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8:1-11)
[화면3 간음하다 잡힌 여인-렘브란트]
혹시, 비밀스럽게 죄를 짓다가 들켜 창피를 당한 적 있습니까?
그 때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서 질문을 합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무엇을 알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모세의 법대로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당시 로마법에 유대인은 죽이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되며, 동시에,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과도 맞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명백한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진퇴양난에 빠뜨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의외의 행동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 많은 추측들이 있습니다. 땅에다가 사람들의 죄 목록을 썼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바로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틈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흥분한 군중들의 흥분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다그쳐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군중들의 흥분된 모습과 예수님의 침착한 모습을 연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려는 군중들의 들떠있는 모습과 사람을 살리려는 예수님의 고요한 모습이 대조되어 느껴집니다.
이윽고 예수께서 천천히 일어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조용한 한 말씀은 천지를 울리는 사자의 포효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침착하고 고요한 예수님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이었을까를 느껴보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느끼기는 단순히 이 여자를 살리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 죄인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비장한 각오가 예수님을 사로잡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고요하고 침착하시면서도, 무언가 군중들을 압도하는 권세에 흥분된 군중들은 서서히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반전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끌고 와서 소리를 지르면서 아마 돌을 손에 쥐어 들었겠지요? 그리고 막 돌로 치려는 자세였을 것입니다. 이 공격적인 군중들을, 마치 풍랑 이는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하니 풍랑이 잔잔해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죽이려는 무리가 우리를 에워쌀지라도 그들을 잔잔하게 잠재우시는 주님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 떠나갈 때까지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 계속 쓰고 계셨습니다. 그 여자만 혼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낮은 자세와 기다리심을 볼 수 있습니다. 서두르시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과 일대일로 남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이 여인을 괴롭히는 무리들이 다 흩어졌으니 예수님께서는 하실 일을 마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 여인을 살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보여주시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십니다. 어떻게 일어나셨을까요? 그의 일어나심도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이 담겨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 끌려온 여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슬픔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절망과 비참이었을 것이었습니다. 아니면 분노와 미움이었을까요? 그런데 분위기가 달라짐을 느끼면서 어떤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볼에 스치는 바람결도 다르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이분, 과연 이분은 누구일까? 그분에 대한 신비한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이 음성은 이 여인이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랑의 음성이었을 것입니다. 이윽고 이 여인은 고개를 들고 대답을 합니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보다 복된 고백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그들에게 정죄함을 받을까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은 많은 죄들로 인하여 얼마나 불안해하며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눈치를 보며,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세월로 인하여 얼마나 피곤하고 곤고합니까?
[화면4] 마틴 루터-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마르틴 루터(Martin Lutter)가 종교개혁을 할 때였습니다.
자기 서재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 본 루터는 기가 질렸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맥이 탁 풀렸습니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리기까지 했던 죄를 다 적은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줍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요사이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루터는 "그렇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런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바로 살아! 너 이 죄 값을 어떻게 할래?
이때 루터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는데 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하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새 힘을 얻어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여있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그때 마귀는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보충]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1.10 ~ 1546.2.18] )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1517년 면죄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로마서8:1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는 무리들을 하나하나 다 물러가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누르고 있는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을 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이렇게 답변을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요절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둘을 던져라.”고 하셨습니다. 어쨌든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이 여자를 율법적으로 처단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죄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공의가 행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로 갔습니까? 공의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뜻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네가 받은 벌을 내가 대신 받겠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을 때에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불쌍한 한 여인을 살려주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이 여인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죽음의 법에서 해방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받아 마땅한 정죄를 당신이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도 바리새인도 모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나를 정죄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갈2:20에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는 나는 누구입니까? 죄 많은 여인, 이 여인을 정죄하는 바리새인, 그리고 이 여인을 살리는 예수. 나는 이 중에 누구일까요?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 저자인 마크 킨저는 다음과 같이 죄책을 말했습니다.
"죄책은 두 가지 정서적 범주로 나뉜다. 곧 뉘우침과 자기 정죄이다.
뉘우침은 잘못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편 자기 정죄는 자기 연민, 실망, 낙담으로 이끄는 정서적 혼란을 말한다.
이것은 "나는 아무 가치도 없어" 라는 일종의 자기혐오이다. 참된 죄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가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용서에 의해서만 깨끗하게 제거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죄책감에서 완전한 자유를 주시고자 함입니다. "너는 스스로 너 혼자만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하겠지만, 보아라 모두 인간은 같은 죄인이란다.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너와 다를 바가 없단다. 스스로 한하고 스스로 포기하며 자신을 질책하지 않길 바란다. 너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지었던 것이란다. 이제 아무도 너를 손가락질 할 사람이 없지 않니? 일어나거라! 다시 시작하거라! 전혀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두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출발하거라!"
법적이고, 사회적인 시각에서 이 여인은 더 이상 유일한 죄인이 아닙니다.
남보다 못한 여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것을 알려 주시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딸이 죄의식에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나머지 인생을 저주 하며 사는 것을 가슴이 아파서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더 아름다운 미래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 거룩하게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 여인에게 보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 여인의 입으로 그것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질문한 것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11절).
그렇습니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아무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여러분들이겠습니까? 주님 앞에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잡혀 온 것이든 끌려 온 것이든, 스스로 괴로워서 달려온 것이든 주님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눈물로 회개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은 결코 박대하시지 않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마저 정죄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먼저 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리려고 먼저 돌을 들어서 여인을 쳤으면 정의의 사자로 길이 남았을지 모릅니다.
단호하게 죄를 용납지 않으시는 거룩한 분으로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영웅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11절).
이 말씀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지금 이 여인은 지방법원이나 고등법원이나 대법원에서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의 선언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분입니다. 심판하는 권세를 하나님께 받은 분입니다.
닉슨의 보좌관이던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이 워터 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오해를 받고 감옥 행을 앞두고 삶을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변의 몇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방도도 못 찾았습니다. 그 후 그는 친구 C.S 루이스(Lewis)가 넘겨준 '단순한 기독교'(Mere Christian)라는 책을 읽고 자서전을 썼는데, 자서전 '거듭나기'(Born Again)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내 속에 평안이 임했다. 정치가 내게 약속해 주지 못한 평안이 내게 임했다. 이 무슨 평안인가? 이 무슨 기쁨인가? 두려움도 사라졌다. 죄책감도 사라졌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2절에 이렇게 바울은 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고 그 8장 마지막에서 이렇게 이 은혜를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한 마디 더 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이 여인에게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 가능함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죄의 노에가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여인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완전한 새로움의 감격을 가지고 성전 문을 나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미국에 35세 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젊은 목사님으로 텍사스주에 아주 큰 교회를 시무하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사냥을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정 조준해서 동물을 쏘았는데 쏘고 나니 그것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목사님 얼마나 마음에 고통을 가졌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은 고통하고 절망하다가 사임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임을 하고 나자 교인들 중에서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젊은 목사를 내보내면 사람 죽인 목사를 어디서 받겠는가. 그러니 우리 이번이 참 중요한 기회다. 한번 목사님을 용서해주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합의를 하고 목사님을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다음부터 그 목사님의 삶의 철학은 용서였습니다. 용서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가 미국 교회 중에 대 교회인 달라스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90세까지 54권의 책을 쓰고 아름답고 멋지게 목회를 마무리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