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사건’의 발화지인 진산면 내의 박해시대의 교우촌
진산 사건의 발화지인 진산 지역은 1791년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배출한 곳이고, 박해가 있을 때마다 순교자가 속출했던 곳이다. 순교 신앙이 깃든 요람지며 교우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이곳에 본당을 세워 진산과 금산 지역 선교의 교두보로 삼고자 하였다.
1886년 공소가 최초로 시작되었다. 삼엄한 박해 시대에 진산에는 500~600명에 이르는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대단히 많은 순교자들과 신앙 고백자들이 살았던 진산이 박해가 끝난 뒤에는 백여 명 밖에 신자가 남지 않았다.
진산 사건 이후 진산의 순교자로는 1812년 11월 말경 이여삼 바오로가 금산군 개직리에서 체포되어 홍주에서 장하 치명하였고,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임 베드로가 전주 옥에서 장살되고, 1867년에는 진산 오항동에 살던 이택경의 아들이 전주 옥에서 교살당하고, 1868년에는 송 루치아가 목숨을 바치며 신앙을 증거 하였다.
그리고 1866년에는 최덕겸, 김 베드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김공우, 최첨지 등이 공주에서 순교하고, 1868년에는 장 아나스타시아가 공주에서, 1878년에는 진산 가세벌 출신인 김춘삼 요한이, 1880년에는 장정선이 각각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금산 땅이기는 하지만 진산과 인접해 있는 곳에서도 초대 박해 때부터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이렇게 진산 그리고 인접한 금산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신앙의 요람지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순교 신앙이 깃든 요람지에 교우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지방리에 본당을 세워 진산과 금산 지역 선교의 교두보로 삼고자 하였다. 지방리 성당은 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가장말에 세워졌다. ‘진산 사건’의 발화지인 진산읍내에서 7km 떨어진 곳이다.
지방리는 1914년 진산군이 금산군에 편입되기까지는 진산군이었다. 현 공소 회장인 정한규 시몬의 구전에 의하면 1886년 공소가 최초로 시작되었고, 1927년 이전에는 현 공소 회장의 집을 공소로 이용하였으며, 1927년 11월 5일 지방리 416-7에 공소가 신축되어 대구교구 드망즈(Demange, 안세화, 1875~1938, 플로리아노) 주교에 의해 축성식이 있었으며, 현재 공소 건물은 1991년 10월에 새로이 신축하였다고 하였다. 현재는 교우 수가 30여 명에 불과하나 한때는 300명에 이르러 본당으로서 중요한 사목지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1931년 본당이 폐지되고 다시 되재 본당 소속의 공소로 환원되었다. 그 이유는 1931년 5월 10일 전라도가 한국인 자치 교구를 준비하기 위한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로 설정된 까닭이다. 드망즈 주교는 전라도를 한국인 신부들에 맡기기로 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되재 본당이 본당 신부 공석으로 남게 되자 지방리 본당 이성만 신부가 되재 본당으로 발령받았기 때문에 되재 본당 공소가 되었다.
◆ 김대건 신부의 당질이 살던 지방리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진산면 지방리는 성 김대건 신부의 가계와도 무관하지 않은 역사적인 지역이었다. 김대건 신부의 4촌 동생인 순교자로 추증되는 김선식(金旋植)(1833-? )의 어린 아들 현학이 이곳에 피난 와서 살았다고 한다.
김선식은 김제철의 넷째 막내 아들로 1833년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그 후 1839년 기해박해를 만나 조부인 택현과 중백부인 김제준 이냐시오가 순교를 하자 부친과 함께 다시 충청도 고향 땅으로 내려와서 살다가 그 후 충청도 옥천으로 피난 가서 살다가 병인박해(1866-1873)를 만나 아마 그곳에서 순교한 듯 하며 현재 묘는 옥천 송산에 묻혀있다.
그러자 어린 아들 현학은 병인박해 때 부모님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 문전 걸식을 하고 머슴살이를 하다가 전라도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가세발로 피난을 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4형제(경배, 선배, 창배, 흥배)와 딸 하나를 두었다. 그의 큰아들 경배는 1939년 50세때에 동생 가족들과 함께 전북 완주군 산관면 마치리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참고로 김해김씨 천주교 성인공파(金海 金氏 天主敎 聖人公派)의 기록에 의하면 김제린의 아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병오박해때 순교하고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는 자손이 없이 1873년에 죽으므로 그의 직계 자손은 완전히 자손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김대건 신부의 직계 후손들은 아무도 없고 다만 김대건 신부의 사촌 형제인 즉 작은 삼촌 제철의 아들들인 4형제(의식, 근식, 진식, 선식) 후손들만이 있다.
◆ 감목대리(監牧代理)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를 담당하는 사제(司祭)를 말한다. 주교는 그의 교구 영역을 여러 본당으로 구성된 지구로 구분하여, 마땅한 성직자로 하여금 각 지구를 감독하게 하는데, 이러한 직책에 임명된 신부를 지구장(地區長, Vicarius episcopalis) 또는 지구수석사제(首席司祭) 등으로 부른다. 주교는 이들의 임면(任免)을 임의로 할 수 있다.
지구장은 담당 구역 내의 성직자들의 생활을 비롯하여 성무집행, 교리교육, 교회재산의 관리, 본당문서의 정리 등을 감독하고 매년 교구장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감목대리는 교회법상 지구장에 해당되는 직책이지만, 포교지(布敎地)의 경우 지구장과는 전혀 다르다. 지구장의 임무는 담당 구역에서 성직자의 생활을 감독하는데 그치지만, 감독대리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담당 구역이 조속히 교구로 승격되도록 준비하는 데 있다.
한국 교회에 처음으로 감목대리가 탄생한 것은, 1928년 서울교구의 감목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서울 대목구에 속하는 황해도를 감목대리구로 설정하는 동시, 장연 본당의 김명제(베드로) 신부를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황해도는 끝내 교구로 승격되지 못하고 1942년 황해도 감목대리구의 폐지되었다. 이어 1931년에는 대구 대목구에 속해 있던 전라북도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어, 전주 본당의 김양홍(스테파노) 신부가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되었다. 이 감목대리구는 1937년에 한국인에게 위임되는. 동시에 김 신부도 감목으로 승격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한국 교회에는 많은 감목대리가 탄생하였는데, 이는 방인(邦人) 교구로 육성키 위해서가 아니라, 새 선교단체에 새 지역을 맡겨 교구를 증설하려 했기 때문이다. 충청남도와 안동지역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촉되었고, 충청북도와 인천(仁川)은 미국 메리놀회에 위촉되었으며, 제주도는 에이레 골룸바노회에 위촉되었는데, 이들은 곧 교구로 승격되었다. 감목대리는 한국 교회에서 방인교구의 탄생과 교구의 증설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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