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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이미 제주에 당도해 있었다. 할머니의 잿빛 머리카락 사이에 새로 돋아나는 검고 윤기 흐르는 터럭처럼 연초록빛 풀잎들은 땅을 뚫고 솟아오르고, 샛노란 유채꽃은 이미 만발하여 흐드러지게 들판을 뒤덮었다. 하지만 섬 한가운데 봉긋하게 솟은 한라산의 허리께부터에는 흰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지금 제주에는 채 짐을 꾸리지 못한 겨울과 이르게 도착한 봄이 서로 뒤척이며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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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도 없이 용산역을 출발한 KTX는 광명역을 거쳐 시속 300km를 육박해 간다. 하늘로 치솟은 빌딩들의 키가 잦아들고 다시 자라나길 수차례, 차창 밖으로는 늦겨울의 들판과 야트막한 언덕들이 평온하게 지나쳐간다. 산그늘 어귀에 남아 있는 눈 더미만이 아직 겨울이 다하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열차가 두텁고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소리, 쇠바퀴와 철로의 규칙적인 마찰음, 산하를 가로지르는 창밖의 넉넉한 풍경에 참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수면으로 빠져 들어간다. 용산을 시발역으로 광명, 서대전, 익산, 송정을 거쳐 목포까지는 약 3시간 정도, 단잠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열차는 우리네 들녘 한복판을 가로지르다가는 물길을 건너고, 산이 가로막으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다시 들판으로 나선다. 우거진 수풀처럼 건물들이 솟아오르면 다시 사람이 사는 마을, 여행길 위에서는 자연의 평온함처럼 사람들의 삶도 새삼스레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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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30분. 제주행 크루즈를 타기 위해서는 여객선터미널로 가야 한다. 배 시간이 넉넉지 못하다면 택시를 잡아 타고 기본요금만으로 터미널로 이동할 수 있지만, 목포에 발을 디딘 이상 기차역에서 항구까지의 길목을 걸으며 천천히 음미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목포역 좌측 뒤로 난 도로를 따라 약 5분 정도 걸으면 갑작스레 짭짤한 바다냄새가 끼쳐 오기 시작한다. 옹기종기 모인 선박들의 뱃전을 어루만지는 바다는 지난 항해의 노고를 위로하고, 갈매기들은 그 위를 날며 그들을 치하하는 듯하다. 왼쪽 항구에 눈길을 빼앗겨 걷고 있으면 오른쪽에서 구성진 남도의 사투리가 들려 온다. 목포종합수산시장이다. 배가 갈린 물고기들이 말리는 것인지 파는 것인지 모르게 널려져 있고, 싱싱한 해산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제주로 향하는 마당에 굳이 보따리를 늘릴 필요는 없지만 눈요기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15분간의 도보여행이다.
기차여행과 도보여행이 끝나면 크루즈여행이 시작된다.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크루즈에 올라 2등 침대칸에 짐을 부려 놓고 식사를 마치고 나니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섬과 섬들을 가로지르던 배도 대양으로 나왔는지 멀리 아득한 수평선만을 옆에 끼고 잔잔한 파도를 지그시 누르며 나아간다.
거칠 것이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의 일몰은 왠지 숙연했다. 차가운 해풍은 바다의 표면을 할퀼 듯 쓸며 달려와 갑판에 올라선 승객들을 위협했지만, 태양은 오늘 하루도 너무나 소중했다고 말해 주려는 것처럼 형언할 수 없는 빛의 향연을 하늘 가득히 펼쳐 주었다. 캄캄한 밤바다를 얼마나 달려왔을까.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불빛들이 까물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제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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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 아래로는 노란 유채꽃이 이미 만발했지만 한라산은 여전히 겨울이다. 거뭇한 현무암은 하얀 눈을 더욱 희게 빛나게 하고, 층층이 멀어지며 지워지는 제주의 오름과 들판들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장관을 연출한다. 새하얀 등산로를 따라 정상으로 오르면 다시 겨울의 한복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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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발 1,400m, 묵묵히 산을 오르는 등반객의 뒷모습 2. 한라산, 해발 1,900m의 풍경 |
하얀 길을 걸어 백록담까지
제주시 방면에서 출발해 5·16도로로 접어들면 한라산을 오른쪽에 두고 달리게 된다. 변덕스러운 제주의 날씨 때문에 좀처럼 그 산세를 바라보기 어렵다는 한라산. 언제나 겹겹이 구름들을 주위에 거느리고 있어 온전한 산의 모양을 드러내지 않는 도도한 산이다. 천운이었는지 차창 밖으로 파릇한 기운이 감도는 들판을 넘어 흰 눈을 덮은 백록담이 또렷하게 내다보인다.
소요 시간이 길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는 성판악코스로 길을 잡았다. 성판악매표소를 통과하면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본격적인 겨울산행이 시작된다. 등반로 양 옆으로는 종아리까지 빠지는 새하얀 눈이 나무들 사이로 눈부시고, 완만하게 아주 조금씩 고도를 높이는 지세는 산책을 나선 듯 휘파람이 절로 나오게 한다.
성판악코스는 한라산을 꼭 빼닮았다. 화산분출로 생성된 산답게 한라산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정상인 백록담까지 봉긋하게 솟아오르는 모양이어서 안온하고 잔잔한 인상이다. 등산치고는 좀 시시하다 싶을 정도로 성판악코스 역시 쉬엄쉬엄 올라오라며 손짓을 보내듯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평지를 걷는 듯했던 길은 매표소에서 약 4km에 이르는 지점에서부터 조금씩 오름세를 나타낸다. 심장박동 소리가 빨라지고 입에서는 하얗게 입김이 나오기 시작한다. 땅은 온통 희고, 하늘은 푸르고, 나무와 바위는 거뭇하다. 성판악에서 백록담으로 오르는 길은 단 하나, 산행은 갈등과 선택의 고통을 거두고 묵묵한 발걸음만을 요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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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이 바로 인생인 것이야”
진달래밭(1,500m)에서 맛보는 사발면 한 그릇은 정말이지 눈물 나게 맛있다. 찬 공기를 통과해 온 등산객들마다 허연 김을 내뿜으며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들이키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오죽 인기가 좋으면 한 사람당 2개까지로 판매를 제한했을까 싶다. 진달래대피소는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백록담 등정을 위한 베이스캠프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노곤해진 다리를 풀고 든든하게 속을 채우는 것이다.
진달래밭을 지나면서부터 산은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어디 세상살이가 산책길만 같단 말인가. 사시사철 푸른 구상나무 군락 사이로 가팔라진 길은 이어지고 백록담은 언뜻언뜻 제 모습을 드러내며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지만 손쉽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제 멀지 않았다고 느껴질 때쯤 등 뒤에서 아버지와 딸인 듯한 등산객의 대화가 들려 왔다.
“백록담 거의 다왔나 봐! 한 500m만 더 가면 되겠는데!”라고 딸이 외치자, 아버지가 말한다. “가까워 보이지?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직 먼 거야. 인생도 그래. 그렇게 인생이 우리를 속인단다.” 잠시 후 나타난 이정표는 앞으로 1km가 더 남았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딸의 한숨소리가 들려 왔다.
사실 인생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성급하게 기대하고, 스스로에게 그 기대를 믿게 만들며, 기대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던가. 조급해하지 말고 과정을 사랑하라고 산과 아버지는 말한다. 아직 가깝지는 않더라도 묵묵히 걸으면 더 멀어질 리 없는 게 목표이며 정상이라고 말이다. 무거워진 다리가 백록담으로 향하는 나무계단을 오른다. 중간중간에 멈춰서 숨을 몰아쉬는 사람들, 뒤를 돌아보면 눈밭을 넘어 제주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얼마를 더 올랐을까, 갑작스레 시야가 확 트여 온다. 드디어 백록담. 눈썰매를 타고 내려가면 한참을 달려가야 할 것처럼 웅장한 백록담에도 새하얀 눈이 뒤덮여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