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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는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노(Rosarino)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2살 때 발병한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혀 왔는데, 공기 좋은 곳에 이사를 다녀 봐도 증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초등학교
과정은 결국 어머니 곁에서 자택학습(Home Schooling)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저서에 심취했으며 1941년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문학과
체육과목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 게바라는 좌익 파시스트가 득세한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껴 한때 '反 페론'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정권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자본가들의 '富의 독점' 특히 미국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그들을
풍자하는 무언극을 쓰기도 했다.
기록에는 그의 어머니 역시 '反 페론'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나와있다.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진학한 게바라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급진적 학생운동에는 가입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만
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우선 자신을 괴롭혀온 천식에 관해 관심을 보였으나 차츰 나병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가 난생 처음 긴 여행길에 오른 것은 1951년 북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일주한 것. 그때 그는 병들고 가난에 찌든 인디오
원주민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과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1951년 의사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더 길고 긴 여행을 떠났는데,
칠레에서는 한때 좌파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올랐다가 반혁명 혐의로 사형 당한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만나기도 했다.
페루의 나환자촌에서 한동안 봉사활동을 했고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에는 폭동이 일어났는데 시위대로 몰려 잠시 구금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베네주엘라, 마이에미 까지의 긴 여행을 마친 후 잠시 집에 돌아와 평소에 관심을 보였던 나병과의 인연으로 피부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지만 중류계급을 보장받는 개업의가 되길 원하진 않았다.
다시 여행길에 오른 그는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만났으며 이를 지켜보기만 하는 자신을 기회주의자로 자책하며 고민하다가
마야와 잉카문명에 관한 고고학 쪽에 눈을 돌려 과테말라에 오래 머물렀다.
과테말라는 당시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 게바라는 일찍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공산당 가입은 거부했고 따라서 정부가 제의해온 의료담당관 자리고 뿌리치고 말았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오 혈통의 마르크스주의 가디아(Hilda Gadea)와 함께 지내며 정치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때 카스트로의
조직원인 로페즈(Nico Lopez)를 소개받았다. 과테말라에서 그는 미국 CIA의 반혁명 대리공작을 낱낱이 목격할 수가 있었는데
그는 그때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신념을 얻게 되었다.게바라는 이곳에서 운명적인 혁명가의 길을 택한 셈이다.
과테말라의 사회주의 정권은 망하고 1954년 그는 멕시코로 옮겨가 그곳에서 본업인 병원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또다시 가디아와 로페즈를 만났고 마침 그곳에 망명해온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결국 카스트로 조직에 가담했고 스페인 공화군 장교 출신인 바요(Alberto Bayo)로부터 전문적인 게릴라전 교육을 받아
훌륭한 비정규전투요원이 되었다.
바요는 자신의 전투경험 뿐만 아니라 모택동의 게릴라전술도 가르쳤다.
그의 유망한 제자이자 그룹의 리더가 된 게바라는 이탈리아어로 '단짝'이라는 의미의 '체'(Che)라는 애칭이 따로 붙었다.
그 무렵 강도 높은 실전 훈련이 비밀리에 계속 되었고 그 현장이 경찰에 발각되어 많은 쿠바인 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한달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1956년 드디어 쿠바에 상륙, 의사이자 혁명군의 지휘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매우 공격적이고 탁월한 지휘자였으며 철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봉자였다.
그는 변절자들을 가혹하게 다뤘으며 특히 부정축재로 실각된 전직 대통령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 ivar)의
추종자들을 다수 처형함으로서 조직을 강화했다.
마침내 혁명은 성공했고 1959년 설날 아침에 아바나에 입성함으로서 카스트로에 이어 쿠바의 제2인자가 되었다.
그의 동료 중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가 몇 있기는 했지만 정식 공산당원은 없었으므로 쿠바 공산당은 그들에게 비우호적이었다.
카스트로가 사회주의로 완전히 돌아선 것은 미국의 지원아래 이뤄진 피그만 침공의 직후 였다.
1965년 카스트로는 쿠바공산당을 접수했으며 동시에 게바라는 국영농장의 감독이 되어 새로운 토지법에 의거 대부분의
토지를 압수했다.
국립은행의 총재도 맡아 전체 산업을 관리하게 되었으나 워낙에 황폐한 쿠바경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959년 게바라는 마르치(Aledia March)와 결혼했고 함께 이집트, 인도, 일본,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유고를 방문했으며
공업장관도 겸한 그는 소련과 무역협정을 맺기도 했다.
따라서 미국시장에 종속되어 있던 쿠바의 설탕산업은 시장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 논리는 모택동의 전술에 매료되어 있었다. "혁명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수정주의라고도
비난했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원조 및 반란혁명의 완수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가 어딘가 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으나 그때 그는 아프리카에 있었다.
콩고에서 쿠바식 게릴라전에 의한 혁명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원조병력을 보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볼리비아에서 게바라는 마지막 혁명의 모험을 시도했다. 게릴라의 구성원은 쿠바,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페루 출신들이었는데
볼리비아는 사실상 남미 5개국과 맞닿는 곳이어서 혁명을 위한 최적지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는 볼리비아 공산당은 소련의 영향력아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들은 당연히 게바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자 조직이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투 때마다 이탈자가 속출하고
기밀이 새나가 많은 조직원들이 체포되거나 피살되었다. 反게릴라전에 고도의 전략을 갖춘 미국CIA의 비밀첩보원들의
지원으로 게바라 부대는 숱한 기습을 받아 지리멸렬했고 그 역시 부상당한 채 포로가 되었다.
1967년10월9일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란 많은 일생은 볼리비아의 이름 없는 작은 촌락
라이게라(La Higuera)에서 수발의 총성으로 막을 내렸다. (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었다)
혁명아 체 게바라의 마지막 날
체 게바라(1928-1967년)를 말할 때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280km 떨어진 인구 20만의 도시 산타 클라라를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엔 체 게바라 혁명기념탑과 아울러 거대한 체 게바라 동상이 넓은 광장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리고 동상 지하에 만들어진 기념관 안엔 체 게바라를 비롯,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무장 게릴라활동을 펴다 죽은 17명의
혁명투사 시신들이 잠들어 있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의 시신을 몰래 파묻었지만, 30년만인 1997년 다시 파내져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쿠바 카스트로 정권이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 시신을 산타 클라라로 옮겨온 것은 바로 그곳에서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사에
커다란 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 28일 게바라 사령관이 이끄는 한 무리의 혁명군은 산타 클라라에 주둔하고 있던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의 군대를 공격했다.
그 다음날 무장열차에 타고 들어오던 정부군 지원부대를 기습, 항복을 받아냈다.
산타 클라라가 혁명군에게 점령당하고 쿠바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미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바티스타에게 “더 이상 당신을 도울 수가 없다”고 통보했고, 바티스타는 바로 망명길에 올랐다.
1959년 1월 2일 카스트로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결정적 분수령이 바로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 체 게바라가 사살된 볼리비아 라 이게라 마을의 담벽에 그려진 체 게바라 초상.
그로부터 8년 뒤, 11개월에 걸친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활동(1966년 11월-1967년 10월)은 끝내 그에게 좌절과 죽음을
안겨주었다. 볼리비아 게릴라 시절 체 게바라는 현지 주민들을 만나면, 반드시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샀다. 그냥 빼앗는 일은
없었다.
체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 1967년 9월 26일자 기록에 따르면, 체 게바라 일행이 그날 새벽 2,280미터 고지의 외딴
산간마을인 피카초에 들어서자 “농부들이 (우리들을) 매우 잘 대해주었다”고 적고 있다.
“식량을 빼앗지 않았고 예의 발랐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죽기 열흘 전 그를 만났던 볼리비아 여인(피카초 마을).
피카초 마을은 열흘 뒤 게바라가 볼리비아 특수군에 붙잡힌 채 압송돼 와 사살 당했던 라 기에라 마을에서 3km쯤 떨어진
곳이다.
그 마을에서 체 게바라를 만났던 여인을 만났다. 이름은 알레한드리나 스모야(67). 오랜 찌든 가난 탓일까, 이빨이 하나만
남은게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들려준 얘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그때 볼리비아 정부군들은 나쁜 사람들이 떼지어 다니니까 조심하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엔 라디오 같은게 없으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질 잘 몰랐다. 그런 어느 날(1967년 9월 26일) 새벽,
체 게바라 일행이 우리 마을에 들어섰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거칠고 거만한 볼리비아 군과는 달랐다.
그들은 우리에게 돈을 주고 식량을 사선 불을 피워 끓여 먹었다.
몹시 시장해 보였다. 지금도 체 게바라를 기억한다. 그는 비교적 건강이 좋아보였다.
내 어린 아들(시실로 바냐와, 당시 두 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씩하게 커야한다’고 말해주었다”
1967년 10월 8일 라 기에라 마을 바로 북쪽 유로(Yuro) 계곡에서 부상당한 채 체포된 체 게바라는 곧바로 라 기에라 마을로
압송돼왔다.
그리곤 그 마을의 작은 학교에 갇혔다. 학교라야 교실 두 개뿐인, 한국으로 치면 분교(分校)쯤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그때 함께 붙잡혔던 ‘윌리’와 체 게바라는 각각 다른 교실에 갇혔다. 볼리비아 광산노조 출신으로 1932년생인 윌리의 본명은
시몬 쿠바. 모이세스 게바라가 이끄는 볼리비아 광부 12명과 함께 1967년 2월 체 게바라의 혁명기지인 낭카와수 강변에 이르렀다.
운명의 날인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와 함께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됐다가 다음날 게바라보다 먼저 처형됐다.
한 여교사의 증언하는 게바라의 최후
◀ 체 게바라가 사살된 라 이게라 마을의 학교는 체 게바라 박물관이 됐다.
체 게바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여인이 있다. 이름은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 8년 전 교단에서 물러난 뒤 바예그란데에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그녀가 체 게바라를 만났던 날은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가 부상을 당한 채 포로가 돼 라이 귀에라의 한 작은 학교교실에
갇혀 있을 때였다. 훌리아는 그때 막 사범학교를 마치고 시골학교 선생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20대 초반의 여인은 어느덧 50대 후반의 부인이 됐다. 그녀의 증언.
▶ 체 게바라가 죽기 직전 앉아있었던 의자.
“오후 어스름할 무렵 체 게라바가 다른 한 명의 포로와 함께 잡혀와 학교 교실에 갇히자, 마을 사람들은 호기심을 지니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체 게바라에게 가까이 가는 걸 막았다. 그렇지만 나는 에외였다. 나는 학교 선생이었고, 무엇보다 젊고
예뻤기에 군인들이 나를 막지는 않았다.
그때 체 게바라는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두 발도 묶인 채 교실 벽을 바라보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누더기나 다름 없이 헤어지고 찢어졌고, 신발은 군화가 아닌, 소가죽으로 만든 누런색
샌들을 신고 있었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에 따르면, 그는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다가 군화를 강물에 빠뜨렸다. 이어지는 훌리아의 증언.
“게바라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다리는 총상을 입은 탓에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체 게바라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들은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그에게 왜 이런 투쟁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의 투쟁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나의 이상(ideal)이 무엇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살아서 바깥에 나간다면, 당신같은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다”
◀ 1967년 체 게바라가 죽기 바로 직전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전 학교여선생 훌리아 코르테즈 오시우아가
“게바라와 밤늦게까지 얘길 나누면서 우린 친구가 됐다.
기억나는 대로 그의 말을 옮긴다면 이렇다. ‘이 학교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학교를 새로 고쳐 짓고 현대적인 학교로 만들겠다. 그리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대주겠다. 트랙터를 보내 길을
넓혀 주겠다.’
나도 그때 형편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얘길 나누는데 한 볼리비아군 장교가 들어서더니, 나더러 나가달라고 했다. 무장군인들은 체 게바라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가더니, 사진을 찍었다. 그때 게바라의 손은 앞으로 묶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그를 지켜봤다. 게바라는 마치 아는 누군가가 마을사람들 속에 섞여있나 찾듯이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그리곤 나를 발견하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사진을 찍은 뒤 군인들은 다시 게바라를 교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금 뒤 나도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게바라와 얘길 나누진 못했다. 게바라는 군인들이 지키고 보는 앞에서 나와 얘길 하는 걸
삼가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런데...(이 대목에서 훌리아는 잠시 울먹이는 표정이 됐다) 총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그 총소리는 게바라가 아니라 그와 함께 체포된 윌리를 겨냥한 총소리였다”
“엄마는 체 게바라에게 주려고 조촐한 식사를 만들었다. 그리곤 내게 갖다주라고 했다. 게바라는 배가 고팠던 듯 접시를
다 비웠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식사는 근래에 내가 먹어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
나는 빈 접시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내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겨우 한두 숫갈을 뜨려 하는데, 총성이 들렸다. 나는 게바라가 죽임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학교로 달려갔다. 이상하게도
그곳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게바라는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눈을 뜬 채 죽어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훌리아는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당시 현장에는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볼리비아군 장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와
있었다.
당시 베트남전쟁으로 골머리를 썩이던 존슨 미 행정부와 볼리비아 군부독재정권은 체 게바라의 처리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결론은 즉결처형 쪽이었다. 이미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체 게바라를 재판에 붙여 국제사회의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이나
볼리비아 양쪽 다 득보다 실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 즉결처형된 체 게바라의 시신이 헬리콥터로 옮겨진 다음 일반에 공개됐던 세뇨르 드 말타 병원
빨래터 (바예그란데).
게바라는 사살된 뒤 다른 게릴라 동료 시신들과 함께 볼리비아 군 헬기로 바예그란데로 실려갔다.
바예그란데는 인구 8천명의 작은 도시. 게바라의 시닌은 그곳 세뇨르 드 말타병원의 세탁장에 눕혀진 채로 일반에
공개됐다.
그런 뒤 비밀리에 시 외곽 마우솔쿰 지역에 묻혀졌다. 세상엔 그의 시신이 볼리비아 밀림지대에 그냥 내던져졌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쿠바와 아르헨티나 공동조사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된 것은 정확히 30년 뒤. 게바라는 함께
암매장됐던 동료 게릴라 유해 6구와 함께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졌다.
볼리비아 혁명과정에서 죽은 다른 11명의 유해도 그 비슷한 시기에 옮겨졌다. 카스트로 정권은 게바라가 1958년 쿠바혁명
당시 바티스타 친미독재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던 산타 클라라에 거대한 혁명기념탑을 만들었고, 그 밑에다
게바라를 비롯한 볼리비아 혁명전사들의 시신을 안장해놓았다.
[상세자료] 우선 유해는 97년 6월 28일에 발견되었습니다.
체 게바라의 유해가 어디있느냐는 그간 의견이 분분했었죠. 정글에 버렸느니 불태워 버렸느니.. 혹은 어느 묘지에
매장했다느니.. 그간 볼리비아 정부가 체 게바라의 유해에 대해 위치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그 위치는
불분명했고 유해가 남았는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바예그란데 근처로 옮겨져 총살당했다는 증언을 확보한 이후, 수색끝에 바예그란데 공항 인근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가 체 게바라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유골에 두 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년 당시 볼리비아 정부군이 게바라의 죽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쿠바에 그의 두 팔을 잘라서 보냈기 때문이죠.
이후 정밀조사를 거쳐서 게바라의 유골임이 확인되고 7월 12일 쿠바로 옮겨져 10월 17일, 쿠바 혁명 당시 그가 함락시켰던
산타클라라 시의 기념관에 매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