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비공개 입니다
21 - 수령 2700년된 차나무
운남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용권님으로 부터 전해온 소식은 나를 감격케 했다.
그는 천신만고를 마다하지 않고 운남성 사모(思茅)지구의 화평현(和平縣) 천가채(千家寨)를 찾아
무려 2700년이나 된 야생고다수(野生古茶樹)를 보고 왔다고 한다. 수령 2700년이나 된
차나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한국인 최초로
그 곳을 탐방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기록적인 사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천가채의 고다수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이 곳에 2700년 된 고다수 1호와 2500년 된 고다수 2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1997년에 공표된 바 있다.
이에 따라 이들 고다수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다수(茶樹)의 노조종(老祖宗)
즉 가장 오래된 조상이라고 지칭되기 시작했다. 2001년에 열렸던
“중국 보이차 국제 학술 연구회”에서는 참가자 63명 전원의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의한 바 있다.
이 기념비는 지금 2700년 된 고다수 앞에 “세계다왕거세무쌍(世界茶王擧世無雙)”이란 비명과 함께 우뚝하게 세워져 있다.
“세계다왕거세무쌍”이란 글 뜻은 이 나무가 “이 세상 통 털어 둘도 없는 세계의 다왕”임을 강조한 것이다.
김용권님의 설명에 따르면 고다수 앞에는 차수왕(茶樹王)의 설명과 함께 두개의 비석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차수왕을 보호하기 위해 5미터 이내 접근금지라는 팻말까지 붙어 있다는 것이다.
이 두개의 고다수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맹해현 파달산(巴達山)의 1700년 된 차나무가
가장 오랜 것으로 알려졌고 이른바 다왕수(茶王樹)라고 까지 명명된 바 있다.
“다왕수”란 “다수왕(茶樹王)”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파달산의 “다왕수”가 발견되기
전까지의 “다수왕”은 남나산에 있던 수령 800년의 나무였다. 이 나무는 오래동안
“다수왕”의 이름을 떨쳤지만 1994년 낙뢰(落雷)로 고사(枯死)했고 오늘날 다수왕의 왕관은
가장 오래된 노다수에게 고스란히 옮겨졌다.
김용권님은 파달산의 1700년 된 다왕수도 지난해 방문한 바 있다고 한다.
그는 다왕수가 2700년 된 다수왕 보다 더 우람하고 컸다고 술회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2700년 된 나무는 높이가 25.6미터 이고 둘레가 1.2미터,
2500년 된 나무는 높이가 19.5미터 둘레 1.2미터이다. 이에 비해 파달산의 1700년 된
나무는 높이가 32.12미터 줄기 둘레는 1.3미터이고 밑 둘레는 2.9미터나 된다.
운남성에는 이 밖에도 수백 년이 넘는 고다수가 즐비하다.
난창지역의 흑산(黑山)에 있는 1호야생대다수는 높이 26.75미터 둘레 1.66미터.
2호 대다수는 높이 14.6미터 둘레 2.3미터이다. 열대원시림에서 자생한 이런
차나무들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차나무와는 비교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백년에서 1천년이 넘는 차나무에서 따낸 차 잎으로 만든 보이차의 품격은 결코 가벼울 수가 없는 것이다.
22 - 고차(古茶), 노차(老茶), 신차(新茶)
어느 나라나 상혼(商魂)이란 대단한 것이라고 할 밖에 없다. 운남성에 있는 수령 2700년
된 다수왕(茶樹王)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 고장의 지명을 딴 보이차가 상품으로 등장하여 성가(聲價)를 올리고 있다.
다수왕이 위치한 화평현(和平縣) 구갑향(九甲鄕) 천가채(千家寨)의 야생 보이차는 옛날부터 유명했다.
운남성의 팔대(八大) 명차(名茶) 가운데 으뜸은 구갑의 마등촌(馬鄧村)에서 나오는 ‘마등차’라고 일컬어진지 오래이다.
이곳의 원주민 “이족”들은 귀빈접대를 할 때 반드시 마등차를 내 놓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90년대에는 아예 ‘천가채’라는 이름의 보이원차(圓茶)가 제한적인 수량이지만 상품화 되어 출하 된 바 있다.
우연한 기회에 나도 이 차를 한편 입수하였는데 천년이상 된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차이기에 귀중품 같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다수왕이 있는 곳은 해발 2,450미터로 이곳의 산 이름은 애로산이라고 하는데 일명 금죽산(金竹山)이라고도 불린다.
내가 갖고 있는 ‘천가채’란 이름의 보이차는 ‘금죽산 야생차’라고 명기(明記)되어 있다.
그런데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심심산골에 천가채(千家寨) 즉 천개의 집이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거니와
산 이름에 슬픈 감옥이란 뜻인 ‘애로’란 글자가 붙은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다.
문헌에 보면 이 곳은 태평천국난(太平天國亂)의 마지막 거점이었다고 한다.
청(淸)나라 말기 홍수전(洪秀全)은 천주교의 태평천국 건국을 표방하고
민란을 일으켜 거병했지만 끝내 패퇴하여 이곳에 숨어들어 저항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당시의 유적이 적지 않게 남아있고 여러 가지 전설이 원주민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보이차는 오랜 역사와 함께 여러 가지 차격(茶格)이 들어나게 마련이다.
흔히 오래된 보이차를 “진년(陳年) 보이차”라고 하지만 ‘진년’이란 말엔 엄격한 기준이 없다.
뿐만 아니라 고차(古茶)와 노차(老茶)라는 말도 상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여기서 ‘고차’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옛날부터 내려온 유물 같은 골동차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1백년 이상 된 야생 고다수(古茶樹)에서 따낸 차 잎으로
만든 차를 일컫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노차’는 수령 30년 이상 된 야생 교목(喬木)에서 따낸 차 잎으로 만든 보이차에 붙여지는 이름이라고 한다.
어쨌든 고차나 노차는 그나마도 희귀품이 속한다. 근래에 출하된 차들은
신차(新茶)에 속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정설(定說)이다.
여기서 '신차‘란 새차나 햇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 재배한 관목(灌木) 차나무 잎으로
대량 숙성시킨 보이차를 일컫는 말이다. 이런 표현방식은 아마도 보이차 세계의 독특한 현상이 아닌가싶다.
23 - 변두리 보이차 이야기
보이차란 이름은 상표라기보다는 보통명사화 된 차 명칭의 하나이다.
본래 중국 운남성에 있는 보이라는 지명(地名)에서 유래한
이 차는 이른바 흑차(黑茶)의 대명사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데 우리나라에선 이런 보이차를 고유상표로 등록하여 법적인 쟁송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법 당국의 최종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자칫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하긴 보이차가 유명해 지는 상황에서 상표권을 확보하여 독점적 지위를
누리려는 충동은 있을법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차인(茶人)의 세계에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중국에서 보이차는 이미 보통명사화 된 것이기 때문에 차의 명칭으로 말미암아 분쟁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실제로 보이차는 본고장인 운남성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주변의 다른 지역에서도 보이차라는 이름으로 제조 판매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는 대만에서도 보이차가 제조되어 성가(聲價)를 올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만에서 만든 “천인(天仁)보이차”가 시중에 나돌고 있다.
이 보이차는 타이페이의 천인다업(天仁茶業)에서 만든 것인데 품질보증을 표방하고 있을 정도다.
중국이외의 지역에서 만든 보이차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홍태창원차(鴻泰昌圓茶)와 하내원차(河內圓茶)를 손꼽을 수 있다.
홍태창원차는 운남성에 있던 ‘홍창’이란 이름의 업체가 태국(泰國)에
합작 설립한 법인의 대표성을 이름 하는 것이다.
홍태창보이차는 한동안 가짜제품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차 애호가들의 선호품이 되었었다.
홍태창의 차 잎은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북부 지역의 것을 원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가짜 제품이 만들어질 여지가 그만치 적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유명세 탓으로 홍콩에서 운남성의 차 잎으로 속성 발효시켜 만든
‘홍태창’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따라서 80년대
이후의 홍태창 보이차는 품질을 엄격히 선별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공론(公論)이다.
하내(河內)원차의 ‘하내’는 하노이(HANOI)의 한자표기이다.
하내원차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든 보이차를 나타내는 상표인 셈이다.
베트남 북부는 운남성 남부와 접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차나무와 차성(茶性)에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이후에는 하내원차가 본격적인 수출품으로 등장했고
홍콩, 싱가폴, 방콕 등지의 화교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하내보이차는 차향에서 잡맛이 풍기는 것과 원차의 크기가
운남 보이차보다 약간 크다는 것이 특징이랄 수 있다.
이 밖에 내가 맛본 변두리 보이차로는 마카오에서 만든
‘세일링 보트(Sailing Boat)'라는 상표의 병차가 있다.
한때 유럽지역에 수출했다는 이 차는 맛이나 향이 매우 청순했다.
24- 여름철 냉차의 으뜸, 보이냉차
여름철 차 마시기는 더위를 쫓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이다.
옛 선인들은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 해서 더위를 열로 다스리는 것을 생활철학으로 삼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이열치열의 원칙이 올곧게 지켜지지 않고 있다.
더위를 이기는 방편으로 으례껏 찬 것을 마시거나 먹는 것을 선호하는 상황이다.
차 마시기에서도 냉차(冷茶)가 여름기호품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심지어는 녹차조차도 냉장고에 보관하여 냉수처럼 마신다.
그러나 녹차는 차성자체가 한냉(寒冷)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냉성(冷性)을 지닌 녹차는 뜨겁게 우려내어 마셔도 결과적으로 몸을 차게 하는 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녹차를 지나치게 차게 하여 마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권장되기도 한다.
물론 일시적으로 녹차를 냉차로 만들어 즐기는 것은 무방하다고 하겠다.
여름철 냉차로서 가장 좋은 것은 보이냉차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보이냉차란 보이차를 우려내어 냉차로 만든 것을 이름 하는 것이다.
보이차를 냉차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일단 우려마신 보이차를 재탕(再湯)으로 끓여서 식힌 다음 냉장하는 방법이다.
사실 값비싼 보이차를 한자리에서 우려마신다음 그대로 버린다는 것은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 재탕으로 끓여 마시면 맛이나 차성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둘째는 보이차를 직접 끓여서 냉장하는 방법이다.
값이 비싸지 않은 일반적인 보이차는 묽게 끓여서 마시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런 방법은 운남 원주민의 차 끓여 마시기 또는 차 다려 마시기와도 일맥상통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차가 냉차로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바로 차성(茶性) 때문이다.
녹차가 냉성(冷性)인데 반해서 보이차는 온성(溫性)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이른바 후 발효차인 보이차는 사람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효능에 있어서 다른 어떤 차와도 견줄 수 없는 빼어남이 있다.
게다가 보이차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차라고 일컬어진지 오래다.
‘수승화강’이란 오묘한 천지조화(天地造化)의 기운을 뜻하는 것인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벽한 건강을 담보하는 것이다.
사실 좋은 보이차를 마시면 아랫배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면서 머릿골에선 시원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더하여 등골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경험은 사람을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바로 이런 오묘함 때문에 보이차가 황실이나 상류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선호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기록에 보면 황실이나 귀족사회의 여름철 다연(多宴)은 단순히 보이차 마시기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끝마무리로 반드시 차향(茶香)이 빼어난 대홍포(大紅布) 또는 무이암차(武夷岩茶) 등을 마셨다고 한다.
25 -보이차의 족보(族譜)
보이차는 이른바 족보(族譜)가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차와 구별된다.
족보가 있다는 이야기는 그만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차와의 확연한 차별성을 부각시켜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차의 족보는 여러 가지 보이차의 역사적인 내력을 설명하는 품급(品級)을 담고 있다.
그것은 보이차의 계보(系譜)를 밝혀주는 필수적 조건의 하나인 셈이다.
보이차 가운데 가장 오래된 차는 문헌급(文獻級)에 속한다.
역사적인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보이차를 통 털어 일컫는 말이 바로 ‘문헌급’이다.
가령 원(元)나라 때의 보차(普茶)라던가 명(明)나라 때의 의차(倚茶) 따위가 그것이다.
문헌급 다음의 보이차는 ‘공차급(貢茶級)’이라고 지칭된다.
공차(貢茶)란 임금이나 황실에 조공으로 바친 차라는 뜻이다.
보이차는 청(淸)나라 중기이후 공차로서의 전성기를 맞았다.
심지어는 ‘홍루몽’같은 소설에서 조차도 궁중기호품의 하나로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정도였다.
공차급의 보이차는 오늘날 중국에서 국보급 골동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
보이금과공차(金瓜貢茶)’란 이름의 차는 한동안 베이징의 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되기까지 했다. 이 ‘금과공차’는 사람머리통처럼 크다고 해서 인두차(人頭茶)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금과공차가 시판되고 있다.
인두차모양의 것으로부터 타차(沱茶) 형태의 것들이 한결같이
‘금과공차’란 이름을 차용(借用)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차들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골동품이 아닌 모조품에 속하는 것들이다.
공차급 다음으로 보이차 족보의 반열에 오르는 차는 ‘호자급(號字級)’이라고 불린다.
‘호자급’의 보이차는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말부터 유통된 민간업체에 의한 제품을 총칭(總稱)하는 것이다.
이때의 민간업체로서 유명했던 상호(商號)로는 동경호(同慶號), 경창호(敬昌號),
복원창호(福元昌號), 동창호(同昌號) 등 무려 10여 곳이 손꼽힌다.
이들이 만든 차는 오늘날 골동급으로 대접받으면서 매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고가(高價)의 골동품이 가짜가 많은 것처럼 이들 상호가 붙은 차들은 대부분이 가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공차급 다음의 반열은 ‘인자급(印字級)’이다.
인자급의 보이차는 홍인(紅印) 녹인(綠印) 황인(黃印) 등으로 표시되는 보이원차를 이름 하는 것이다.
50년대 전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인자급’의 보이차도 진품(眞品)은 골동품 못지않은 귀중품 취급을 받는다.
그다음의 반열은 ‘칠자급(七子級)’이라고 일컬어진다.
‘칠자급’은 60년대 이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칠자병차 (七子餠茶)를 상징하는 말이다.
‘칠자급’의 보이차는 오늘날 대량생산되고 있을 뿐더러 생산년도와 제조창 그리고 유통경로에 따라 품질도 다양하다.
26 - 가짜 보이차 이야기
우리나라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보이차가 본격적인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한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이른바 골동품급에 속하는 명차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명품 보이차의 가격도 오늘날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저렴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차의 인심도 좋았고 차를 나누어 마시는데 아무런 주저함도 없었다.
요즘 귀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보공명(思普貢茗) 원차 따위도 차 맛을 타박하며 즐기지 않을 정도였다.
족보에 있는 산차(散茶)일지라도 냉대를 받기 일쑤였다.
당시엔 일상적으로 마시는 차가 홍인(紅印)원차나 홍인철병(鐵餠)이었다.
어쩌다가 버섯덩어리처럼 생긴 맹견긴차(猛景緊茶)나 정흥(鼎興)긴차를 구하면
약용차(藥用茶)의 본보기인양 화제에 떠올리며 즐겼다.
심지어는 백년이나 묵은 복원창(福元昌)원차를 구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나도 복원창 한편에 70만원 꼴로 구입한 경험이 있거니와
오늘날의 복원창 가격이 편당 최소한 2천만원이라는 사실에 견주면
그야말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을 아니 느낄 수 없다.
골동 보이차 값이 치솟은 까닭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는 골동차의 희소가치 때문이다.
골동차는 먹어치우는 과정에서 희소가치가 생기고 가치증식이 일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둘째는 골동 보이차에 대한 투기현상이 야기되었다는 사실이다.
보이차에 대한 투기는 주로 대만과 홍콩등지의 상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투기의 거품이 좀처럼 꺼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보이차에 대한 투기와 고가(高價)형성은 수많은 가짜 명품 보이차를 범람케 만들었다.
가짜 명품 보이차는 전문가 일지라도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가짜 명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도 그리 흔치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어떤 장인은 가짜 명품 차에 가짜임을 스스로 내비(內飛)로 밝힌 사례도 있다.
이런 경우는 비록 가짜이긴 하지만 만든 장인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 아닌가 싶다.
가짜 명품 보이차와 진품을 구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설명되던지 간에 필수적인 조건으로 손꼽히는 것이
건창(乾倉)이냐 습창(濕倉)이냐의 여부다.
다시 말해서 진품의 필수적인 조건은 건창에 있고, 가짜의 그것은 습창에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건창이란 보이차의 숙성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자연산 교목(喬木)에서 따낸 차 잎을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햇빛에 말려 차를 만든 다음
건조한 창고에서 오랜 세월 보관하는 방법이 바로 건창의 핵심이다.
이에 반해서 습창은 습도가 높은 창고에서 단기간에 속성 발효시킨 차의 제조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한데 오늘날 시중에 나돌고 있는 보이차는 대부분이 속성 발효시킨 습창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차의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뿐만 아니라 습창을 나쁘다고 해야 하는 절대적 이유도 없다.
나쁜 것은 가짜명품으로 속이는 일 뿐이다.
27 - 죽통차에 얽힌 사연
운남의 10대 명차(名茶)의 하나로 죽통차(竹筒茶)가 손꼽힌다.
운남의 남부 지역인 맹해 일대의 소수 민족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이차는 야생차 잎을 대나무 속에 넣어서 숙성시켜 만드는 것이다.
이 차는 독특한 향과 맛을 지니는 것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죽통차는 죽통향차(竹筒香茶)라고도 불린다.
대나무향이 짙게 배여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한데 죽통차는 꾸냥차(姑娘茶)라는 별칭을 지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꾸냥”이란 중국말로 “처녀”라는 뜻이다.
상품화된 죽통차 가운데는 아예 “꾸냥차(姑娘茶)”라는 상표를 붙인 것들도 있다.
죽통차를 꾸냥차라고 부르게 된 사연은 이 지역의 전설(傳說)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옛날 이 지역의 처녀(꾸냥)들은 차나무의 새싹이 돋을 무렵 민족의상을 화사하게 차려입고
지극 정성으로 차 잎을 따서 치마에 담아 죽통차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 꾸냥은 이 차를 남정네에게 선물함으로써 사랑을 고백했다고 한다.
이런 전설은 하나의 전통이 되어 결혼 할 때의 혼수품으로
보이차 내지는 죽통차가 포함되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죽통차의 전통적인 제조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신선한 야생 차 잎을 증기로 쪄서 잎을 부드럽게 하여
유념의 과정을 거친 뒤 발위에 펴서 약간 건조시킨 다음 대나무 통에 담는 방법이다.
이때 대나무 통 곳곳에 구멍을 낸 후 약 40℃의 숯불로 완전 건조시킴으로써 죽통차를 완성시킨다.
또 하나의 방법은 찹쌀밥을 지으면서 차 잎을 찹쌀의 수증기로 쇄청(殺靑)한 다음
대나무 통에 담아 앞서의 방법으로 건조시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죽통차는 차잎향,
대나무향, 찹쌀향의 세 가지 향기가 풍기기 때문에 보이차 애호가들 사이에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전통적인 죽통차는 금새 먹지 않는다고 한다. 천정에 매달아 놓고
이른바 후숙(後熟)이 이루어지기까지 최소한 2~3년을 기다린다고 한다.
한데 오늘날의 죽통차 제다 방법은 전통적인 그것과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그것은 죽향을 많이 머금은 청죽(靑竹) 가운데서 직경 5~6cm 매듭 길이 20~30cm
정도의 것을 골라 죽통을 만들고 쇄청한 차 잎을 다져 넣은 다음
차 잎이 담긴 죽통을 화로 위에 올려놓아 건조시키는 과정으로 죽통차를 만드는 방식이다.
죽통을 불에 쪼여 건조시키기를 4번정도 반복함으로써 제다과정이 끝나는데
이때 죽통을 쪼개 차를 꺼내서 보관하거나 상품화한다고 한다.
흔히 죽통차는 단단하기가 돌덩어리나 쇠 덩어리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오랜 기간 잘 보관된 차일수록 그런 성향을 지닐뿐더러
차 색깔 또한 쇠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철갈색을 풍기게 마련이다.
오늘날 시판되고 있는 죽통차는 작은 원주형(圓柱型)의 모양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좋은 죽통차는 은은한 향에 맛이 순후한 것이 특징이다.
28 - 와인과 보이차
요즘은 사교문화(私交文化)에 있어서도 독특한 퓨전문화가 형성되고 있는 듯싶다.
강남의 어떤 까페에선 와인을 즐기면서 보이차를 마시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하긴 와인이나 보이차는 이른바 웰빙음료로서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퓨전문화가 오히려 당연한 어울림이라고 할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와인과 보이차의 공통점은 너댓가지로 열거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와인은 빈테이지가 있고 빈테이지에 따라 가격 또는 가치의 차별화가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보이차에도 빈테이지가 있으며 가격과 선호도에서 크게 차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둘째, 와인은 빈테이지의 것뿐만 아니라 보졸레누보같은 신주(新酒)도 선호의 대상이 된다.
일반적인 차의 경우는 신차(新茶) 곧 햇차가 선호도에서 묵은차를 압도한다.
가령 녹차에 있어서 우전(雨前), 세작(細雀) 등이 애음되는 것은 그것을 말해준다.
보이차의 경우는 햇차의 선호도가 보졸레누보와 동격의 것으로 비교할 수 없을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이차의 햇차도 독특한 향과 맛 때문에 애호가들 사이에서 선호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야생 대엽종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는 오랜 발효기간을 거쳐야 하지만
어린 차 잎으로 상징되는 명전(明前)신차나 금아(金芽)병차 따위는 햇차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셋째, 와인은 생산지역 곧 포도밭의 위치와 지역에 따라 랭킹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보이차도 산지와 수종에 따라 랭킹이 좌우된다.
일반적인 보이차는 재배종 차나무의 잎을 원료로 하지만 명품에 속하는 보이차는
예외 없이 야생 대엽종 차나무의 잎을 원료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보이차는 옛날부터 맹해지역의 이무정산(易武正山)의 것을 으뜸이라고 여겨왔다.
넷째, 와인을 즐기는데 있어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와인의 보관방법과
사용하는 용기 곧 와인글래스라고 일컬어진다.
마찬가지로 보이차를 즐기는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것이 보관방법과 사용하는 용기라고 하겠다.
보이차는 보관방법 뿐만 아니라 다호(茶壺)나 찻잔에 따라서 차 맛에서 현격한 차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섯째, 와인을 즐기는데 있어서의 와인 테이스팅처럼 보이차의 경우도 테이스팅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와인을 감별하는 테이스팅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뒷받침 되어야 비로소 제격이란 평가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보이차 테이스팅도 경험과 지식이 뒷받침되어야만 하는 법이다.
비록 와인과 보이차는 많은 공통점을 지닌 웰빙음료이긴 하지만 와인은 몇잔정도 즐기는데서 끝나야 한다.
와인을 무한정 마시다간 오히려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이차는 그런 한계를 초월한다. 좋은 보이차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29 - 공명차(孔明茶)
운남에서는 보이차의 조상(祖上)으로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떠받들고 있다.
해마다 음력 7월이 되면 다조회(茶祖會)가 열리고 공명등(孔明燈)을 밝힌다고 한다.
특히 제갈공명의 탄생일인 7월 23일엔 공명절(孔明節) 기념행사가 절정을 이룬다는 소식이다.
제갈공명이 보이차의 다조(茶祖)로 추앙받게 된 사연은 하나의 전설로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유비(劉備)를 도와 촉(蜀)나라를 세운 제갈공명은 오늘날의 운남까지 세력을 넓혀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했다.
유명한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故事)를 남긴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 고사의 본고장이 된 곳은 바로 오늘날의 운남 맹해지역이다.
맹해지역은 보이차 나무의 원산지로도 손꼽히는데 이것도 제갈공명의 전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제갈공명이 군사를 이끌고 맹해지역에 진출했을 때 이른바
수토불복(水土不服)의 화를 입어 군졸들이 심한 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수토불복”이란 그 고장의 물과 흙에 익숙하지 않은 외지인이 겪는 고통을 이름 하는 것이다.
이때 제갈공명은 갖고 다니던 지팡이를 남나산(南糯山)에 심어 처방을 내렸다고 한다.
지팡이에선 금새 무성하게 잎이 피었고 이것을 다려 마시고 눈에 발라 병마를 말끔히 쫓아냈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 지팡이가 보이차 나무의 원조(元祖)인 셈이다.
보이차는 일명 공명차(孔明茶)라고 불린다. 실제로 상품명으로 ‘공명차’가 나돌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일단 ‘공명차’란 이름이 붙어 있으면 보이차를 뜻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보이차 이외의 차엔 제갈공명의 이름을 감히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명차 이외에 사람의 이름을 붙인 보이차로는 신농(神農) 보이차라는게 있다.
신농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차의 시조(始祖)로 추앙받는 존재다.
동이족(東夷族)의 선조이기도 한 신농은 비단 차뿐만 아니라 약초(藥草)의 지혜를 후손에게 남겨준 신인(神人)이다.
중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농을 그들의 조상으로 여기지 않았었다.
한족(漢族)은 전통적으로 황제(黃帝)의 자손임을 내세워 왔다.
그러나 10여년전부터 중국에선 그들이 이른바 삼조(三祖)의 후손이라고 표방하기 시작했다.
삼조란 신농과 치우와 황제를 말하는 것이다.
신농뿐만 아니라 치우는 동이족의 선조이고 우리 겨레의 조상이다.
특히 치우는 2002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가 기치를 세운 ‘붉은악마’의 원조이며 상징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도 그 근원이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상고사를 부정하거나 홀대하는 사이에 중국은 남의나라 역사를 자기 것인 양
왜곡하고 남의 조상을 자기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꼴이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와 정치 문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문화와 우리민족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버리는 위기적 상황에 몰려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차 문화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로 왜곡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외가 아닌 것이 현실이다.
30 - 네 가지 즐거움 (四樂)
옛 다인(茶人)들은 차 마시는 즐거움을 네 글자로 상징화해서 설명하곤 했다.
첫째는 문(聞)이다. 문은 문향(聞香)의 준말이다. 차의 향기를 즐기는 것이 곧 문향이다.
한데 차의 향기는 코로 냄새 맡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귀로 듣는다는 뜻의 문(聞)자를 붙인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사실 차의 향기를 귀로 듣는다는 것은 다도(茶道)에서 도 닦음의 어떤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도 닦음의 심오한 경지에 이르면 이른바 “한소식”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의 “한소식”은 귀로 듣는 ‘문’인데 그 “문”은 “소리 없는 소리”라고 일컬어진다.
차의 향기를 듣는 “문향”도 궁극에 가서는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듣고 깨닫는 것을 이름 하는 것이다.
차의 향기는 발효정도에 따라 강약의 차별성이 생기게 마련이다.
반발효차인 오룡차계열의 차들은 향기에 따라 품성(品性)을 구분하기도 한다.
후 발효차인 보이차도 산지와 제조창에 따라 여러 가지 향기를 지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난향(蘭香)보이차, 연꽃향보이차,장향(樟香)보이차 등은 그러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식(食)이다. 여기서 ‘식’은 마신다는 뜻의 음(飮)을 포괄하는 말이다.
차를 마시는 것과 차를 먹는 것이 같은 차원의 것이라는 것을 웅변해 주는 셈이다.
그러나 발생론(發生論)에 근거해서 말한다면 차는 마시는 음료이기
이전에 먹는 잎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늘날에도 운남성의 소수 민족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보이차를 먹는 습관이 유지되고 있다.
특히 보이차는 맛이 깊은 음료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먹어보거나 마셔보지 않고는 참 맛을 알기 어렵다.
보이차의 참 맛을 아는 즐거움은 곧 “식”에서 찾아진다.
셋째는 청(聽)이다. 차는 향이나 맛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청’ 즉, 귀로도 즐긴다는 뜻이다.
차를 귀로 즐기는 ‘청’은 차향을 귀로 즐기는 ‘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청’은 그야말로 육신의 귀로 즐기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차를 즐길 때 들리는 물 끓는 소리에서부터 다기(茶器)가 부딪히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다석(茶席)에서 들리는 소리는 모두가 ‘청’의 범주에 속한다.
차를 함께 나누는 벗과의 다담(茶談)이나 BGM의 음악소리는 ‘청’의 경지를
한차원 높여주는 조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는 제이다. “제”는 눈으로 직접보고 즐기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차를 마시면서 차의 향을 말하고 맛을 평가하면서 차 잎의 상태를 감상하는 것은
즐거움의 차원을 한 단계 격상시켜주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이차는 우려낸 뒤의 차 잎의 상태가 그 차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보이차는 아무리 오래된 것일지라도 차 잎에서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반면 인공적으로 만든 속성발효 보이차는 차 잎에서 전혀 생동감이 찾아지지 않는다.
31 - 네 가지 금기(禁忌)
보이차는 이른바 웰빙(Well Being)차의 으뜸으로 손꼽히긴 하지만 일반적인 녹차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 금기(禁忌)사항이 적용된다.
첫째, 하루지난 차를 다시 우려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녹차의 경우 차를 우려마신 다음 하루를 묵히면 변질되기 십상이다.
특히 여름철엔 부패가 급진전되어 곰팡이가 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녹차를 마신 다음엔 반드시 다호속의 차를 말끔히 씻어내는 습성을 길들여야 한다.
물론 보이차의 경우도 여기에서 예외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후발효차인 보이차는 녹차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보이차는 비록 하루를 묵혀 마시더라도 맛이나 질에서 이상을 느낄 수 없다.
이런 사실은 보이차 애호가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좋은 보이차는 몇 번이고 우려 마실 수 있고 끝까지 마신 다음
차 잎을 말려 다시 재탕하여 마셔도 맛이나 느낌에서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 특징이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숙병보이차는 그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녹차에 적용되는 금기사항을 그대로 지켜야만 한다.
둘째, 공복(空腹)인 상태에서는 차를 많이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녹차의 경우 공복에서 차를 마시면 소화 장애를 일으키기 쉽다.
심한 때엔 속을 깎아내리는 통증을 경험할 수도 있다.
보이차의 경우도 진한 차를 공복에 마시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식사하기 전엔 묽게 마시고 식사 후 진하게 마시는 것이 보이차 마시기의 정도(正道)라고 할 수 있다.
식사 후의 보이차는 소화촉진제구실을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셋째. 약을 복용할 때 차로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약을 차물로 마시는 것은 옛날부터 금기시되어 왔던 터였다.
현대 의학에서도 해명되었지만 특히 수면제(睡眠劑)같은 것을 녹차로 마시면 효과가 반감된다고 한다.
녹차에 함유된 카페인이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뇌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수면약의 작용을 상쇄시키며 이렇게 되면 약을 과다복용하기 쉽고,
결과적으로 불행한 사태로 귀결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보이차는 카페인 성분이 적기 때문에 효과면에서 물론 녹차와 구분된다고 하지만
약이란 모름지기 맹물로 마시는 것이 옳지 않나 싶다.
넷째, 취침 전에 차를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녹차의 카페인 성분이 수면을 방해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상적인 사람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녹차를 마신다면 필경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게 될 가능성이 그만치 높아진다. 그러나 보이차는 여기에서 예외이다.
보이차를 애용했던 청(淸)나라 황실의 기록을 보면 오히려 취침 전에 가장 즐겨 마셨던 차가
보이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 발효차인 보이차는 궁중만찬의 소화촉진제인 동시에 수면 촉진제 구실을 했던 셈이다.
나의 경우도 저녁에 보이차 마시기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
- 차례(茶禮)의 참뜻
새해 첫 아침엔 전통적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다.
이때 지내는 제사를 일컬어 차례(茶禮)라고 부른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차례의 참뜻이나 내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싶다.
차례란 글자 그대로 차(茶)를 끓여서 조상 앞에 헌다(獻茶)하는 예법을 말한다.
요즘은 정월 차례상에 으레 술(酒)을 헌주(獻酒)하지만 옛날엔 술보다도 차를 위주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 세 나라 가운데 정월 첫 제사를 일컬어 차례라고 부르는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다.
이것은 차 문화의 뿌리가 우리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차(茶)에 대한 말 줄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차(CHA) 또는 차이(CHAI)라고 발음 하는 줄기이고,
또 하나는 티(TEA) 테(TE)라고 발음하는 줄기이다.
오늘날 영어권이나 서양에서는 차를 ‘티’ 또는 ‘테’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서 일본이나 중국 등에서는 차라고 부른다.
이것은 두 줄기의 구분을 선명하게 해 주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는 차(茶)와 다(茶)를 함께 쓴다.
이것은 적어도 언어학적으로는 차(CHA)와 다(TEA)가 같은 뿌리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말에서는 일반적으로는 차(茶)라고 발음 하지만 헌다(獻茶)라던가
다반(茶飯), 다식(茶食)이라고 할 때는 다(茶)라고 발음한다.
그렇다면 ‘차’와 ‘다’를 구분해서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이에 대한 풀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월 첫 제사에서 헌다(獻茶)할 때의
차를 ‘다’라고 일컫는 까닭을 살피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정월 차례에서 바치는 차는 햇차가 아니고 묵은 차이다.
이것은 계절적으로 불가피한 현상이다. 한데 묵은 차는 대개 발효된 차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차’와 ‘다’를 구분 짓는 하나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헌에 보면 분명히 ‘다’는 발효된 차라고 쓰여 있다.
일반적으로 발효차라면 대개 홍차(Black Tea)라던가 보이차를 꼽는다.
최근의 동향을 보면 보이차는 발효차 특히 완전(完全) 발효차 내지 후(後)발효차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황실을 비롯해서 대만, 홍콩, 싱가포르, 북경, 상해, 광동 등의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보이차의 선호도가 대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완전 발효차로서의 보이차의 인지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완전 발효차는 보이차만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조까지만 하더라도 이른바 공차(貢茶)로서 발효차가
만들어져 임금에게 바쳐졌던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차례상에 헌다 할 때의 차가 발효차인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조상에게 헌다하는 옛 전통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33 - 천량차(千兩茶)
보이차 가운데 천량차(千兩茶)라는 게 있다.
천량차란 무게가 천량이나 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량차는 높이 150cm, 지름 20cm 안팎의 원주형(圓柱形)을 이룬 모양새가 두드러진다.
옛날 중국 도량형 단위로 천량이 될 정도의 차이기때문에 그야말로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을 준다.,
청나라 때는 한량이 37.3g였는데 비해서 오늘날 중국에서는 한량을 50g로 계산한다.
현재 차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천량차의 무게는 약 36kg이다.
청나라 때의 기준으로 셈하면 명실공히 천량차인 셈이다.
천량차는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차라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천량차의 산지(産地)도 운남성이 아니라 호남성(湖南省)이다.
그러나 천량차가 보이차의 장르에 속하는 흑차(黑茶)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보이차의 일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천량차는 본래 화권차(花卷茶)라고 불렸다.
둥근 원주형의 차를 만들어 대나무로 엮어 두루마리처럼 포장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량차는 원료인 흑모차(黑毛茶)를 쪄낸 다음 압축하여 만드는데
옛날에는 건장한 남자 8인이 한조(組)를 이루어 36kg짜리 차를 완성시켰을 정도로 힘든 작업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천량차는 남자 8인이 압축시켜 고형화(固形化)한 것이기 때문에 차의 중심부는
마치 나무토막처럼 견고한 것이 특징이다.
천량차를 물속에 오랜 시간 침전시켜 두었는데도 중심부에는 물기가 조금도 스며들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만치 압축이 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견고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이런 천량차를 마시기 위해선 톱으로 나무 자르듯 토막내서 산괴(散塊)로 만드는 방법이 일반화 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듯 견고한 천량차도 세월 앞에서는 별 수 없는 모양이다.
오랜 시간 자연 숙성과정을 거치게 되면 천량차의 표피는 말할 것도 없고
중심부도 떼어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게 된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천량차의 맛도 절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차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천량차의 맛을 좋은 보이차의 그것과 비교하는 담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천량차의 잎은 보이차의 잎과 태생적으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맛과 향기에서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천량차는 포장이 클 뿐만 아니라 만만치 않은 무게때문에
수송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어왔던 게 지난 날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1958년 이후에는 천량차의 생산이 중지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기록이 진실이라면 오늘날 차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천량차는 최소한 40년 이상의 진년차(陳年茶)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내세울 증거가 없는 한 천량차를 무조건
오래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 오늘날 중국 차 시장의 실상이다.
요즘에는 천량차의 스몰 사이즈인 백량차(百兩茶)도 간혹 보인다.
이 차는 천량차 이전의 복고풍(復古風)의 차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의컬렉션/이규행] 金보다 비싼 '먹는 문화재' 보이차(普耳茶)
이규행씨 부부는 아침.저녁으로 함께 차를 마시며 인생의 깊은맛을 즐긴다.
'한국경제신문' 사장, '문화일보' 회장, '중앙일보' 고문을 지낸 원로
언론인 이규행(68) 씨. 차의 세계에 푹 빠진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평생 신문사에 몸을 담다 보니 항상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 살았던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일환으로 단전호흡과 마음수양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차를 접하게 되었고, 차에 대한 공부를 해오고 있다.
그는 차를 마시는 목적을 두 가지로 든다.
첫째는 건강을 위해서이고, 둘째는 삶을 정신적으로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밖에 수행(修行)과 차의 관계를 강조한 이른바 선다일미(禪茶一味)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선다일미의 세계는 일반 대중이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에
대중들은 좋은 차만 마실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말해 두고 싶단다.
그가 '보이차(普耳茶)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한국경제신문사 사장으로 있었던 1981년부터다.
보이차가 우리나라에 막 들어올 무렵이었? 보이차란 차잎을 쪄 발효시킨 차를 말한다.
그는 차 공부를 오래 하면서 그 중 보이차가 최고라는 것을 알았다며 '보이차 예찬론'을 펼쳤다.
엽차(葉茶)의 경우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상복(常服)하면 몸이 냉(冷)해지기 때문에 좋지 않은데 반해,
보이차는 발효차이기 때문에 마실수록 몸이 따뜻해진다고 한다.
오래 숙성시켜야 하는 차이므로 가격대가 상당해서 중국에서도 서민들은 쉽게 접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인데, 최근 프랑스 의학잡지에 보이차의 효능이 발표되면서 세계적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이 폭등해 지난해 12월에 있었던 '보이차 경매'에서는
100g에 2,300만원으로 낙찰되어 '금값보다 더 비싼 차'라는 별명을 달았다.
그는 보이차를 '문화재급 차'라고 칭했다.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보이차에는 '빈테이지'(성숙도)가 있고,
맛과 향 그리고 색깔을 구분할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 오랜 경험자만이 그것을 판별할 수 있다고 한다.
와인에 와인리스트가 있는 것처럼 보이차에도 족보가 있는데,
그는 족보에 오른 모든 보이차를 가지고 있었다. 가격대를 묻자 언뜻 망설이는 표정이다.
"좋은 인연이 있어 모든 종류의 보이차를 마셔 봤고 상당수를 가지고 있다"고만 답했다.
좋은 차는 수십 번 우려내도 색깔이 바래지 않는다며 차를 정성스레 우려내는 그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이외에 그가 소장한 차 : 복원창원차(100년 이상 된 것), 동경원차(90-65년),
경창원차(55년), 동창황기(55년), 정흥긴차(65년), 반선긴차(20년), 송빈원차(75년),
홍태창원차(50년), 녹인원차(40-45년), 원차철병차(45년), 칠자철병차(35년),
보이타차(25-30년), 가장보이차(가정에서 보관하고 있던 오래된 차)
첫댓글 어찌 이런 좋은 자료를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