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 / 김영산 시인 시선집
문학연대 시선04 / 백비 / 김영산 시인
김영산 시인 :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하여 『冬至』 『평일』 『벽화』 『게임광』 『詩魔』 『하얀 별』 등의 시집을 냈다. 2017년 『포에트리』 제2호에 평론 「한국 시인들에게 나타난 우주문학론의 징후」를 발표했다. 산문집 『시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다』와 평론집 『우주문학의 카오스모스』 『우주문학 선언』 『우주문학과 시』 등을 펴냈다. 제3회 황진이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중앙대 겸임교수 및 한국예술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 우주로의 회귀를 꿈꾸는 김영산의 시(詩)
과연 김영산 시인의 시는 우주로 회귀하고자 몸부림친다. ‘우주광녀 이야기’에서부터 ‘하얀 별’들의 수런거림, ‘푸른 해’. 블랙홀을 빠져나왔던 시들의 향연이 다시 블랙홀로 향한다. 지구에 갇혀 수명을 이어온 시의 회귀 본능인 것이다. 김영산 시인은 시의 본능에 따라 호흡하고 자꾸 블랙홀로 향하는 내면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처음부터 시는 땅에 발붙일 수 없었던 우주의 별이었던 까닭이다. -편집자 주
●시인의 말
신작시 스물세 편과 시집 여섯 권에서 선한 것이다.
「봄똥」, 「동지(冬至)」 시편을 쓸 때가 22세,
어언 한 바퀴를 돌고 있다.
하지만 삶은 살수록 어렵고 시는 쓸수록 어려우니,
시는 젊은 장르이니
아직도 시는 멀다.
“끝까지 우길 수 없는 시와 끝까지 우기는 시”라는 글을
작년 『현대시』 10월호에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러니 시는 알 수 없는 영원한 ‘물음’이고
시에 대한 절망으로 나는 시를 쓰지만
나의 바람은 ‘시의 환희’가
‘죽음의 환희’로 이어지는 것이다.
● 시집 『백비』가 갖는 의미
김영산 시인이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시의 관념들을 통째로 쇄신하겠다는 의지를 분출한 지 오래되었다. 그가 개척한 ‘우주문학’에는 죽음과 신생의 화염이 격렬하게 불타오른다. 『백비』는 결코 이해받지 못할 이 모험의 운명에 대해 미리 쓰는 조사(弔詞)일까? 아니다. 이는 그의 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만나게 될 백지장 미래를 슬퍼하는 노래다. 그러나 이는 저주가 아니다. 도발이고 격려다. 새로운 시를 읽고 느끼는 것은 삶의 혁명으로 직결되기에.
- 정과리 /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 · 문학평론가
●시집 속에 담긴 시 둘러보기
이미 우주문학 시대에 우리는 접어들었다, 고 나는 쓴다
서울에서 한적한 시골 학교를 오가며
이 어린 새싹들이 나는 좋아
다행인 것은 38년 만에 돌아온 교실이
캄캄한 지난날의
블랙홀이 아니라는 것이다
블랙홀은 너무나 머나먼 곳에 있다
블랙홀은 빛나지 않는 가장 큰 별이라서
블랙홀은 거리를 둬야 별이 된다, 고 나는 칠판에 쓴다
우리 태양이 은하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2억 년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나는 돌고 돌아 돌아온 교실에서
나의 수업은 ‘과학과 시’
‘우주문학은 과학이 아니어서 슬프다’
우리 누리호 우주선이 성공하더라도,
시는 과학이 아니라서
외진 교실에서 우리는 시를 쓰고
내가 공부하던 교실의 둥근 책상에서 36명의 1학년을 만나
앳된 시를 쓰자
앳된 우주문학을 하자
- 「우주문학과 시」 전문
위의 시는 김영산 시인의 시적 전환을 시사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특히 자신이 앞으로 추구해 나갈 세계가 바로 ‘우주문학’이라고 천명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대학 강단에서도 ‘앳된 우주문학’을 가르치겠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이 추구하는 우주문학의 실상을 파악하기는 무척 어렵다. 시인은 물과 기름이었던 시와 우주를 결합하고자 끈질긴 노력을 보여준다. 우리 시단에서 ‘우주문학’은 대단히 새로운 개념이다. 시인은 내 시가 달라졌고 우리 시가 달라져야 함을 역설한다.
팥죽을 쑤다 어머니는 우신다
마당가에 눈이 쌓여 희붐한 저녁나절
시장한 식구들이 안방에 모여앉아
짧은 해처럼 가버린 언니를 생각한다
동생들 학비와 무능한 아비의 약값과 70년대말
쪼든 양심을 위해
십 년이 지나도록 구멍난 생계를 뜨개질하지 못한 딸들을 위해
긴긴 밤 무덤들 위에 목화송이 흰 이불을 덮어주기 위해
- 「동지(冬至) - 김경숙 언니에게」 전문
“짧은 해처럼 가버린 언니”는 누구인가.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 때 죽은 노동자 김경숙 씨를 가리킨다. 이른바 유신 말기였다. 서울시경 기동대장이 지휘하는 1,000여 명의 경찰 기동대가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21살 여공 김경숙(당시 노조 집행위원)이 사망했다. 시인은 위 시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유신 정권 붕괴의 서막이 된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 사건 때 죽은 김경숙의 동생이 되어 그녀의 넋을 위로하기로 한다.
어머니 겨우내
떨며 생솔가지 베던 조선낫으로
그늘진 텃밭 지푸라기 쓸고 눈을 털면
힘살 백인 배추싹들 가슴 멍들도록 살아서
너, 견디기 힘든 시절을 뿌리째 끙끙 앓고 있구나
- 「봄똥」 전문
‘봄똥’은 겨울을 난 이른 봄의 배추인데 이 땅의 민중을 가리키는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왕조시대 때는 상민 이하의 계층을 민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 이후에는 군장성, 고급공무원, 국회의원, 재벌, 장차관(김지하의 시 「오적」에 나오는 오적)의 반대말로 인식되었다. 금력과 권력을 가질 꿈을 꿀 수 없는 서민계층이 민중일 터이다. 촛불혁명의 주체세력 중에는 지식인도 있고 샐러리맨도 있었지만 말이다.
1964년 야반, 아버지는 골병든 아들 위해 무구장 파헤쳐 한 소쿠리
인골(人骨) 가져다가 왕겨 태워 갱엿 환을 만들어 먹였다고
감곡과원 외딴 농가 마당에서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새빨갛게 타는 잉그럭불 들추었다
- 「무구장」 전문
시인이 태어난 무렵의 일이다. 제목은 ‘묵뫼’의 전라도 사투리로,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거칠게 된 무덤이다. 어느 외딴 농가 마당에서 들은 이 이야기는 좀 섬뜩하다. 무연고 무덤을 파헤쳐 인골을 가져다가 왕겨 태워 갱엿 환을 만들어 먹였다고 골병든 아들이 나았을까? 시인은 이런 인간세상의 비극적 상황을 별다른 감정의 이입 없이 담담히 이야기하지만 독자는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이승하 시인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영흥도 농어바위를 위한 기도 ˚ 15
영흥도 소사나무를 위한 기도 1 ˚ 16
영흥도 소사나무를 위한 기도 2 ˚ 17
흰 매 ˚ 18
까치들의 집단적 공격성 - 흰 매 ˚ 20
타조 ˚ 21
배추밭을 둘러보다 ˚ 22
시래기 ˚ 24
야콘 ˚ 26
라일락 한 그루를 나도 갖고 있지 ˚ 27
파도 ˚ 28
게임광 ˚ 29
설동자(雪瞳子) ˚ 30
가을 혼례 ˚ 31
지구의 주소 ˚ 32
제2부
내 십일면관음상 ˚ 37
무구장 ˚ 38
변산 편지 ˚ 39
갈대를 위하여 ˚ 40
갑문에서 ˚ 41
벽화 ˚ 42
벽화 ˚ 43
벽화 - 면회 ˚ 44
벽화 ˚ 45
지하철 벽화 ˚ 46
벽화 ˚ 47
벽화 ˚ 48
오늘의 벽화는 내일 그려지지 않는다 ˚ 49
사슴 ˚ 50
하지(夏至) ˚ 52
백중 무렵 ˚ 53
두 나무 ˚ 54
제3부
봄똥 ˚ 57
어느 신혼부부 ˚ 58
동지(冬至) - 김경숙 언니에게 ˚ 60
이미지 ˚ 61
갈치의 추억 ˚ 62
돼지 - 큰 누님 ˚ 63
사람에게도 하나씩 개펄이 있다 ˚ 64
까치밥 ˚ 65
무광 ˚ 66
깃발 ˚ 67
목소리를 낮춰 얘기하라 ˚ 68
식구 ˚ 70
소상 - 모닥불 ˚ 71
밤꽃 ˚ 72
영산강 - 이 나라 첫 벼농사 지은 영산강변 ˚ 73
영산강 - 마음의 습지 ˚ 74
밥 때가 지나 ˚ 75
나와 당신이 잘 다니던 산 ˚ 76
부치지 못한 편지 ˚ 78
제4부
나는 장님이 되었다 ˚ 81
미인 ˚ 82
물웅덩이와 푸른 해 ˚ 83
푸른 해 ˚ 84
인간공장 ˚ 86
한국 건축 최고 발명품 - 아파트 ˚ 88
문비(門碑) ˚ 91
지구대통령, 죽음은 계산된다 ˚ 96
우주게임 ˚ 98
거꾸러진 우주문학 ˚ 100
우주문학과 시 ˚ 102
우주안경 해부 - 오른쪽 눈은 오른쪽 귀보다 내측이고 코보다는 외측이다 ˚ 104
망상(網狀) 우주세포 ˚ 106
우주혈관의 뇌경색은 지진(紙陳)이다 ˚ 109
우주게임에는 코인이 필요 없다 ˚ 110
우주광녀 이야기 ˚ 112
우주게임 ˚ 114
하얀 별 ˚ 121
하얀 별 ˚ 127
하얀 별 ˚ 133
하얀 별 ˚ 138
모든 죽음은 환희다 – 생비(生碑) ˚ 142
백비 ˚ 143
푸른 해 – 공동묘지를 떠나며 ˚ 152
그녀의 십일면관음상 ˚ 154
눈보라 ˚ 156
[해설] 동지의 눈물에서 하얀 별의 산고에 이르는 길 ˚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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