transference)...등등
홀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거나 단어들을 조합시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 모든 것들이 어떤 맥락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제가 읽은 여러 종류의 책에서 홀의 이야기가 인용되는 것을 수없이 읽었는데... 역시나 그 책들의 맥락에서 홀의 이야기가 적적히 인용되었던 것 같네요!)
7.
“이군 내일은 식전에 나온나!”
-모내기가 한창 바쁠 때... 보통 아침 5시에서 6시 사이
“이군 내일은 좀 일찍 나온나!”
-파종할 때나, 비닐하우스에서 논으로 모판을 낼 때...보통 6시에서 7시 사이
“이군 내일은 아침 먹고 일찍 나온나!”
-곧 있을 바쁜 일을 미리 준비할 때...보통 7시에서 8시 사이
“이군 내일은 아침 먹고 나온나!”
-평소 때...보통 8시에서 9시 사이
“이군 내일은 아침 먹고 천천히 나온나!”
-그리 바쁜 일이 없을 때... 보통 9시에서 10시 사이
육묘장에서 일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전 이곳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 문장의 맥락을 위의 이야기처럼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맥락을 파악한 저는 비밀스런 사실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물론 시골 분들에게는 공공연한 이야기이지만-혼자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상황-시․공간-에 따라서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처럼 피부 깊숙이 느낀 것은 실로 오래간만의 일이였습니다...
8.
육묘장이 한가할 때는 가끔씩 사장님이 함께 운영하시는 우사에서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읽은 데즈먼드 모리스의 『인간 동물원』이란 책에서의 이야기들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들을... 소들의 행동을 보고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일했던 우사는 황소 즉 수놈들만을 키우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했던 초기에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종종 소 한 마리가 발기하여 다른 소의 엉덩이에 성행위를 하려는 모습이 관찰되어졌고, 저는 당연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수놈들만 키운다는 이야기는 제게 충격 아닌 충격을 주었습니다...
모리스의 책에서처럼 동물원에 갇혀 지내는 동물들의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제 눈앞에서 관찰하였다는 사실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같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도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저는 동성애 자체에 편견을 가지고 있기에... 아니 더 큰 맥락에서 성 자체에 편견을 가지고 있기에...
9.
육묘장 일을 마치는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소 우리 근처에 소들이 먹을 볏짚을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때마침 어린 송아지 두 마리를 지인에게서 구입해서 가져오시는 사장님의 모습이 보여 졌습니다...
전 당연히 사장님이 가지고 오신 송아지 두 마리가 비교적 작은 송아지들이 있는 소 우리로 곧장 들어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그 송아지들을... 따로 관리 하시는 사장님의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 되었습니다...
“이군! 소들도 심하게 텃세를 해... 며칠 후에 송아지 몇 마리 더 사서... 이 두 마리와 함께 한꺼번에 빈 우리에 같이 넣을 꺼내!”
사장님에게 그 이유를 듣고, 곧 제 호기심은 풀렸지만... 또 다른 호기심이 발동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송아지들도 텃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다시 자기 닮은 이라는 프랙탈 이론과 함께... 도리 사생들이 종종 보여주는 텃세-기득권에 대한 이상한 관념-가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인류 전체-심지어 평화와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 집단에서도 조차 가장 심한-가 내집단과 외집단에 대한 이상한 텃세가 유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역사는-우리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음에도 - 같은 오류를 반복할까?"
10.
얼마 전까지 일했던 공장에서의 일과는 주, 야 2교대 시스템 이었습니다(2시간 일하고 10분 휴식, 2시간 일하고 1시간 주어지는 점심시간, 또 2시간 일하고 10분 휴식 그리고 2시간 일하고 30분의 저녁시간... 마지막 2시간 일하고 퇴근...혹 학창시절의 시간표와 비슷하다는 생각은 드시지 않으세요?)
산업혁명과 프로이센(독일)에서 함께 기여한 지금의 공장제도와 학교제도... 그리고 대다수 가 비슷하게 돌아가는 우리 문화의 시스템들...
그런데 농사일만큼은 이런 시스템을 벗어나... 자연의 시스템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이것이 농사일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것을 알기란 무척 쉬운 일이었습니다.
이번에 경험한 육묘장에서의 일이... 직업으로 따져 스물 몇 번째인지... 서른 몇 번째인지 이제 헤아리기도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공장이라는 감옥을 금방 탈출하여 시작한 육묘장에서의 2개월은 무척 즐거웠고, 그 이상의 의미를 제게 남겨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6월 10일 두 번째이자... 마지막 월급인 100만원을 받았습니다...
공장에서 일했으면 물론 이번 달이 보너스 달이였기에 상여금을 포함해 2배가 훨씬 넘는 돈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이 지금껏 제 방향을 바꾸는데 대한 가장 큰 갈등요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통장에는 들어있지 않은 자연의 엄청난 상여금을 받았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함이 마음속에 남겨져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키운 모가 올 여름에 지나갈 태풍을 잘 견디어 튼튼한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