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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짜리 딸을 키우는 이태희(35)씨는 '콩쥐팥쥐'의 원전을 읽다 소름이 돋았다.
콩쥐가 꽃신을 주운 원님과 결혼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그림책의 결말 부분 다음에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콩쥐를 시샘한 팥쥐는 "연못에 놀러 가자"고 꼬인 뒤 콩쥐를 물에 빠뜨려 살해한다.
팥쥐는 콩쥐인 척 하고 원님의 아내 노릇을 하는데 콩쥐의 원혼이 원님 앞에 나타난다.
연못 물을 퍼낸 뒤 시신을 건져 내니 콩쥐가 살아났다.
원님은 팥쥐를 죽이고 시체로 젓을 담가 팥쥐 엄마에게 보냈다.
팥쥐 엄마는 젓갈인 줄 알고 먹다가 그게 무엇인지 깨닫고 기절해 죽는다….
이처럼 동서양의 수많은 전래 동화들은 아이들을 위해 손질한 개작(改作)의 흔적을 한 꺼풀 벗겨 내면
'호러(Horror)물'에 가까울 정도로 잔혹한 내용들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팔다리를 차례로 뜯어 먹는 호랑이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대사로 유명한 '해와 달 이야기'는 대부분의 유아용 그림책 시리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전래동화다.
하지만 한국 전래동화의 중요한 원전 중 하나로 꼽히는 박영만의 '조선전래동화집'(1940)에 실린 이 이야기는 무척 충격적이다.
어머니의 떡을 다 빼앗아 먹은 호랑이는 지름길로 가서 숨어 있다
"왼팔을 베어 달라"며 어머니의 팔을 떼어먹는다.
이런 방법으로 어머니의 오른팔→왼쪽 다리→오른쪽 다리를 차례로 베어 먹은 호랑이는
마지막 순간 땅 위를 굴러 집으로 가는 어머니의 몸뚱이까지 삼켜 버린다.
이 장면이 전체 분량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묘사되는데 또 다른 판본에서는 팔을 먹기 전에
저고리·치마와 속곳까지 빼앗아 성적 겁탈을 암시한다.
호랑이는 힘없는 민초들에 대한 약탈의 상징인데 대부분의 그림책에서는 '어머니를 잡아먹었다' 정도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장화홍련'의 원전 역시 엽기적이다. 사또가 장화와 홍련이 왜 죽었느냐고 추궁하자 계모는
'사실은 장화가 낙태를 한 뒤 못에 빠져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뒤 허리춤에서 피 묻고 바싹 마른 고깃덩어리를 내보이는데,
사또가 이것을 칼로 가르니 쥐똥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백설공주' 왕비가 친엄마였다고?
아동용 각색판과 원전 사이의 괴리는 서구 동화도 만만치 않다.
그림(Grimm) 동화 원전에서의 '백설공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라는 문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백설공주의 결혼식에 온 계모에게 불로 달군 쇠 구두를 신겨 죽을 때까지 춤을 추도록 한다는 얘기가 결말이다.
'신데렐라'에서 두 언니는 주인공이 떨어뜨린 신발을 억지로 신기 위해 발가락과 뒤꿈치를 칼로 잘라낸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마지막 장면에서 비둘기들이 나타나 두 사람의 양쪽 눈을 파먹는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주인공 남매는 마녀를 떠밀어 오븐 속에서 타 죽게 한다.
'노간주나무'라는 동화에서는 계모가 전처의 자식을 죽여 수프로 만든 뒤 남편에게 먹이는 장면까지 나온다.
각색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래 이야기에 깃든 잔인한 요소가 남아있는 경우도 많다.
안데르센 동화 '빨간 구두'는 신기만 하면 춤을 추게 되는 구두가 벗겨지지 않아 발목을 잘라낸다는 이야기다.
페로 동화 '푸른 수염'은 아예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이다.
19세기 그림 형제의 원전 자체가 이미 상당 부분 각색된 판본이라는 주장도 있다.
1998년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키류 미사오(桐生操)의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 동화'는
▲그림 동화 초판에서 백설공주와 헨젤·그레텔의 엄마는 사실 친어머니였지만 나중에 계모로 바뀌었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물레에 손가락을 찔리는 부분은 성 경험을 상징하는 것이며
▲'빨간 모자'는 원래 소녀가 늑대에게 잡혀먹히는 데서 끝난다고 지적했다.
◆"전래동화는 원래 어른들의 이야기"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지금의 '동화'들은 구전 민담으로사 18세기까지 어른들의 문화였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과거에는 성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태도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생겨났다"고 했다.
곽신숙 삼성어린이박물관 운영과장은 "유아들은 들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때문에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부모들이 동화책을 읽어 줄 때 문맥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런 내용들을 건너뛰거나 바꿔 읽어 주는 게 바람직하다"
고 했다. 동화작가 임정진씨는 "아이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면서도 나름대로 걸러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유아용 책 정도는 그대로 들려 줘도 무방하다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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