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때는 이래저래 각종 도감들이 난립하다시피했다. 고려의 영향으로 인해 상설기구도 도감으로 부른데다가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했기 때문에 궁궐을 지을 때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 종묘를 옮겨야 할 때는 이안도감(移安都監),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뒤 도성(都城)을 축조할 때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이 설치됐다.태종 때의 도감들 중에서는 오늘날 청계천의 모태가 된 개천을 파기 위해 태종11년 윤12월14일 설치된 개거도감(開渠都監)이 특기할만하다. 개거도감은 이듬해 2월15일 폐지됐고 곧바로 오늘날의 초대형 시장에 해당하는 시전(市廛)건설을 위한 행랑조성도감(行廊造成都監)으로 개편했다. 국초(國初) 사회 인프라 구축을 위함이었다.세종8년(1426년)에는 도성에 갖은 화재가 발생하자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고 이후 성곽보수를 담당하는 기능까지 추가돼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으로 확대돼 세종16년(1434년) 청계천 보수작업을 수행했다. 조선시대의 도감은 특히 국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큰 역할을 했다. 일단 국왕이 승하하면 장례행사 전체를 주관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이 설치되고 동시에 장례기간 동안 시신이 안치된 빈전의 각종 제례는 빈전도감(殯殿都監)이 맡아서했고 장지문제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소관이었다. 조선시대 전체를 거쳐 가장 빈번하게 설치됐던 도감도 바로 이 국장 빈전 산릉도감이었다.경우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도감이 설치되면 위원장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는 영의정이 맡았다. 오늘날의 위원격인 제조(提調)에는 전현직 정승이나 해당기관 판서급이 임명됐다.태조 이성계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는 세조7년(1471년) 6월16일 불경의 번역 및 간행사업을 담당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했다. 세조가 얼마나 간경도감을 중시했는지는 그가 화재방지를 위해 간경도감 주위의 민간23채를 철거토록 한데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간경도감은 유교의 부흥을 주도한 성종 때 폐지됐다.대부분의 도감은 임시직이면서도 국왕이 중시하는 사업을 주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도제조나 제조를 맡으려고 경쟁이 심했다. 그러나 단 하나, 서로 맡기를 꺼리는 도감이 있었다.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하는 책임을 맡는 '영접도감(迎接都監)'이 그것이다. 성질 못된 사신이라도 걸리면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사신에게 은밀히 청탁해 조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얻어내는 뒷거래로 보상을 받기도 했다.실록에 '도감'을 검색해보면 광해군 때가 1400여건으로 가장 많다. 50년 넘게 재위한 영조의 경우에도 400여건밖에 되지 않는데 10년 남짓 왕위에 있었던 광해군 때 1400여건은 아무리 전후복구 사업을 위해서라고 하나 남설(濫設)이었다. 당시의 감사 및 언론기관인 사헌부와 사간원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광해군2년 3월의 기록이다."근래에 본래의 관원 이외에 필요치 않는 관원을 별도로 마구 설치하니, 매우 구차한 일일 뿐 아니라 허다한 늠록(�菉-혈세)의 낭비가 적지 않습니다."
'위원회의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조선일보 2008.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