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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과 피바위, 황산대첩의 전설
어제와 달리 화창한 봄날의 기분 좋은 아침.
그러나 어제 편승한 지점(대덕리조트)까지의 대중교통편이 없다.
심란해 있는 늙은이의 기분을 풀어줄 해결사들이 속속 등장하다니.
1번타자는 주천파출소의 경찰관(백차).
그는 버스노선이 있는 24번국도상에 나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경찰은 전국 어데서나 언제나 내게 고마운 지팡이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내게 나타난 2번타자는 신협 운봉지점장.
출근길이라는 그는 운봉읍 자기 사무실을 지나 리조트까지 달렸다.
인월땅, 옛 인월역 마을로 되돌아갔다.
사적104호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와 직결된 인월(引月)과 피바위
(血巖)전설의 땅을 기점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잘 알려진대로 고려의 우왕6년(1380), 삼도도원수 이성계 장군이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사살하고 왜적을 섬멸한 전투장이다.
한 장군이 쏜 화살이 소년거인 왜장의 투구를 벗긴다.
적장이 벗겨지는 투구를 붙드느라 입을 벌리는 순간 다른 장군의 살이
적장의 벌린 입에 명중한다.
목구멍이 뚫린 적장은 피를 토하며 낙마하여 죽는다.
이 때 흘린 적장의 피가 바위에 배어 붉게 물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람천의 피바위와 황산대첩비지(위)
이 일련의 사건은 그믐밤에 일어난다.
칠흑의 밤이 되어 적을 무찌를 수 없는 이성계가 간절히 기도한다.
"밝은 달을 띄워달라"고.
곧 만월이 떠올라 적을 섬멸했다는 것.
이 장군이 달을 끌어올렸다 해서 이곳 지명을 인월이라고 했으며 죽은
적장의 피로 붉게 물든 람천의 바위를 피바위라 했다나.
인월과 피바위의 전설이다.
황산대첩과 피바위 이야기는 황당하고도 비현실적인 전설일 뿐이지만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단초가 된 것.
신화적인 능력을 갖춘 위대한 인물로 묘사한 이성계의 설화들은 이씨
새 왕조 창업의 당위 논리를 펴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선전의
일환으로 창작된 것들이다.
이조 왕조 탄생을 합리화하고 찬양하는 내용의 설화를 노래 형식으로
창작한 것이 바로 '용비어천가'다.
황산대첩비와 정약용
그러나, 411년 뒤인 1791년(정조15)에 이 길을 지나가며 황산대첩비의
글을 읽은 정약용은 "본래부터 붉은 바위였으며 피로 물들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茶山詩文集6권p175'跋荒山大捷碑')
정약용(茶山丁若鏞/1762~1836)은 이조 22대 정조때의 문신이 실학자, ·
저술가, ·시인, ·철학자, ·과학자·, 공학자 등 불세출의 천재였다.
그는 전주-임실-남원-함양-산청-진주-사천-고성-통영의 통영별로를
따라서 진주목사인 부친(丁載遠)에게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광한루에 올랐으며(登南原廣寒樓), 황산대첩비를 읽고(讀荒山大捷碑),
팔량령을 넘으며(諭八良嶺) 각기 시를 지었다.(茶山詩文集1권p174)
이 때 지었다는 '독황산대첩비' 에 "妖星旣隕衆彗倒 潤石千年殷血滋"
(요성기운중혜도 윤석천년은혈자/요망스러운 별 떨어지자 뭇 혜성이
넘어져 시냇돌에 천년토록 검붉게 피 배어 있네)라는 귀절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독황산대첩비'가 아니고 '독황산대첩비문'이 맞다.
비석을 읽은 것이 아니고 비문을 읽었으니까)
411년 밖에 되지 않은 황산대첩인데 '천년, 피바위' 운운하였는가 하면
다른 글(跋荒山大捷碑)에서는"왜병들이 계곡에 피를 많이 흘려서 계곡
바위빛이 지금까지도 붉게 물들었다"는 앞의 전설을 부정했다.
공평하신 신이 내린 천재와 다작자(多作者)의 한계인가.
지엽에 불과하나 다산의 가벼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산에 대한 아쉬움이 하나 더 있다.
왕조에서 신하가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18
~19세기의 인물이며 가톨릭교에 귀의한 그의 산더미같은 저작물 중에
우리 글로 쓴 것이 단 한 줄도 없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람천(濫川)은 지리산 고리봉에서 발원하여 황산과 덕두산 간의 협곡을
통해 인월면으로 흐른다.
람천을 따라서 국악의 성지(聖地),가왕 송흥록(歌王宋興祿)과 국창 박
초월(國唱朴初月)이 살았던 곳('生家' 라는 안내문은 잘못된 것),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이 살았던 집
다산의 '황산대첩비에 발함' 에는 또 "운봉(雲峰)은 남도의 으뜸 관방
(關防)이고 추풍령이 다음이다. 운봉을 잃으면 적(賊)이 호남을 차지
할 것이고 추풍령을 잃으면 적이 호서를 차지할 것이므로 이는 반드시
굳게 지켜야 할 관문"이라는 내용도 있다.
해남(전남) 우수영공원(명량대첩기념공원)에 있는 이충무공의 명언인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를 떠올리게 하는 글이다.
운봉 유감(有感)
황산대첩비지 등 운봉읍 화수리를 지나 운봉읍사무소로 갔다.
도중에 반c나 지났지만 낯설지 않은 초등학교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조잘대는 어린이들로 늘 활기찼던 마당이었건만 평일인데도 쓸쓸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변했을 뿐인데.
1950년대에 20여학급, 1.300여명의 학생에 3개의 벽지초등학교가 따로
운영되었건만 모두 폐교통합했음에도 11학급에 전교생이 285명이란다.
젊은이들의 도시집중화를 이유로 들먹이지만 도시의 초등학교도 같은
현상인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운봉은 읍으로 승격했을만큼 인구가 증가했지만 어린이의 증가는 없다.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게거품을 뿜어대던 군사쿠데타
정부놈들 지금은 뭐라 말할 텐가.
이 재앙을 누가 어떻게 얼마쯤이나 풀어갈 것인가.
쓸쓸하기 그지없는 운봉초등학교
늙은 길손의 룰루랄라 3번타자는 운봉읍사무소 C씨.
그는 운봉에 대한 자료들을 즉석에서 프린트하여 주는 성의를 보이며
여러 안내를 친절하게 했다.
1950년대 말에 투병과 피정을 했던 곳.
이 인연으로 이 지역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많은 자료를 가디고 있는
내게는 비록 중첩된다 해도 그의 호의가 고마웠다.
해발500여m인 운봉고원은 남원시의 운봉읍과 인월, 아영, 산내 등 3개
면을 말하며 동 팔량, 서 여원, 남 화개, 북 복성이 등 4개 재위에 있다.
운봉고원을 흐르는 물은 백두대간이 분수령이 되어 수계가 갈린다.
동남쪽은 엄천강(임천강)으로 해서 남강을 경유,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반대쪽은 요천을 거쳐 섬진강에 합류한다.
평탄분지인 운봉고원의 운봉읍은 삼국시대에 모산현(牟山縣)이었다.
신라의 국경 요새지였으며 35대 경덕왕(景德/재위742~765) 때 운봉현
(일명 운성)으로 바뀌어 천령군(天嶺郡/경남 함양군)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940년(고려태조23) 남원부로 편입되었다.
1896년(고종33), 운봉현에서 군(郡)으로 승격하였고 일제의 행정개혁
때(1914) 남원군 운봉면이 되었으며 1995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경이로운 것은 왕조가 몇번이나 바뀌었고 일제와 광복 등 1.250여년이
넘는 격변의 세월에도 바뀐 적이 없는 지명이라는 점이다.
지리산록인 동쪽에는 덕두산, 바래봉 등 해발1.000m가 넘는 산봉들이
병풍처럼 도열하여 있고, 서북쪽에 고남산(846m)이 솟아 있는 지형적
영향으로 고랭지 기후지대다.
산이 높고 물이 얕기 때문에 땅이 척박해 생산이 적다.
봄이 늦고 가을이 빨라서 농작물의 성장에 지장이 많으며 초가을의 된
서리로 인해 농사를 아예 망치기 일쑤다.
서늘하여 여름나기는 좋으나 눈이 많이 내리고 추운 겨울이 길다.
이베리아반도의 표고1.000m가 넘는 광대한 메세타(Meseta)에 비하면
500m대는 고원이라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 쪽은 부유한데 우리는 왜 이럴까.
관개시설과 기후적응 경작 등 국가적 지원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작은 고을의 소박한 사람들, 태고의 순후한 풍속"(세조12년/
1466 전라도관찰사 元孝然의 말)이라던 순박한 인심도 낭원좌영(左營)
이 옮겨온(숙종34년/1708) 후 변질되었단다.
무예(武藝) 숭상으로 문풍(文風)이 끊기고 무향(武鄕)이 돼버림으로서
더욱 삭막해갔다는 것.
그런데도 정감록을 비롯하여 내로라 하는 술가(術家)들이 선정한 십승
지지(十勝之地)에 빠짐없이 들고 있다.
십승지란 천재지변 또는 전쟁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열곳을
말하는데 불가사의다.
내가 잠거(潛居)했던 때는 이른바 지리산 빨치산토벌작전이 종료된지
오래되지 않은 시기였다.
산간 들에서 일하다가 토벌군의 겁탈로 태어난 아이를 비롯해 씻기지
않고 회복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보며 장탄식하던 때였기에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한 많은 여원치
서천리(西川)의 람천변에 조성된 서림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공원에는 돌장승들이 있고 박봉양 공적비도 서있다.
아전(衙前) 출신으로 1894년 민보군(民堡軍)을 조직해 동학농민군의
운봉 진출을 저지한 공적이다.
민보군이 없었거나 농민군이 민보군을 제치고 영남 진출에 성공했더
라면 갑오동학농민혁명사는 얼마나 달리 기록되었을까.
2주갑(周甲) 갑오의 해인 2014년, 1c에 20년을 더하는 동안에 개벽을
거듭 한 시점에서도 민초들에게는 그 때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24번국도를 따라 여원치(女院峙)로 갔다.
이백면 양가리 ~ 운봉읍 장교리에 있으며 팔량치에 상대되는 고개다.
남원과 함양 간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재마루였다.
그래서 운봉은 옛부터 교통요지였다.
내가 오르내리던 1950년대 말의 99굽이 여원치는 대형차량의 교행마저
불가능한 좁은 비포장길이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몇굽이 간격의 한 곳씩 교행처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 곳에서 선착한 차가 대기하기를 마치 단선열차의 교행방식 같았다.
그럼에도 이 고원지대는 전라좌도와 경상우도 간의 교통요로였던 통영
별로의 요지로 1960년대 까지도 그 역할을 충실히 했으며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유효하다.
왜구의 극심한 침범이 운봉현까지 미치던 고려말.
고개마루에는 이름 없는 주막이 있었다.
주막을 들락거리며 행패를 부린 왜구에게 몹쓸 짓을 당한 주모는 그들
에게 더럽혀진 왼쪽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했다.
적을 퇴치하기 위하여 운봉에 당도해 꿈에 한 노파로부터 승전 전략과
날짜를 계시받은 이성계는 대승했다.
그는 꿈에 나타난 노파가 자결한 주모의 원신(怨神)이라고 믿고 재마루
암벽에 암각과 사당을 지어 여원(女院)이라고 불렀다.
이 조각상이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62호인 마애여래좌상(女院峙磨崖
如來坐像)이며 여원치가 된 내력이란다.
주민들이 연재라 부르는 것은 변음일 것이다.
여원치의 주 고객은 전라좌도와 경상우도 주민들이었겠지만 충무공 이
순신장군도 넘었다.
정유재란때(4월 25일/양6월 9일) 운봉 박룡의 집에서 일박했는데 백의
종군하기 위해 합천의 권율도원수 진영으로 가는 길이였을 것이다.
남원에서 운봉-함양-산청을 거쳐.
그랬음에도 다음날 방향을 80리길 남구례로 틀었다.(난중일기)
권율 도원수가 이미 합천을 떠나 순천에 가있다는 말을 듣고 그랬을 터.
남원~남구례도 80리길이므로 남원~운봉의 40리길을 무위하게 돌았다.
여원치를 지나간 장수는 또 있다.
계사년(1593) 8월 22일 명나라의 원군 정왜도독 유정(征倭都督劉綎)이
본진(지금의 경북성주)으로 돌아가던 중 이곳 여원재에서 자신이 모월
모일 이곳을 지난다는 내용의 행적을 바위에 새겼단다.
"萬曆二十二年甲午歲季春月 征倭都督豫章省吾劉綎復過(만력22년 갑오
세계 춘월 정왜도독 예장 성오 유정 복과)라고.
오랜 세월 풍우에 씻겨 알아보기 어렵도록 마모되어 있으며 좌영장 이
민수도 자기 이름과 함께 똑같은 내용의 비문을 개각(改刻)했다나.
투병중인 아들을 위해 내 어머니도 한숨지으시며 이 재를 넘나드셨다.
7세 아들(1941년)의 개복수술을 시작으로 20대 후반까지 못난 아들의
병바라지 하시느라 한이 맺히셨던 내 어머니.
나도 백두대간 북상과 남하 때는 매번 이 재에서 끊고 남원시내로 갔다.
편리한 대중교통편을 이용해 남원의 찜질방에서 몸풀고 다음날 새벽에
대간을 이어갔으니까(메뉴 '백두대간....'8, 9번글 참조)
수정봉, 입망치와 고남산 사이의 백두대간도 여원치를 가로지른다.
재마루에는 예전에 없던 '동학농민혁명유적지백두대간'비가 서있다.
갑오년(1894), 남원의 서부평야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
하고 있었고 동부(운봉) 고원지대는 박봉양의 민보군과 수성군이 여기
백두대간 능선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전라좌도 농민군이 영남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 패함으
로서 농민혁명은 좌절되었으나 양쪽 군사가 모두 나라와 겨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기에 그 분들을 추모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한 평화와 상생을 다짐하고자 이 곳 백두대간에 표석을 세웠단다.
여원치 재마루
강릉쪽에서 오르는 대관령, 풍기쪽 죽령 등의 옛길처럼 여원치 옛길도
있었으나 외지인이 단독으로 그 길을 찾아 오르내릴 형편이 아니다.
가능하다 해도 나는 99굽이 도로를 따랐을 것이다.
버스의 뒷바퀴가 빠져 달아났으니 망정이지 앞바퀴가 그랬더라면 아마
수십번은 굴렀을 사고를 비롯해 아쩔한 추억들이 깃든 길이니까.
7부능선쯤에 자리잡은 여원정(女院亭)에 올랐다.
그러나, 일급 피서정일 뿐 전망은 절망이라 바로 내리막 길을 탔다.
디카의 메모리칩이 바닥남으로서 남원시내 전자제품점 찾아가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