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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서울: 어문학사, 2010.
3월 24일
벌써 3번째다. 아시다시피, 백색인은 아쿠다카와 상을 받은 책이다. 작가로서 굉장히 중요한 경력career을 만들어준 책이라 할 수 있다. 두 권으로 되어있는데, 묶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결국, 뒤에 읽게 될 <사해의 호반> <깊은 강> <침묵>을 예비하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프랑스 유학을 했을 때, 그러니까 얼굴이 흰 사람들 속에서 황색인으로서, 그들과 자기가 어떻게 다른지 경험했다. 우리가 가진 상식이 그 속에서 무너지고, 사유하는 방식이 철저히 다르니까. 그 속에서 자기를 찾기 위해 애를 써본 거고. 어떤 글에서 얘기했는데, 쟈크라는 이름을 보니까, 그 이름이 상기시키는 게 많다더라. 선과 악의 대비. 서양적 사고가 대비이다. 투쟁과 갈등. 여러 가지가 동시에 떠오른다. <황색인> 자기와 같은 이름을 쓰고 보면, 조금 다르다. 이름 자체에 담긴 차이가 느껴지고, 그게 이 책으로 형상화된 거라 할 수 있다.
의도적인 책이다. 신의 아이, 신들의 아이. 백색인은 서구 사상 기독교신앙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직조하고 여향을 미쳤는가, 신이라는 단수 형태로 말하고 있다. 신들이라는 건, 물론 아시아에서 다신론적 세계에 살고 있는 황색인들의 모습을 반영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하나의 <침묵>으로 가기 위한 준비작업 정도로 봐도 된다. 그 주제를 발전시켜나간다. 나중에 <침묵>에서 보겠지만, 일본이라는 늪과 같은 다신론적 상황. 다신. 자연신. 그런 늪과 같은 상황에서 카톨릭이 뿌리 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 현지인들에게 의미가 있어야 할텐데. 어떻게 보자면, 이 책은 감리교의 중요한 신학 중 하나인 토착화 신학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랄까, 문학적 토착적 신학의 문학적 형상화, 이 정도로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용은 다 읽어왔겠지만, 내용을 간략히 보자. <백색인>은, 나라는 화자가 콤플렉스가 있다. 못생겼다. 이런 인물이 꼭 나온다. 엔도의 문학에. 못생겼다는 콤플렉스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아버지의 세계에서 어머니의 세계로 가보려고 한 것이다. 지나치게 청교도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어머니. 외적으로는 따라가는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곁길로 간다. 이본느를 보는 순간, 확 자기 삶이 다른 방향으로 간다. 이본느와의 만남 때문이라기보다는, 찰나의 부딪힘, 그게 변곡점을 찍는 것이다. 억눌려 있었기 때문에 스프링처럼 튀어나오는 악의 욕구, 이런 게 나타나게 된다. 대학생이 되어 만난, 신부 후보생인 쟈크라는 사람과 마리 테레즈, 그들 모두 다 용모들이 뛰어나지 않는다. 전부 열등감 덩어리들이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신체적 열등감 뿐 아니라 죄책감이다. 신의 눈앞에 있다는 죄책감 같은 것들이다. 이 책에서 엔도가 다루는 것은 죄책의 문화이다.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을유문화사, 2008)은 일본 문화를 다룬 책이다. 일본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두 구분을 한다. 죄책의 문화와 수치의 문화다. 서양은 ‘죄책감’. 키에르케르고도 그렇다. 목동이던 아버지가 벼락 칠때 신을 저주하는 광경을 보는데, 그게 아들에게도 죄책감으로 나타나고. 우울하다. 신 앞에 선 죄인의 모습. 항상 문제는, 신과 나 사이를 어떻게 풀 것인가이다. 죄책의 문제에선 책임이 중요하다. 아시아, 특히 일본을 사로잡는 것은 다신이다. 뭔가 찝찝하면 저 신한테 가서 바치면서 용서를 구하면 되는 거다. 유일신세계에서는 그게 안된다. 다신의 세계가 좀 더 살기 쉽다. 다신의 세계에서는 수치심을 괴롭힌다. 타인을 의식한다. 수치심을 느끼게 될 때, 수치를 가리려고 하거나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없애려 한다. 일본 문화 속에 그런 게 있다. 은밀하게 없애버리는. 그 대조가 상당히 흥미롭다.
그 언어로 정식화하진 않았으나, 죄책의 문화와 수치의 문화를 인물들을 통해서 그대로 구현해내고 있다. <황색인>에 등장하는 ‘치바’. 그가 이토코라는 사촌, 친구의 약혼자인데 관계를 맺는데도 죄책감이 안든다. 께름칙한데 괜찮은 거다. 그런 모습들, 이게 중요한 윤리적 테마가 된다. 윤리적 태도가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보여준다. 비교적 간단하다. 크게 보면, 그런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백색인에서 보면, 화자가 신 앞에서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테레즈나 쟈크가 감당이 안된다. 신의 세계를 그는 부정한다. 무신적 세계 속에 빠져있는데, 쟈크와 테레즈를 무너뜨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신의 세계가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고문 장면에서, 약간 두려움을 느낀다. 신을 상정하지 않고는 두려움이 나오지 않는다. 역설적이다.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나’를 파괴한다. 부정했는데 ‘나’를 감싸고 있다. 모호함, 화자조차도 신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이것이 일본에서 아파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연결되는 것이다.
각자 읽은 느낌을 나눠 달라.
목사.
순수한 분들과 목회하고 있다. 연세도 있으시고, 학력도 낮으시고. 그분들 앞에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아내는 쉽게 좀 하라고 요청하고.
처음에는, 고문하는 자와 당하는 자, 이 대조 때문에 고통스럽게 읽었다. ‘아이’임을 깨달으면서 읽었다. 직접체험하지 못했는데, 신앙의 처절한, 두려워서 가보지 못한 곳을 밟아본 느낌이었다.
김기석.
인식의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요약할 수 있는 능력. simplify. 소박하고 단순하게 만드는 것. 복잡한 걸 꿰뚫는 것! 종교의 천재라 할 수 있다. 우리 버릇은 이걸 좋아한다. 그런데 인식을 복잡화시킬 필요가 있다. 자꾸 해봐야 새로운 시야들이 열린다.
문학에서도 두 가지 서술 방식이 있다. 하나는 단순대조해가면서, 인물들 성격도 분명하게 하는 것. 엔도의 인물들은 복잡하지 않다. 발전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단절이 없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민음사)나 헤세의 <데미안>은 성장소설이다.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겪는다. 단순한 인식에 이르기 위해서. 일본의 문학이 요즘 와서 어필하는 것들이,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그들은 단순하게 얘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설류는 주로 그런 것들이다. 복잡하게 중층적 시선이 필요한 건 어려우니까.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문학과지성사, 2008). 엄청 좋은 책인데, 안읽힌다. 구스타프 플로베르 <성 앙투안느의 유혹>(열린책들/지식을만드는지식) 귀한 책임에도 안 읽는다. 너무 복잡해서. 그런 걸 뚫고 가야 하는데. 복잡화 과정을 겪는 작품들은 나의 인식을 뒤흔들어놓는다. 그러나 이런 책들은 우리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다. 나로 하여금 동참자가 되게 만든다. 그러나 주제의식은 명확하게 붙들게 해준다. 작가가 자기의 고민을 숨기지 않는다. 이게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목사.
엔도 소설은 사람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게 있구나 느꼈다. 여전히 먼지라던가, 사람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 햇빛에 비친 가구의 그림자들, 이런 소재를 엔도는 내용에서 사용하는구나. 신의 아들 백색인 같은 경우에는 남을 위해서 자살을 하지 않는가. 과연 나도 그럴 수 있는가 감정이입도 해보았다.
신들의 아들 황색인은, 부로우 신부가, 명확히 안나온 것 같은데, 듀랑에 의해 권총 누명을 알 것 같은데, 아무소리 안하고 대신 붙잡혀가고. 이 또한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
듀량이 괴로워하는 것, 겟세마네 동산인데,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다.
김기석.
죄책의 문제, 수치의 문제, 이런 것들이 주제화된다는 걸 잠시 후에 생각해보고. 듀량도 자신의 선의 때문에 기미코와 그런 관계가 된 것이다.
142쪽. “피네 선생은, 악마는 사람들에게 잊혀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말하고 있다. 수해가 있던 날부터 악마는 교묘하게 이 이 피에르 듀량의 선의를, 자존심과 의무감을 이용했던 것이다. 가나의 기적은 그리스도만이 행하는 것은 아니다. 악마는 포도주를 독약으로 바꾸는 마술을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 아름다운 행위인데, 그게 전락으로 가는 길일 수 있다. 고통이 바로 세움의 길이 되기도 하고. 인간사라는 게 복잡하다. 단순하게 해석이 안 된다. 인식을 위해서는 우리가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우리 소설에는 ‘이승우’ 작가가 그걸 잘한다. 중층적으로 덧씌우고. 처음에는 왜 그런가 싶다. 그게 자신의 인식과정인 것이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것이다. 삶의 모호함을 견딜 수 있어야 성숙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단종파가 발흥하고 마음 뺏는 것은, 거짓인식이지만, 불확실성의 고통인데, 아주 단순화시켜준다. 조그만 상식만 있어도 말도 안되는데, 잘도 넘어간다.
가학 피학성(sadomasochism). 학대당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안되니까. 누군가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권위로 잡아주기를 바란다. 나쁜 종교의 특색이다. 예수와 무관한 것이다.
목사.
백색인, 황색인, 피로, 비밀 등 겁치는 낱말이 많더라. 자살로 이야기가 매듭지어지는 것도. 자살의 의미는 죄책과 수치로 각각 실행했던 걸까?
김기석.
자살의 느낌. 스스로를 지운 것이다. 듀량은 죽고 싶었을 것이다. 끝까지 비루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그게 책의 중심구조는 아닌 것 같다.
이기적 자살, 이타적, 사회적 자살도 있다. 에밀 뒤르케하임. 독일계-프랑스사람이다. 그의 <자살론>에서 그렇게 다룬다. 대개 이기적 자살이 많다. 예컨대, 베트남전쟁 말기, 광택스님이 신너를 붓고 자살을 하는 것은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사회적 죽음은, 사회 속에 자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타적 죽음은 전철에 떨어진 사람을 살리다가 죽는 것. 기독교 신자의 말로 하자면, 인류의 죄를 위해 진 것이면, 대속인 것이다. 그런데 함부로 규정하는 건 무리다.
화자 속에 있는, 경멸하고 미워하는 신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목사.
자살하면 장례도 안치러준다?
김기석.
말도 안된다. 교인 가운데 한분이 자살을 했다. 그는 뭘해도 뭔가 잘 안되었다. 사법고시도 1차만 되고 2차는 안되고. 취직은 또 잘 된다. 그러나 사회적 성취가 적어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자살했다. 당시 담임목사가 장례하면서, “그는 자살한 게 아니라 탈출했다”고 하더라.
너무 이분법적으로 자살은 죄라고 규정하면 안된다. 기독교목사 버릇 중 하나는, 선과 악을 자기가 다 아는 것으로 해놓고 거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삶의 복잡성 속으로 들어가면 결정이 쉽지 않다. 모호함을 견뎌야 한다. 예수라면 어떡할까, 우리 몫이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지고 가셨다? 죄책의 문화가 아닌 우리에게 그 말이 와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죄책이 별로 없는데. 인간은 죄인이라고 다 규정을 해줘야 한다. 용서받아야한다고. 잘 안다가온다.
서양 사람들은 타고났다innate. 칼 바르트의 인간한계상황, 죽음, 질병, 유한성 그리고 죄책이 포함된다. 서양인들에게는 ‘innate‘한 것이다.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한다. 속죄라는 말이 와닿을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죄책이 아니라 한이 있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한. 자식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한’. 부모에게 잘해주지 못한 ‘한’이다. 한을 풀어야 하는 거다. 죄책은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고. 이게 황색인과 백색인으로 나눠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말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서구적 개념으로 예수가 죄를 해결주었다, 이에 우리는 아멘한다. 하지만 동양 사람들은 그게 후련하지 않다. 엔도가 그런 고민을 한다. 예수가 어떤 역할을 한 것이지? 엔도는 ‘아픔’을 가지고 접근한다. 유한함, 슬픔, 자기 걸로 부둥켜 안은 것이다. 엔도의 예수 모습은 항상 그렇다. 어떤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아니다. 함께 안아서 해소한다. 기다모리 가죠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 그렇다. 동양적 해석은 이렇다.
실제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할 때, 기도가 문제를 해결주기도 한다. 탄식시나 지혜문헌을 보면, 탄식시를 하면, 반복해서 드리는 까닭은 해결돼서가 아니다. 나의 한스러움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때, 해소할만한 게 되는 것이다. 중압감에서 놓여지는 것이다.
서양신학이 놓치는 게, 너무 죄책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다.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말이다. 죄책을 얘기하면, 예수라는 중보자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고. 그러니 신학계에서 밤낮 싸우고 있다. 서양에서는 별 문제가 안되어서 안 다룬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냐 안받냐 싸우고 있다. 서로 전혀 다른 문법으로 접근하니까.
이사야 53장, 고난받는 종의 모습, 이게 하나님께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함께 부둥켜안고. 어떤 문제가 있는데, 내 문제를 해결해줘서 그와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그냥 옆에 있어줘서 힘이 나는 것이다. 이게 임마누엘이다.
목사.
프랑스-유대, 두 속성 중에 자기한테 유익한 것만 고수하는.
141쪽 “자신을 믿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을거라고, 그게 가룟유다의 오만함이 아니었을까.
김기석.
콤플렉스가 있는 자크와 ‘나’. 쟈크는 신에의 헌신, ‘나’는 무신론적 삶으로 나아간다. ‘나’는 쟈크를 부정하고 파괴하려 한다. 삶이 갈라졌다. 접점이 없고 영원히 평행선이다. 그런데, ‘나’가 쟈크를 파괴하려다가 ‘접점’이 생겼다. ‘나’는 그들(자크와 테레즈)을 굴복시켜서 자기정당화를 하려 했다. 악마적인 역할을 감당하는데, 역설적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자기 이면 속에 있는 두려움을 보게 된다. 두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그 심연에 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부정하는 행동을 통해 신에 대한 여명으로 끝난다. <백색인>은 이런 구조다. 콤플렉스가 신에게로 이끄는, 그런 구성이다.
책을 읽을 때, 인물들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이유 같은 걸 살피라. 여기서는 콤플렉스, 작가 어떤 고민을 했을지 생각해보고, 인물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보자. 성격은 언제나 발전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사건과 배경이 있어야 한다. 작가들은 인물-사건-배경을 얽어낸다. 문학에서 이걸 플롯이라고 한다. 그게 모이면 내러티브가 된다.
한편, 공간 배치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마리 테레즈는 무도회장을 가고 싶어하는데, ‘나’는 그 심리를 이용해먹지 않는가.
큰 종이를 두고 그려보라. 나중에 그 종이 하나로 잘 보인다.
목사.
냄새에 대해 많이 언급되더라. 시각적인 것도 사용되고. 냄새는 내면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김기석.
맞다. 중요한 지적이다. 책을 읽을 때, 한 권의 시집을 평해야 할 때, 내 경우에는, 그냥 한번 주욱 읽는다. 그리고 덮는다. 종이를 펼치고 떠오르는 생각/단어들과 이미지들을 그리고 적는다. 시인의 심상을 엿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집을 들여다본다. 내가 적은 어휘들을 중심으로 다시 보면, 시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전체 지도가 나온다. 시 한편에서 드러나지 않는 시인의 내면 세계가 전체를 통해 보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에도 냄새, 먼지 같은 게 중요하다. 배경으로서만 아니라 내면의 풍경을 형성화하기 위한 것이다.
목사.
95쪽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말줄임표, 이게 ‘신’인가?
김기석.
너무 유추 가능하다. 본격적 문학 깊이 가면 이런 걸 하면 안된다.
목사.
본문 속 화자가 누리는 게 자유인가?
김기석.
더 깊은 심연으로 데려 간 것이다. 연민, 선이 나쁜 쪽으로 가기도 하고. 지금 선을 해도 다 선의도 아니고. 칼 야스퍼스는 말했다.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다. 인간 존재는 인간이 되는 데 있는 것이다.
목사.
듀랑 신부는 여인을 이해 사제직을 포기한 사람, 부로우 신부는 인간미는 좀 없는 이미지로 여겨졌었는데, 토론회 얘기 들으니까 뒤집히더라.
김기석.
엔도의 실제경험이라고 하더라. 프랑스 신부 둘.
목사.
43쪽. “그리스도가 유다를 사랑하지 않으셨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성경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김기석.
둘 다 있는 것이다. 유다 문제르 교회사에서 해결을 해야 하는데. 외경에는 유다에게 예수가 부탁한다. 자기를 배신하라고. 예수가 죽어야 구원을 완성한다고. 유다는 신의 섭리 속에 자기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어떤 성경에는 빵을 나눌 때, 유다 속에 사탄이 들어갔다고 한다. 유다가 왜 그랬는지 설명해야 하니까. 결정론자들은 그렇게 설명하려든다.
우리가 지옥이니 천국이니 따질 필요가 없다.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 베드로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한다. 은총의 심연으로 간다. 유다는 강하다. 신의 은총으로 가지 않고, 스스로를 처벌한 것이다. 불쌍하다.
구원에 대해서는 오지랖 넓게 얘기하는데, 이론일 뿐이고, 부질없는 짓이다. 고난주간을 좋아하는 게,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예수는 아니까, 그 전에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는 그 아픔과 한계까지 껴안은 것이다.
목사.
유다 문제 때문에 교회를 떠난 이도 있다더라.
김기석.
예수가 죽어야만 구원할 수 있었다는 얘기는 예수의 삶을 박제화하는 것이다. 사도신경만 봐도, 예수가 태어나 고난 받고 죽은 것 밖에 없다. 예수의 삶이 제거되었다. 교회전통에서 중요한 교리이지만, 좀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신경에서는 예수의 사상이 사상되어버렸다. 십자가는 삶의 결과일 뿐, 목표는 아니었다.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십자가는 예수가 선택했던 삶으로 주어진 것이다. 세상의 잔혹함이 안겨준 것 말이다. 예수는 그걸 회피하지 않고, 구원의 자리로 간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제자들 발 닦아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유다가 배신한 것은 발 닦아준 이후이다.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닦아주는 예수의 마음이 대단한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밖에서 설교할 때 종종 하는 얘긴데, 요한복음 21장 디베랴 바닷가, 사랑받는 제자가 저분더러 주님이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뛰어나가고. 예수는 “너 그럴 줄 몰랐다”는 핀잔 섞인 말을 하지 않고, “조반을 먹으라”라고 밥을 먹자고 한다. “네가 날 부인했다고 해도, 네 식구에서 내친 적이 없다”는 뜻일 게다.
목사.
엔도도 그렇지만, 성경도 그런 이미지를 잘 활용하는 것 같다.
김기석.
이번 주중 아담 해밀턴의 책을 봤는데, 재미난 이야기가 있더라. 주목을 하지 못했던 것 중 하나는, 예수가 기도했던 그곳을, 마태와 마가는 겟세마네, 누가복음은 올리브 산, 요한복음은 올리브 ‘동산’이라고 한다. garden 얘기가 요한복음에 3번 나온다고 하더라. 기도하시던 곳, 묻혔던 곳, 마리아가 ‘동산지기’로 예수를 헛갈려하는 것. 아담 해밀턴에 의하면, 에덴동산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한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으로 쫓겨났는데, 예수는 하나님 뜻 위해 자기를 죽인 것이다. 새로운 동산이다. 동산의 회복이다. 생명의 회복. 재밌다.
더 재밌는 것은, 마리아가 가보니 돌문이 굴려져 있다. 흰 옷 입은 천사가 있다. 예수의 시체가 놓여있는 곳에, 머리맡에 발치에 천사가 있다고 한다. 아담 해밀턴은, 의도적인 서술이라고 한다. 언약궤 뚜껑을 속죄소, 속죄판, 시은좌라고 하는데, 거기 그룹 둘이 있다. 그는 천사 둘이 두 그룹이라고 설명한다. 덧붙이기를, 예수라는 존재가 속죄의 완성이라고. mercy of God?
출애굽기 30장 6절, 하나님이 백성을 만났다고 한다. 만나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절묘한 상징인 것이다. 꼭 그렇게 봐야 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목사.
책의 표지가 판테온이더라. 인상적이다. 그리스의 신전들과 무슨 상관인지 궁금했다.
백색인 마지막에, 한명의 모습 안에 있는 다 묘사되어 있는 게 많이 찔렸다.
김기석.
중요한 지적이다. 쟈크가 보여주고 있는 이중적 모습, 관음증적인 관심. 마리 테리사를 좋아하는 것이다. 신학생이라 그걸 처리하는 방식을 모르는데, 애써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듀량이 내치고 싶은데 품는 것. 그걸 위선적이라 하면 안된다. 모두가 양면을 가지고 있다. 동기까지 뒤져서 순수하지 못하다고 타박하면 안된다. 모두가 혼돈 속에 있다. 양쪽으로 갈 수 있다. 내 습성이 어느 쪽으로 가는 데 더 기울어져 있다. 그게 정체성이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 그는 시편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님을 향하는 것 orient. 그게 해체되는 순간이 온다. 고난. disorient. reorientation. 이 과정이 시편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어떤 이가 disorient되어 있다고 배제하거나 형편없다고 말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목사.
치바도 바뀌어 가는 것 같다.
양면성을 가진 사람이, 한쪽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인가?
김기석.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주도록 믿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자꾸만 깨뜨리고 나가야한다. 항상 배우려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색은,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을 절대화하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내면으로 움츠러들고. 낯선이를 위험한 사람으로 대한다.
신앙은 끝없는 자기 지양이다. 구약에서는 “(고향집,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라”. 신약에서는 “나를 따르라”로 바뀐다. 지향이 분명해진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를 따르라는 것이다. 이는 종말론적 관점으로 이끈다. 종말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확실하다고 누리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 죽음 선고받으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뀌지 않는가. 가치관이 재정립된다.
목사.
쟈크는 신학생으로 헌신해서 가능했을까?
김기석.
우연도 있지 않을까.
홍정수 교수가 그러더라. 자기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감리교 해방신학자가 가르쳐서 물었다더라. 왜 감리교 신학자냐고. “그냥 그렇게 됐어”라더라. 정직한 얘기다. 세게, 비장하게 얘기하는 걸 잘 신뢰를 안해.
목사.
정치는 자기이익을 위하는 것 같다.
김기석.
우리 시대 진보들의 문제. 정치라는 게 운동권 논리로 안된다. 막스베버, 책임의 정치와 신뢰의 정치를 얘기한다. 클리어하기 때문에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신념의 정치다. 신념을 관철시키는 것, 이게 운동권 논리다. 정치는 그렇게 안된다. 파트너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대변하는 이들을 위해 최대의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다. 나도 양보하고 그도 양보시키고.
누군가를 규정 속으로 가두는 게 불편하다. 경멸의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그래서는 안된다. 오히려 미움의 힘이 더 강화된다.
목사.
싸가지 없는 진보. 강준만. 진보진영이 가진 태도가 오히려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만든다고.
김기석.
그렇게 옳은 말은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할 수 있을까. verbal language 보다 unverbal language가 더 중요하다. 기분 나쁜 거다. 그래서 세련되어야 한다. 유보적인 반대를 할줄 알아야 한다.
167쪽 “그 멍한 시선에는 우리 백인이 왠지 기분 나쁘게 느끼는 무감동한 것, 비정한 것이 있는 것이다. 기미코가 때때로 외우는, ‘나무아미타불’은 우리가 바치는 기도 같은 것이 아니라 죄의 무감각에 어울리는 주문이다.”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다. 무감각, 비정, 뭘 가지고 그렇게 얘기할까.
수치의 문제, 수치는 숨기려고 하는 것이다. 타자를 배제하려는 것. 이건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의식화해야 한다.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용서가 될수도 있고.
다음 책으로는 <바다와 독약>을 읽도록 하겠다. 다음모임은 4월 19일 화요일 오후 3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