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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호성지란?
천호성지는,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교우촌 천호(天呼) 공소의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있다. 천호공소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하느님을 부르며 사는 신앙 공동체로서 존재하고 있고, 천호산 역시 이름 그대로 순교자의 피를 담은 병(甁)의 구실을 하고 있다. 2. 성지의 조성 과정 천호성지와 그 주변의 산은 본래 고흥 유씨 문중의 사유지로서 조선조 때 나라에서 고흥 유씨 문에 하사한사패지지(賜牌之地)였다. 이러한 남의 땅에서 사는 신도들은 산 자들의 집이건 죽은 자들의 무덤이건 언젠가는 쫓겨나야 할 처지였다. 그러던 중 1909년 뜻하지 않게 이 땅을 매입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되재본당 목세영 신부를 중심으로 12명의 신도들이 어렵사리 돈을 마련하여 150 정보의 임야를 매입했다. 이렇게 해 서 공소신도들은 생활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미 모셔진 순교자들의 묘소들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3. 천호공소(다리실·용추네) 천호공소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는 다른 지명을 갖고 있는데, 박해시대에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고 불렀다. 다리실은 월곡(月谷)이라고도 썼으며, 용추네는 본래 용이 등천한 내(川)가 있다 해서 용천내라고 했는데 용추네는 용천내가 변한 이름이다. 천호(天呼)라는 행정명(行政名)은 후대에 교우마을이 형성되면서 용천내가 천호로 바뀐 듯하다. 4. 다리실과 성 손선지·성 한재권 천호 성지에 묻힌 순교 성인 중, 손선지 베드로와 한재권 요셉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피신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중 다리실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옮겨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1866년 12월 13일 손선지 성인이 처형된 후 그의 아들 손순화(요한)는 70여세 된 할머니 임 세실리아와 어머니 루시아와 동생들을 데리고 천호마을로 다시 피신해 왔다. 이 때 성 한재권과 성 정문호의 가족들은 무능골과 인접한 시목동으로 피신해 왔다.
1868년(고종 5년, 무진년)에는 다리실에도 박해의 손길이 뻗혔다. 그래서 6월 9일 문회장, 이요한, 김치선, 김영문(요셉), 장윤경(야고버) 회장 등 천호 신도들이 여산으로 끌려 갔는데, 그 중 장윤경 회장은 1868년 10월 1일(양력 11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때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가 사망했는데, 그 사 연은 이러하다.다리실 신도들이 체포되던 날이었다.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는 병으로 앓아 누운지 스 무날이나 되어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포교 일행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마태오를 욱지르며 신도 들이 도망간 곳을 대라고 하다가는 체포한 신도들의 압수한 재산을 가지고 여산관아로 갔다. 그날 밤 마태 오의 큰형 요한은 환자가 걱정이 되어 집에 왔다가 환자로부터 포졸들이 남기고 간 말을 듣고는 환자인 마 태오를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런데 마침 장마철이어서 찬비를 맞으며 3, 4일을 지내고 나니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포졸들이 찾아 올 것이 두려워 자기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남의 집에 들어 갔다. 그러나 마태오는 불안해서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 음 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요한은 환자가 무엇이든 먹어야 살 것 같아 음식을 주었지만 먹지를 못하더니 마침내 풍증(風症)으로 1868년 6월 12일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입전으로는 이런 말이 전해 져 오고 있다. 환자가 몹시 앓고 있는데 포졸들이 다시 마을에 와서 집을 뒤지고 다니다가 환자와 요한이 숨어 있는 집 울안에까지 왔다. 환자는 고열의 고통을 못이겨 신음하고있던 터였다. 형 요한은 발각되는 날에는 숨을 곳이 들통나 떼죽음을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환자의 신음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이불 을 덮어 씌워 누르고 있다가 포졸들이 떠난 후에 이불을 걷어 보니 질식해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박해시대에 천호산 기슭에는 다리실(용추네=천호),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7 개의 공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실, 성채골, 그리고 후대에 터를 옮겨 새로이 시작한 산수골 공소 만이 남아 있는데 이들 공소 중 다리실 공소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공소다. 1877년 한국천주교회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밖에 없었는데, 블랑 신부는 1877년 으럼골을 사목활동의 거점지로 하여 정착한 후, 리우빌 신부와 라푸르카드 신부 등 3명의 선교사가 10여년 동안 이곳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들 선교 사들이 주로 머문 곳은 천호공소였다. 오늘의 천호공소는 150여년의 전통을 지닌 교우촌 답게 주민 전체 가 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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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분 성인들 | |||||||||||
천호성지에 성 손선지 성 정문호, 성 한재권이 묻힌 것은 1867년이었다. 이 분들이 한 곳에 묻히게 된 것은 세 성인이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서 거주하다가 함께 체포되고 같은 날 한 장소에서 처형되었을 뿐 아니라 생전의 친분 관계도 그랬지만 그들 가족이 천호마을로 피신해 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명서 성인은 세 성인들과 한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셨지만 다른 곳에 묻혀 계시다가 1988년 이곳에 안장되었다. 손선지 성인과 정문호 성인은 충청도 임천의 동향인이다.정문호 성인이 대성동 신리골에 살게된 것은 손선지 성인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또 한재권 성인은 충청도 진잠 사람이었는데 손선지 성인과 평소 친분이 있어서 그가 천호마을에 정착해 있는 것으로 알고 찾아갔었지만 대성동 신리골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다시 그곳으로 찾아가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성인들이 처형된 후 손선지 성인의 가족이 천호마을로 피신하여 오자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가족들도 함께 왔는데, 이들 두 가족이 거처를 정한 곳은 천호마을과 인접해 있지만 천호와 다름없는 시목동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한 날 한 시각에 처형된 분은 여섯 분이다. 그중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3명은 대성동 신리골에서 살고 있었고, 조화서, 조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 4명은 신리골에서 남쪽으로 3㎞ 가량 떨어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성지동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5일 두 마을 신도들이 체포되어 함께 전주로 압송되었다. | ||||||||||||
숲정이에서 처형된 분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사람은 향리(鄕吏) 신분인 오사현이라는 외교인이었다. 그는 성지동과 인접한 유상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성지동은 1840년대에 형성된 교우촌이었고, 대성동 신리골 역시 이 무렵 형성된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오사현은 이 두 마을이 신도들의 교우촌인줄을 모르고 지냈다. 성지동과 대성동 신리골에 사는 신도들은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생계를 근근히 이어가는 터라서 가난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도 일상 생활의 몸가짐은 누구나 본받을 만큼 모범적이었다. 오사현은 두 마을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내밀히 알아 본 결과 놀랍게도 나라가 금하고 있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이 비천하게 살면서도 훌륭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종교가 참 인간됨을 가르치는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향리(鄕吏)의 신분으로 천주교도들을 관가에 고발해야 했지만 그러지를 않고, 오히려 자기도 언젠가는 천주교를 믿겠다고 내심 다짐하고는, 그들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을 숨겨 왔다. (그는 훗날 진안 서촌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입교한 후 착실히 수계범절을 하다가 선종했다.) 그리고 평소 성지동에 사는 조화서 성인과 각별한 친분을 맺고 지냈다. 오사현은 마음으로 아끼던 천주교도들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자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신도들을 구명하기 위해 전주 감영으로 찾아가 평소 친분이 있는 관원들을 만나서 그들이 살아 날 방도가 없을까 물었다. 관원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당장 풀어줄 뿐 아니라 압수한 재물도 돌려주겠는데 저들이 막무가내로 죽기를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오사현은 신도들을 살려볼 요량으로 그들이 갇혀있는 옥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권고하기를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는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배교하라고 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자기들의 구명을 위해 애쓰는 오사현의 인정에 고마워하면서도 배교 하라는 말을 하려거든 다시는 옥에 나타나지 말라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신도들은 옥중에 있는 동안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고 교리를 토론했다. 이런 모습을 본 옥직이는,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매일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즐거워하니 도대체 네 놈들은 어떻게 된 놈들이냐' 하며 혀를 찼다. (입전에선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사현은 옥으로 신도들을 찾아가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살아서 나오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 우선 배교한다고 말하고 석방된 후에 다시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도들은 오사현에게, '우리와 무관한 당신이 우리를 구명하려고 하는 마음은 잊을 수 없이 감사한 일인데, 만약 우리가 이렇게 고마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당신은 우리를 보고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욕하지 않겠소? 이처럼 사람은 진실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진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어찌 생각으로나마 거짓말을 품을 수 있겠소' 하고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오사현만 아니라 영장(營長)도 처형 직전까지 여러번 설득했지만, 신도들은 끝까지 유혹을 물리치고 체포된지 여드레만인 1866년 12월 13일 참수당했다. 목격자 오순보의 말에 의하면 순교자들이 참수될 때 목에서 흰 피가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오사현과 그의 아들 오순보의 말은 이렇다.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처형장에 있던 거지들이 시체의 옷을 벗겨 가려고 우루루 몰려 왔다. 오순보는 거지들을 쫓아내고 여섯 순교자의 머리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관졸들의 양해를 얻어 잘려진 머리를 각자의 몸에 차례대로 맞추어 놓고 거적으로 덮어 주었다. 그 후 군인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직했다. 삼일 후 순교자 가족들은 돈을 걷어 오사현에게 주면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오사현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지 나흘만에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 개와 일꾼 열두 명을 사서 형장으로 갔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한 영장 이근섭과 교섭하여 장사지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여섯 순교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대(將臺. 군지휘소) 건너 범바위(현재 鎭北寺가 있는 곳) 아래 도랑가에다가 가매장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무덤 앞에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 올때 달고 나왔던 명패를 세워 놓았다. | ||||||||||||
손순화는 성 손선지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처형되자 가족을 이끌고 다리실로 피신해 왔다. 그는 이곳에 지내면서 도랑가에 가매장된 아버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그는 자기 집에서 건너다 보이는 (현재의 무덤이 있는 곳) 산에 아버지를 모신다면 항상 지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묘 자리로서도 손색이 없는 땅이어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미룰 수 없었다. 그는 매제인 한정률(혹 경영 요한. 그는 처이자 손선지 성인의 딸인 손 막달레나와 함께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함)과,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가족, 그리고 신도들과 함께 1867년 정월 그믐 날(양력 1867. 3. 5) 시체를 반장(返葬)할 채비를 하고 가매장터로 갔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는 마음이 불안하고 떨렸다. | ||||||||||||
그 날은 날씨가 청명했다. 가매장 터는 숲정이에서 빤히 쳐다보이는 곳이었다. 숲정이는 군인들의 연무장이었으며 지휘소가 있었다. 1801년부터 이곳에서 천주교도들의 사형이 집행되어 왔다. 손순화 일행은 가무덤 앞에 당도하긴 했어도 당장 연무장의 지휘소에서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끼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 붉은 빛이 순교자들의 무덤만을 비추어 주었다. 이 빛의 도움으로 각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명패를 분간 할 수 있어서 염습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무사히 염습을 마친 일행이 시체를 메고 얼마만큼 와서 위험한 지경을 벗어나자 다시 하늘이 맑게 개었다. 일행들은 이런 일을 보고 천주의 영적이라 감탄했다. 손선지 성인의 시체는 다리실(현재의 위치)에 장사하고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시체는 시목동에 장사하였다. (손순화의 증언 기록에는 시목동에 장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한재권 성인의 후손들은 다리실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현재의 위치로 성묘를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정문호 성인이나 한재권 성인의 가족들은 훗날 손선지 성인의 곁으로 이 분들을 옮겨 모셨다. 오사현의 증언 기록은 위의 상황을 이렇게 보충해 주고 있다. 그는 1867년 2월(음력) 조 베드로, 이명서, 정원지 세 분의 시체를 그 자손과 함께 가서 이장하여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 위에 장사하였고,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의 시체는 그 자손이 먼저 이장하여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무덤은 가족들이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여 결국 봉분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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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병인년 순교자 분묘 조사와 발굴 작업 ▲ TOP | ||||||||||||
1922년부터 1923년에 걸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병인년(1866년) 한국 순교자들 중 시복 대상자들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이 조사는 교황청 조사위원회의 위임을 받은 서울교구 보좌 주교인 드브레드(유) 주교가 맡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 지방의 조사는 전동본당의 라크루(具) 신부가 주관하고 서기에는 김 도마를 임명했다. 이 작업은 1923년 6-8월, 2개월에 걸쳐 실시되었다. 1923년 6월 11일 오전 8시경이었다. 서울 교구 드브레드(유) 보좌주교, 전동본당 라크루 주임신부, 서기 김 도마, 다리실 공소 교우들, 김 베드로 회장, 김 방지거, 이 도마, 박 필립보, 김 마리아, 이 다두, 장 야고버, 송 라파엘 등 조사단 일행이 다리실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조사 작업을 하면서 분묘들의 위치를 표시한 도면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 네 개의 분묘를 그려 놓았다. 그리고 시복조사 심의 중 증인들의 증언을 참작해서 네 무덤을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정원지의 무덤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조사단의 추측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쉽게 판명된다. 그 이유는 첫째, 정원지는 이곳에 묻혀 있지 않다. 그 증거로 정원지의 시체를 거두어 주고, 또 유상리 막고개로 이장해 준 오사현의 말을 살펴 보자. 그는 순교자들이 처형된 지 나흘 후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 두 개를 사고 일꾼 12명을 사서 여섯 시체를 거두어 장대(將臺, 숲정이) 건너 부응바위 아래 도랑 가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67년 2읠, 조화서, 이명서, 정원지 등의 세 시체를 순교자들의 가족과 함께 가서 이장하여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장사했는데,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의 시체는 그 가족들이 이장하여 갔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지는 제외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훗날 정원지의 가족들이 다리실로 이장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 둘째로는, 다른 한 개의 무덤은 1868년 여산에서 처형된 일곱 분(사실은 여덟분)의 합동 무덤인 것이다. 이 무덤을 증언한 사람은 김영문(요셉)인데, 그는 다리실에서 살다가 1868년 6월 9일 여산으로 끌려 갔었으나 용케 풀려 나왔었다. 그래서 그의 증언과 순교자 김성화 가족들의 증언을 근거로 하여 이 합동 무덤을 '김성화(야고버) 외 6인의 무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래서 네 무덤은 손선지, 7인의 합동 묘, 정문호, 한재권의 무덤으로 정리된다. 전주교구 김진소 신부는 1923년 6월 11일 이 현장에서 작성된 문서를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입수하여 1977년 11월에 현장을 답사하고 그 후 수 차례에 걸쳐 현장을 조사했다. 그리고 호남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1983년 5월 9일부터 5일에 걸쳐 현장에서 발굴 작업을 착수했는데, 유해들은 도면에 표시된 장소에 정확히 묻혀 있었다. 이 유해들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과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및 치과대학에서 5개월에 걸쳐 법의학적인 검사를 가졌으며, 이 검사 결과는 다시 교회사학자들의 문헌적인 검토를 거쳐 두 유해들의 주인공은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유해로 확정을 내리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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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 이명서의 유해 | |||||||||||
성 이명서는 오사현의 주선으로 1867년 2월 18일(양력 3. 23) 조화서, 정원지와 함께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묻히었다. 그 후 손자인 이준명(아나돌)은 진안군 진안면 어은동 모시골에 자기 소유의 산을 마련하여 1920년 3월 22일 그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1968년 시복되던 해에 한국 순교자현양위원회에 의해 발굴되어 서울 절두산 순교자기념관에 안치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에 다시 전주교구로 모셔와 보관하고 있다가 1988년 10월 1일 이곳에 안장하었다. | ||||||||||||
이곳 성지에 묻힌 순교자들의 무덤 중에서 성인들의 무덤은 본래 발굴된 곳에서 몇 뼘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거의 같은 장소에 안장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남기기 위해 발굴한 장소에 표석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실명(失名)된 순교자들의 무덤은 먼저 8인의 무덤으로 발굴된 순교자들에게 번호를 부여하였다. 순교자 김영오가 묻힌 곳에서 우측으로 1번부터 8번까지는 일명 8인의 순교자 무덤에서 발굴된 분들을 안치했고, 9번째는 방아골에서, 10번째는 현재의 십자가 탑 아래쪽에서 발굴된 분을 안치했다. 그런데 11번째의 무덤은 가무덤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1983년 5월 천호산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할 때 이곳 천호공소의 노령의 신도들로부터 이러한 증언을 들었다. 현재의 피정의 집 뒷편으로 산수골로 넘어가는 고개의 우측 산 날에는 옛부터 순교자의 무덤으로 전해 오는 묘가 봉분이 거의 없어진 상태로 있었다. 천호공소 회장은, (1983년의 5월의 말로) 20년 전까지 그 무덤의 사초를 맡아 왔었던 이전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그 무덤에는 여자 순교자가 묻힌 것으로 알려져 왔다고 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을 가정해 본다면 고산 산수골에 살다가 1868년 10월 여산에서 순교한 박성진의 아내라고 불렸던 분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여러 해를 사초해 온 천호공소의 이종권 회장과 노인 신도들과 함께 현장을 찾아갔더니, 순교자의 무덤 자리에 엉뚱하게 낯모르는 묘가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무덤에 어떤 표석이나 분간할 만한 표시를 해 놓았던 것도 아니고, 또 무덤을 관리한지도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누구도 묘의 위치를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한 새 묘가 조성된 데에는 이런 저런 말이 있었지만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어서 참고하기로 하고 발굴작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차후 발굴될 경우를 생각해서 우선 가무덤을 조성해 놓았다. | ||||||||||||
<여산에서의 순교> | ||||||||||||
1. 여산의 사형 집행 ▲ TOP | ||||||||||||
1868년(무진년) 여산에서 천주교 신도들의 사형이 집행된 것은 사법권을 가진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산(礪山)은 왕후(王后)의 외향(外鄕)이며 성향(姓鄕)이었다. 이 고을 출신 송선(宋璿)의 딸은 여흥부원군(礪興府院君) 민제(閔薺)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태종(太宗)의 비(妃)인 원경 왕후(元敬王后)가 되었다. 그래서 왕후의 외가 고향이라 하여 세종 18년(1436년) 현(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부(府)로 승격시켰다. 또한 여산은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며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성향(姓鄕)인 것이다. 이러한 왕후들과 관련되어 부(府)로 승격되었다. 또한 여산에는 전라도 다섯 진영장(鎭營將) 중 후영장(後營將)이 있었다. | ||||||||||||
2. 1868년(무진년) 여산의 순교자들 ▲ TOP | ||||||||||||
1868년 여산에서는 교수형, 참수형, 백지사형으로 많은 수의 신도들이 치명했다. 신도들은 옥과 숲정이와 장터에서 처형되었는데 기록상으로 알 수 있는 숫자는 25명이다. 이들의 거주지를 보면, | ||||||||||||
3. 순교 일화 ▲ TOP | ||||||||||||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문서에서 확인된 숫자만 25명이나 되었으나 틀림없이 이 숫자보다는 더 될 것이다. 순교자들에 대하여 이런 입전이 전해지고 있다. 비록 낙수(落穗) 같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흘려 버릴 수 없는 일화이다. 어느 날인가 8명이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는데, 그중 1명이 배교하는 일이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 밤이었다. 옥사장이 단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배교하지 않은 일곱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워 주고 한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웠다 벗겼다 했다. 그래서 옥사장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교자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옥사장은 배교자 대신 치명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서 일곱 사람과 함께 치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전의 사실 여부가 어찌 되었건 이 입전을 소중히 간직하여 전해 주려는 신도들의 숨은 뜻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옥사장이 결단을 내리게 된 동기는 신도들이 옥중에서 보여준 금석 같은 신앙과 표양을 보고 양심의 눈을 부비고 뜬 것이리라. 그리고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준 초연한 행동에는 무엇인지 모를 깊은 뜻과 고귀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옥사 장은 천주교 신앙으로 전향하고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 ||||||||||||
4. 순교하기까지의 참상 ▲ TOP | ||||||||||||
순교자들이 옥중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신도들의 굶주림이 얼마나 참혹했기에 오죽해야 옥사장까지 동정심이 발동했을까. 옥사장은 신도들에게 바가지를 주면서 옥 밖으로 나가 동냥을 해 먹고 오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빌어먹을 만한 곳도 변변치 못한 고을이었던가 보다. 그래서 빈 바가지를 들고 들어오는 죄수 신도들을 보고 하는 말이 바가지를 주며 내 보낼 때는 도망가라는 말인데 바보같이 왜 들어오느냐고 호통을 쳤다. 신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는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다시 들어 왔다." | ||||||||||||
5. 천호산에 묻히기까지 ▲ TOP | ||||||||||||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둔 신도들은 이분들을 묻을 장소로 천호산을 택했다. 천호산에는 이미 1년 전에 전주에서 치명하신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산의 순교자들도 당연히 그분들의 옆에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순교자들은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묻었지만 어떤 순교자들은 다급한 나머지 적당한 곳에 가매장했다가 훗날 전주의 순교자들 곁에 묻었다. | ||||||||||||
<고산 지방의 교우촌> | ||||||||||||
1. 저구리 신앙공동체 ▲ TOP | ||||||||||||
고산지방에 신도들이 살게 된 것은 1791년(신해박해) 진산(珍山)사건이 끝나고서였다. 진산에 살던 양반인 윤지충(尹持忠)은 유교식 조상 제사 의식을 거부하고 천주교식 제사 의식을 따랐다 하여 1791년 12월 8일 전주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집안이 폐족이 되자 지충의 아우 윤지헌(尹持憲)은 고향을 떠나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피신해 살았다 (흔히 운주면, 화산면, 비봉면, 고산면 등을 통칭하여 교회에서는 고산지방이라 부른다). 그 후 충청도 내포지방 신도들이 저구리로 이주하여 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이 무렵의 신도들로는 이존창, 김유산, 김강이, 그의 아우 창귀 등을 들 수 있다. 1795년 4월 중순(음)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주신부는 이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1801년 이후 세상이 조금 평온해지자 전국에서 신도들이 전라도를 피난지로 하여 몰려왔다. 이러한 현상으로 고산 지방에 교우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박해가 거듭될수록 이 지방에는 교우촌이 증가될 뿐더러 또한 이 지방에서 체포되는 신도 수도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택리지(擇里志)>의 기록대로 고산지방은 산수가 험난하여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되었다. 그러나 풍진 세상에서 잠적하여 심신을 기르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아무튼 교회 문서의 기록만 보아도 박해시대에 고산지방에 생긴 교우촌이 57개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고을에는 심산유곡의 어디에나 신도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 ||||||||||||
여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주거지 가운데 가장 기억해야 할 교우촌은 넓은 바위이다. 대아리 저수지에서 동쪽으로 5㎞쯤 협곡을 따라 산천리, 왕재, 은천리를 지나면, 산에 묻힌 골짜기에 지금은 흔적마저 찾기 어렵지만 유서 깊은 넓은바위 교우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교우마을이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어도, 일찍이 고산 관아에 천주도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1866년(병인년)1월 여러 신도들이 체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상당히 오래된 교우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 신도들의 출신지는 대개 경상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등이었다. 이 교우촌이 겪은 가장 큰 박해는 1868년(무진년)에 있었다. 이 때 이 마을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심지어 젖먹이를 둔 여인까지 수십 명이 여산으로 끌려가 그 중 16명이 순교했다. 이들 순교자들 중에서 지도적인 인물은 김성첨(토마스)였는데, 그의 약전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그의 본관은 선산 김씨이며 함양 출신으로 언젠가는 알 수 없어도 넓은바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6년 1월 고산 관아의 포졸들이 이곳을 수색하여 신도들을 체포해 갈 때 그의 사촌인 김 프란치스코를 대신해서 끌려갔다가 석방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868년 9월 10일이었다. 여산 포교 일행 28명이 넓은바위를 덮쳐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여산 포교들은 해당 고을의 사법권이 없다 하며 완강하게 저항하므로 포교들은 할 수 없이 물러 갔다. 그런지 4일 후 여산 포교들은 고산 포교들을 앞세우고 다시 찾아와 그를 체포하여 고산 관아로 끌고 갔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고산 주민들에게도 김성첨은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에게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을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죄상을 꾸짖으며 개과하여 배교한다면 여산부사에게 상신하여 석방해 주겠노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성첨은 만번 죽을지라도 배교는 천만부당한 일이라면서 여산 부사에게 이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여산은 고산과 진산을 관장하였고 영장(營將)이 있어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김성첨은 다른 10명의 신도들과 여산으로 압송되어 와서 영장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다. 영장은 사학(邪學)의 괴수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가르쳤으며, 마을에서 발견된 천주학의 서적과 상본들은 모두 네가 준 것이 사실이며 그 출처를 밝히라고 닥달했다. 그는, 본래 대대로 내려오는 천주교 가정이어서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부모가 돌아 가신지 오래되어 그 출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신도 일당을 불라 하면서 혹독하게 형벌하는 바람에 자기와 함께 끌려온 신도가 전부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영장은 더욱 분노하며 혹독하게 형벌을 내렸지만, 얼굴빛 하나 변하기는커녕 태연자약 하자, 초죽음이 되도록 매질을 해서 옥에 가두었다. 옥에 갇힌 신도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굶주림이었다. 그들의 집에 남은 가족들은 너무 가난해서 옥바라지를 해 줄 처지가 못되었다. 그런데 김성첨과 함께 갇힌 신도들 중 다섯 명은 그의 종질과 재종손이었다. 김성첨과 함께 일가족 6명이 옥고를 치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기를, "우리가 (치명할) 이 때를 기다렸는데 천당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도 참아 받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받으라."하며 격려했다. 김성첨은 신도들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었다. 신도들에게 옥은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신앙의 수련장이었다. 이러한 신도들의 기도생활을 보고 옥을 지키던 군인들은 능욕하기를, "저놈들은 죽어 가는 주제에 무엇이 즐거워 배가 고픈 줄 모르고 천주학만 한다."하며 비아냥거렸다. 김성첨과 함께 끌려간 신도들은 그해 10월 21일(양력 12. 4)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나, 김성첨은 그의 종손 마티아와 함께 11월 10일(양력 12. 23) 교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2세(어떤 기록은 57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