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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시각으로 액자 속에 담아낸 삶의 수채화
- 원준연 수필집 ‘이순의 경지는 어찌하여’를 읽고
문 희 봉
(수필가·평론가)
1. 들어가는 말
나는 좋은 글보다는 좋은 사람을 더 좋아한다. 원준연 수필가는 글도 좋지만, 사람은 더 좋다. 좋은 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글재주, 글 냄새보다 사람 냄새가 솔솔 배어 나와 나를 취하게 한다. 글에서 전해지는 사람의 냄새는 진실한 사람일수록 진한 향을 낸다. 글 속에 따사로운 사랑의 훈김이 서려 있어 나를 감동시킨다. 원 수필가,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은은한 사람의 향기를 내뿜는 좋은 사람이다. 입을 열 때에는 기사가 바둑돌을 오랜 생각 끝에 적소에 착점하듯이 정확하고 품위 있는 말만을 신중히 골라 쓰는 수필가다.
넝마주이가 쓰레기들 속에서 쓸 만한 물건을 줍듯 그는 무한한 어휘의 밭을 뒤져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쓰고 있다. 일상사의 이면(裏面)을 신선한 시각으로, 미사여구(美辭麗句)는 최대한 자제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만으로 솔직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독특한 시각으로 삶을 액자 속에 담아내는 기교가 능숙하고 언어의 행진이 현란하다.
수필은 느낌의 세계를 뛰어넘어 훨씬 높은 곳에 존재하는 깨달음의 세계다. 거기에 도달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며, 평생 정진하여도 닿을 수 없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 수필가의 제3수필집을 대하면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수필은 함축과 상징의 구축물로 융합되는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수필가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와 주제를 이끌고 나가는 힘이 뛰어나다. 언어 조탁 능력의 탁월, 끈적거리는 점액질 같은 수필의 찰기와 흡인력을 거느리고 있다. 원 수필가의 수필은 그래서 한 편 한 편이 절창이다.
수필다운 수필, 진 수필 한 편을 생산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통과 출혈을 거듭하는가? 골수를 깨고 뼛속 깊이 흐르는 진액이 솟아난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급한 경사를 올라야 하는가? ‘이순의 경지는 어찌하여’는 이런 어려움을 모두 이겨내고 생산한 수필들이기에 독자들의 환호를 사고도 남음이 있다.
원 수필가의 수필은 일조일석에 만들어진 기적의 선물이 아니다. 항상 머릿속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생각의 산물이요, 오랜 구상에서 태어난 결과물이다. 원 수필가의 제3수필집을 읽으며 ‘그는 왜 글을 쓸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깊은 사랑의 우물을 파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그는 왜 수필을 사랑을 하는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팔팔 살아 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일 것이다. 산(生) 글을 쓰고, 산(生) 사랑을 하는 것이 그의 삶 전부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수필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쓰는 글이다. 숭늉 맛이 나는 수필, 사탕 맛이 나는 수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독자들이 구수하고 달콤함에 이끌려 읽고 싶은 충동을 맛보게 된다. 한 편의 수필을 생산하기까지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수필은 자신의 감정과 세계관을 보편화하는 것이다. 원 수필가의 수필은 서정과 서사를 사유로 이끌어가는 힘이 여느 수필가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그럼 작품 몇 편을 감상해 보자.
2. 수필 작품 속 여행
가. 이순의 경지는 어찌하여(육순을 넘어)
사십 이후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 삶은 순간순간이 모두 중요하다. 한 권의 책처럼 인생은 시작과 내용전개와 결말이 조화를 이루어야 멋진 삶을 살았다고, 의미 있는 생(生)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육십 이후는 더말할 것도 없다. 살다 보니 벌써 육십을 넘겼다는 수필을 읽고 나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한 사람을 데려와서 링컨에게 추천하며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링컨은 그 추천한 사람을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서 거절한다. 친구가 그 이유를 묻자 링컨은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네.’라며 거절한다.” 나이가 들다 보면 자기 삶과 인품이 그대로 투영되어 얼굴에 드러나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다.
요즘을 일컬어 ‘백세시대’라고 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백세시대는 꿈만 같은 말이다. 결단코 올 것 같지 않던 백세시대가 우리 세대의 코앞에 와 있다. 분명 축복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백 세까지 산다는 것은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더구나 건강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제 막 육순을 맞았으니, 인생 마라톤의 전환점을 조금 더 지났다. 옛날 같으면 공자의 이순〈耳順;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을 터득해야 할 나이인데, 아직도 이에 미치지를 못하니 헛나이만 먹은 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 이순의 경지는 어찌하여 - 중에서
자기 얼굴만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쓰는 말과 글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 말과 글에도 그 사람의 삶과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기 얼굴'뿐 아니라, 말과 글도 함께 관리할 줄 알아야 비로소 겉과 속이 같은 인품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미몽에서 깨어나며 드는 생각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보다도 긴 남은 인생의 여정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단상 - 중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당신한테 묻는다면 무어라 답하겠는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우리는 살아야 한다. 선한 목표와 꿈이 있기 때문에 살아야만 한다. 고난과 역경이 절망의 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임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이 사랑이다. 가장 큰 승리이다. 인생은 지금부터 제2막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 87세로 타계하신 선친께서는, 선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장수 유전인자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당신 스스로 건강관리를 참 잘 하셨다. 홀로 되셔서도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하시는 등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다. 또 좋아하시는 테니스를 못 치는 날에는 여든을 넘기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팔굽혀펴기 50개와 테니스라켓 스윙을 500개씩이나 하셨다. 대단히 어려운 각고의 노력이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비교적 건강하게 장수하신 것 같다. - 신역술인 – 중에서
나. 가정은 고향이다(멘토와 멘티)
부부가 사랑하면 부부는 물론 자녀들까지 건강해진다. 그래서 더 행복해지고 더 오래 살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한 부부에게는 하나가 더 필요하다. 그건 바로 '존경'이라는 보석이다. 서로 존경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과 존경이 두 바퀴처럼 늘 함께 가야 장수해도 의미가 있고, 또 그만큼의 행복이 뒤따른다. 가슴높이를 맞추려면 한 사람은 몸을 낮추어야 한다. 키 작은 아이가 깨금발을 하는 것보다 키 큰 어른이 몸을 숙이는 것이 아무래도 좋다. 부모란 늘 자녀의 가슴높이까지 내려가야 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자녀의 심장 박동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부모의 사랑과 바람을 자녀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 새겨 주어야 한다.
오늘에서야 펼쳐보니, 뜻밖에도 부모님의 연서가 한 통씩 들어있다. 어머니가 보내신 하얀 서신의 봉투는 관제엽서보다 작은 크기인데, 풀칠을 하는 부분이 톱니 모양을 하고 있고, 그곳에는 파란 줄이 장식되어 있어서 마치 작은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예쁘다. 언뜻 보아도 고급스럽다. ‘親展’이라고 쓰여진 겉봉에는 아버지의 주소와 존함이 한자로 아주 정갈하게 쓰여 있다. 속지는 누런 갱지에 붉은 줄이 쳐져 있는데, 써 내려간 글씨가 참으로 예쁘고 깔끔하다. 어머니의 성격이 글자에, 문장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맞춤법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고, 한자가 더러 섞여 있어서 손자대(代)로 내려가면 뜻의 전달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뚱맞은 생각도 들었다. - 연서에서 그려보는 어머니 - 중에서
멘토가 있으면 좋다. 자기 아들딸처럼, 제자처럼, 친구처럼 전인적으로 돌봐주는 사람. 때로는 내가 꿈꾸었던 것 이상의 꿈을 이루도록 챙겨주고 지원해주는 사람. 진정성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가슴이 따뜻하고, 세상 보는 눈이 긍정적이고, 인내할 줄 알며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 이런 멘토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행운아이다. 원 수필가님의 멘토는 바로 부모님이다. 수필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수필과 생을 같이 하신 아버님의 영향을 받아 훌륭한 수필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원종린수필문학상 운영위원장으로 대한민국의 수필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분이다.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가 처음 안아주던 감촉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때의 그 편안함과 따뜻함이 아스라한 기억 저편의 영혼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자식의 정서와 품성을 매만지고, 그 너머의 무의식과 본성까지를 지배하고 있다. 자식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 이전에 받았던 사랑과 냄새와 목소리와 어루만짐이 오늘의 원 수필가를 있게 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유언은 자손들에게 조그만 폐도 끼치지 않으려는 고뇌가 엿보여서 더욱 가슴이 뭉클하다. 선친의 유언장에 비하면 나의 미리 쓴 유언은 미흡한 점이 너무도 많다. 다시 잘 다듬어야 할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부모님의 크나큰 사랑을 다시 한번 더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크나큰 사랑 - 중에서
빛은 어두움을 이긴다. 아무리 작은 불빛도 어두움을 몰아낸다. 한 사람이 밝은 빛을 내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빛이 스며든다. 반대로 한 사람이 두려움에 떨면 그 옆의 다른 사람도 덩달아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밝은 빛 하나가 세상을 밝힌다. 그건 다름 아닌 용기, 긍정, 배려, 감사, 사랑이라는 빛이다. 마음으로 보되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긍정의 마음으로 보느냐, 부정적 마음으로 보느냐.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느냐, 미워하는 마음이냐. 감사하는 마음이냐, 원망하는 마음이냐. 그래서 마음은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으로 보아도 껍데기만 보인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한 사랑이며,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러한 깊은 사랑을 받고 자라는 우리들은 분명 행복하다. 이 사랑을 우리들의 손으로 세상에 되돌려줄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좀 더 아름답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 따뜻한 세상 - 중에서
다. 기름 없는 등잔엔 점화가 안 된다(초심)
정말 짜증 나고 때로 내가 한심해 보이는 순간까지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상황을 포기한다기보다는 나의 실수를 용서하고 상황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있는 대로 화를 내거나 그것을 되뇐다고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낙심할 것도 없다. 나 있지 않은 길을 간다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 절벽도 만나고 돌밭도 걷지만, 그 고통과 수고 덕분에 없던 길이 생겨나고, 새로운 지도가 만들어진다.
요즘처럼 자유분방한 세상에서, 물려받은 종가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종가음식을 지키며, 육백 년 예법에 어긋남이 없이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죽하면 어려움의 대명사로 ‘종부의 길’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 종부의 길 – 중에서
희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생겨나는 것이 희망이다. 희망은 희망을 갖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희망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도 희망은 없다. 사소한 꿈을 갖고 사는 것도 큰 행복이다. 소소한 꿈도 빼어난 그림 한 폭도 작은 밑그림에서 시작된다. 밑그림이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고치고 다듬고 매만지면서 점차 좋아지게 된다. 꿈을 적는다는 것은 인생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며, 고치고 다듬고 매만지다 보면 그 밑그림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 초심을 지니고 살다 보면 자신의 생이 부유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시대인들 마찬가지이겠지만, 세상은 늘 어수선하다. 요즘 세상은 유난히 가짜뉴스나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것 같아 몹시 씁쓸하다. 묻힌 진실이 밝혀지기도 어렵거니와, 나중에 밝혀진들 가슴만 아프다.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신의 손 - 중에서
누군가 첫발을 내딛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면 길이 생긴다. 그곳이 숲이면 숲길이 되고, 그 길에 꽃을 심으면 꽃길이 된다. 어느 날, 좋은 사람들이 만나 마음을 나누며 꿈과 희망을 노래하면 아름다운 길(道), 꿈길이 된다. 희망의 길이 된다. 그 길을 원 수필가가 만들고 있다. 강물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인다. 그러나 강물이 스스로 파문을 짓기도 한다. 미세해서 자세히 들여다 봐야 아는 것이다. 우리들도 가끔은 타인에 의해 흔들리기도 하고 나 자신도 알지 못할 어떤 것에 흔들리기도 한다. 신경림의 시 ‘갈대’와 같이 그렇게 조금씩 흔들리며 가는 것이다. 다만 얼마나 중심을 잡고, 나를 다스려 가는가에 따라 삶은 크게 달라진다.
구랍, 우인으로부터 작은 액자를 선물 받았다. 그 속에는 ‘신종여시(愼終如始)’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문구로, 일을 마칠 때까지 처음처럼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의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흔히 회자되는 ‘초심, 처음처럼, 한결같이’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뜻이란다. - 신종여시(愼終如始) - 중에서
라. 천사는 날기 위해 다리가 필요하지 않다(‘내면의 미’ 추구)
일상에 젖다 보면 나를 모르고, 나를 잊고 산다. 내가 과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목표도 잃은 채 떠밀리듯 살아간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특별한 인연으로 '진짜 나'를 만나면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황홀해진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황홀경'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눈부신 깨달음의 재료이다. 시련, 고통, 괴로움의 폭풍도 마찬가지이다. 한때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고 고통이었으나, 한순간 깨닫고 나면 빛으로 변한다. 깨달아야만 비로소 빛이 된다.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된다.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이다. ‘눈썹기와’란다. 내 눈에는 낙타의 긴 눈썹보다도 더 예쁘게 보인다. 용마루 밑에 눈썹기와가 달린 연유를 알아보니, 예로부터 이 지역에는 비가 많이 내려서 용마루 안쪽으로 비가 스며들어 지붕이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란다. 선조들의 지혜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눈썹기와 - 중에서
가끔은 내가 아닌 것처럼, 누군가의 조종에 움직이는 인형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그것이 최상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도 자신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를 이끄는 것은 바로 ‘나’라는 생각으로 나의 주관은 확실히 가지고 자신 있게 나아가야 한다. 내 안의 마음의 평화는 마음공부의 최고 단계이다. 그만큼 오랜 명상과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바깥 조건에 따라 내 일상이 흔들리고 출렁이면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얻었다 할 수 없다. 내 마음 안에 고요함과 감사가 넘치면 세상도 평화롭고 행복하다. 원 수필가의 수필이 그렇다.
흔히 회자되는 말이 있다. 외모도 중요하지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을 때 미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참다운 아름다움의 미인이 될 것인지 새해를 맞이하여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 눈썹기와 - 중에서
마. 삶에 꼭 들어맞는 톱니바퀴(인간관계)
사람 사이에 다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되도록 다툼 없이 사는 것이 좋다. 한 번 다투기 시작하면 다툴 일이 많아진다. 다툼의 원인은 많은 경우 상대방에 있기보다 내 안에 있기 쉽다. '나'를 좀 내려놓고 상대방에 귀 기울이며 이해하려 애쓸 때 다툼도 줄어들고 거리도 좁아진다. 행복은 멀리에 있는 것일까? 비싼 값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행복은 내 주변에 있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행복은 바로 내 마음의 주머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언제고 열어 꺼내볼 수 있다면 그건 행복이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메일이 왔다.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나를 다시 만난 것이, 선생의 최고의 기쁨이다.’라고 쓰여 있다. 지인이 멀리서 당신을 찾아 왔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 하겠는가? 선생의 건강한 모습을 뵈니, 나 또한 매우 기뻤었다. 이런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 중에서
잘 맺은 인간관계가 나를 키워준다. 섭리 같은 특별한 만남의 씨앗이 장차 좋은 열매를 알알이 맺으려면 혼이 담긴 따뜻한 눈빛과 깊은 사랑으로 상대방의 성장을 축복하고 꿈이 이루어지도록 응원하며, 힘들고 외로울 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가 되어주면 된다. 소중한 만남을 소중히 지켜나간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만물은 저마다 파동이 있다. 그 파동에 따라 서로 공명하며 메아리를 일으킨다. 사랑은 사랑의 메아리를, 미움은 미움의 메아리를 낳는다.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미움조차도 용서와 사랑으로 전환시켜 메아리치도록 자기 내면의 공간을 닦고 비우면 좋다.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효과적이다. 상대를 감싸 안으면서도 자신의 위엄을 잃지 않는 것, 경직되지 않는 것, 그것이 부드러운 카리스마이다. 이런 인간관계는 서로를 위해 좋은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인생 후반부를 살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가끔씩이라도 만나서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를 정겹게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오랜 기간 떨어져 있어서 이야깃거리도 많을 것이다. 좋은 친구를 더 이상 멀리 두고 싶지 않다. - 어떤 우정 - 중에서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평생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더러는 그 상처를 딛고 더 크게, 더 높게 솟구쳐 오르는 사람도 있다. 상처의 원인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은 치유의 첫 과정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용서와 화해와 사랑과 감사로 씻어내는 것, 치유의 다음 단계이다. 상처가 아물면 '아팠던 흔적'이 삶의 훈장으로 바뀐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처음 만나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아도 언젠가는 헤어지며 각자의 길을 가곤 한다. 늘 '내 편'이 되어 평생의 멘토와 멘티로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보다 더 큰 빽은 없다. 세상이 두렵지 않다. 완전한 용서의 첫걸음은 나를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조건이 없다. 이유도 필요 없다. '나를 용서하지 못한 나'를 무조건 용서하고 그 다음, 이 시간 이전의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되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용서는 나를 살려낸다. 옆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린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초석이다.
흔히 인생을 동전의 양면 같다고 하는데, 긴 여정에서 한쪽의 면만 나오는 경우는 없다. 어느 쪽이 나오든 낙담하지 말고 마음을 굳게 먹고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은 아닐는지! - 동전의 양면과 인생 - 중에서
바. 지나친 문명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사랑이 흐르는 사회)
우리는 수많은 지식과 정보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지식의 양만큼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도리어 많은 것들을 잃어가고 있다. 현대 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병들이 늘어나고, 지식이 손도 대지 못하는 갈등과 불안들이 만연되어 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현상이겠다. 사랑이 그 속으로 들어가면 해결되는 것이리라.
이런 정도의 인간의 능력 발휘만으로도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가공할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특히 막대한 정보를 탑재한 인공지능의 기계사람(로봇)이 만들어지고, 그 기계사람이 스스로 진화하는 사회가 연출된다면, 우리 후손의 삶은 어떨 것인지…. 기계사람의 지배를 받으며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 기계사람이 지배하는 세상 - 중에서
요즘은 옆집은 있어도 이웃이 없다고 한다. 이웃이 없는 오늘의 삶, 오늘의 문화는 외형으로는 풍족해 보여도 너무나 삭막하다. 훈훈한 사랑과 정이 없어 마치 사막지대에 사는 것 같다. 예전에는 옆집뿐 아니라 온 동네가 나의 이웃으로 살았다. 온라인처럼 밤이나 낮이나 항상 대화와 정이 통했고, 특히 애경사 때는 내 일처럼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았다. 기계에 의존하는 사회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로봇이 거의 매일 매스컴에 등장하고 글의 소재로도 여기저기 오르고 있는 것을 보면, 거역할 수 없는 로봇의 시대인 모양이다. 멀리서 기계사람이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적응이 쉽지 않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 그나마 그런 시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이를 먹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 기계사람이 지배하는 세상 - 중에서
많이 아는 만큼, 경험이 많은 만큼, 인격이 높은 만큼, 지혜로운 만큼, 드러내 요란을 떨기보다는 좀 더 겸손하고 신중하면 좋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다 같은 뜻이겠다. 온실의 화초는 약하다. 조금만 센 바람이 불어도 힘을 쓰지 못한다. 인재 역시 온실에서만 키우기 어렵다. 그런데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생각하는 조각상처럼 고독해 보이던 녀석과 나는 특히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나도 사주에 천고성(天孤星)이 들어 있어서 그런지, 쓸쓸하고 외로운 시간을 많이 보냈었다. 자네는 ‘원숭이’라고 불리고, 나는 ‘원준연’이라 불리니, 우리는 성씨 또한 같지 않던가. 우리 지구상 어디에서 살던 힘을 내서, 붉은 원숭이해를 자네와 나의 희망찬 새로운 해로 만들어 보세! - 닮은 꼴 원숭이 - 중에서
사.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내일을 가꾼다(애국심)
평자가 한국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23전 23승 무패라는 기록은 전 세계 해군 역사에도 없다. 비결이 뭘까? 간단하다. 이길 때까지 준비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나기 1년 전부터 거북선을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 시키고 군량미를 모았다. 승리가 우연이 아닌 99%의 필연이 달성될 때까지 준비한 것이다. 23전 23승! 전승! 무패! 그것도 이길 만한 조건이 아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최악의 조건에서 거둔 기록이기에 더욱 놀랍다. '철저한 준비'도 전승의 요인이지만,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 더 마땅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열악한 조건에서도 진실함과 지혜로움과 구국일념의 애국심으로 신명을 다 바치면 하늘이 움직여 도와준다. 그것도 전승, 무패로! 대마도에서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을 보면서 우리나라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두 분 임금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나라를 위한 구국 일념에 대한 각오는 누구나가 갖는 용기는 아니다. 원 수필가의 아버님도 나라를 위한 애국심이 남달랐던 분이다.
아버지가 겪으셨을 쓰라린 고통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아 학병사기(記)를 읽는 내내 몇 번이나 가슴을 움켜쥐었는지 모른다. 그때 당한 물고문과 매타작 등으로 아버지의 건강은 많이 나빠져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건강을 평생 각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중략) 아버지가 겪었던 진실은 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떳떳한 독립무공자의 자손임을 긍지로 여기며,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 독립무공자의 자손 - 중에서
3. 나가는 말
본 수필집을 모두 섭렵했지만 모두 소개하지 못함이 아쉽다. 작품의 주제는 다양하게 망라되어 있는데 다 수용하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스포츠, 소풍의 마지막, 종이책의 푸대접, 존엄, 칭찬, 사소한 꿈 등 다양했다. 그중에서 몇몇 주제만을 골랐다는 것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
원준연 수필가의 조각품은 영원할 것이다. 그에게는 펄떡거리는 물고기의 비늘 같은 그런 번득임이 있기 때문이다. 갓 구워낸 막대 빵을 안았을 때처럼 원 수필가의 수필은 따뜻하다. 생활 속에서 가져온 소재이면서도 꾸밈이 없이 밝고 따뜻해서 좋다. 고달픈 현실보다는, 어두운 면보다는 긍정적이고 사회의 밝은 면을 다루었기에 그지없이 아름답고 따뜻하다.
과장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번득이는 기지가 있고, 그윽한 방향(芳香)이 흐르는 수필을 우리는 일급수필이라 부른다. 재미와 감동은 수필의 향이요 맛이다. 그 재미와 감동은 지성을 촉구하는 재미요, 사랑을 느끼게 하는 감동이다. 원 수필가의 수필이 바로 그렇다.
원 수필가는 한 줄의 글을 쓰는 것이 피를 말리는 아픔이라면, 한 줄의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뼈를 깎는 아픔이라 생각하며 수필을 썼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원 수필가의 수필은 자신 내면을 관조하는 문학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보다 산뜻하고 소설보다 감미로운 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수필은 현실 속에서의 이상 구현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다. 조그만 얘깃거리밖에 안 되는 소재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하는 안목을 갖는 것이 인간적일 때 비로소 수필은 가치를 띠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고, 잔잔한 기쁨이나 사소한 바람(願) 같은 것을 엮은 수필집인데 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도 한편의 아름다운 수필로써 생명의 꽃을 피우기 위해 밤을 지새울 원 수필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희망을 가꾼다.’는 말이 있다. 원 수필가는 수필을 가꾸는 분이기에 내일은 조건 없이 밝을 것이다.
끝으로 제4, 제5수필집 출간을 기대하며, 한국 수필 문단의 거목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